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5.
성령과 함께하는 나 홀로목사의 성경강해에 참석하신여러분 환영합니다.
지난시간 참으로 중요한 내용을 본 것 같은데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아마도 몇몇 분은 아주 평범한 내용이라 여기거나 대수롭지 않게 여길 겁니다.
하지만 지난시간에 나온 내용은 대단히 중요하다 할 수 있습니다.
성령을 깨닫게 되면 삼라만상 안에 성령이 들어있음을 알 수 있으며 아무리 하나님의 품성인
성령이라 할지라도 인간 몸 안에 갇힌 이상 일반인처럼 육신이 겪어야할 신체적인 일들을 겪
어야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되면 우리자신도 예수님과 동일해 질 수 있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
이게 됩니다.
그리고 비록 자신내면의 성령이 깨어나지 못했더라도 반드시 그런 분을 만나게 된다는 것도
알게 되었지요.
성령에 대한 믿음이 있다면 반드시 영생에 이른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는데 아직도 이런 내
용이 믿어지지 않는다면 갈 길은 멀고 앞길에 놓인 장애물도 많을 겁니다.
여러분께서 이러한 점을 인식하고 좀 더 겸손 되게 하나님께 기도하시길 바라며 누가복음 3장
의 문을 열겠습니다.
디베료가이사가 위에 있은지 열 다섯 해 곧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의 총독으로, 헤롯이 갈릴
리의 분봉왕으로, 그 동생 빌립이 이두래와 드라고닛지방의 분봉왕으로, 루사니아가 아빌레
네의 분봉왕으로, (눅3:1)
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빈 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
게 임한지라(눅3:2)
요한이 요단강 부근 각처에 와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눅3:3)
And he came into all the country about Jordan, preaching the baptism of
repentance for the remission of sins;
디베료 가이사는 로마황제 티베리우스를 가리키며 로마가 유대를 식민지로 삼고 있을 때 본디
오 빌라도가 유대총독으로 파견되어있었으며 각 지역에 유대인들을 왕으로 임명하여 통치하고
있었다는 시대적 배경을 기록한 겁니다.(1절)
이러한 식민시절을 빈들로 표현했으며 무지한 이방의 세상에 요한(하나님은 은혜로우시다)이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임무를 부여받았다는 말입니다.(2절)
3절의 요단강은 흘러가는 강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의 강, 즉 영생에 이르는 길을 가리킵
니다.(요단의 히브리어 뜻, “영원의 강”)
요한이 영생을 얻고자하는 모든 이들에게(he came into all the country about Jordan) 죄
사함의 침례를 전파했다고 합니다.(preaching the baptism of repentance for the
remission of sins)
요한의 이런 행위가 사사로운 것이 아니라는 것을 누가는 구약의 내용을 들어 다음과 같이 기
록하고 있습니다.
선지자 이사야의 책에 쓴바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
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눅3:4)
모든 골짜기가 메워지고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지고 굽은 것이 곧아지고 험한 길이 평탄하
여질 것이요(눅3:5)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리라 함과 같으니라(눅3:6)
이 말씀은 이사야서 40장에 나오는 말씀이니 잠시 보고난 후 돌아오겠습니다.
너희 하나님이 가라사대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사40:1)
너희는 정다이 예루살렘에 말하며 그것에게 외쳐 고하라 그 복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의 사
함을 입었느니라 그 모든 죄를 인하여 여호와의 손에서 배나 받았느니라 할지니라(사40:2)
Speak ye comfortably to Jerusalem, and cry unto her, that her warfare is
accomplished, that her iniquity is pardoned: for she hath received of the LORD's
hand double for all her sins.(KJV)
Speak tenderly to Jerusalem, and proclaim to her that her hard service has been
completed, that her sin has been paid for, that she has received from the LORD's
hand double for all her sins.(NIV)
외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사40:3)
The voice of him that crieth in the wilderness, Prepare ye the way of the LORD,
make straight in the desert a highway for our God.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작은 산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않은 곳이 평탄케 되며 험한 곳
이 평지가 될 것이요(사40:4)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 대저 여호와의 입이 말씀하셨느니
라(사40:5)
And the glory of the LORD shall be revealed, and all flesh shall see it together: for
the mouth of the LORD hath spoken it.
