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생각 긴여운

내적(內的) 휴거(携擧)Rapture.

배가번드 2023. 4. 1. 0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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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을 통틀어 가장 기분 좋은 일을 말하라면 아들과 조카아이들이 무탈하게 성장해준 일입니다.

다들 착하게 성장하여 어른들이 되었고 각자의 위치에서 잘살아가고 있습니다.

아들이 장성하는 동안 함께 해주지 못한 점은 늘 미안함으로 남아있지만 모난 구석 없이 살아주었기에 늘 감사합니다.

아들에 비하면 조카아이들은 자주 만났을 뿐 아니라 성장과정을 항상 지켜본 셈입니다.

아이들이 학교 다니기 전부터 이사하는 집마다 따라다니다 보니 자연스럽게 한 가족처럼 여기며 살았지요.

해외에 나가있는 시간외에는 늘 이웃에서 살다시피 했으니 어떻게 보면 한가정의 식구들보다 더 많은 정을 나누고 살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조카아이들과는 거리감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입니다.

이제 다들 혼기가 차서 내일이라도 시집장가를 간다 해도 조금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들이지요.

살아온 지난세월을 돌아보니 아이들이 너무 잘 커주었다는 생각이 절로 듭니다.

단 한 번도 말썽을 피우지 않고 곱게 성장했습니다.

그러고 보면 맏이로서 책임을 다하지는 못했지만 동생들 모두가 잘 살아 준 것 자체가 내게는 크나큰 복입니다.

언젠가 영화 “국제시장”을 보고 많은 눈물을 쏟아낸 것도 주인공이 맏이로서 느껴야했던 책임감에 동감을 했기 때문일 겁니다.

겉으로 말은 하지 않았지만 마음속으로는 항상 동생 집에 대한 걱정을 늘 하고 있었지요.

어쩌다 한 번씩 종교적인 대화를 할 때마다 내 언성이 높아졌던 이유도 내가 가진 믿음을 동생이 따르지 않아서가 아니라 동생이 필요이상으로 자신의 믿는 교리를 내게 주입시키려했기 때문이었는데 그런 식으로 믿게 되면 참된 영생을 얻기가 어렵기 때문이었습니다.

동생은 동생대로 내가 우상숭배에 빠져있다 여기는지라 필요이상으로 자신이 다니는 교회의 교리를 내게 전해주려 했던 것이고 나는 나대로 성경을 그런 식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생각했던 겁니다.

이모두가 가족을 너무나 사랑했기에 일어난 일이라 생각합니다.

어느 날 문득 자신들은 휴거를 당하고 나 혼자 이 세상에 남겨진다고 생각하다보니 어떻게든 나를 자신의 믿음 안으로 들어오게 만들고 싶었던 거지요.

그렇지만 나는 나대로 동생식구들의 믿음을 보면서 항상 걱정이었던 것이 저러다 교회에다 재산을 몽땅 바치고 결국에는 후회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은 아닐까 했던 겁니다.

그러다보니 늘 주위에 머물면서 함께 교회를 다녀가며 논쟁 아닌 논쟁을 끊임없이 해야만 했습니다.

동생이 그렇게 주장하는 이유가 성경에 나와 있기도 했으니 전혀 근거 없이 말하는 것은 아니었지요.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마24:40)

두 여자가 매를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24:41)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24:42)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너희도 아는바니 만일 집 주인이 도적이 어느 경점에 올 줄을 알았더면 깨어 있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24:43)

이러므로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24:44)

 

앞 구절만 보면 휴거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그렇지만 이 내용은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봐야 진정한 뜻을 알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24장을 처음부터 보면 육신을 성전으로 보고 세상을 사는 동안 잘못 쌓아놓은 고정관념을 허물어트리는 일을 성전이 무너짐에 비유했음을 알 수 있지요.

시간관계상 모두는 올릴 수 없기에 핵심내용만 올린 것인데 여기에서조차 들어 올림이 물리적인 휴거나 기적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42절에 주가 임한다는 말은 들어 올림 받는 것과 정확히 반대되는 겁니다.

