세상사람 모두가 홀로(holo)되길 기원하는 나 홀로 목사입니다.
지난시간 요한과 예수가 에세네파라는 말을 듣고 많은 이들이 실망을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게다가 성경말씀을 믿기만 해서는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고 했으니 기분이 상했을 수도 있
겠지요.
하지만 그렇다고 실망을 할 문제는 아닙니다.
성경에 나오는 요한이나 예수는 우리들이 그들처럼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본보기이기에 오
히려 좋아하고 기뻐해야하며 그들의 가르침이 구도자에게는 등대와 같은 역할을 할 겁니다.
특히나 예수는 인간의 육신으로 하나님과 하나 됨을 이루었으니 우리들에게 하나님과 하나
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주신 분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성경에서 말하는 대로 구도의 길을 가는데 아무런 성과가 없다고 한다면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구약의 많은 내용들이 자신 안에 성령이 완전히 드러나면 어떠한 일들이 일어나는가에 대한
야기들이며 그 말씀의 실현이 예수입니다.
그래서 많은 제자들이 그를 신처럼 여기며 그를 메시아라고 하는 겁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해줍니까?
구약에서 말하는 하나님을 믿고서 하나님과 하나가 되었다고 한다면 예수를 믿고서 예수와
하나가 될 수 있다는 말이 아닐까요?
지금 나 홀로 목사가 하고자 하는 일이 바로 이러한 일이며 여러분 모두가 그와 같이 될 수
있음을 말하고자 하는 겁니다.
또한 나 홀로 목사는 오늘날의 크리스천들의 역사를 되짚어 보며 우리들이 얼마나 많은 오류
를 범하고 있는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지난시간에 잠시 보았듯이 에세네파들의 생활 형태를 가만히 살펴보면 과거부터 전해져 내
려오는 가톨릭의 수도회와 일치되는 점들을 볼 수 있는데 가톨릭의 신부님들이 독신을 고집
하며 지내는 이유가 바로 에세네파의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아야합니다.
이런 의미로 보자면 예수와 요한이 에세네파라는 것이 충분히 납득이 가는 일이지요.
예수의 제자가 예수의 수행방법을 따르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아마도 개신교의 많은 목사님들은 과거 가톨릭의 부패를 말하며 마틴 루터의 일을 떠올리겠
지만 그 당시 가톨릭교회의 부패 상황만을 보고 전체 가톨릭을 매도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
니다.
만약 그런 식으로 싸잡아 비난을 한다면 기독교도 비난을 받아야 마땅한 일이 아니겠습니
까?
자신의 신도임을 확인하려면 자신 앞에서 팬티를 내리게 해보면 안다고 말하는 목사가 버젓
이 목회자노릇을 하고 있으며 교회의 목사자리를 대물림하며 신자를 재산으로 여기는 목사
가 즐비한 이 시점의 기독교가 중세시대의 가톨릭보다 나은 점이 도대체 뭐라고 생각하는지
물어보고 싶습니다.
이종파가 저 종파를 미워하고 공격하며 서로가 자신들이 제대로 된 성경말씀을 전한다고 큰
소리칩니다.
그러면서 남들이 수십 년 공을 들여 키워놓은 해외 교회를 자신들의 소속으로 만들곤 하지
요.
과연 이러한 짓을 예수님이 좋아하실까요?
당하는 입장에서 보면 참으로 억장이 무너질 노릇입니다.
해외 선교라는 것이 얼마나 힘이 들며 노력이 필요한 일인데 터를 닦아놓으니 다른 종파에서
자신들의 교회에 종속 시켰다고 한다면 가만히 당하고 있을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이와 같은 일들이 만연하기에 전쟁이 끊이지 않고 일어나는 겁니다.
진정 선교활동을 하고 싶다면 슈바이처 박사처럼 자신을 희생해가면서 개척해야 마땅한 일
이지 남이 닦아놓은 길을 걸어가려해서는 안될 일입니다.
물론 이들의 행위가 성경을 잘못해석한데서 오는 오류라는 것을 압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영적전쟁이란 자신의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일임을 알아야 외적인 전쟁을
멈출 수가 있으며 자신내면에서 성령이 되살아날 수가 있습니다.
