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홀로목사

마가복음20.

배가번드 2019. 9. 15. 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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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홀로목사와 함께하는 성경강해시간입니다.

오늘은 시작에 앞서 여러분께 질문을 하나 할까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중요한지 여러분의 내재한 성령이 부활하는 것이 중요한지요?

도대체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는지 참으로 궁금합니다.

왜 제가 이런 질문을 하는가하면 최근에 어떤 목사님께서 예수님이 부활하신사건이야말로 믿음의 핵심이며 예수님이 부활하지 않고 그냥 돌아가셨으면 일반인과 별다를 바 없다는 말씀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정말 이렇게 생각하고 있다면 그야말로 걱정되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처럼 죽음에서 부활하지 않으면 하나님 독생자가 아니라는 말이 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과 하나 될 수 있는 사람이 단한사람도 없다는 말이지요.

이래서는 성경을 제대로 믿는다 할 수 없으며 예수님의 가르침이 사람들을 영생으로 이끄는 것이라 말하기도 어렵습니다.

이런 인식으로는 자신들의 교리가 영생으로 향하는 유일한 길이며 구원의 길이라고 주장해서는 안 됩니다.

만약 예수님이 부활해야만 진정한 구원이 이루어지고 영생을 얻는다고 할 경우 예수님 사후부터 지금까지 단한사람도 영생을 얻어서는 안 되며 하나님 우편에 앉는 사람도 없다는 말이 되지요.

이것은 명백하게 잘못된 교리입니다.

우선당장 성경에 기록된 12사도들만 해도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라 영생을 얻었으며 구약속의 수많은 선지자들도 영생의 하늘에 올라 하나님과 하나 되는 영광을 입었습니다.

그런데 어찌 예수님이 육신으로 부활해야만 영생을 얻는다고 주장할 수 있는지요.

다시 한 번 더 말하거니와 예수의 가르침을 믿고 따른다는 것은 예수님이 성령으로서 우리 안에서 부활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 같은 나 홀로목사의 말이 진실 되지 않다고 믿는다면 여러분 스스로 깊이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만약 정말 예수님이 육신으로 부활해야만 구원의 역사가 일어난다고 할 경우 예수님의 부활 때 대부분의 제자들이 구원되어야만했고 세상은 종말을 맞이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이미 우리들이 확인했다시피 예수님제자들 중 어떤 이들은 영생의 하늘에 오르는가하면 어떤 이들은 그렇지 못했지요.

부디 나 홀로목사와 함께 하는 여러분은 모두가 부활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고 내면에 자리하고 있는 성령을 깨우시길 바라며 15장을 시작하겠습니다.

 

새벽에 대제사장들이 즉시 장로들과 서기관들 곧 온 공회로 더불어 의논하고 예수를 결박하여 끌고 가서 빌라도에게 넘겨주니(15:1)

빌라도가 묻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네 말이 옳도다 하시매(15:2)

대제사장들이 여러가지로 고소하는지라(15:3)

빌라도가 또 물어 가로되 아무 대답도 없느냐 저희가 얼마나 많은 것으로 너를 고소하는가 보라 하되(15:4)

예수께서 다시 아무 말씀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빌라도가 기이히 여기더라(15:5)

 

역시 예수님께서는 일부러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해 연극을 하신 것이 맞는 것 같습니다.

1절을 자세히 살펴보면 온 공회로 더불어 의논하였다했지요.

이것이 무엇을 말해주는가 하면 종파에 관계없이 모든 이들이 합의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우리들이 생각해봐야할 점은 그 당시 유대교회는 종파의 구분이 따로 있지 않았다는 겁니다.

이교회는 바리새파 저 교회는 에세네파, 사두개파 등의 파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교회내부에 파벌이 있었다는 거지요.

이 같은 일을 오늘날에 비유하자면 구원 파 내부에 박 목사 파, 이 목사 파 유 목사 파 등이 있다가 따로 교회를 만든 일과 유사하다 볼 수 있습니다.

종파가 갈라진 것은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 먼 훗날의 이야기라는 겁니다.

왜 이렇게 말씀드리는가하면 예수님께서 때때로 교회에서 설교를 하셨기 때문입니다.