1절에서의 너희는 이사야와 같은 선지자들을 가리키며 자신내면(성전)에 성령이 거함을 깨달
은 이들을 가리킵니다.
이런 이들에게 하나님께서 명령하시기를 백성(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을 위로해주라고 했습니
다.
예루살렘의 뜻은 평화의 기초, 평화의 터전이니 믿음이 설 자리가 마련된 사람들을 비유한 겁
니다.
달리표현하면 성령이 깨어날 준비가 된 이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죄를 용서받았다고(her iniquity is pardoned) 말해주
라 하셨던 거지요.(2절)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해볼 대목은 그 복역의 때가 끝났다는 부분입니다.
한글성경에 이렇게 기록된 것은NIV를 번역했기 때문인데 KJV를 보게 되면 복역이 끝난 것이
아니라 전쟁이 끝났다 입니다.(her warfare is accomplished)
복역이라 해도 틀린 것은 아니지만 풍기는 뉘앙스에 있어서는 많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물질세상에서 영적인 세상으로 옮겨간다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기에 전쟁으로 표현한
겁니다.
그만큼 물질을 추구하던 삶에서 영적인 길로 돌아선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라는 말이며 이미
그러한 마음을 먹었다면 죄 사함 받기에 충분하다는 거지요.
사실 이것은 한사람의 인생에서 충분히 설명되어지는 일이기도 합니다.
물질세상이 재미있어 즐겁기 그지없는 사람이 영적인 길로 돌아서기는 그야말로 어려운 일이
며 인생길에서 지독한 고통과 괴로움을 맛봐야 가능한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죄로 인해 여호와의 손에서 두 배로 받았다했습니다.(she hath received
of the LORD's hand double for all her sins)
사는 동안 충분히 벌을 받았다는 말이지요.
3절에서 말하는 광야란(in the wilderness)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방의 마음을 가리키는 말이
며 사막 또한 믿음이 서있지 않은 적막한 마음상태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이런 이방의 마음 안에도 외치는 소리가 있었다고 합니다.(The voice of him that
crieth in the wilderness)
그러면 이목소리의 주인공은 누구일까요?
당연히 성령입니다.
그래서 외치는 자(그분)의 소리가 가로되(The voice of him that crieth in the wilderness)
하나님의 길을 준비하라 말했던 거지요.
이 내용은 이방인의 마음 안에도 성령이 들어있다는 비유적인 말씀이기도하며 내면에서 성령
이 깨어난 이들이 준비된 이들에게 외치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 기록한 겁니다.
이어지는 4절 내용을 보면 왜 평탄하게 만들라고 했는지 그이유가 나옵니다.
골짜기마다 돋우어지고 들과 산이 낮아지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된다는 말은 사람들마다의 특성
과 신분이 같아지는 것을 비유한 겁니다.
사는 동안 각자의 역할을 하기위해 높고 낮은 신분이 필요했고 맡은바 역할에 따라 고저장단
의 소리를 냈지만 하나님 품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한다는 거지요.
이러한 마음상태가 될 때 여호와의 영광(성령)이 드러나게 되고(the glory of the LORD
shall be revealed) 모든 육체가 하나님을 보게 된다는 말입니다.(5절)
여기에서의 모든 육체란 물질의 몸이 아니라 빛의 몸을 가리킵니다.
분별이 없고 완전히 평등해진 몸체를 말하는 것이니 당연히 영의 몸입니다.
이 내용을 약간 다르게 표현해보면 분별 심을(시비와 선악) 버리고 모든 육신 안에 담긴 성령
을 보게 되면 하나님과 하나 되는 영광(영생, 구원)을 얻게 된다는 말이 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모든 말씀은 여호와의 입이 말씀하시는 거라 하셨으니 성령이 드러난 사
람이 말하는 것은 곧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말입니다.
결국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신 것도 성령이신 하나님이고 누가복음에 등장하는 요한이
말하는 것도 하나님 말씀이라는 거지요.