성경을 통해 많은 이들이 이와 같이 자신 안에서 성령이 살아남을 경험하였지요.
성경이 써질 당시에도 있었음은 물론이며 오늘날 가톨릭을 비롯하여 기독교내에서도 이와
같은 일을 해낸 많은 이들이 있습니다.
어디에 있느냐고 묻는 이들이 있다면 그는 진정 성경을 모르는 사람이며 성경을 알아도 부분
적으로 안다고 봐야합니다.
성경이 하나님이 쓰신 책이라는 말의 의미조차도 모르면서 성경을 안다고 하는 겁니다.
여러분들은 왜 성경이 하나님이 쓴 책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기자의 내면에 성령이 임하여 썼기 때문에 하나님이 썼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그들이 바로 성령이 함께하는 영광을 누린 사람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예수만이 특별하게 성령이 임했으며 그만이 유일하게 하나님의 독생자라고 한다면 성경은
거짓말을 기록한 것이 됩니다.
이제는 나 홀로 목사가 말하고자 하는 뜻을 이해하리라 생각합니다.
서론이 너무 길었지요?
성경을 통해 여기에 대한 이야기를 다시 나눌 시간이 주어지리라 생각되는바 지난시간에 이
어 진도를 나가보도록 하겠습니다.
곧바로 마태복음 4장 내용을 보겠습니다.
그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마4:1)
사십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마4:2)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이 떡
덩이가 되게 하라(마4: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
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마4:4)
이 말씀 역시 신명기 8장3절에 나와 있는 대목을 인용하여 예수께서 말씀하신 내용을 마태복음의 기자가 기록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명기에 나와 있는 이 내용이 그 당시는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봐야겠지요?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신8:3)
신명기에 나오는 이 말씀은 모세가 40년 동안 수행의 길을 걸어 나오는 동안에 일어났던 일을 말해놓은 것으로서 모세개인의 깨달음의 과정을 말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출애굽이란 믿지 않는 마음, 즉 이방인(애굽)의 마음으로부터 탈출을 뜻하며 수많은 백성이란 우리들 마음 안에 존재하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인식들을 말하는 거지요.
이것을 만약 역사적인 사실로 받아들인다면 그야말로 웃기는 노릇이 아닐 수 없습니다.
몇 십만 명이 한꺼번에 움직이게 되면 어떠한 일이 발생할지를 생각해보지도 않은 상태에서 말을 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집트의 역사에 출애굽 사건이란 없다는 것입니다.
또한 이것은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르치기 위해서 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만나라는 것이 정말 하늘에서 내려오는 음식이 아니라 진리의 말씀이라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마태복음4장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은 어떠한 상황에서 나온 말씀일까요?
성령에 이끌리어 광야로 갔다는 것은 스스로의 내면에서 일어난 상황이라는 말입니다.
시험하는 자가 나왔다는 것은 상징적인 말로서 예수 내면에서 부정적인 생각이 일어났다는 것을 뜻하는 겁니다.
만약 이것이 아니고 정말 마귀가 나타나서 시험을 했다고 한다면 성령이 마귀라고 봐야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성령이 예수를 마귀에게 끌고 갔으니 성령이 마귀라는 말이 되지요.
이것은 분명 마태복음 3장의 연장선에 있는 내용으로서 하늘에서 내려온 성령이 예수께 임하고 그 증거로서 마음 안에서 시험을 받는 내용입니다.
하나님 말씀만으로 배고픔을 이겨낸다는 것보다 성령이 함께하면 먹는 것에 집착하거나 먹을거리를 얻기 위해 정도 이상의 지나친 노력을 하지는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만약 이 같은 말을 극단적으로 받아들이게 되면 성령이 함께하면 먹지 않고도 배부르다는 말이 되지요.
과거 유럽에서 마녀사냥이 일어난 일이 바로 이러한 구절에 대한 해석을 극단적으로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구약을 믿는 유대인들은 돼지고기를 먹지 않았는데 누군가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다 싶으면 데려다가 고문을 하고 자백을 하면 이단으로 몰아 극형에 처하곤 했지요.