종파에 구분이 있었더라면 특정교회에서만 설교하셨을 텐데 그렇지 않았다는 것은 종파의 구분이 없었다는 확실한 증거이며 교회관계자들이 무조건 예수님을 반대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이 무조건 예수님을 반대했더라면 교회에서 설법하게 내버려두지 않았을 것이 분명하며 그들이 정말 예수님의 가르침을 죄악시 여겼더라면 그 당장 요절이 낫을 겁니다.

이미 성경에서 몇 번이나 확인했으므로 더 이상 주장하지 않겠습니다만 이 내용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의 왕이라는 사실을 밝힌 것에 불과합니다.

이방인인 빌라도조차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낄 정도로 연극을 했던 거지요.

그렇다면 얼마나 리얼한 연극이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명절을 당하면 백성의 구하는대로 죄수 하나를 놓아 주는 전례가 있더니(15:6)

민란을 꾸미고 이 민란에 살인하고 포박된 자 중에 바라바라 하는 자가 있는지라(15:7)

And there was one named Barabbas, which lay bound with them that had made insurrection with him, who had committed murder in the insurrection.

무리가 나아가서 전례대로 하여주기를 구한대(15:8)

빌라도가 대답하여 가로되 너희는 내가 유대인의 왕을 너희에게 놓아주기를 원하느냐 하니(15:9)

이는 저가 대제사장들이 시기로 예수를 넘겨준줄 앎이러라(15:10)

그러나 대제사장들이 무리를 충동하여 도리어 바라바를 놓아 달라 하게 하니(15:11)

빌라도가 또 대답하여 가로되 그러면 너희가 유대인의 왕이라 하는 이는 내가 어떻게 하랴(15:12)

저희가 다시 소리지르되 저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15:13)

빌라도가 가로되 어찜이뇨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하니 더욱 소리지르되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하는지라(15:14)

빌라도가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하여 바라바는 놓아 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주니라(15:15)

 

아주 재미있는 내용입니다.

아마도 많은 분들이 바라바를 강도나 살인범쯤으로 알고 있겠지만 이 내용을 보면 전혀 아닙니다.

바라바는 이스라엘 측에서 보면 독립투사였습니다.

민란이란 정치에 반대하여 백성들을 선동하고 폭동이나 소요사태를 야기하는 행위이니 바라바는 로마로부터 독립운동을 하던 중에(had made insurrection) 피치 못하게 살인하여 잡혀온 사람이란 걸 알 수 있지요.(had committed murder in the insurrection)(7)

그런 이유로 백성들이 바라바를 놓아주라고 했던 겁니다.

빌라도는 대제사장들이 예수를 시기하여 고발했다는 것을 알고 있음으로 풀어주고자 했지만 오히려 바라바를 원했다는 것은 담겨진 뜻이 있다는 소립니다.

유대인의 왕(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의 왕)인 예수보다 나라의 독립을 우선시 여겼다는 것을 보여주는 거지요.

한마디로 말해서 영적인일보다 육적이고 물질적인일이 우선시되었다는 겁니다.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마가의 인식하에서 기록된 내용이며 마태오는 다르게 기록해 놓았습니다.

참고삼아 잠시 보시죠.

 

그 때에 바라바라 하는 유명한 죄수가 있는데(27:16)

 

지면관계상 모두를 옮기지는 않았으나 마태복음 40편을 보면 관련내용을 확인할 수 있으니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보시면 아시겠지만 마태복음을 보면 민란을 일으켰다는 말은 없습니다.

마가는 마태복음을 통해 이 같은 내용이 뜻하는바가 뭐라는 것을 정확히 알고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좀 더 사람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게 풀어놓았지요.

십자가사건에 담겨진 뜻이 있다는 것을 말하고자했던 것인데 좀 더 현실감 있게 느끼기 위해 요한복음에 기록된 관련구절을 한 번 더 보겠습니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하지 아니하는도다 하였으니(11:50)

이 말은 스스로 함이 아니요 그 해의 대제사장이므로 예수께서 그 민족을 위하시고(11:51)

And this spake he not of himself: but being high priest that year, he prophesied that Jesus should die for that nation;

또 그 민족만 위할 뿐 아니라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모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죽으실 것을 미리 말함이러라(11:52)

And not for that nation only, but that also he should gather together in one the children of God that were scattered abroad.

