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갑습니다.
나 홀로 목사입니다.
지난시간의 향기가 무척 진하게 느껴지는군요.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들이 평소 알고 있던 성경내용들이 얼마나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는 시간이었지요.
성경 곳곳에 담겨진 내용들이 우리가 표면적으로 알고 있는 것보다 아주 많은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깊이 파고들수록 더욱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오늘도 지난시간에 이어 성경 안으로 들어가 놀라운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여보도록 하지요.
그럼 마태복음 속으로 들어가 볼까요?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서 가장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하였음이니이다.(마2:6)
And thou Bethlehem, [in] the land of Juda, art not the least among the princes of Juda: for out of thee shall come a Governor, that shall rule my people Israel.
이 구절 역시 예수가 구약에서 예언한 인물임을 강조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야기입니다.
잠시 보도록 할까요?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미5:2)
But thou, Bethlehem Ephratah, [though] thou be little among the thousands of Judah, [yet] out of thee shall he come forth unto me [that is] to be ruler in Israel; whose goings forth [have been] from of old, from everlasting.
미가서 5장2절에 있는 이 구절을 따로 보게 되면 마태복음에서 말하는 것처럼 예수의 탄생을 예언한 것이 되겠지요.
하지만 그렇게만 여길 문제는 아니라 여겨집니다.
왜냐하면 미가서 5장 1절 내용에 이어서 나오는 말로서 아주 시적인 표현 속에 담겨진 심오한 가르침이 있기 때문이지요.
그렇다면 잠시 1절의 내용을 볼까요?
딸 군대여 너는 떼를 모을지어다. 그들이 우리를 에워쌌으니 막대기로 이스라엘 재판자의 뺨을 치리로다.
Now gather thyself in troops, O daughter of troops: he hath laid siege against us: they shall smite the judge of Israel with a rod upon the cheek.(미5:1)
심오한 내용이 담겨있음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내용이지요?
이 구절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미가서 전체를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시간관계상 전체를 보기는 어렵고 딸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지요.
미가서 4장에 보면 시온의 딸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시온이란 하나님이 약속한 땅이라 해서 영광스러움을 상징하지요.
이스라엘을 지칭한다 해도 틀리지 않으며 하나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이라 해도 틀리다 볼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어떠한 개인이라 볼 수도 있으며 백성들 전체라 해도 무방하다는 것이지요.
지난시간 이사야서에서 말한 처녀와 같다고 볼 수 있는 겁니다.
잠시 미가서 4장을 보도록 하지요.
딸 시온이여 해산하는 여인처럼 힘들여 낳을지어다. 이제 네가 성읍에서 나가서 들에 거주하며 또 바벨론까지 이르러 거기서 구원을 얻으리니 여호와께서 거기서 너를 네 원수들의 손에서 속량하여 내시리라.
Be in pain, and labour to bring forth, O daughter of Zion, like a woman in travail: for now shalt thou go forth out of the city, and thou shalt dwell in the field, and thou shalt go [even] to Babylon; there shalt thou be delivered; there the LORD shall redeem thee from the hand of thine enemies.(미4:10)
이 말은 무엇을 뜻할까요?
믿음의 길을 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해산하는 아이처럼 힘든 구도의 길을 걸어간다는 것을 일컫고 있지 않습니까?
향락과 악덕의 도시 바벨론에 가서야 구원을 얻는다는 것은 안락한 삶을 통해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음을 말하고 있으며 향락과 악덕 속에서도 믿음을 저버리지 않고 시련을 이겨 낼 때 하나님께서 속량(구원)해 내신다는 약속의 말씀이지요.
이렇게 본다면 미가서 5장의 내용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의 마음 안에 하나님을 따르고자 하는 순수성(딸)을 반대하여 끊임없이 공격하는 거친 부정성(he)의 싸움을 비유한 거라 봐야합니다.
그렇다면 왜 베들레헴을 지칭해서 말을 했는가 하는 의문이 남겠지요?
이것을 알려면 이스라엘의 지리적 상황을 살펴봐야하는데 예루살렘의 변방에 위치한 베들레헴은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목에 자리 잡고 있는 작은 소도시입니다.
약속의 땅이자 성지인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길 변두리에 있는 작은 도시는 바로 영생을 향해 구도의 길을 걸어가는 구도자를 말하는 거지요.
그렇다면 미가서5장2절의 내용은 이렇게 바뀝니다.
“베들레헴의 에브라다야 네가 비록 하나님을 믿는 마음(유대)이 작을지라도 그 믿음을 지켜나간다면 네 안에서 너를 하나님께로 이끌어줄 이가 나오나니 그가 네길(이스라엘)을 인도하리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
자신 안에서 하나님의 품성이 드러난다는 말이며 그가 나타나서(성령) 구원에 이르는 길을 인도한다는 거지요.
만약 지리적인 요인을 들어 미가서가 예수의 탄생을 예언 했다고만 본다면 다음에 나오는 구절들은 아무런 쓸모가 없겠지만 미가서 뒷부분을 보면 영적으로 심오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잠시 보도록 하지요.