잡혀온 사람이 이단이 아니라고 변명을 해도 고문을 하면 대부분이 고통에 못 이겨 자백을 하고 죽임을 당했는데 이유인즉슨 성령이 함께하면 고통을 이길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참으로 한심한 노릇이 아닐 수 없는데 오늘날의 크리스천들도 이와 비슷하게 극단적으로 성경해석을 하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사실 먹지 않고도 배가 고프다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도 있는데 극도로 슬프거나 너무나 기쁘면 그럴 수 있긴 합니다만 그렇다고 영원히는 아닙니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성령과 먹는 것은 관계가 없다고 볼 수 있습니다만 인간의 육신을 덮어쓰고 있는 이상 어떻게든 먹어야 됩니다.
물론 나 홀로 목사의 주변에는 먹지 않고 사는 사람들이 있긴 합니다만 그들 또한 다른 방식의 에너지를 흡수하지요.
이들의 식생활방식이 특이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진정한 의미에서 성령이 함께 한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말씀의 떡이란 영혼이 먹는 것을 말한 것으로 성령을 뜻하며 사람 안에 성령이 함께한다는 말입니다.
사람이 떡만 먹고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사는 성령이 담겨져 있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 안에 성령이 함께 하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배고픔을 해결하고자 하는 육신의 욕구를 이겨냈던 겁니다.
이 모든 것이 예수의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는 것을 성경은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음구절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Then the devil taketh him up into the holy city, and setteth him on a pinnacle of the temple(마4:5)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하였으되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저희가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And saith unto him, If thou be the Son of God, cast thyself down: for it is written, He shall give his angels charge concerning thee: and in (마4:6)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요?
만약 마귀가 거룩한 성으로 예수를 데려갔다고 한다면 마귀가 우리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갈 수 있다는 말이 되지 않겠습니까?
다시 말하면 마귀가 거룩한 성을 마음대로 들락거린다는 말도 됩니다.
이제는 나 홀로 목사의 말을 이해하시겠지요?
이것은 어디까지나 예수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내면의 갈등을 말하는 동시에 믿음의 길을 걸어가는 구도자들의 마음 안을 보여주는 것인데 거룩한 성이란 여러 인식 안에 존재하는 일정한 의식공간을 말하는 것입니다.
마귀가 저 멀리 하늘에 있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안에 들어앉아서 언제든 튀어나온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며 그러한 마귀의 유혹을 예수가 어떻게 이겨냈는가를 보여주는 겁니다.
마태복음의 4장 6절의 말씀도 구약 시편91:11,12절을 인용한 것인데 예수님이 왜 그 구절을 떠올렸는지 잠시 보도록 하겠습니다.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네 모든 길에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
저희가 그 손으로 너를 붙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시91:11,12)
이것은 하나님을 믿고 성령이 함께 하는 이는 하나님의 완전한 보호아래 있다는 것을 시편기자가 말해놓은 것입니다.
예수가 스스로 생각하기를 자신이 진정 하나님의 성령과 하나 되어 하나님과 합일이 된 존재라고 한다면 어떤 경우에라도 보호를 받지 않겠는가 생각한 겁니다.
잘 믿기지 않는다면 91장의 내용을 잠시 볼까요?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하는 자는 전능하신 자의 그늘아래 거하리로다(시91:1)
He that dwelleth in the secret place of the most High shall abide under the shadow of the Almighty.
예수가 구약의 내용을 숙지하고 있었고 하나님의 성령이 함께하면 어떠한 일이 일어나는가를 잘 알고 있었기에 이러한 내용을 떠올렸던 겁니다.
그러자 예수내면의 또 다른 쪽에서는 반대생각이 일어나서 대응을 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하였느니라 하신대 (마4:7)
이 또한 구약에서 인용한 내용입니다.
너희가 맛사에서 시험한 것같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시험하지 말고(신6:16)
이 내용은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출애굽 했을 때 르비딤에 장막을 치고 생활을 한 적이 있는데 마실 물이 없게 되자 백성들이 하나님을 의심한데서 생겨난 말이라고 하지요.
