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홀로목사

마가복음17.

배가번드 2019. 9. 3. 0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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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십니까?

나 홀로목사입니다.

봄기운이 완연하게 느껴지는 요즘 지난겨울을 되돌아봅니다.

길고긴 겨울동안 춥지 않게 여겨진 것은 매일같이 성경 속에서 성령과 함께 했기 때문이라 생각됩니다.

사실은 매일 성경연구를 하지는 못하고 있으며 일주일에 네다섯 번 정도 하는 것 같습니다.

그조차도 하루에 2시간 이상을 넘기지는 못하는지라 내용이 부실해지지 않을까 늘 걱정입니다.

책상에 앉아 성경을 연구한다는 것이 쉬운 것만은 아니어서 성령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낮 시간의 대부분을 건축현장에서 보내고 나면 파김치가 되는지라 또 다른 영역의 힘이 주어지지 않는다면 할 수 없는 일이지요.

나 자신이 생각해도 기적 같은 일이 아닐 수 없으며 성령의 임하심을 매일같이 경험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어떤 분은 거짓말처럼 여기시는 분들이 있는데 솔직히 그런 분들은 나

홀로목사의 성경강해를 단한편이라도 올곧게 읽은 적이 없을 겁니다.

왜냐하면 성경에는 성령의 파워가 담겨있고 그 성령을 드러내는 작업을 하는 나 홀로목사의

성경강해에는 성령의 에너지가 흐르기 때문입니다.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거나 성령을 깨닫기에 부족함이 있는 분들은 단한편도 제대로 읽을 수

없을 거라 장담할 수 있습니다.

나 홀로목사의 성경강해는 편당 9페이지 분량으로 이루어지는데 결코 적은 량이 아닙니다.

글을 쓴 제자신조차도 집중상태가 흐트러지게 되면 잘 읽어지지 않을 때가 있는데 일반인들

이야 오죽하겠습니까.

웬만한 인내심과 집중상태가 아니면 끝까지 읽는다는 것은 그야말로 힘든 일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나 홀로목사의 성경강해를 제대로 읽기만 해도 영생에 한걸음 다가설 수 있

을 거라 여깁니다.

장담하건데 지금까지의 내용을 한 구절도 놓치지 않고 읽기만 해도 반은 성공했다 볼 수 있

습니다.

부디 나머지 반도 단시일 내에 쟁취하시길 기원하며 13장을 열겠습니다.

 

예수께서 성전에서 나가실 때에 제자 중 하나가 가로되 선생님이여 보소서 이 돌들이 어떠하며 이 건물들이 어떠하니이까(13:1)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이 큰 건물들을 보느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하시니라(13:2)

 

성전에서 나가셨다는 것은 예수님은 성령을 완전히 드러내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제자들이 돌들과 건물들에 대해 물었던 것은 자신들의 육신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의 성전(육신)에 비해 그들의 것(, 건물)이 어떠한지 물었던 거지요.

나 홀로목사의 말에 믿음이 가지 않는 분들을 위해 마태복음에 기록된 동일한 내용을 잠시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성전에서 나와서 가실 때에 제자들이 성전 건물들을 가리켜 보이려고 나아오니(24:1)

And Jesus went out, and departed from the temple: and his disciples came to him for to shew him the buildings of the temple.

 

그런데 말씀을 드리고 나서 보니 참으로 이상한점이 포착되었습니다.

성전에서 나와서 가실 때에 해당하는 영어를 보면 (Jesus went out, and departed from the temple) 인데 이중에 departed 는 단순하게 나와서 로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이 단어는 죽음이라는 단어대신에 쓰이는 단어로서 세상을 떠난, 하직한 등의 뜻으로 쓰입니다.

이렇게 보면 성전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 성전(육신)으로부터 분리되었다 로 해석되어야하지요.

예수님이 성령을 완전히 드러낸 분이라는 것을 나타내기위해 이렇게 기록한 겁니다.

이런 까닭으로 제자들이 자신들의 성전(육신)을 보이려고 나아온 겁니다.

어떻습니까?

이제는 이해가 가셨나요?

아직도 이해가 가지 않는 분들은 다음구절에 집중해 보기 바랍니다.

