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보시기에 모든이가 살았다.
어떤 이들은 사람의 영혼과 짐승의 영혼이 다르다고 합니다.
그 이유를 몸체의 크기에서 찾기도 하며 인식의 차이를 예로 듭니다.
코끼리의 몸과 사람의 몸이 크기가 다르기 때문에 영혼도 차이가 난다는 겁니다.
무엇보다도 사람의 생각과 짐승의 생각이 다르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이런 인식은 상당히 합리적으로 보입니다.
성경은 이런 점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인생에게 임하는 일이 짐승에게도 임하나니 이 둘에게 임하는 일이 일반이라 다 동일한 호흡이 있어서 이의 죽음 같이 저도 죽으니 사람이 짐승보다 뛰어남이 없음은 모든것이 헛됨이로다(전3:19)
다 흙으로 말미암았으므로 다 흙으로 돌아가나니 다 한 곳으로 가거니와(전3:20)
인생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가는 줄을 누가 알랴(전3:21)
그러므로 내 소견에는 사람이 자기 일에 즐거워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나니 이는 그의 분복이라 그 신후사를 보게 하려고 저를 도로 데리고 올 자가 누구이랴(전3:22)
Wherefore I perceive that there is nothing better, than that a man should rejoice in his own works; for that is his portion: for who shall bring him to see what shall be after him?
21절 말씀에 따르면 짐승에게는 성령이 심어져 있지 않다는 결론에 도달하기 마련입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되면 짐승을 하나님이 만들었다는 성경말씀에 위배됩니다.
19절을 보더라도 동일한 호흡이 있다는 말을 기록했으니 하나님이 생명의 숨결을 사람에게나 짐승에게 공히 담아놓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생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이 아래로 내려간다는 21절 말씀이 성립되려면 사람과 짐승의 혼은 구분되어져야만 합니다.
이럴 경우 불가피하게 영혼과 육신 외에 또 다른 무엇인가가 있어야하지만 그럴 수는 없으므로 하나님의 숨결이신 성령이 잠들거나 죽었다는 표현을 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육신이 성전이요 성전 안에 하나님이 거하신다는 사실을 모르고 죽는 영혼은 짐승의 영혼처럼 육신과 함께 멸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22절에서 사람이 자신의 맡은바 임무를 즐거워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다 한거지요.
여기에서 맡은바 임무란 죽음이후에 일어날 일을 보게 하는 것으로 성령을 하나님께로 데려갈 인자를 가리킵니다.
이러한 일에 대해 예수님은 달란트에 대한 비유로 말씀하신바 있습니다.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어라(마25:28)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마25:29)
시간관계로 정확한 구절을 찾아 올리지는 못했으나 여기에서 말하는 달란트는 재능을 말한다기보다 성령을 가리킨다고 봐야 합니다.
성령을 깨닫지 못하고 죽게 되면 성령은 온 곳으로 돌아간다는 말로서 하나님과 하나 된 성령에 흡수된다는 뜻이지요.
이 또한 비유의 말씀으로 내재한 성령을 깨닫지 못한 영혼은 성령을 깨우지 못한 채 땅으로 내려가거나 낮은 천국을 가게 된다는 말입니다.
결국 이 말씀을 보건데 살아생전 성령을 깨닫게 되면 자신의 영혼이 성령과 하나 되는 영광에 힘입어 영생의 하늘에 오르게 되는 것이며 그렇지 못한 영혼은 성령과는 무관하게 짐승의 혼과 같이 땅으로 내려가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성령에 대해 정확하게 알아야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과 같을꼬 내가 무엇으로 비할꼬(눅13:18)
마치 사람이 자기 채전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자라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느니라(눅13:19)
또 가라사대 내가 하나님의 나라를 무엇으로 비할꼬(눅13:20)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하셨더라(눅13:21)
일반적인 인식으로는 하나님왕국과 성령을 같다고 생각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영적인 시각으로 보자면 하나님왕국은 성령과 같은 겁니다.
성령이 육신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에 입각하여볼 때 하나님왕국은 성령과 정확히 하나이며 하나님은 우주만물과 동일한분입니다.
이러한 인식에 도달하게 되면 성령은 본인의 마음 밭에 씨를 뿌리는 것과 같아서 점점 자라나 많은 이들이 영혼을 의탁하는 예수님과 같은 인자가 되는 거지요.(19절)
이런 이유로 예수님은 서말 속에 넣은 누룩을 성령에 비유했습니다.
하필 서말(3)이라 한 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비유한 것으로 성부이신 하나님이 성자인 사람의 몸에 빛이신 성령으로 임한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성령을 깨닫는다는 것은 곧 하나님과 하나 되는 것이라는 점을 볼 때 우리의 영혼을 어떻게 인식하느냐는 것은 무척 중요합니다.
만약 우리의 영혼이 짐승의 영혼과 같지 않다는 생각에 이르게 되면 성령과 하나 되기는 어렵다는 겁니다.
진정 우리의 영혼이 성령과 하나가 되었다면 경계의 벽이 있을 수 없으며 시공간의 제한을 넘어서야한다는 말입니다.
이런 일을 일러 불가(佛家)에서는 영혼의 세계를 부증불감(不增不減)한다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누룩에 비유한 가르침과 정확히 일치하지요.
우리가 이 땅에서의 역할로 인해 인간관계를 형성하고 살더라도 우리영혼의 본질을 깨달아야한다는 것이 성경의 핵심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을 통틀어 핵심을 짜내라고 한다면 예수님의 피가 흐르는 것이 아니라 피에 담긴 뜻을 알아야하는 것이며 성령을 깨달아야합니다.
다른 이들의 성경 보는 방식은 내가 알 수는 없지만 나는 이렇게 받아들이고 있으며 내가 아는 바는 이렇습니다.
그렇지만 분명한 것은 성령을 드러내는 것과 성령을 깨달은 사람을 추종하는 것은 다릅니다.
석가모니부처가 자신을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비유했듯이 나 역시 성령이 내재함을 말하는 사람에 불과합니다.
손가락을 보지 말고 달을 봐야하듯이 내재한 성령을 깨달아야 마땅한 것이지 나를 추종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믿고 따라야하는 것은 내재한 성령이며 성령의 말씀에 귀 기울여야 하는 겁니다.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마6:6)
But thou, when thou prayest, enter into thy closet, and when thou hast shut thydoor, pray to thy Father which is in secret; and thy Father which seeth in secret shall reward thee openly.
자신의 골방을 아는 이들만 들으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