하지만 이 또한 구도자의 내면세계를 말해놓은 것입니다.
만약 이 말이 실감이 가지 않는다면 모두들 자신들의 삶을 가만히 들여다보시기 바랍니다.
현실이 정말 힘들고 고통스러울 때 하나님을 불신해 본적이 없습니까?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보지 않은 사람은 이해를 못하겠지만 인생에 있어서 기가 막힌 일을 당해본 많은 사람들은 이 말을 올곧게 이해를 할 겁니다.
출애굽기에도 나와 있듯이 마음이 편안하고 물질적인 풍요가 함께 할 때는 누구나가 하나님을 믿으며 찬양해 마지않습니다.
그러다가 괴롭고 고통스러운 일들이 일어나고 인생에 풍파가 겹쳐 물질적인 멸망이 일어나게 되면 하나님을 원망하기 마련이지요.
또한 물질적인축복이 함께한다고 해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마음 안에서 살아나느냐 하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성경은 말해줍니다.
아론이 그들의 손에서 금 고리를 받아 부어서 조각칼로 새겨 송아지 형상을 만드니 그들이 말하되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의 신이로다 하는지라(출32:4)
아론은 이스라엘 스승 모세를 도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주던 모세의 형인데 모세가 자리를 비운사이 우상을 만들어 내는 죄를 범하게 됩니다.
성령이 함께 하지 않은 이가 자신의 의를 내세우게 되면 일어나는 일을 말해놓은 것이지요.
금송아지를 만들었다는 말은 물질 세상에 빠지게 되면 하나님이 자신들을 위해 축복을 주신 것이라 생각하지만 이미 물질이 그들의 정신을 지배하며 그들이 섬기는 신이 되어 버린다는 말을 비유로서 말해주는 것입니다.
아론은 히브리어로 고상함을 뜻하는데 성령이 함께 하는 듯이 말하는 포장된 목회자들을 말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 입이 아무리 고상하게 말을 하더라도 물질을 추구하고 물질적인 축복만을 말한다면 이미 성령이 그와 함께 하지 않는다는 것을 성경은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또한 우리네 인생에서 일어나는 일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동안 물질적인 축복이 오게 되면 처음에는 더욱더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하는 매일을 지내게 됩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 물질이 구도자의 삶을 지배하게 되고 물질을 추구하는 욕구가 더욱 커지게 되며 물질이 인생의 목표가 되어버리게 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 말을 하고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물질의 축복(금송아지)을 믿음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겁니다.
이러한 순간들이 반복되는 것이 인생이며 굴곡 많은 생을 살아가는 동안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끈을 놓지 않는 것이 하나님과 하나 되는 길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런 것을 예수님이 알고 있었기에 이러한 구약의 구절을 인용하여 하나님을 불신하는 마음을 이겨냈던 겁니다.
하지만 이것이 모두는 아니지요.
사람들의 마음 안에는 수없이 많은 욕구들이 있으며 물질적인 것은 물론이며 명예를 얻고자 하는 욕심도 있으며 세상을 지배하고자 하는 욕망도 있는데 그러한 생각들조차 이겨내야 함을 예수는 우리들에게 보여줍니다.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마4:8)
가로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마4:9)
이러한 마음안의 욕심을 예수는 다음과 같은 말로서 물리칩니다.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단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마4:10)
이 또한 신명기 6장 13절을 인용한 말씀입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섬기며 그 이름으로 맹세할 것이니라(신6:13)
물질적인 영광을 추구하고자 하는 욕심에 굴복하지 않으며 오로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겠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 순종하는 마음이란 어떤 것일까요?
물질적인 것들을 모두 버리고 이 세상을 떠나는 것일까요?
물론 이러한 생각을 하시는 분들도 다수 있을 것 같고 나 홀로 목사의 주변에도 이와 같은 생활을 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나 홀로 목사는 그렇게만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만약 누군가 세상을 벗어나서 에세네파처럼 금욕주의적 삶을 사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께 순종하는 유일한 삶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분에게만 해당되는 진실일겁니다.