그러므로 여인이 해산하기까지 그들을 붙여 두시겠고 그 후에는 그의 형제 가운데에 남은 자가 이스라엘 자손에게로 돌아오리니(미5:3)
여기에서 그들이란 마음속의 부정성들을 뜻하며 군대와도 연관이 있는데 여인이 해산한다는 말은 하나님의 성령이 마음 안에 심어지는 것을 뜻합니다.
그 후에 남은 자가 돌아온다는 말은 마음의 부정성과 싸워 이긴 상태, 즉 성령이 완전히 깨어난 그리스도를 말하는 거지요.
이렇게 보면 군대라는 말의 뜻이 완전하게 드러나게 됩니다.
미가서 5장1절의 해석은 이렇게 되겠지요.
믿음의 길을 걸어가는 구도자여!
마음 안에 믿음의 인식들을 모으라 네 믿음을 방해하는 모든 인식들이 너의 믿음을 방해하기 위해 에워싸고 집요하게 공격할지니 하나님을 믿는 마음을 경멸(輕蔑)하리라.
이제는 이해가 되었지요?
만약 아직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면 알게 될 겁니다.
하나님을 따르고 성경말씀을 믿는다 하지만 때때로 반대되는 마음을 일으키며 자신 안에 함께하는 부정적인 생각을 따르고자 하는 일들이 숱하게 일어나지요.
그리고 또 한 가지 군대라는 말이 뜻하는 바는 집단의식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세상시류에 부합된 집단이기주의 속에서 하나님을 따르겠다는 마음이 심어질 때 내면에서는 그동안 물들어있던 모든 고정관념들이 새로운 구도심과 한판 전쟁을 벌이게 되는 겁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이겨내게 되면 자신내면에 성령이 자리 잡아 삶을 이끌어 주는 거지요.
이 같은 상황이 하나님과 하나 되는 길, 즉 영생에 이르는 길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 본보기가 바로 그리스도 예수입니다.
마태복음에서 예수가 예언된 메시아라고 말을 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네 삶을 돌아보면 예수가 얼마나 위대한 인물인지 쉽게 알 수가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세상의 유혹에 너무나 약하여서 믿음이 마음 안에 자리 잡을 틈이 없습니다.
현실이 조금만 어려워도 믿음을 쉽게 저버리는 신앙심을 가지고 어떻게 영생을 얻을 수가 있을는지요?
만약 누군가가 자신의 습관하나도 이겨내지 못했다고 한다면 그의 마음 안에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뿌리내리지 못했다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과거 나 홀로 목사와 함께 수행의 길을 걸어가던 한사람이 있었습니다.
처음 그는 그야말로 신실함과 청정함을 함께 갖춘 모범적인 수행자였지요.
그러던 어느 날 문득 깨닫게 되었습니다.
모든 것은 마음먹기 나름(일체유심조)이라는 것을 알았던 겁니다.
이 같은 일을 그가 알게 된 것은 누군가의 글을 본 후였는데 순간적으로 자신이 크게 깨달은 것으로 착각을 하고 과거의 좋지 못한 습관을 다시 시작하게 되었고 결국 수행이 퇴보하였습니다.
왜 이런 일이 발생되었는가 하면 자신 안에 성령이 완전하게 뿌리내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자신 안에 믿음이 흔들리지 않을 정도로 성령이 자리 잡지 않았음에도 타인들의 깨달은 바를 자신의 삶에 적용을 시키다보니 일어난 일이었지요.
진정 성경을 통해 무엇인가를 얻었고 좋은 가르침을 통해 깨달았다고 한다면 더욱더 자신의 삶을 고귀하게 여기고 더욱더 영적인 생활을 하며 과거의 못된 습관을 쫒아가지는 않을 겁니다.
물론 습관을 쉽게 이겨낼 수 있었다고 해서 모든 것을 이룬 상태라고는 볼 수 없으며 숱한 시련들이 남아있습니다.
지난시간 우리들은 이사야서를 통해 엉긴 젖과 꿀을 보았는데 그 말의 뜻이 저주와 축복이라고 했지만 많은 이들이 그 의미를 온전히 깨닫지는 못합니다.
이 말의 진정한 뜻은 자신 안에 그리스도 의식이 완전하게 깨어나게 되면 하나님의 저주와 축복을 동시에 먹게 된다는 것인데 자신의 삶에서 다가오는 환란의 순간조차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으로 받아들이게 된다는 겁니다.
따라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는 순간까지도 원수를 사랑했던 그리스도 예수야 말로 그 시대에 진정으로 깨달은 위대한 스승이었던 것이 맞는 거지요.
마태복음에서 예수가 예언된 이스라엘의 통치자라는 의미는 하나님을 믿고 따르고자 하는 사람들을 이끌어줄 영적 스승이라는 말입니다.
그러기에 마태복음에는 다음구절로서 또 한 번 자신의 스승이 구약에서 예언된 인물임을 강조합니다.
헤롯이 죽기까지 거기 있었으니 이는 주께서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신바 애급으로부터 내 아들을 불렀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라(마2:15)
이 역시 구약의 호세아서에서 인용한 구절이지요.
아래를 볼까요?