 

이 내용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기로 작정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일을 기록한 것입니다.

전체내용을 읽어보면 대제사장이 예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구할 뿐 아니라 영적으로도 구원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주목해볼 점은 51절 내용으로 대제사장이 예수께서 민족을 위해 죽을 것을 예언했다는 겁니다.(he prophesied that Jesus should die for that nation)

52절에 예수께서 죽으실 것을 미리 말했기 때문이라 했는데 이는 영어성경에는 없는 내용입니다.

한글성경을 편찬하는 과정에서 자신들 임의로 생각하고 붙여놓은 거지요.

요한은 십자가사건에 담겨진 깊은 뜻을 말하기위해 하나의 비밀을 흘려놓듯이 기록해놓은 것인데 자신들 생각에 부합되지 않는다싶어서 임의로 기록한 겁니다.

그들의 인식으로서는 대제사장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원수나 다름없는데 이들이 선지자와 같이 예언의 능력이 있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요한은 대제사장들과 예수님이 같은 목적을 가지고 십자가 사건을 도모했다는 것을 은연중에 심어놓았습니다.

이제 나 홀로목사가 거듭해서 말씀드렸던 이유를 조금이나마 이해하셨으리라 여기며 진도를 나가겠습니다.

 

군병들이 예수를 끌고 브라이도리온이라는 뜰 안으로 들어가서 온 군대를 모으고(15:16)

예수에게 자색 옷을 입히고 가시 면류관을 엮어 씌우고(15:17)

예하여 가로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고(15:18)

갈대로 그의 머리를 치며 침을 뱉으며 꿇어 절하더라(15:19)

희롱을 다한자색 옷을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히고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나가니라(15:20)

 

일단죄인으로 확정된 이상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한 절차를 밟아야 했다는 것을 기록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얼마나 많은 조롱과 비웃음을 당했는지 말해놓았지요.

하지만 마가는 여기에다 아주 중요한 메시지를 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영적인 왕이라는 사실을 은연중에 나타내는 동시에 인자가 걸어야할 길이 어떠하다는 것을 말하고자했습니다.

예로부터 자색 옷은 아주 값비싼 옷으로서 일반인들은 감히 입을 엄두조차 낼 수 없는 겁니다.

왕족이나 귀족들이 입을 옷을 죄인의 몸에다 입힌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니 다른 뜻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영적인 왕, 즉 하나님왕국의 왕이라는 것을 말하고자 한 거지요.

그러나 영의 세계 왕이지만 이 세상에서는 고난과 시련을 당해야만 한다는 것을 가시면류관을 씌운다고 했습니다.(17)

사람들로부터 비웃음과 조롱거리가 된다는 의미로 갈대로 머리를 치며 침 뱉고 절한다했지요.(18)

그리고 19절에서 자색 옷을 벗기고 원래 옷을 입혔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육신을 가진 상태이기 때문에 영광된 영의 몸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을 나타냄과 동시에 영광된 영의 몸을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육신의 몸만 보았다는 뜻입니다.

이 같은 일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육신적이고 물질적인인식하에서는 성령을 깨달은이를 알아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일반인들은 물론 소위 말하는 성직자들조차도 모르긴 마찬가지라 할 수 있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일반인들보다 더욱더 못한 것 같기도 합니다.

자신들이 알지 못하는 성경내용을 말해주어도 고맙게 여기기는커녕 오히려 가르치려듭니다.

사람들은 보이는 만큼만 본다는 것은 그야말로 진리입니다.

겉모습이 화려하고 세상 적으로 뛰어난 능력을 가진 이들은 영적인면도 높다고 생각하며 물질적으로 보잘것없고 초라해 보이는 사람은 영적인 수준도 낮다고 여기지요.

이런 사람들을 일러 성경은 사두개파라 규정짓고 있습니다.

현시대의 성직자들 대부분이 이러한 인식의 범주에 머물고 있기에 성경해석이 영적이지 못한 것이며 구약의 대부분내용에 담긴 뜻도 알지 못하는 겁니다.

이야기가 잠시 옆길로 새는 것 같습니다.

나 홀로목사와 함께하는 여러분은 그렇지 않으리라 여기며 궤도(軌道)수정을 하고 성경으로 돌아가겠습니다.