조금 더 이해하기 쉬울 겁니다.

 

예수께서 감람산에서 성전을 마주 대하여 앉으셨을 때에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과 안드레가 종용히 묻자오되(13:3)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이 모든 일이 이루려 할 때에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13:4)

 

예수께서 감람 산 위에 앉으셨을 때에 제자들이 조용히 와서 이르되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24:3)

 

여러분의 이해를 돕기 위해 마태복음을 아래쪽에 붙여놓았습니다.

마태오는 예수께서 그저 감람산위에 앉으셨다고 기록한 반면 마가는 성전을 마주 대하여 앉으셨다했습니다.

그리고 마가는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냐고 하며 무슨 징조가 있을지를 물었습니다.

이런 일이란 표면적으로는 성전이 무너지는 일이지만 영적으로 보면 육신을 가리킵니다.

나 홀로목사가 이렇게 말씀드리는 이유는 마태복음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냐고 물었던 것이 바로 그 이유입니다.

이 말씀은 세상이 멸망할 때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는 의미가 아니라 제자들이 세상을 떠나는 날 성령이 임하게 되는 것을 뜻합니다.

영적인 부활의 날은 육신으로서는 마지막이 되며 자신 안에서 성령이 완전히 드러나게 되면 하나님과 하나 되신 예수님과 동일하게 된다는 거지요.

제자들이 이렇게 되려면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될는지 확인해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13:5)

And Jesus answering them began to say, Take heed lest any man deceive you: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내가 그로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케 하리라(13:6)

For many shall come in my name, saying, I am Christ; and shall deceive many.

 

자신 안에 들어앉은 성령을 일깨우려면 사람을 조심하라 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이름을 빙자(憑藉)하여 자신이 그리스도라 (I am Christ)하며 사람을 속인다고 합니다.

이 말씀인즉 사람이 그리스도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누구라도(any man) 육신으로서 자신이 그리스도라고 말한다면 아니라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육신이 그리스도가 될 수 없다는 말이지요.

조금 소상하게 말씀드리자면 누군가 자신이 성령을 깨달아 영적스승이 되었다 할지라도 육신이 그리스도라고 말한다면 거짓 스승이라는 겁니다.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들을 때에 두려워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끝은 아직 아니니라(13:7)

 

거짓 스승들이 세상이 곧 멸망한다 말하더라도 두려워 말라는 거지요.

세상이 멸망해야 하는 것은 맞지만 이런 식의 멸망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진정한 멸망이란 자신의 내면에서 이루어진다는 내용이 다음구절에 이어집니다.

 

민족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처처에 지진이 있으며 기근이 있으리니 이는 재난의 시작이니라(13:8)

 

인종과 종교의 벽(민족과 민족)은 물론 이념의 제한성(나라와 나라)이 허물어져야하며 지금껏 가지고 있던 물질적인 인식들이 영적으로 바뀌는 과정에 있어 주변사람들과 심각한 마찰(지진)이 있을 것이며 이로 인해 물질적으로 가난하게(기근) 될 수 있다는 겁니다.

이런 일뿐만이 아니라 더욱 심한 일들이 일어날 수도 있다고 합니다.(these are the beginnings of sorrows)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사람들이 너희를 공회에 넘겨주겠고 너희를 회당에서 매질하겠으며 나를 인하여 너희가 관장들과 임금들 앞에 서리니 이는 저희에게 증거되려 함이라(13:9)

 

일반적이고 기본적인 교리에서 벗어나 영생을 얻는 획기적인 방법을 전하려하면 기득권층으로부터 공격을 받게 됩니다.

그렇다할지라도 성령을 욕되게 할 수는 없으니 그들에게 굴복하지 않는지라 물질세상의 왕 앞에서 심판받게 된다는 거지요.

이러한 일이 왜 일어나는가하면 성령을 위해 물질 세상에 굴복하지 않았다는 증거를 남기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이 결코 몰라서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또 복음이 먼저 만국에 전파되어야 할 것이니라(13:10)

 

미리 말씀 드린 데로 여기에서의 국가란 이념을 말하는 것으로서 인식 체를 비유한 겁니다.