이제 이사야서 내용을 통해 누가복음을 충분히 이해하셨으리라 생각하며 여기에 대한 내용은
마태복음4편에서 다루었던 만큼 더 이상의 보충설명은 하지 않고 진도를 나가도록 하겠습니
다.
요한이 세례 받으러 나오는 무리에게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장차 올 진
노를 피하라 하더냐(눅3:7)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
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눅3:8)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리라
(눅3:9)
7절 말씀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조금 이상합니다.
분명 성령을 깨달은(드러낸) 사람에게 침례를 받게 되면 죄 사함을 받는다했는데 요한은 사정
없이 꾸짖고 있습니다.
심지어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말하기까지 하는데 왜일까요?
그 해답은 이어지는 8절에 나옵니다.
구원을 받기위해서는 회개를 해야 마땅하고 회개했다면 합당한 열매가 맺어야한다고 합니다.
말로만 아브라함 자손이라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지요.
하나님이 돌들로도 아브라함 자손이 되게 하신다는 말은 돌에도 하나님품성이 담겨있다는 말
입니다.
이 말씀은 에너지 차원에서 하신 말씀으로 삼라만상 중에 하나님께서 만들지 않은 것은 없다는 말과 같습니다.
말인즉 모든 이들 안에 성령이 담겨있는 것은 맞지만 진정으로 자신의 죄를 뉘우쳤다면 거기
에 합당한 행동을 해야 마땅하며 그렇지 못하면 구원받지 못했다는 겁니다.
요한이 이렇게 말한 것을 볼 때 그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이 침례만 받으면 구원받을 수 있다
여기며 몰려왔다는 것을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에 기록되기로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을 향해 이 같은 말씀을 하셨다고 했는데 누
가는 약간 달리 기록했지요.(마태복음4편)
이어지는 9절 내용은 하나님과 연결고리가 끊어진다는 것을 비유한 겁니다.
나무는 사람을 가리키며 뿌리는 하나님과의 연결고리를 뜻하며 불에 던져진다 한 것은 무저갱
(지옥)에 빠진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무서운 말을 하자 무리들이 두려워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합니다.
무리가 물어 가로되 그러하면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눅3:10)
And the people asked him, saying, What shall we do then?
대답하여 가로되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
렇게 할 것이니라 하고(눅3:11)
이 말씀이 간단한 것 같지만 사실은 아주 깊은 뜻이 담겨있습니다.
옷 두벌 있는 자와 먹을 것 있는 자가 나누어주라는 말은 단순하게 있는 것을 나누라는 말이
아니라 동등해지라는 말입니다.
한마디로 표현해서 분별 심을 버리라는 거지요.
만약 이것이 아니라 단순하게 자비를 베푸는 것이었다면 있는 것을 무조건 주라 말했겠지만
하필이면 두벌이라 기록한 것은 똑같이 한 벌씩 나누라는 말로서 하나님 앞에 모든 사람이 평
등하다는 사실을 깨닫도록 하기위해서입니다.
11절 말씀은 앞서 이사야서를 통해 본 것과 동일한 선상에서 해석되어야할 내용입니다.
이러한 요한의 가르침에 다른 이들도 궁금한 점이 있었나 봅니다.
세리들도 세례를 받고자 하여 와서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눅3:12)
가로되 정한 세 외에는 늑징치 말라 하고(눅3:13)
세리의 임무는 세금을 거두는 것이니 당연히 징수(徵收)해야 하겠지만 정해진 세금 외에는 강
요하지 말라했지요.
이 말씀은 맡은바 임무에 충실하되 범법행위를 하지 않는다면 죄 사함의 침례를 받을 수 있다
는 말입니다.
별거 아닌 것 같은 이 내용도 알고 보면 깊은 뜻이 담긴 말씀입니다.
그때당시 세리라는 직업은 이스라엘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받는 직업이었습니다.
세금을 거둔 만큼 수입이 느는지라 규정보다 더 많은 세금을 부과하기 일쑤였으니 당연히 미
움을 받았지요.