사실 임한다는 말은 성령의 드러남을 표현하기 위해 쓰인 말일뿐 정확히 말하자면 내재하는 성령이 깨어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24장 2절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아있지 않을 거라 기록되어 있습니다.

기존의 잘못된 믿음이 완전히 무너져 내려야 성전에 깊숙이 거하시는 성령이 드러날 것을 말해놓은 거지요.

 

예수께서 성전에서 나와서 가실 때에 제자들이 성전 건물들을 가리켜 보이려고 나아오니(24:1)

And Jesus went out, and departed from the temple: and his disciples came to him for to shew him the buildings of the temple.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보지 못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리우리라(24:2)

And Jesus said unto them, See ye not all these things? verily I say unto you, There shall not be left here one stone upon another, that shall not be thrown down.

 

보다시피 성전건물들이라고 복수형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the buildings of the temple)

제자들 각자의 육신을 성전의 건물들이라고 묘사한거지요.

육적인 고정관념들이 성전을 둘러싸고 있기에 성전의 건물들이라 표현한 것이며 그러한 고정관념이 무너져야 진정한 인자가 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겁니다.

빛이신 성령이 머무는 성전은 경계의 벽이 있을 수 없으며 하나님이신 성령은 어느 곳에 갇혀 있을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렇지만 인간의 몸 안에 들어오는 순간부터 고정관념이라는 틀 안에 갇히게 됨으로 이렇게 묘사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액면대로 볼 것이 아니라 담겨진 속뜻을 봐야합니다.

만약 우리가 마태복음에 기록되어있는 들어 올림을 휴거로 받아들일 경우 심각한 오류가 발생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사후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 단 한번만이라도 휴거가 일어났어야했다는 겁니다.

역사가 생긴 이래로 지금까지 이런 일은 한 차례도 일어나지 않았지요.

요즘은 교회에서조차 이런 오류를 인정하는지 휴거를 말하는 곳이 없는 것 같지만 내가 동생과 처음 교회 다닐 때만 하더라도 심각할 정도로 휴거를 주장하곤 했습니다.

내가 걱정했던 부분이 바로 이러한 점이었기에 동생과 때때로 언성을 높여가며 종교적 논쟁을 했던 겁니다.

그런데 어느 날인가 동생이 다니는 교회를 갔을 때 놀라운 광경을 목격하게 됩니다.

성가대에 속한 동생이 찬송가를 부르는 모습이 너무나 행복해보였던 거지요.

나에게는 말도 안 되는 교리이지만 동생은 그 말씀을 진리로 받아들이고 있었으며 이단이라 생각할만한 교리조차 하나님말씀이라 여기며 즐겁고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놀라웠습니다.

행복이 멀리 있지 않고 마음 안에 있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동생처럼 성경을 받아들인다 해서 안 될 것은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으며 자신과 가족을 불행에 빠트리지만 않는다면 얼마든지 이해를 할 수 있다 여기게 된 겁니다.

다만 타인의 종교를 함부로 평가하거나 타인의 행동에 대해 함부로 심판하는 행위만큼은 말리고 싶기에 때때로 논쟁을 했던 거지요.

내가 성경을 연구하고 상고하는 이유는 그렇게 거창한 목표가 있어서가 아닙니다.

단지 성경에 대한 깊은 속뜻을 알고 싶은 누군가에게 알려주고 싶은 마음에서입니다.

작게는 내 가족들에게 크게는 기존의 고정관념에서 벗어나고 싶은 사람들에게 또 다른 방식의 성경해석을 말하고 싶은 겁니다.

내가 성경에 대해 글을 쓴다고 해서 물질이 생기는 것도 아니고 명예가 주어지는 것도 아니지만 우리가 다 같은 하나님의 자녀이기에 성령으로 연결된 하나이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나는 누구에게도 내가하는 말을 믿으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들어보고 취할 건 취하고 버릴 건 버리라고 말하고 있으며 오히려 나로부터 멀어지라 말하고 있지요.

 

성령이 내재(內在) 한다 여기는 이들만 들으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