우리 몸을 이루고 있는 많은 인식 체들이 부활의 날 성령을 통해 영생을 얻는다는 것을 완전히 받아들여야한다는 말입니다.

달리 말하면 완전히 믿어야한다는 겁니다.

아직도 나 홀로목사의 말이 믿기지 않는다면 성경을 통해 증명해보이겠습니다.

 

사람들이 너희를 끌어다가 넘겨줄 때에 무슨 말을 할까 미리 염려치 말고 무엇이든지 그 시에 너희에게 주시는 그 말을 하라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요 성령이시니라(13:11)

 

재난과 환란을 당함에 있어서도 굴하지 않고 성령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으면 미리 준비하거나 생각하지 않아도 성령께서 적당한 말을 할 수 있게 만든다는 거지요.

하지만 영생을 얻는다는 것이 그리 호락호락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다음구절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형제가 형제를 아비가 자식을 죽는데 내어주며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하리라(13:12)

또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13:13)

And ye shall be hated of all men for my name's sake: but he that shall endure unto the end, the same shall be saved.

 

아마도 많은 분들이 이러한 일을 전쟁으로 인해 극심한 재난이 일어나는 걸로 알고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렇게 여겨서는 곤란합니다.

이 내용은 영생을 향한 길을 방해하는 여러 가지 일들 중 한 가지를 비유한 겁니다.

가까운 가족들이 가장 심하게 방해할거라는 거지요.

이념의 차이란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습니다.

종교적인 신념과 사상이란 아주 무서운 겁니다.

반드시 종교가 아니더라도 이념의 차이는 끔찍한 일도 가능하게 만듭니다.

가까운 중국만 하더라도 장기집권을 노린 마오쩌둥의 문화대혁명으로 인해 가족 간에 이러한 일이 실제로 일어났었습니다.

자식이 부모를 반동으로 몰아 인민재판에 회부시켜 처벌받게 하고 죽음으로 몰아간 일이 비일비재했지요.

그리고 우리나라에서는 남북전쟁으로 인해 형제간에 총부리를 맞대고 서로 죽이는 일이 있었습니다.

이 같은 일은 과거뿐만이 아니라 지금도 현재진행형으로 일어나고 있는 일이기도 합니다.

종교적인 신념으로 가족 간에 불화가 일어나고 서로 원수지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으며 정치적인 이념으로 인해 부모와 자식이 조면(阻面)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요즘 노부모들은 태극기 집회에, 젊은 층은 촛불집회에 나가 자신의 정치적 신념을 보이곤 하는데 이로 인해 부모 자식 간에 등 돌리는 경우가 생기고 있습니다.

이글을 읽는 종교인들은 스스로를 살펴보면 이 같은 내용이 무엇을 말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자신들의 믿음으로 인해 가족이나 주변사람들을 향해 무어라고 말하고 있는지 스스로를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부모나 형제에게 예수님 믿지 않는 죄로 지옥가리라 말하며 죽음으로 내몰고 있지 않느냐는 겁니다.

시계바늘을 과거로 돌려 예수님시대로 돌아가 보면 보다 정확하게 이 내용의 뜻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생존당시 성령을 드러내어 천국복음을 전하려할 때 이스라엘사람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심하게 배척했지요.

기득권을 가진 종교가들에게는 교리에 맞지 않는다고 거부당했고 다수의 일반인들에게는 현실적이지 못하다는 이유로 배척당했습니다.

그래서 마가는 모든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받는다고 했으며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기록했던 겁니다.

그런데 말을 하고보니 13절에 아주 재미있고 흥미로운 내용이 있습니다.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했는데 직역을 해보면 끝까지 견디면 구원을 얻은 것과 같다 입니다.

 

he that shall endure unto the end, the same shall be saved.

 

영생을 얻기 위해서는 우리 육신이 성전이며 성전 안에 하나님이 성령으로 자리하고 있음을 죽는 날까지 믿어야한다는 말입니다.

사는 동안은 육신에 가려 성령이 드러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죽는 날에는 성령이 완전히 드러나게 될 것인 만큼 구원을 얻은 것과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이렇게 해석하고 보니 12절의 내용이 명확하게 정리가 됩니다.