로마 식민 시대였던 만큼 거두어진 세금의 대부분은 로마로 보내졌는데 어찌 이스라엘사람들
이 세리를 좋게 볼 수 있었겠습니까.
이스라엘사람이지만 로마를 위해 일하는 세리는 매국노였고 원수나 다름없었을 겁니다.
이런 상황에서 요한이 세리도 죄 사함을 받을 수 있다 말하고 있으니 그리 간단하게 받아들일
상황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왜 누가는 이런 내용을 기록했을까요.
눈치 빠른 분들은 알아차렸겠지만 누가는 죄 사함(구원)을 받는 데는 직업의 귀천이나 신분의
고하, 또는 국가나 인종의 차별이 없다는 것을 말하고자했습니다.
다음구절을 보면 좀 더 이해가 될 겁니다.
군병들도 물어 가로되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가로되 사람에게 강포하지 말며 무소하지
말고 받는 요를 족한 줄로 알라 하니라(눅3:14)
And the soldiers likewise demanded of him, saying, And what shall we do? And he
said unto them, Do violence to no man, neither accuse any falsely; and be content
with your wages.(KJV)
군병들이란 로마 군사를 가리킵니다.
로마의 압제(壓制)하에 놓인 이스라엘은 군대를 조직하거나 군병을 거느릴 수 없으니 당연히
로마인들이지요.
이방인들도 죄 사함의 침례를 받을 수 있다는 말이니 하나님은 인종과 직업을 따지지 않는다
는 말입니다.
그런데 몇 가지 조건이 달려있습니다.
아무에게도 강포(强暴)하지 말고(Do violence to no man)무소(誣訴)하지 말며(neither
accuse any falsely)받는 요에 만족하라했지요.(be content with your wages)
이 말씀을 가만히 분석해보면 아주 심오한 뜻이 담겼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누가가 로마군인을 등장시킨 것은 이방인들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이지만
그 뒤에 달린 조건은 이방인뿐만 아니라 죄 사함을 받으려는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말입
니다.
먼저 강포하지 말라는 말은 폭력을 행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고 무소하지 말라는 허위로 고
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며 받는 요에 만족하란 말은 받는 임금(보수)에 만족하라는 겁니다.
그중에서도 무소하지 말라는 말은 십계명중 “이웃에게 거짓증언 하지 말라”에 해당됩니다.
그리고 받는 요에 만족하라는 말은 군인들이 받는 월급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행위
에 따른 결과에 만족하라는 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일을 했다면 일에 대한 보수가 주어질 것이고 무언가를 심었다면 뭔가가 싹이 트고 열매를 맺
겠지요.
이러한 인과응보의 법칙에 순응하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간단하게 받아들일 내용은 아니며 육신의 한계를 철저히 깨달아 알라는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 그런가하면 로마 군병들은 직업자체만으로 충분히 폭력적이기 때문입니다.
남의 나라를 침략해서 점령하고 있는 행위가 폭력적이지 않을 수 없지요.
그리고 무소하지 말라는 말도 가만히 분석해보면 그렇게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란 걸 알
수 있습니다.
영어성경을 보면 조금도 잘못되게 고발하지 말라(neither accuse any falsely)인데 약간의
거짓증언을 해서도 안 된다는 말이니 조금의 거짓말도 허용 안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어찌 이것을 쉽다할 수 있겠습니까.
게다가 받는 요에 만족하라는 말은 더욱이 어렵다 하겠습니다.
사람이 사는 동안 좋은 일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불행하고 슬픈 일도 숱하게 마주하게 됩니
다.
그러한 순간조차 만족하라는 말이니 어찌 육신을 가진 인간으로서 쉽게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
까
결국 누가는 사람들로 하여금 육신과는 별개인 성령에 대해 깨닫게 하기위해 이런 내용을 기
록했습니다.
참고로 말씀드리자면 3장10절~15절까지의 내용은 다른 복음서에는 기록되지 않았으며 오로지
누가복음에만 있는 내용입니다.
그만큼 누가의 인식에 깊이를 알 수 있습니다.