 

마침 알렉산더루포의 아비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시골로서 와서 지나가는데 저희가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우고(15:21)

나가다가 시몬이란 구레네 사람을 만나매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웠더라(27:32)

 

여기에서 잠시 가던 걸음을 멈추고 사건정황을 따져보기로 하겠습니다.

과거이스라엘의 사형제도가 어떠했는지 현시대의 우리가 잘 모르겠지만 십자가형을 받은 사람을 위해 십자가를 대신진다는 것이 과연 있을 수 있는 일인지요.

이 같은 일을 확인하기 위해 잠시 요한복음을 보겠습니다.

 

저희가 예수를 맡으매 예수께서 자기의 십자가를 지시고 해골 ( 히브리 말로 골고다)이라 하는 곳에 나오시니(19:17)

 

요한은 분명 예수님께서 자신의 십자가를 혼자 짊어졌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어찌 마가도 마태오도 시몬이라는 사람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졌다고 했을까요.

나 홀로목사가 거듭해서 말씀드렸다시피 십자가 사건에는 뭔가 밝히지 못할 비밀스러운 일이 있었음이 틀림없습니다.

참고삼아 말씀드리자면 이스라엘박물관에 전시된 자료에 십자가형은 올리브나무를 이용한다고 합니다.

올리브나무는 완전히 자라도 그리 크지가 않다고 하며 곧게 자라는 것은 드물다고 알려져 있지요.

그래서 십자가형에 쓸 나무는 미리 골라두고 세로 목으로 쓰며 죄인이 가로 목을 손에 들고 갔다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에 입각(立脚)해볼 때 우리가 영화에서 보는 장면은 허구일가능성이 큽니다.

구태여 예수님을 대신해서 시몬이라는 사람이 십자가를 졌을 것이라는 말은 하지 않겠지만 예수님이 완전히 죽었다가 되살아난 것이 아니라는 것은 확실합니다.

앞으로 얼마 남지 않은 시간동안 성경을 통해 확인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를 끌고 골고다라 하는 곳(번역하면 해골의 곳)에 이르러(15:22)

몰약을 탄 포도주를 주었으나 예수께서 받지 아니하시니라(15:23)

 

!

여러분!

마가는 이 사건에 대한 진실이 따로 있음을 말해주기위해 몰약을 탄 포도주를 주었다고 기록했습니다.

몰약이란 강력한 진통제입니다.

이런 진통제를 죄인에게 준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지요.

무엇보다도 마태복음은 이 장면을 다르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잠시보시죠.

 

쓸개탄 포도주를 예수께 주어 마시게 하려 하였더니 예수께서 맛보시고 마시고자 아니하시더라(27:34)

 

보시다시피 마태오는 비밀스럽게 몰약이 섞인 포도주가 아니라 쓴 포도주라고 비유했지요.

하지만 마가는 한 꺼풀 벗겨서 몰약을 탄 포도주라 밝혀놓았습니다.

누가도 요한도 이 장면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으니 그렇게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떤 일들이 있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이제 한발 더 앞으로 나가보겠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고 그 옷을 나눌쌔 누가 어느 것을 얻을까 하여 제비를 뽑더라(15:24)

때가 제 삼시가 되어 십자가에 못 박으니라(15:25)

 

위내용은 시편(2218)을 인용한 것으로서 사람들이 영의 세계를 모르고 물질적인 일들만 관심 있어 한다는 것을 표현한 겁니다.

영의 세계에 대해 알았더라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지 않았을 거라는 말이지요.

지면관계상 예문을 올리지는 않았지만 마태복음 41편이나 시편을 꼭 한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영의 세계에 대해 모르는 사람들이 영적인 사람을 얼마나 핍박하고 멸시하는지 잘 묘사되어있습니다.

이러한 연유로 예수님에게는 다음과 같은 죄명이 씌워졌습니다.

 

그 위에 있는 죄 패에 유대인의 왕이라 썼고(15:26)

 

예수님의 유일한 죄는 사람들에게 영생에 대한 복음을 전하려한 죄밖에 없었으니 영적인(하나님 찬양하는 사람들) 왕이라는 말입니다.