영생(구원)을 얻지 못한 상태에서 가족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영적인 죽음으로 몰고 가는 것과 다름없다는 말입니다.

지금까지의 마가복음 내용을 마태오는 다음과 같이 짧게 기록했습니다.

잠시 보실까요.

 

그 때에 사람들이 너희를 환난에 넘겨 주겠으며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가 내 이름 때문에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으리라(24:9)

그 때에 많은 사람이 실족하게 되어 서로 잡아 주고 서로 미워하겠으며(24:10)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겠으며(24:11)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24:12)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24:13)

 

동일한 내용이지만 마가와 마태오는 각자의 인식으로 성령과 영생에 대해 기록해 놓았으니 비교해보시기 바라며 다음내용을 보겠습니다.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서지 못할 곳에 선 것을 보거든 (읽는 자는 깨달을진저)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어다(13:14)

"When you see `the abomination that causes desolation' standing where it does not belong -- let the reader understand -- then let those who are in Judea flee to the mountains.

 

멸망의 가증한 것에 해당하는 영어를 보면 the abomination that causes desolation입니다.

직역해보면 황량함을 유발하는(적막함의 원인이 될) 혐오스러운 것인데 장차 썩어질 우리의 육신을 가리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육신으로는 서지 못할 곳이 있는데 그곳은 바로 성전을 뜻합니다.

사람의 몸으로는 성전에 서지 못하지만 선 것을 보거든 이라고 기록한 이유는 하나님 믿는 사람이 자신의 내면에서(육신은 성전) 성령을 보게 되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육신의 눈이 아니라 영의 눈(지혜안, 영안)으로 본다는 겁니다.

유대는 하나님 찬양의 뜻이니 하나님 믿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산으로 도망하라고 한 것은 인식(認識)의 초점을 높은 곳으로 향하라는 말입니다.(flee to the mountains)

전체적인 내용을 볼 때 이 내용은 심하게 비유된 말씀으로 하나님 믿는 사람 중에 자신의 내면에서 성령을 보게 되면 높은 인식을 갖추게 된다는 겁니다.(let those who are in Judea flee to the mountains)

이 내용은 다니엘서를 인용한 것인데 마태복음 33편과 34편에 다니엘서에 대한 내용을 상세하게 풀이해놓았으니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시간관계상 다니엘서를 여기에서 다룰 수는 없지만 반드시 다니엘서를 읽고 제대로 해석해야만 이 내용을 소화 시킬 수 있습니다.

읽는 자는 깨달을 진저라는 토를 달아놓은 이유가 바로 이런 거지요.

그러면 이렇게 자신내면에서 성령을 보게 된 사람은 어떻게 되는 것인지 성경을 통해 알아보겠습니다.

 

지붕 위에 있는 자는 내려가지도 말고 집에 있는 무엇을 가지러 들어가지도 말며(13:15)

 

높은 인식에 이른 사람(지붕위에 있는 자), 즉 성령을 한번이라도 본 사람은 더 이상 저급한 물질적인 것에 관심기울이지 말라고 합니다.

 

밭에 있는 자는 겉옷을 가지러 뒤로 돌이키지 말지어다(13:16)

 

들판에 선 것 같이 물질적인 것들이 없어질 것인즉 겉 치례를 위해 마음을 돌이키지 말라고 하는군요.

 

그 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로다(13:17)

But woe to them that are with child, and to them that give suck in those days!

이 일이 겨울에 나지 않도록 기도하라(13:18)

And pray ye that your flight be not in the winter.

 

그날이란 육신으로 성전에 오르는 날(your fligh), 즉 성령을 깨달아 알게 되는 날을 가리킵니다.

시공이 없는 영의 세계에 오르게 되면 자칫 육신의 의무를 소홀히 하는 일이 발생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자면 누군가 깊은 산속에 나무를 하러갔다가 동굴하나를 발견하여 들어가 보니 노인네들이 바둑을 두고 있기에 잠시 구경하고 돌아왔는데 6년의 세월이 흘러있었다는 것과 같은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거지요.

이렇게 되면 아이를 임신한 사람이나 젖먹일 아이가 있는 이에게는 끔찍한 일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런 까닭으로 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했습니다.