이 같은 내용을 비추어볼 때 누가는 성령을 완전히 깨닫고 있음이 확실하며 이방인들도 하나
님과 하나 됨의 영광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증언하는 증인이라 하겠습니다.
이제는 여러분도 누가의 이러한 목적을 완전히 이해했으리라 믿고 다음구절에 집중해보겠습니
다.
백성들이 바라고 기다리므로 모든 사람들이 요한을 혹 그리스도신가 심중에 의논하니(눅3:15)
And as the people were in expectation, and all men mused in their hearts of John,
whether he were the Christ, or not;
백성들이 기대한 것처럼(as the people were in expectation) 요한이 그리스도가 아닐까 생
각했다고 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앞서 말한 내용을 보면 요한은 하나님과 하나 된 인물이 맞습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말들이지요.
그러면 과연 요한이 성령과 하나 된 인물이 맞는지 확인해 보겠습니다.
요한이 모든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
게 세례를 주실것이요(눅3:16)
어째 조금 이상한 것 같습니다.
앞서 말한 내용을 보면 분명 요한이 성령과 하나 된 사람이 맞으며 그리스도라 칭해도 조금도 손색이 없지요.
그런데 왜 요한이 이렇게 말했을까요?
아마도 많은 분들이 이 내용을 들어 요한보다 예수님이 더 큰 깨달음을 얻은 분이라 여기겠지
만 사실을 말하자면 확실히 아닙니다.
왜 그런가 하면 성령을 깨닫게 되면 높낮이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사야서 40장을 통해서 알아보았듯이 만물이 동일하다는 인식에 도달하지 않고서는 성령을
깨달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높낮이가 있겠습니까.
따라서 이 내용은 하나의 시험과도 같은 것이며 누가가 의도적으로 예수님을 요한보다 더 높
게 부각(浮刻)시키기 위해 만든 것으로 봐야합니다.
사실 누가가 여기에서 말하고자 한 것은 진정한 침례는 육신(요한)이 물로서 하는 것이 아니
라 하나님으로부터 의무를 부여받은 그리스도(기름부음을 받은 자, 성령을 깨달은 자, 메시아)
가 성령과 불로서 한다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내용을 보면 나 홀로목사의 말이 타당성 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될 겁니다.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눅3:17)
이렇게 행하실 분은 하나님밖에 없으니 성령을 깨달아 하나님과 하나 된 이가 이와 같은 능력
을 가지게 될 겁니다.
여기에서의 알곡은 성령을 깨달은 사람을 뜻하며 쭉정이는 자신의 영혼을 모르고 무저갱에 빠
질 사람들입니다.
이 내용을 액면그대로 보게 되면 하나님은 무엇인가를 의도적으로 하는 분인 것 같습니다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성령을 깨닫게 되면 자연스럽게 하나님과 하나가되기에 모아들인다는 표현을 한 것 일뿐 성령
이 무엇엔가 끌리어 가는 것이 아닙니다.
말을 하다 보니 이 내용은 아주 중요한 것 같아 좀 더 세밀하게 분석해보겠습니다.
성령이 곧 하나님인데 하나님이 성령(알곡들)을 거두어들인다는 말은 근본적으로 성립되지 않
는 말이지요.
이 같은 말이 성립되려면 하나님은 성령보다 훨씬 상회하는 존재가 되어야 마땅합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과 성령이 하나일수 없으며 세상누구도(예수를 포함) 하나님과 하나 되지
못합니다.
하지만 우리들이 지금껏 성경을 통해 보았듯이 성령은 하나님과 동일하며 성령을 하나님이라
해도 조금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할까요.
이 같은 일을 설명하기위해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가정(假定)하여 하나님을 A라고 합시다.
그러면 성령하나를 A1다른 성령을 A2 이런 식으로 나가게 되면 하나님 A는 수없이 많은 성
령을 만들어내게 됩니다.
이러할 때 A1 이나 A2 등은 하나님과 동일한 존재들이 되는 거지요.
어떻습니까?
이해가 되셨겠지요.