그렇다고 해서 일반인들과 똑같이 살아가는 것이 유일하게 순종하는 삶이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많은 선지자들이나 이스라엘의 영적 스승들을 보면 금욕주의자들도 있었고 일반인들과 똑같은 삶을 살았던 분들도 있으며 여성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이 같은 사실을 볼 때 자신에게 주어진 삶속에서 일어나는 그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놓치지 않고 구도의 길을 걸어가는 것만이 순종하는 삶이라 할 수 있을 겁니다.
예수가 말씀하신 것은 바로 이러한 마음상태를 말한 것이지요.
지금 우리가 보는 이 내용은 정말 중요하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믿음 생활을 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기복적인 신앙형태를 갖고 있기 마련인데 예수님은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함께하면 없던 능력이 생기고 가난한자가 부자가 되며 어리석은 이가 명석하게 되는 등의 생각을 하기 쉽지만 그렇게만 여겨서는 절대 하나님과 하나 됨을 경험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것들을 무조건 버리고 무시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진정 하나님의 성령이 함께 하게 되면 만족하는 마음을 얻게 되며 물질적인 욕심을 버리게 되는데 그것이야말로 하나님이 주시는 최상의 선물인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는 가만히 생각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억만금을 얻고도 만족하지 못하는 것이 인생살이가 아닌가요?
출세에 대한 욕구는 한계가 없으며 이것을 얻고 나면 저것을 얻고 싶은 것이 사람의 욕심입니다.
바로 이러한 마음속의 욕심을 잠재울 수 있는 것이 성령이 함께하는 이의 특권이며 하나님의 그늘아래 거하는 자가 누리는 축복이라 할 수가 있습니다.
가끔씩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 중에도 진정 만족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이야말로 하나님의 축복을 듬뿍 받고 사시는 분들이며 그들 마음에는 형상에 매이지 않는 하나님이 살고 있을겁니다.
나 홀로 목사가 감히 말 하건데 올곧게 주어진 오늘을 만족하며 살아가는 인생은 하나님이 함께하는 삶을 이미 살아가는 분들이며 그러한 분들은 구태여 종교생활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어떠한 성직자도 그보다 하나님의 축복을 많이 받을 수는 없으며 그 누구도 그이보다 높은 이는 없습니다.
이런 사람을 누가 본 일이 있습니까?
의외로 많은 분들이 손을 드시는군요.
그렇다면 자신을 좀 더 면밀하게 들여다 봐야합니다.
진정 만족하는 삶을 살아가는 분들에게는 두 가지의 충분조건이 있는데 첫째가 그이보다 높은 이가 없으며 두 번째가 그이보다 낮은 이도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비천한 사람보다 조금도 높지 않으며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자보다 못하지 않은 이가 바로 만족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며 그가 바로 하나님의 성령과 하나 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저주에 휩싸여 살아간다고 여겨지는 삶을 살아가는 그런 사람보다 조금도 높지 않은 삶을 살아가면서도 감사할 수 있는 사람을 말하는 겁니다.
어떤가요?
누가 이런 사람 있습니까?
자신이 없는가 보군요.
바로 이러하기에 예수님이 찬양받아 마땅하다는 것이며 같은 인간의 몸을 가졌지만 하나님과 하나가 되었다고 말하는 겁니다.
많은 이들이 예수님이 기적을 많이 일으키고 신통을 부린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거기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담겨 있으며 정말 예수님이 기적을 일으킨 것일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우리들이 오늘 예문으로 보았듯이 예수님이 신통이나 기적을 극도로 경계했다는 것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신통이나 기적이란 것을 추구하는 것이 결코 좋은 일이 아니기에 예수님은 현실의 어려움을 기적을 일으켜 극복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기적을 일으키고자 하는 마음을 마귀라고 규정지었던 거지요.
많은 구도자들이 경전을 통해 기적이나 이적을 몹시 부러워하며 경외하는데 실상을 알게 되면 그다지 좋아할 일이 아닙니다.
