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판하는 것으로 심판받는다.
사람의 행동양식은 통일된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언행은 그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심어진 유전자의 영향을 받고 그가 속해진 사회의 분위기나 환경에 영향을 받게 되며 받아들인 정보에 따라 달라집니다.
산간오지에 사는 사람의 행동양식과 도시민의 생활상이 다른 것이 이래서입니다.
티베트 오지에는 일처다부제가 행해지고 있고 아랍세계에서 일부다처제가 성행하는 것이 바로 이런 이유라 할 수 있습니다.
물자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산간오지에서는 먹는 입은 최대한 줄이고 일하는 사람은 많아야 하기에 살아남기 위한 극단적 선택을 한 겁니다.
또한 전쟁이 잦았던 아랍민족은 남자의 숫자가 절대적으로 부족함으로 일부다처제가 허용되었던 거지요.
요즘은 이러한 풍습도 많이 없어지고 있다는데 이러한 변화가 생기는 것은 통신과 교통의 발달로 정보교환이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외부와 단절되어있던 사회에 문명이 전달되면서 자연스럽게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어떤 정보를 우리가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행동양식이 달라진다는 증거라 할 수 있습니다.
요즘은 우리나라에서도 많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지요.
과거에는 제사음식을 집안의 며느리들이 함께 만들고 친척들이 한꺼번에 모여서 제사를 지내곤 했지만 요즘은 제사음식을 따로 파는 곳도 있으며 제사대행업체들까지 있는 실정입니다.
가족이 해외여행을 나갈 때 제삿날 조상을 모실형편이 안되어 대행업체에게 맡기면 모든 일을 알아서 해준다고 합니다.
미리 알아보고 제삿날을 피하면 되지 않느냐하지만 가족이 모두 모이는 것도 쉽지 않은지라 이러한 방편을 취하게 된 겁니다.
조상제사가 가족들의 여행보다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며 후순위로 밀린 셈입니다.
어르신들이 들으면 세상 말세라 말할 것이 분명하며 호로자식들이라 말하겠지만 이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변화라 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문화가 사회에 만연하다보니 이러한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며 영의 세계를 접하고 나면 제사의 무의미함을 알게 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사실 알고 보면 제사도 하나의 형식일 뿐이며 절대적으로 사람이 취해야할 법도가 아닙니다.
결혼을 하고 처음 처가댁에 제사를 모시러 갔을 때 이러한 점을 깨닫게 되었지요.
우리 집안에서 지내던 것과 다른 방식으로 제사를 모시는 바람에 약간 놀라웠는데 사촌형님들께 물어보니 가가예문이라 하시면서 웃으셨습니다.
집집마다 제사방법이 다르다는 말씀으로 지방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다는 겁니다.
결국 제사예절에 절대적인 방법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사이에 하나의 약속이라는 점을 깨달았지요.
과거 조선시대만 하더라도 초상 때 곡을 대신해주는 직업이 있었다고 합니다.
원래의 유교풍습에 따르면 초상집은 곡이 끊어지면 안 되기 때문에 유가족들이 식사를 하거나 잠을 잘 때는 대신해서 곡을 해줄 사람이 필요했던 겁니다.
초상집에 곡소리가 끊어지면 안 된다는 규정이 유교에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양반사회에서는 이러한 일이 정석으로 여겨졌던 모양입니다.
이러한 일이 가능했던 것은 부자이기 때문으로 가난한 집에서는 엄두도 못 낼 일이었지요.
아무리 제사가 중요하다 하더라도 산사람은 살아야 하는 법이며 먹고사는 일이 급한지라 곡소리를 대신해줄 사람을 고용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양반가에서조차 빈부 차에 의해 제사의 법도가 달라져야했으니 평민이나 상놈들의 제사법은 말할 필요조차 없을 겁니다.
이렇게 양반과 상놈의 행동양식에 차이가 났으니 민란이 일어날 만도 했을 거라 생각됩니다.
양반가에서 보기에는 예법도 지키지 못하는 민초들의 삶이 짐승과 같다 여겼을 것이고 일반백성들의 입장에서는 양반들이 착취를 통해 부를 누리고 있다 여겼으리라 생각합니다.
이렇듯 제사를 모시더라도 같지가 않았고 방식과 예법도 상황에 따라 달랐던 거지요.
그래서 우리들은 각자가 처해있는 현실에 맞춰서 자신들이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최선을 다하며 살아가는 것이 정답이며 정해진 매뉴얼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닙니다.
본인들이 생각하기에 조상들의 혼이 있어서 제사 때면 오셔서 음식을 먹는다 생각하면 제사를 모시면 되는 것이고 나처럼 영혼이 이미 영원한 영의세계로 갔다고 생각하면 제사를 모시지 않으면 되는 겁니다.
다만 다른 이들의 행동양식을 함부로 판단하는 일만은 하지 말아야합니다.
이런 일에 대해 성경은 정확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마7:1)
"Do not judge lest you be judged.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마7:2)
"For in the way you judge, you will be judged; and by your standard of measure, it will be measured to you.
한글성경은 비판이라 기록했지만 영어성경을 보면 분명히 심판하지 말라 말하고 있습니다.(Do not judge)
우리가 누군가를 심판하는 것이 우리의 잣대로 인해서인데 그러한 잣대를 우리에게도 적용해야한다는 것을 기록한 겁니다.
비록 내 입장에서는 타인들의 행동양식이 마음에 들지 않겠지만 그들은 그들만의 인생길이 따로 있다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만약 누군가 제사는 반드시 지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거기에 걸맞은 인생길과 영혼의 앞날이 정해질 거라는 것을 우리가 안다면 타인의 행동에 대해 함부로 심판하기는 어렵지요.
그러므로 영생을 목표로 삼는 구도자의 행동양식은 달라지기 마련입니다.
나 같은 경우에는 그때그때 상황에 맞춰 행동을 달리합니다.
초상집에 갔는데 그곳에서 절을 하면 같이 절을 해주고 교회방식으로 기도를 하면 기도를 같이 해줍니다.
로마에 가면 로마의 법을 따라야한다는 심정으로 교회에서는 예수님을 찬송하고 절에 가면 부처상에 절을 하지요.
찬미가를 올림에 있어 내재하는 성령을 생각하고 부처상에 절을 하면서 내재하는 성령을 생각하는데 무엇이 문제가 되겠습니까.
삼라만상을 하나님이 만들었는데 어느 것이 하나님의 것이 아니겠냐는 말입니다.
만물 안에서 빛을 보는 자만 들으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