아직도 이해가 되지 않는 분들은 스스로 뺨을 세 차례 때리시기 바랍니다.
사는 동안 너무나 많은 악행을 저질러 지혜가 막혀버린 탓이니 스스로를 벌해야 마땅합니다.
“내 탓이요 내 탓이요 내 큰 탓이로소이다”를 외치며 소리가 나도록 때려야 조금 이해가 될
겁니다.
이런 사람들이 오늘 이 자리에 오신 분들 가운데는 없으리라 여기며 다음내용을 보겠습니다.
또 기타 여러가지로 권하여 백성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였으나(눅3:18)
And many other things in his exhortation preached he unto the people.
분봉왕헤롯은 그 동생의 아내헤로디아의 일과 또 그의 행한 모든 악한 일을 인하여 요한에
게 책망을 받고(눅3:19)
이 위에 한 가지 악을 더하여 요한을 옥에 가두니라(눅3:20)
Added yet this above all, that he shut up John in prison.
18절을 보면 요한이 백성에게 여러 가지 좋은 소식을 그냥 전한 것이 아니라 간곡하게 전도
하였다고(in his exhortation preached) 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성과가 좋지 못했는데 분봉왕 헤롯이 요한을 옥에 가두게
되지요.
동생 아내와 결혼한 일과 모든 악한 일에 대한 요한의 질타 때문에(19절) 한 가지 악을 더하
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요한을 옥에 가두는 일이었다고 합니다.(20절)
그런데 가만히 들여다보면 누가는 단순하게 헤롯이 요한을 감옥에 가둔 사실을 기록한 것이
아니란 걸 발견할 수 있습니다.
헤롯의 뜻은 “영웅의 아들”이고 헤로디아의 뜻은“영웅의 딸”입니다.
영웅(英雄)이란 물질세상에서 최고의 찬사를 받는 이를 가리키는 말이지요.
요한의 뜻은 “야훼는 은혜로우시다 ”이니 물질세상을 좌우지하는 권력자(헤롯, 헤로디아)가 야
훼의 은혜를 받은 이를 감옥에 가둔다는 것은 성령을 벌하는 것과 마찬가지라 하겠습니다.
그러니 죄 중에서 가장 큰 죄를 지은 겁니다.
그런 이유로 누가는 모든 죄 위에 한 가지 더한 죄를(Added yet this above all) 지었다고
기록했던 거지요.
누가가 이 내용을 통해 우리에게 전해주고자하는 가르침은 영은 언제나 물질보다 상위(上位)
에 자리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물질 세상에 속한 자(헤롯, 헤로디아)는 결코 성령이 드러난 이(요한)를 알아볼 수 없
다는 것을 말해놓았습니다.
이어지는 내용역시 이와 비슷합니다.
백성이 다 세례를 받을쌔 예수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리며(눅3:21)
성령이 형체로 비둘기같이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
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눅3:22)
And the Holy Ghost descended in a bodily shape like a dove upon him, and a
voice came from heaven, which said, Thou art my beloved Son; in thee I am well
pleased.
21절을 보면 백성들과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 세례(침례)를 받으셨습니다.
하지만 뭔가 다른 것은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성령이(the Holy Ghost) 형상을 갖춘 몸으로(in a bodily shape) 예수님위에 비둘기
같이(like a dove upon him) 내려앉았으며(descended) 천국으로부터(came from heaven)
너는 내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한다는 소리가 났다고(a voice) 했습니다.
참으로 대단한 내용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에게 한 가지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일반인들도 예수님과 함께 세례를 받았으니 그들도 이러한 경험을 했을까요?
정신이 이상하지 않다면 당연히 못했다는 것을 알겁니다.
이러한 경험을 했다면 이미 성령과 하나 된 이가 분명합니다.
그러니 똑같은 세례를 받아도 받는 이에 따라 결과는 완전히 달라지는 겁니다.
앞서 말씀드린 데로 세례를 주는 이는 요한인데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물로서 침례를 받게
되거나 성령과 불로서 침례를 받게 되는 거지요.
누가는 바로 이 같은 점을 우리에게 말해주려 했습니다.