잘 이해가 가지 않는 분들을 위해 이적이나 기적에 대한 나 홀로 목사의 개인의견을 말씀 드리겠습니다.
먼저 기적이나 이적을 일으킬 수 있는 힘은 물질세계와 직접적인 연관을 짓는 또 하나의 인식의 세계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능력을 발휘한다는 것은 이러한 인식 세계의 힘을 이용하는 것인데 거기에 따른 보답을 반드시 해야만 한다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우리들이 아파서 병원을 가게 되면 돈을 지불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이치라고 보면 됩니다.
그리고 우리들이 알아야할 또 한 가지 사실이 있습니다.
만약 누군가가 동쪽에 있는 산을 기적의 힘을 써서 서쪽으로 옮긴다면 서쪽에 있는 산이 어디론가 움직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물질 세상에 교란이 일어나게 되는 겁니다.
누군가 기적을 일으킨다고 한다면 세상에 혼란을 가져온 것이라 여겨야하며 그로인한 인과응보의 적용을 받아야 한다는것을 의미합니다.
이제는 신통이 가지는 의미를 조금은 이해가 되었으리라 생각됩니다만 한 가지 덧붙여서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언젠가 지인의 권유로 책을 본적이 있는데 어떤 성자에 관한 책이었습니다.
거기에 나오는 주인공께서는 엄청난 기적을 보여주었고 위험에 빠진 지구까지 구했는데 말년에는 그 모든 것이 부질없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합니다.
이분에게는 많은 제자들이 있었는데 그중 한사람에게 동전하나를 선물했다고 하지요.
원래 은화였던 동전을 신통을 써서 금화로 만들어주었는데 1년이 지난 후 제자의 집을 방문한 그가 깜짝 놀라고 말았답니다.
분명히 제자에게 기념으로 간직하라고 준 금화가 은화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더라는 겁니다.
그것을 보는 순간 그는 한 가지 깨달음을 얻었다고 합니다.
이 세상 만물은 하나님께서 지은신대로의 역할이 주어져 있는데 그것을 아무리 신통력을 써서 막으려 해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았던 거지요.
여러분 모두는 잘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오늘 예문으로 들었던 것처럼 물질세상의 온갖 부귀영화를 줄 수 있는 기적의 힘을 사탄의 행위로 규정지은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말씀하신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오로지 하나님만 경배하겠다고 했는데 이 말씀의 진정한 뜻은 자신(육신)의 의지대로 이 세상을 좌우지 하지 않고 하나님이 주시는 대로 받아들이겠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분이 과연 신통이나 기적을 마음대로 행사하며 자신을 알리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겠습니까?
신약에 기록된 예수의 기적들 대부분이 제자들이 자신의 스승을 드높이기 위해 과장되게 말해놓은 것이며 비유로서 가르침을 주려고 계획적으로 말해놓은 것이기도 합니다.
나 홀로 목사의 지금 이 말에 많은 크리스천들이 화를 내는군요.
예수가 보여준 기적을 가볍게 여긴다고 생각하시는 모양인데 여러분 모두는 잠시 화를 가라앉히고 나 홀로 목사의 다음 말에 귀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과거 예수님 생존당시에 이스라엘에는 많은 메시아들이 존재했다고 합니다.
그중에서도 예수님만큼이나 많은 기적을 일으킨 메시아가 있었는데 오늘날까지도 그 무덤 앞에는 그를 추모하는 행렬이 끊이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것은 절대 나 홀로 목사가 꾸며서 하는 말이 아니라 지금도 이스라엘에서 실지로 일어나고 있는 일입니다.
왜 이스라엘 백성들은 20억 이상이 믿는 예수를 지금도 믿지 않고 그 시대의 다른 스승은 찬양하는 걸까요?
그가 성자로 불리며 추앙받는 가장 큰이유가 수없이 많은 사람들을 치유하는 기적을 보였기 때문이라고 했는데 예수님이 정말 무분별하게 기적을 보였더라면 유대인들 중 많은 사람들이 따르지 않았을까요?
성경에는 분명 그이유가 나와 있습니다.
