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생각 긴여운

육(肉)과 영(靈)의 전쟁.

배가번드 2022. 12. 28. 0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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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를 다니지만 성경을 읽지 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나마 읽어도 대충 읽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러다보니 목사님 말씀을 진리인양 받아들이지요.

이런 점을 나쁘다고 볼 수는 없지만 이왕교회를 다니려면 성경은 필수로 읽어야 합니다.

처음에는 성경내용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특히 구약은 아무리 봐도 이해할 수가 없게 기록이 되어 있으며 액면대로 읽으면 오히려 불신이 커지게 됩니다.

그렇지만 신약을 잘 읽어보면 구약을 바탕으로 성경이 기록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되지요.

결국 비유와 은유의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성경의 깊은 뜻을 헤아려 가르쳤음을 알 수 있는 겁니다.

이러다보면 구약보다는 신약위주로 성경을 읽게 되며 자꾸 반복해서 읽다보면 각 복음서마다 같은 장면을 다르게 기록하고 있음을 깨닫게 되어 있습니다.

이때가 되면 사람들은 두 가지 유형으로 나뉩니다.

성경을 불신하여 교회를 떠나거나 더욱 성경에 매달리거나 둘 중 하나가 될 거라는 말입니다.

성경을 많이 읽어본 이들은 아시겠지만 4복음서가 약간씩 다릅니다.

어떤 경우에는 같은 장면이 심하게 다른 경우도 있습니다.

이렇게 기록한 이유는 각자가 보는 시각과 인식이 다르다는 점을 말해놓은 것이며 성경을 액면대로 볼 것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주고자 배려한 겁니다.

이러한 점을 깨닫게 되었을 때라야 성경에 담긴 깊은 뜻을 헤아리게 됩니다.

이 같은 일은 우리네 인생길에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습니다.

성경내용에 깊은 뜻이 담겨있듯이 우리인생길에도 깊은 뜻이 담겨있는 거지요.

단순하게 한번 왔다가는 인생 신나게 즐기며 살 것이 아니라 나에게 주어진 삶이 어떤 의미가 있는가를 봐야합니다.

각자의 인생길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궁극적 목적지가 어디인지 알게 되며 그러한 목적지가 영생에 있음을 깨닫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한 점을 볼 수 없다면 아직은 육신으로 살아야할 날이 많이 남았다는 것이며 좀 더 세상에 머물러야만 하는 겁니다.

그런 뜻에서 구약의 일부분을 인용하여 우리네 인생이 가지고 있는 뜻을 살펴보기로 하지요.

 

이삭은 사십세에 리브가를 취하여 아내를 삼았으니 리브가는 밧단 아람의 아람 족속 중 브두엘의 딸이요 아람 족속중 라반의 누이였더라(창25:20)

이삭이 그 아내가 잉태하지 못하므로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그 간구를 들으셨으므로 그 아내 리브가가 잉태하였더니(창25:21)

아이들이 그의 태 속에서 서로 싸우는지라 그가 가로되 이같으면 내가 어찌할꼬 하고 가서 여호와께 묻자온대(창25:22)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창25:23)

And the LORD said unto her, Two nations are in thy womb, and two manner of people shall be separated from thy bowels; and the one people shall be stronger than the other people; and the elder shall serve the younger.

먼저 나온 자는 붉고 전신이 갖옷 같아서 이름을 에서라 하였고(창25:25)

후에 나온 아우는 손으로 에서의 발꿈치를 잡았으므로 그 이름을 야곱이라 하였으며 리브가가 그들을 낳을 때에 이삭이 육십 세이었더라(창25:26)

 

이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히브리어를 알아야합니다.

우선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백성의 아버지)의 아들인 이삭의 뜻은 “웃음”입니다.

세상의 즐거움을 뜻하며 그가 아내를 맞이하여 아이를 낳았다는 것은 세상을 통해 얻어야하는 일이 어떠하다는 것을 말해놓은 겁니다.

이삭의 아내 리브가의 뜻은 : “그물끈” 이고 그녀 아버지 브두엘의 뜻은 “하나님의 집” 이며 라반은 “흰빛”입니다.

따라서 이삭은 단순하게 리브가에게 장가를 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집에서 성령(흰빛)을 깨닫기 위해 영적인 길로 접어든 거지요.

영적인 길에 들어선 것을 그물망에 갇힌(장가를 들다) 것으로 비유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해석해보면 21절에 이삭이 바란 것은 육신의 아들을 원한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결실을 원했음을 알게 됩니다.

뱃속에서 아이들이 싸웠다는 것은 육과영의 투쟁을 뜻하는 것이며 그로인해 고민을 하여 하나님께 답을 구합니다.(22절)

하나님이 대답하시기를 복중에 두 민족이 싸움을 하여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긴다고 한 것은 육과 영이 전쟁을 한 끝에 승리한 쪽이 육신을 이끌어 간다는 것을 뜻하는 겁니다.

그래서 23절에 깊은 속이라 말해놓았습니다.(from thy bowels)

우리 내면을 가리키는 것으로 육의 속성이 승리를 하면 영을 끌어안고 가는 것이며 영이 승리하게 되면 육을 다독이며 이끌어간다는 뜻에서 이렇게 기록한거지요.

그리고 알아야할 것은 25절과26절에 기록된 에서와 야곱의 이름이 가진 뜻입니다.

에서는 “털 복숭이” 이고 야곱은 “발꿈치를 잡는 자” 이니 형인 에서는 육적자아, 즉 짐승 같은 마음을 뜻하며 야곱은 우리인간의 행동을 제어하는 양심과 같은 영적자아를 뜻합니다.

우리자신의 마음속을 들여다보면 늘 이두가지 마음이 투쟁한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육신을 따라 세상적인 것들에 영향을 받는 마음과 불의한 마음을 뿌리치고 영적인 것을 추구하는 마음이 항상 갈등을 일으킵니다.

우리가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지는 스스로의 삶을 들여다보면 잘 알 수 있지요.

조금만 아파도 견디지 못하여 믿음이 송두리째 흔들리고 물질적 어려움이 닥치면 신앙심은 너무나 쉽게 무너집니다.

이래서 우리는 기도가 필요하며 영적동반자가 필요합니다.

아마도 어떤 이들은 자신이 당하는 고통의 크기를 말하며 신에게 불만을 터트릴지 모릅니다.

왜 자신에게만 이런 고통을 주시느냐 하겠지요.

하지만 하나님은 너무나 공평하며 감당하지 못할 짐을 주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닥쳐온 모든 환란의 제공자는 자기 자신입니다.

또한 그러한 어려움은 하나님의 축복임을 알아야합니다.

고통과 어려움은 모두가 우리에게 주어지는 시련이며 우리육과 영을 성장시키기 위해 제공되는 하나님의 선물과도 같은 겁니다.

번뇌는 보리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아도 정작 자신에게 주어지는 순간은 그렇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 인생이지요.

어차피 나에게 주어진 짐이고 건너야할 강이라면 이삭과 같이 웃으며 걸어가는 것이 좋습니다.

이러한 마음으로 걷게 되면 저주는 어느덧 축복으로 바뀌게 됩니다.

이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입니다.

 

듣고 싶은 이만 들으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