그리고 성령은 그저 빛이 아니라 형상을 갖춘 빛의 몸(in a bodily shape)이라는 사실도 알
려주었습니다.
또 한 가지 우리가 알아야할 것은 하나님(성령, 빛)은 하늘에 있지 않고 예수님 몸 안에 있다
는 사실입니다.
한글성경은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기록했지만 영어성경은 내가 네 안에서 기뻐한다(in thee I
am well pleased)로 적고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누가가 오늘날의 우리들에게 전해주고자하는 핵심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데로 성령은 삼라만상 안에 공히 들어있지만 드러내고 그렇지 않고의 차이는
실로 엄청난 겁니다.
누가는 이러한 점을 알고 있기 때문에 우리들에게 여러 가지 비유의 말로서 가르침을 주고 있
습니다.
이어지는 내용도 누가의 그러한 의도 중에 하나라고 할 수 있으니 다함께 확인해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가르치심을 시작할 때에 삼십세쯤 되시니라 사람들의 아는대로는 요셉의 아들이니
요셉의 이상은 헬리요(눅3:23)
And Jesus himself began to be about thirty years of age, being (as was supposed)
the son of Joseph, which was the son of Heli,(KJV)
Now Jesus himself was about thirty years old when he began his ministry. He was
the son, so it was thought, of Joseph, the son of Heli,(NIV)
그 이상은 맛닷이요 그 이상은 레위요 그 이상은 멜기요 그 이상은 얀나요 그 이상은 요셉이
요(눅3:24)
그 이상은 맛다디아요 그 이상은 아모스요 그 이상은 나훔이요 그 이상은 에슬리요 그 이상은
낙개요(눅3:25)
그 이상은 마앗이요 그 이상은 맛다디아요 그 이상은 서머인이요 그 이상은 요섹이요 그 이상
은 요다요(눅3:26)
그 이상은 요아난이요 그 이상은 레사요 그 이상은 스룹바벨이요 그 이상은 스알디엘이요 그
이상은 네리요(눅3:27)
그 이상은 멜기요 그 이상은 앗디요 그 이상은 고삼이요 그 이상은 엘마담이요 그 이상은 에
르요(눅3:28)
그 이상은 예수요 그 이상은 엘리에서요 그 이상은 요림이요 그 이상은 맛닷이요 그 이상은
레위요(눅3:29)
그 이상은 시므온이요 그 이상은 유다요 그 이상은 요셉이요 그 이상은 요남이요 그 이상은
엘리아김이요(눅3:30)
그 이상은 멜레아요 그 이상은 멘나요 그 이상은 맛다다요 그 이상은 나단이요 그 이상은 다
윗이요(눅3:31)
그 이상은 이새요 그 이상은 오벳이요 그 이상은 보아스요 그 이상은 살몬이요 그 이상은 나
손이요(눅3:32)
그 이상은 아미나답이요 그이상은 아니요 그 이상은 헤스론이요 그 이상은 베레스요 그 이상
은 유다요(눅3:33)
그 이상은 야곱이요 그 이상은 이삭이요 그 이상은 아브라함이요 그 이상은 데라요 그 이상은
나홀이요(눅3:34)
그 이상은 스룩이요 그 이상은 르우요 그 이상은 벨렉이요 그 이상은 헤버요 그 이상은 살라
요 (눅3:35)
그 이상은 가이난이요 그 이상은 아박삿이요 그 이상은 셈이요 그 이상은 노아요 그 이상은
레멕이요(눅3:36)
그 이상은 므두셀라요 그 이상은 에녹이요 그 이상은 야렛이요 그 이상은 마할랄렐이요 그 이
상은 가이난이요(눅3:37)
그 이상은 에노스요 그 이상은 셋이요 그 이상은 아담이요 그 이상은 하나님이시니라(눅3:38)
23절은 잘못된 번역입니다.
NIV성경을 번역한 탓에 이렇게 기록했겠지만 이는 분명 누가의 목적에 어긋나는 겁니다.