 

이는 그날들은 환난의 날이 되겠음이라 하나님의 창조하신 창초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13:19)

 

시공간의 경계가 깨어진 상태인 영의 세계를 경험하게 되면 육신적으로는 엄청난 재앙이 될 수 있음을 말해줍니다.

물질세상의 시스템이 전혀 적용되지 않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창조의 시작부터(과거) 지금까지(현재)는 물론이거니와 후에도(미래) 이런 환난이 없다는 말은 바로 이러한 영적경험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만일 주께서 그날들을 감하지 아니하셨더면 모든 육체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어늘 자기의 택하신 백성을 위하여 그 날들을 감하셨느니라(13:20)

 

물질로 이루어진 육체로는 감히 영의 세계를 경험할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허락하신다면 가능하다는 겁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은 저 멀리 하늘에 있는 분이 아니라 우리 안에(성전) 내재한 하나님이십니다.

이분이 우리의 일거수일투족(一擧手一投足)을 면밀히 알고 계시는지라 때가 이르게 되면 영의 세계를 허락하시지요.

우리들이 얼마나 영에 대해 갈망하고 성령을 위하는 삶을 사는지 잘 아시기에 때가 되면 경험케 한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알아야할 것은 하나님이 선택하신다고 했지만 사실은 우리의 선택이기도 하다는 겁니다.

우리자신이 영적인 삶을 선택해서 걸어갈 때라야 내면의 성령이 감흥(感興)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우리가 물질적인 향락과 육적인 쾌락을 선택했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건져 올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만약 이럴 것 같으면 지옥 갈 영혼은 어디에도 없을 테지만 지옥이 언제나 만원인 것을 보면 하나님은 우리인간들에게 모든 선택의 기회를 열어주고 있는 것이 확실하며 우리의 미래는 우리에게 달린 동시에 하나님에게 달린 것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언제나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습니다.

그러면 영의 세계를 경험하여 내면의 성령을 보게 되면 또 어떤 일이 일어날는지요.

 

그 때에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보라 저기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13:21)

And then if any man shall say to you, Lo, here is Christ; or, lo, he is there; believe him not: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서 이적기사를 행하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백성을 미혹케 하려 하리라(13:22)

For false Christs and false prophets shall rise, and shall shew signs and wonders, to seduce, if it were possible, even the elect.

너희는 삼가라 내가 모든 일을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노라 (13:23)

 

그러면(And then)(성령을 경험하게 되면, 성전에 오르는 경험을 하게 되면) 누군가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저기 있다 말해도 믿지 않게 된다는 말입니다.(believe him not)

이미 자신의 내면에 그리스도(성령)가 함께 한다는 것을 확인했으니 흔들림이 있을 수 없지요.(21)

하지만 이런 영적경험이 주어지고나면 온갖 시험과 유혹들이 구도자에게 다가옵니다.

자신이 스스로 그리스도라고 말하거나 선지자를 자처하는 이들이 이적과 기적을 보여주며(shew signs and wonders) 유혹합니다.

이미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even the elect) 이와 같은 시험은 주어집니다.(22)

왜 이러한 일이 일어나는가 하면 물질세상을 관장하는 영의 작용(作用)으로 인해서인데 성경적으로 표현하면 물질세상을 지배하는 마귀와 사탄이 영의 세계로 올라가는 영혼을 끄집어 내리기위해 발목을 잡고 늘어지기 때문입니다.

사람에 따라 다르긴 하겠지만 구도자에겐 이런 시험이 언제든지 다가옵니다.

심지어 예수님조차 이러한 경험을 하셨는데 다함께 확인해 보겠습니다.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4:8)

가로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4:9)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단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4:10)

 

이제 여러분은 예수님께서 받으신 시험과 유혹에 대해 확인했습니다.

하나님과 하나 된 예수님조차 이러한 시험을 당하셨을 진데 하물며 범부(凡夫)인 우리야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만약 성경을 통해 누군가 영생을 얻으려 한다면 이러한 시험을 반드시 이겨내야만 합니다.