이스라엘이 어렸을 때에 내가 사랑하여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냈거늘(호11:1)
호세아서에서 말하는 내 아들은 하나님을 믿고자 하는 하나님의 백성을 지칭한 것이고 애굽이란 이방인, 즉 믿지 않는 상태에 있던 사람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마태복음에는 이 같은 구약의 말씀을 인용했을까요?
바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였는데 다음구절을 보면 정확한 해답을 알 수가 있을 것 같군요.
라마에서 슬퍼하며 크게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받기를 거절하였도다 함이 이루어졌느니라(마2:18)
In Rama was there a voice heard, lamentation, and weeping, and great mourning, Rachel weeping [for] her children, and would not be comforted, because they are not.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라마에서 슬퍼하며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 때문에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어져서 위로 받기를 거절하는 도다.(램31:15)
Thus saith the LORD; A voice was heard in Ramah, lamentation, [and] bitter weeping; Rahel weeping for her children refused to be comforted for her children, because they [were] not.
첫 번째는 마태복음이고 두 번째가 예레미야서입니다.
똑같은 내용이지만 약간의 단어배열이 다르지요?
그런데 가만히 들여다보면 번역을 할 때 고민을 한 흔적이 보입니다.
마태복음의 번역은 라헬이 자식 때문에 애곡했지만 자식이 없어서 위로받기를 거절한 걸로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예레미야에서는 자식이 없어져서 위로받기를 거절하는 걸로 해석이 되어있지요.
자식이 죽어서 애곡을 하는데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받기를 거절했다하면 말이 되지 않으니까 자식이 없어져서 위로받기를 거절한 걸로 해석 했던 겁니다.
여기에 대한 정확한 해석을 하려면 예레미야31장 전체를 들여다봐야하겠지만 시간관계상 간단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31장을 요약하면 방황하는 이스라엘(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인들이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오게 되면 축복을 받게 된다는 내용으로서 슬픔도 즐거움이 되고 근심으로부터 기쁨을 얻게 만들어준다는 하나님의 약속이지요.
물론 이것은 구원을 받은 후의 마음상태에 대한 이야기이며 현시대의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의 복원을 뜻하는 바는 결코 아닙니다.
앞서 마태복음에서 말했듯이 자식 때문에 애통해 했지만 위로받기 거절한 이유가 자식이 없어서라 한 것은 자식이라 하지만 진정한 의미에서는 자식이 아니라는 말을 비유한 것입니다.
나 홀로 목사가 이렇게 강하게 말하는 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라마의 히브리어 뜻은 높은 곳이며 라헬은 야곱의 부인인데 이스라엘사람들(야곱의 이름이 이스라엘로 바뀜)의 조상이라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높은 곳(높은 의식)에서 보는 시각으로는 자식이 아니므로 위로받을 필요가 없다는 말이기도 하며 예수가 바로 높은 세상에서 내려온 영혼이란 것을 암시한 거라 봐야하지요.
이제 제대로 해석이 된 것 같지요?
마태복음의 저자가 구약에 대해 정통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역사적인 사실을 근거로 영적인 가르침을 잘 묘사해 놓은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 같은 그의 의도가 어떤 이들을 미망의 세계를 헤매도록 만들기도 하지요.
사실 이 같은 일조차도 아주 지혜로운 일이기도 합니다.
돼지에게는 진주목걸이를 주지 말라는 예수의 가르침대로 진정한 의미는 구약을 통해서 깨닫도록 배려한 것이기도 합니다.
제대로 성경을 들여다보지 않고서는 절대 깨닫지 못하게 만들어놓았다고도 볼 수 있으며 폭력적이고 배타적인 성격의 소유자들은 타인들과의 논쟁을 통해서 투쟁만을 일삼게 만들어놓았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옛 성현들은 이렇게 말을 했지요.
“똑같은 물이라도 소가 먹으면 우유를 만들어내고 뱀이 먹으면 독을 만들어낸다”
성경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은 정말로 무궁무진합니다.
지옥문을 활짝 여는 것부터 시작해서 천국에 이르는 문은 물론이며 하나님과 하나 됨을 경험할 수도 있지요.
앞으로 우리들은 여러 번 그와 같은 경험을 하리라 기대하며 오늘은 여기에서 쉬어가겠습니다.
홀로 거룩하신 나의 하나님!
당신의 은혜로움이 오늘도 저희와 함께 하였음에 감사하나이다.
하늘에 태양이 구름에 가려져 보이지 않더라도 늘 존재하듯이
육신 속에 깊이 감춰진 당신은 우리와 함께 하심을 우리가 아나이다.
자비로우신 우리의 하나님!
우리가 믿음의 길을 걸어감에 있어 유혹에 쉽게 흔들릴지라도
돌이켜 돌아오면 구원해 주시리라는 약속을 오늘 보았나이다.
또한 우리들의 나약함을 질타해주시는 당신의 매서운 손길을 느낄 수 있음에
감사해야함도 알았나이다.
진정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일은 우리의 잘못을 나무라는 당신의 노호가 아니라
외면이라는 것을 모든 이들이 알도록 허락하소서.
아멘! 아멘!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