 

강도 둘을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으니 하나는 그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15:27)

(없 음)(15:28)

And the scripture was fulfilled, which saith, And he was numbered with the transgressors.

 

28절은 한글성경에는 없음으로 나와 있지만 영역본을 보면 불법 자와 함께 죄인으로 매겨졌다한 성경이 실현되었다 입니다.

하나님왕국에서의 왕이 세상에서 죄인과 동일시 여겨졌다는 말이지요.

세상 사람들이 영적인왕을 어떻게 대했는지 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가로되 아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15:29)

네가 너를 구원하여 십자가에서 내려 오라 하고(15:30)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영의 일에 대해 모름으로 예수님의 부활을 육신적인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날 거라는 비유의 말을 정말 성전(교회, 회당)을 허물고 사흘 만에 다시 짓는다는 말로 들었다는 말이지요.

정말 그런 기적을 행사할 것 같으면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라고 놀렸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29절 내용 중에 머리를 흔들었다는 부분입니다.

추정(推定)해보면 성전(육신)을 헐고 사흘 만에 짓는 것이(육신의 부활) 아니라는(머리를 좌우로 흔듦) 말입니다.

은연중에 마가는 이런 뜻을 여기에다 심어놓았습니다.

영의 세계에 대해 모르는 사람들은 이렇게 받아들일 거라는 것을 마가는 말해놓았는데 영에 대해 조금이나마 알고 있다는 사람들조차 제대로 알지는 못한다는 것을 마가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습니다.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함께 희롱하며 서로 말하되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15:31)

Likewise also the chief priests mocking said among themselves with the scribes, He saved others; himself he cannot save.

 

이들 역시 영의 세계에 대해 몰랐다는 것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구원의 진정한 뜻을 몰랐다는 말입니다.

육신이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영의 되살림, 즉 우리 안에 내재한 성령의 깨어남이라는 것을 몰랐기에 대제자장과 서기관들조차 이렇게 비아냥거렸던 겁니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미에 대해서도 사람들이 너무나 몰랐다는 것을 이어지는 내용에 나옵니다.

 

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가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우리로 보고 믿게 할찌어다 하며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자들도 예수를 욕하더라(15:32)

 

성령이 드러나 그리스도가 되었다하더라도 물질세상의 법칙을 거스러지는 않는다는 것을 모르기에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하나님이 있다면 왜 지옥을 만들었는가 하는 말과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들이 가장 많이 하는 질문이 이것인데 나 홀로목사가 굳이 대답을 하자면 지옥 갈 사람을 위해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똑같은 이치로 영생을 사모하는 사람들을 위해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혔는데 내려올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반대로 말하자면 영생을 얻지 못할 사람들 때문에라도 내려오지 않아야한다는 말입니다.

믿음이 없는 자들에게 영생의 하늘을 오르게 만들 수는 없지요.

이 말을 제대로 인식하기 위해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믿음을 주기위해 기적의 힘으로 십자가에서 내려온다고 칩시다.

그럴 경우 이 사건을 본사람 모두 예수님을 믿겠지요.

하지만 개중에는 지옥가야 마땅할 사람들도 있기 마련일 텐데 그들이 뉘우침과 용서의 과정 없이 영생을 얻게 되면 우주질서는 무너지게 되며 인과응보의 법칙 또한 적용되지 않게 됩니다.

물론 사람들에게 믿음을 주고 서서히 뉘우침과 용서의 과정이 진행될 수도 있겠지만 기적이나 이적을 보고 생긴 믿음은 그 생명이 결코 길지 않습니다.

약간의 고난과 시련이 다가와도 스스로 견딜 생각을 않고 또다시 기적을 바라게 되며 자신이 바라는 대로 일이 되지 않으면 믿음과 함께 당사자도 멀리 달아나기 마련입니다.

기적과 이적이 일어나지 말란 법은 어디에도 없지만 자신의 십자가를 지는 사람은 결코 기적이나 이적을 바라지 않습니다.

나 홀로목사가 단언컨대 기적이나 이적을 즐겨 행하거나 바라는 사람은 영생과는 거리가 먼 사람입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과 하나 된 자,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조롱하는 사람들에게 영생을 허락한다는 것이 타당한일인지 스스로에게 물어보면 답이 정확하게 주어집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것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만고의 진리입니다.