지금 우리가 몸담고 있는 이세상은 선악과가 달린 에덴동산이며 우리가 얻고자하는 것은 선악과라는 달콤한 열매가 아닙니다.

마귀와 사탄이 유혹하더라도 선악과를 먹어서는 안 되며 기필코 얻어야할 것은 영생과 입니다.

이미 확인했다시피 영생을 얻는다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지요.

오죽하면 성경에 다음과 같이 기록했겠습니까.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 내시에덴 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3:24)

 

이런 이유로 마가는 영생을 얻는 그날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습니다.

 

그 때에 그 환난 후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13:24)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에 있는 권능들이 흔들리리라(13:25)

 

물질세상의 근간(根幹)을 이루던 법칙이 한순간에 무너짐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들이 보고 있는 우주의 모든 것들이 그 의미를 상실하고 인과의 법칙조차 무너진다는 것을 하늘의 권능이 흔들리는 것으로 표현했습니다.

이와 같은 나 홀로목사의 해석을 증명해줄 내용이 다음구절에 이어집니다.

 

그 때에 인자가 구름을 타고 큰 권능과 영광으로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보리(13:26)

 

인자란 영생을 얻은 이를 말한다는 것을 여러분 모두는 알고 있는바 이 말씀이 물질적 유혹과 시험을 이겨낸 후의 일을 묘사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나 홀로목사는 이 구절에서 재미난 내용을 보았습니다.

왜 인자가 하필이면 구름을 타고 오며 사람들이 볼 수 있다고 했을까요.

잠시 눈을 감고 내면의 성령께 물었더니 다음과 같이 답해주셨습니다.

 

구름을 탔다는 것은 일반인들은 볼 수가 없다는 뜻이고 볼 수 있는 사람이란 영생을 얻은 사람과 그들과 인연 있는 사람들을 가리키니 하늘의 권능과 영광이 임할 자를 가리키노라

 

이 같은 대답이 주어짐과 동시에 다음내용과 자연스럽게 연관聯關)이 지어졌습니다.

 

또 그 때에 저가 천사들을 보내어 자기 택하신 자들을 땅 끝으로부터 하늘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13:27)

 

영생을 얻게 되면 온 우주가 하나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는 것을 비유했습니다.

천지를 비롯하여 삼라만상이 한 점 안에 모인다는 말이니 시공의 벽이 완전히 무너진 상태를 말합니다.

달리표현하면 만물동일체의 개념이 생긴다는 거지요.

이러한 일들이 영생을 얻게 될 때 생기는 일이라는 말입니다.

여기에 대한 부연(敷衍) 설명을 예수님께서 하셨습니다.

함께 보시죠.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13:28)

Now learn a parable of the fig tree; When her branch is yet tender, and putteth forth leaves, ye know that summer is near:

이와 같이 너희가 이런 일이 나는 것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을 알라(13:29)

So ye in like manner, when ye shall see these things come to pass, know that it is nigh, even at the doors.

 

28절을 깊이 있게 들여다보면 그냥 가지가 연하여지고가 아니라 아직까지 연하여 있을 때(When her branch is yet tender)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말해주는가 하면 사람이 물질과 육신에 초점이 맞춰진 생활을 오래하다 보면 고정관념이라는 것이 형성됩니다.

뿌리 깊은 생활습관이 그 몸을 지배하게 되어 영적인 삶으로 돌이키기 어렵게 된다는 거지요.

가지로 치면 딱딱하게 되어 더 이상 잎사귀를 낼 수 없는 지경에 처해집니다.

그래서 성경은 아직까지 연할 때(yet tender) 잎사귀를 낸다고 기록한 겁니다.

29절에서 말한 이런 일이라 한 것은 1절부터 지금까지 열거한 여러 가지 징조들 모두가 인자가 오기위한 전조현상(前兆現像)입니다.

앞의 내용들이 이스라엘이 겪어야만했던 수난의 역사가 아니라는 것이 증명된 셈이지요.