앞서 말했던 것처럼 많은 사람들이 물질적인 축복만을 원하기 때문에 영적인 축복을 볼 수 없었기 때문이었지요.
또한 육신으로 하나님과 하나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또 다른 이유도 있지만 지금으로서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기적이라는 것이 좋아할 일만은 아니라는 것은 분명히 밝히며 기적을 통해 치유되고 되살아난 그 누구도 지금까지 살아있지는 못하다는 것을 밝히고자합니다.
물론 기적의 힘을 나 홀로 목사도 믿습니다.
저 역시 살아나오는 동안 몇 번의 기적을 경험했으니까요.
하지만 그 모두가 육신이 바라서 기적이 온 것이 아니라 그저 기적 같은 일이 내 눈앞에서 벌어졌을 뿐이었습니다.
그것도 육신이 바라는 것과는 전혀 반대의 기적들이 일어났습니다.
육신은 언제나 물질적인 축복을 원하고 노력을 기울였지만 성령이신 하나님은 번번이 멸망의 기적을 보여주셨습니다.
처음에는 이러한 일들을 겪으며 하나님을 무척이나 원망하였고 현실을 거부하고 싶은 마음이 순간순간 일어났습니다만 이제는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축복임을 알았습니다.
성경안의 많은 성자들이 그들의 삶을 통해 내가 걸어온 길이 곧은길이었음을 말해 주었습니다.
지금 나 홀로 목사는 바로 이러한 것들을 말하고자 하는 겁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은 높은 곳에서 인간들 세상을 내려다보며 언제 심판할까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의 깊숙한 곳에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드리고자 하는 거지요.
증거가 있냐고 묻는 분이 있다면 다음구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에 마귀는 예수를 떠나고 천사들이 나아와서 수종드니라(마4:11)
극성스럽게 예수의 마음속을 괴롭히던 마귀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전혀 흔들림이 없자 사라지고 대신 천사들이 나와서 예수를 보살피게 된다는 말입니다.
시편 91장의 내용대로 하나님과 하나 된(지존자의그늘에 사는 자) 이의 삶을 지켜주신다는 구약의 말씀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나타내는 겁니다.
아마도 몇몇 분은 하나님과 하나가 된 자들만이 누리는 특권이 아닌가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성경에는 그렇게 적혀있지 않습니다.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는 나의 피난처시라 하고 지존자로 거처를 삼았으므로(시91:1)
하나님을 믿는 이들은 모두가 이러한 삶을 살아간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다만 그들이 모르고 있을 뿐이라는 겁니다.
오늘 우리들은 성령이 함께하는 삶을 살았던 예수가 자신 안에서 어떠한 시험을 받았는가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그러한 시험을 이겨냈는가를 보았지요.
또한 예수는 구약의 말씀을 통해 깨달음을 얻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앞으로 성경을 통해 이러한 사실들을 재삼 확인할 시간을 가질 수 있을 거라 생각하며 오늘은 여기에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거룩한 성전 가장 은밀한 곳에 거하시는 나의 하나님!
당신이 계시는 곳이 하늘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들 마음 안에도 머문다는 것을
어찌 오늘에야 세상에 내놓도록 허락하시는지요.
인류가 생성된 후부터 지금까지
당신과 하나 됨을 경험한 수많은 사람들이 있어왔지만
오늘날 사람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고 예수만이 보이나 봅니다.
예수를 믿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예수가 하나님과 하나 된 분이라는 사실을.......
하지만 자신들 또한 예수와 하나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은 믿지 않습니다.
때론 예수와 하나가 될 수 있다고 말은 하면서도
누군가 예수와 하나가 되었다고 하면 기를 쓰고 반대를 합니다.
이모두가 자신들의 육신에만 초점이 맞추어져 있기 때문이며
예수에 대한 환상 때문이지요.
예수가 내려와야 천국을 갈 수 있다는 말의 진정한 의미는
예수가 재림을 해야 천국을 갈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신의 영역에 올려놓고 숭배의 대상으로 만들어놓은
예수라는 우상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사실을
당신을 믿는 모든 이들이 알도록 허락하소서.
아멘! 아멘!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