 

제 육시가 되매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제 구시까지 계속하더니(15:33)

구시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지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15:34)

 

이 내용역시 아주 중요합니다.

평소 제자들에게 자신이 하나님과 하나 된 자라는 것을 밝혀왔는데 불구하고 죽음에 이르러 하나님을 찾는다는 것은 뭔가 모순된 것 같지만 사실은 육과 영은 전혀 별개의 것이자 하나라는 것을 말해주고자 한 겁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하지 못하고 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보시죠.

 

곁에 섰던 자 중 어떤이들이 듣고 가로되 보라 엘리야를 부른다 하고(15:35)

사람이 달려가서 해융에 신포도주를 머금게 하여 갈대에 꿰어 마시우고 가로되 가만 두어라 엘리야가 와서 저를 내려 주나 보자 하더라(15:36)

 

보시다시피 영이(엘리야) 사람과 같은 형상을 갖춘 존재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그만큼 사람들이 영에 대해 모르고 있다는 것을 마가는 말하고자 했던 겁니다.

그래서 마가는 영혼과 육체의 상관관계가 어떠하다는 것을 묘사해놓았습니다.

 

예수께서 큰 소리를 지르시고 운명하시다(15:37)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니라(15:38)

 

성소 휘장은 육신을 가리키며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었다는 것은 영()과 육(아래)이 갈라졌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며 죽음을 비유한 겁니다.

물론이것은 어디까지나 성령이 드러난 사람의 죽음을 나타내는 것이며 일반인들의 죽음은 아닙니다.

그랬기에 마가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습니다.

 

예수를 향하여 섰던 백부장이 그렇게 운명하심을 보고 가로되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15:39)

 

성경에는 많은 백부장들이 등장하는데 아마도 이곳에 등장하는 백부장은 마태복음 85절에 나오는 백부장인 것 같습니다.

그러했기에 이러한 믿음을 가질 수 있었던 거지요.

그렇게 운명하심을 보았다는 것은 육과영이 분리되는 과정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는 말이니 성령을 깨닫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을 알아볼 수 있었던 겁니다.

그러나 백부장 한사람만이 이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것을 마가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멀리서 바라보는 여자들도 있는데 그 중에 막달라 마리아와 또 작은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있었으니(15:40)

이들은 예수께서 갈릴리에 계실 때에 좇아 섬기던 자요 또 이 외에도 예수와 함께 예루살렘에 올라온 여자가 많이 있었더라(15:41)

 

비록 그 당장은 아니더라도 멀지않은 장래에(멀리서 바라보는) 성령을 영접할 이들도 많았다는 거지요.

예수와 함께 예루살렘에 올라왔다는 것은 성전에 올랐다는 말이니 영생을 얻었다는 말입니다.

그만큼 많은 이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았다는 겁니다.

이외에도 많은 이들이 있었을 것이 분명한데 마가는 특별히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사람을 소개시키고 있습니다.

함께 만나보겠습니다.

 

이 날은 예비일 곧 안식일 전날이므로 저물었을 때에(15:42)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와서 당돌히 빌라도에게 들어가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 사람은 존귀한 공회원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15:43)

Joseph of Arimathaea, an honourable counsellor, which also waited for the kingdom of God, came, and went in boldly unto Pilate, and craved the body of Jesus.

 

 

평상시 예수님제자 중에는 볼 수 없었던 인물입니다.

그러나 당돌하게도 예수님의 시체를 빌라도에게서 받아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들여다보면 요셉이 아주 대단한 인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고결한 상담자라(an honourable counsellor) 했으니 영적으로 아주 높은 인식을 갖춘 사람이라는 말이지요.

그리고 하나님나라를 기다린다는 것은(waited for the kingdom of God) 성령을 보장받아 영생을 얻어놓았다는 겁니다.

달리 표현하자면 이미 성령이 깨어났지만 육신을 입고 있는지라 생명이 다할 때까지 기다린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여러분!

요셉에 대해 연구를 하다 보니 아주 특이한 점을 발견했습니다.

마태복음과 요한복음에는 요셉이 예수님의 제자였음을 말해놓았는데 누가복음에는 조금 특이한 내용을 기록해놓았더군요.

잠시 보도록 하겠습니다.