나 홀로목사의 말이 맞는다는 것을 예수님께서 확인해주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이루리라(13:30)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13:31)

 

이세대란 예수님말씀을 듣는 지금현재 각 사람들의 인생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생존당시에는 이 말씀을 예수님 입을 통해 직접 듣던 사람들에게, 2천년의 세월동안은 각 시대마다 성직자들이나 혹은 선지자들의 입을 통해 듣던 사람들에게, 오늘날에는 목회자들이나 그밖에 영적스승들 입을 통해 듣는 사람들에게, 지금이순간은 나 홀로목사의 입을 통해 듣는 여러분들에게 인자가 함께하는 영광이 주어질 수 있다는 말입니다.(30)

물질계인 우주가(천지) 없어진다 해도 영계의 최고봉에 자리한 성령(말씀, 진동)은 영원합니다.(31)

성령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존재하기에 이러한 일이 가능하며 육신과는 전혀 별개의 존재라는 것을 말씀하신 겁니다.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시느니라(13:32)

 

육신과 형체를 가진 모든 것들을 초월하여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것을 나타내보이고 있습니다.

영적인 세계의 무궁무진함과 단계별로 나누어진 영의 세계를 간략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마도 몇몇 분은 영의 세계에 대해 알고 싶어 하실 것이 분명하지만 아직은 때가 이른지라 지금은 설명해드릴 수 없습니다.

이러한 영의 세계를 아는 것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여러분이 성령을 깨우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역시 나 홀로목사와 같은 마음인 것 같습니다.

다음을 보시죠.

 

주의하라 깨어 있으라 그 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함이니라(13:33)

Take ye heed, watch and pray: for ye know not when the time is.

 

아주 중요한 단어가 해석에서 빠져있군요.

아마도 NIV성경을 해석한 탓인 것 같은데 기도하라는 단어(pray)를 빼먹어서는 곤란합니다.

주의하고 깨어 있으려고 노력하는 것은 육신이지만 그 일을 가능케 하는 이는 하나님(성령)이라는 것을 알아야하기에 기도를 빼먹는다는 것은 성경을 믿는 사람이 할 짓은 아닙니다.

늘 깨어있으라는 말은 항상 성령에 대해 생각하라는 말이며 성령이 함께 한다는 것을 믿을 수 있게 하나님께 기도하라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일반인들이 성령에 대해 아는 것이 얼마나 힘들다는 것을 아시기에 좀 더 쉬운 비유의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가령 사람이 집을 떠나 타국으로 갈 때에 그 종들에게 권한을 주어 각각 사무를 맡기며 문지기에게 깨어 있으라 명함과 같으니(13:34)

For the Son of Man is as a man taking a far journey, who left his house, and gave authority to his servants, and to every man his work, and commanded the porter to watch.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집 주인이 언제 올는지 혹 저물 때엘는지 밤중엘는지 닭 울 때엘는지 새벽엘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라 (13:35)

그가 홀연히 와서 너희의 자는 것을 보지 않도록 하라(13:36)

깨어 있으라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이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니라 하시니라(13:37)

 

성령을 인자에 비유했습니다.(the Son of Man)

성령은 곧 하나님이니 사람들에게 각자의 임무를 주었다는 말입니다.

문지기(the porter)란 우리의 육신을 가리키며 성령이 우리의 진짜 주인이라는 거지요.(34)

언제 성령이 임하게 될는지 모른다는 겁니다.(35)

잔다는 것은 성령을 모르고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36)

성령에 대해 늘 생각하고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노라면 어느 때인가 성령이 임하게 되는 날이 옵니다.

그래서 깨어나라고 말씀하신거지요.(37)

사실 깨어나라는 말은 지켜보라는 말로 해석하는 것이 더 좋을 수 있습니다.

늘 지켜보는 것이나 깨어있으라는 말은 같은 것이긴 하지만 나 홀로목사가 기도하는 방법을 보자면 지켜보는 것이 더욱 좋은 해석일수 있다는 겁니다.

눈을 감고 제3의 눈인 지혜안으로 자신의 내면을 늘 지켜보는 것은 성령을 깨우는 가장 좋은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참고로 말씀드리자면 나 홀로목사는 이러한 방법으로 늘 기도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관한 이야기는 과거에도 한번 한 것 같으니 더 이상 언급하지 않겠지만 성령을 늘 생각하고 주시하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는 것을 말씀드리며 13장에 마침표를 찍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