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생각 긴여운

성령을 영접하지 못하였다면 영적으로 맹인이다.

배가번드 2025. 2. 17. 0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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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휴가 기간에 일요일이 포함되다보니 교회를 나가게 되었습니다.

평소보다 적은 인원이 모였지만 몇몇 분은 나를 알아보고 반갑게 맞아 주셨지요.

다들 매주 교회에 나오지 않는 나를 위해 차편을 마련하겠노라 나서는 통에 변명 아닌 변명을 해야만 했습니다.

가끔씩 이긴 하지만 지방에서 오시는 손님도 맞이해야하고 요양원에 계신 어머니 병문안도 해야 함으로 한 달에 한두 번 참석할 수밖에 없는 사정을 일일이 말씀드릴 수도 없어서 그저 차가 없어서라 둘러댄 탓에 이런 반응들을 하신 겁니다.

매주 나오지는 않아도 성경연구는 매일한다는 내말에 어떤 형제님은 그렇다면 자신들을 가르쳐달라는 말씀까지 하셨지요.

말씀은 그렇게 하였지만 실지로는 성경을 연구했다면 그 결과물을 보자는 뜻이라는 점을 익히 알고 있으므로 그저 웃어넘기고 말았습니다.

같은 성경을 보더라도 가치관과 인식의 차이에 따라 받아들이는 것이 극명하게 달라진다는 점을 설명한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으므로 그렇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그래서 항상 교회를 나가게 되면 목사님의 가르침과 나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는가를 보게 됩니다.

항상 그래왔듯이 이번에도 어김없이 차이점을 발견하게 되었으니 오늘은 그 점을 주제로 성경을 상고해볼까 합니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마10:34)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마10:35)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마10:36)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마10:37)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마10:38)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마10:39)

He that findeth his life shall lose it: and he that loseth his life for my sake shall find it.

 

이 말씀을 두고 목사님은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영적전쟁에 나설 것을 요구한다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전도를 함에 있어 전쟁에 임하는 자세로 나서야할 것을 주장했지요.

식구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예수님을 위해 전도에 나서야한다는 말씀을 하시기에 나와는 많은 차이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으며 시각의 차이가 이렇게 크구나 했던 겁니다.

지금 이 말씀은 어디까지나 예수께서 성령의 입장에서 말씀하신 것으로 외적인 전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재하신 성령을 부모나 자식보다 귀하게 여겨야한다는 말씀으로 혈육을 넘어선 크나큰 영적세계를 알라는 뜻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종교가 다름으로 인해 가정에 불화가 생기게 되어 서로 원수 대하듯 하게 됩니다.

이러한 이유로 지금도 이슬람국가에서 전도하다 목숨을 잃는 이들이 왕왕 생기는 겁니다.

이미 여러 차례 말했듯이 이슬람교나 유대교, 기독교는 같은 성경에 그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지금에 와서는 마치 완전히 다른 경전을 믿는 것처럼 여기고 있으며 서로가 원수처럼 지내고 있는 중입니다.

유대인의 탈무드나 이슬람의 코란 모두는 성경에 기초하여 만들어진 것으로 알고 보면 한 뿌리라고 할 수 있지요.

하지만 누구도 이런 점을 인정하지 않고 있으며 여전히 서로가 원수 되어 지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이 말씀을 외적인 전쟁이라 여긴다면 성경을 크게 오해하는 것이며 세상의 전쟁을 부추기는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이러한 까닭으로 38절에서 예수께서는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자신을 따르라고 한 겁니다.

육신이 지은 죄는 자신이 감당하고 성령을 육신보다 중하게 여기는 자라야 성령의 가치관에 부합한다는 거지요.

그래서 39절에 자신의 목숨을 찾는 자는 이것을 잃을 것이고(findeth his life shall lose it) 나를 위해 목숨을 잃는 자는 이것을 발견 한다(his life for my sake shall find it) 말해놓았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나는 육신의 예수가 아니라 성령을 가리키며 이것(it) 또한 성령을 뜻합니다.

즉, 성령을 위해 제 목숨을 아낌없이 버릴 정도가 되어야 성령을 찾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렇듯 성경을 보는 관점(觀點)에 있어 목사님과 내가 많이 다릅니다.

과연 어떻게 받아들이는 것이 성경적이고 하나님 뜻에 부합할지를 판단하는 것은 개인의 몫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내재하신 성령에 초점을 맞추지 못하면 성경의 어떤 구절도 오해하기 마련입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관련구절을 보도록 하지요.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요9:7)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요9:39)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이르되 우리도 맹인인가(요9:40)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요9:41)

 

원래 목사님은 장님이 눈을 뜬것에 초점을 맞추어 인용하셨지만 나 홀로목사는 속뜻을 말하기위해 다른 구절을 올렸습니다.

9장의 전체내용을 액면으로 보면 봉사가 눈을 뜬 것으로 보이지만 속뜻은 영적인 눈을 떴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기에 핵심 되는 구절만 올린 겁니다.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한 것은 하늘로부터 보내심을 받아 생명의 가르침을 전하고 있는 인자이신 예수님이 영안(지혜안)을 뜨게 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7절)

하나님이신 성령이 예수의 육신을 통해 이 세상에 와서 생명의 말씀을 전하여 주니 그 말씀을 믿게 되면 영안이 열려 영적인 세상을 밝히 본다는 거지요.

하지만 영안이 열리게 되면 세상적인 면에 초점을 맞추지 않게 됨으로 오히려 맹인이 되게 만든다 했습니다.(39절)

그래서 40절에서 바리새인들이 자신들도 맹인인가를 물었던 겁니다.

즉, 자신들도 영안이 열린 것이냐를 묻고 있는 거지요.

여기에 대해 예수께서는 세상적인 것을 보지 않아야 맹인이라 할 것인데 아직도 세상적인 기준으로 판단하므로 영안이 열리지 않았다고 대답합니다.(41절)

가치관이 영적이지 못한 것을 비웃고 있으며 인자를 알아보지 못함을 나무라고 있습니다.

진정 성령의 내재하심을 믿게 되면 죄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지만 아직도 가치관이 물질 세상에 머물고 있기에 성령을 알아볼 수도 없고 깨어나지도 못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통해 알아야할 것은 성령의 내재하심을 믿고 성령과 하나 되는 겁니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전해주고자하는 것도 바로 이러한 점이지요.

그래서 보혜사를 보낸다 하셨으니 이미 보혜사는 세상에 수없이 많이 내려와 있다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목사님의 입을 통해서도 성령이신 보혜사가 말씀 하셔야하고 나 홀로목사를 통해서도 역사 하셔야하는 것이지 예수가 다시 이 세상에 와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아직도 빛이신 예수를 영접하지 못하였다면 영적으로 맹인이 되어 있는 것이며 실로암에 가서 눈을 씻어야한다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까닭에 나 홀로목사는 세상적인 일을 제대로 볼 수 없음을 자랑삼고 있으며 영적인 세상을 볼 수 있음을 영광스럽게 여기고 있다는 점을 말씀드리며 상고(相考)의 시간을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