 

(저희의 결의와 행사에 가타 하지 아니한 자라) 그는 유대인의 동네 아리마대 사람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러니(23:51)

 

여기에서의 저희란 대제사장무리를 가리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기 위해 결의를 다지고 행동으로 옮길 때 요셉은 찬성(가타)하지 않았다는 말이지요.

이 말인즉, 요셉도 대제사장무리에 속해있었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요셉이 대제사장무리와 한통속이었다는 말인 동시에 그들 중에도 성령을 깨달아 아는 사람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어떻습니까?

이제는 감이 잡히십니까?

아직도 나 홀로목사의 말이 믿기지 않는다면 다음구절에 집중해 보시기바랍니다.

 

빌라도는 예수께서 벌써 죽었을까 하고 이상히 여겨 백부장을 불러 죽은지 오래냐 묻고(15:44)

백부장에게 알아 본 후에 요셉에게 시체를 내어 주는지라(15:45)

 

이 내용을 보건데 예수님십자가 사건에는 대제사장 및 서기관들뿐만 아니라 로마병사까지 연루되어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백부장이란 로마군인의 계급으로 100명의 군인을 거느린 장교를 가리킵니다.

빌라도로서는 같은 나라 군인인지라 절대적으로 신뢰했겠지만 39절에서 보았다시피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식할 정도로 백부장의 믿음은 컸습니다.

이런 사람에게 죽음여부를 확인했다는 것은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긴 꼴이지요.

좀 더 명확하게 백부장의 개입여부를 알아보기 위해 요한복음을 잠시 보겠습니다.

 

이 날은 예비일이라 유대인들은 그 안식일이 큰 날이므로 그 안식일에 시체들을 십자가에 두지 아니하려 하여 빌라도에게 그들의 다리를 꺾어 시체를 치워 달라 하니(19:31)

군병들이 가서 예수와 함께 못박힌 첫째 사람과 또 그 다른 사람의 다리를 꺾고(19:32)

예수께 이르러는 이미 죽은것을 보고 다리를 꺾지 아니하고(19:33)

그 중 한 군병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19:34)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너무나 명확한 일입니다.

다른 죄수들은 모두 다리를 꺾었는데 예수님만 꺾지 않았다는 것은 매수(買收)되었거나 일부러 봐주려고 작정했다는 거지요.

너무나 표 나게 봐줄 수는 없었기에 일부러 옆구리를 찔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제 왜 마가복음에 백부장이 등장했는가를 알았으리라 생각하며 다음내용으로 넘어가겠습니다.

 

요셉이 세마포를 사고 예수를 내려다가 이것으로 싸서 바위 속에 판 무덤에 넣어 두고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으매(15:46)

때에 막달라 마리아요세의 어머니 마리아가 예수 둔 곳을 보더라(15:47)

 

마가는 단순하게 요셉이 세마포로 싸서 무덤에 넣어둔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도 누가복음도 모두 이렇게 기록되어있지만 요한복음만큼은 완전히 다르게 기록하고 있지요.

 

일찍 예수께 밤에 나아왔던 니고데모몰약침향 섞은 것을 백 근쯤 가지고 온지라(1939)

And there came also Nicodemus, which at the first came to Jesus by night, and brought a mixture of myrrh and aloes, about an hundred pound weight.

이에 예수의 시체를 가져다가 유대인의 장례법대로 그 향품과 함께 세마포로 쌌더라(19:40)

Then took they the body of Jesus, and wound it in linen clothes with the spices, as the manner of the Jews is to bury.

 

몰약은 강력한 진통제이고 침향은 알로에로서 재생효과가 뛰어난 치료제입니다.

이 둘을 섞어서(a mixture of myrrh and aloes) 예수님 몸에 난 상처에 대고 쌌다는 것은 (took they the body of Jesus, and wound it in linen clothes) 시체처리가 목적이 아니라 부상당한 몸을 치료하려는 겁니다.

어떤가요?

이제는 나 홀로목사의 말에 믿음이 갑니까?

아직도 여러분이 예수님의 육신적 부활에 미련을 가지고 있다면 정말이지 갈 길이 멉니다.

만약 이런 분들이 있다면 다음시간에는 마지막 남은 미련마저 털어버리라 권하며 15장을 이곳에서 마무리 짓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