KJV를 보면 예수께서 헬리의 아들인 요셉의 아들이 된지 약30년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알려진 바로는 하고 토를 달아놓았지요.(as was supposed)
22절과 연결해서 생각해보면 가르침을 시작할 때로 번역하는 것이 틀리지 않겠지만 23절 자
체만보면 사람들이 아는바와 같이 헬리의 아들인 요셉의 아들이 된지 약 30년이 되었다가 됩
니다.
왜 나 홀로목사가 이렇게 말씀드리는가하면 이 내용은 누가가 마태복음을 보고난 후 어떤 목
적을 가지고 기록했기 때문입니다.
일단 마태복음에 나와 있는 동일한 내용을 본 후 누가의 목적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마1:1)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를 낳고(마1:2)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헤스론은 람을 낳고(마1:3)
람은 아미나답을 낳고 아미나답은 나손을 낳고 나손은 살몬을 낳고(마1:4)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마1:5)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마1:6)
솔로몬은 르호보암을 낳고 르호보암은 아비야를 낳고 아비야는 아사를 낳고(마1:7)
아사는 여호사밧을 낳고 여호사밧은 요람을 낳고 요람은 웃시야를 낳고(마1:8)
웃시야는 요담을 낳고 요담은 아하스를 낳고 아하스는 히스기야를 낳고(마1:9)
히스기야는 므낫세를 낳고 므낫세는 아몬을 낳고 아몬은 요시야를 낳고(마1:10)
바벨론으로 이거할 때에 요시야는 여고냐와 그의 형제를 낳으니라(마1:11)
바벨론으로 이거한 후에 여고냐는 스알디엘을 낳고 스알디엘은 스룹바벨을 낳고(마1:12)
스룹바벨은 아비훗을 낳고 아비훗은 엘리아김을 낳고 엘리아김은 아소르를 낳고(마1:13)
아소르는 사독을 낳고 사독은 아킴을 낳고 아킴은 엘리웃을 낳고(마1:14)
엘리웃은 엘르아살을 낳고 엘르아살은 맛단을 낳고 맛단은 야곱을 낳고(마1:15)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마
1:16)
그런즉 모든 대 수가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열네 대요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이거할 때까지
열네 대요 바벨론으로 이거한 후부터 그리스도까지 열네 대더라(마1:17)
So all the generations from Abraham to David are fourteen generations; and from
David until the carrying away into Babylon are fourteen generations; and from the
carrying away into Babylon unto Christ are fourteen generations.
누가의 목적을 말씀드리기에 앞서 마태복음 마지막 17절을 분석하고 넘어가야할 것 같습니다.
여기까지 함께하신 여러분들은 아시겠지만 아브라함의 뜻은 “백성의 아버지”입니다.
성령을 깨달아 하나님과 하나 된 사람이기도하지요.
그리고 다윗의뜻은 “사랑받는 자”이며 또한 다윗은 아브라함과 마찬가지로 멜기세덱의 반차에
오른 사람입니다.
바벨론의 뜻은“신의 문”으로 하나님과 하나 되는 영광된 자리를 뜻합니다.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의 뜻은“기름부음을 받은 자” “축성된 자”이지요.
바로 예수님의 대명사로서 메시아를 가리킵니다.
이제 여러분은 아시겠습니까?
마태복음의 저자가 이렇게 기록한 것은 예수님의 족보를 말하고자한 것이 아니라 주기적으로
하나님과 하나 되는 영광된 자리에 예수님이 오르셨다는 것을 말하고자 한 겁니다.
열 네 대란 구약속의 완전을 이룬 창조의 숫자7의 두 배로서 주기를 나타내기위해 쓰인 것일
뿐 특별한 의미는 없습니다.
이점을 간파한 누가는 대수와는 관계없이 하나님이 이 세상에 임하게 되는 과정을 말하고자
한 거지요.
그렇기 때문에 아담(히브리어 뜻 사람)위에는 하나님이라고 기록한 겁니다.
상세하게 비교분석해본 분들은 아시겠지만 누가복음과 마태복음은 다윗 아래로는 일치하지 않
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에게서 만나게 되는데 아무리 멀리 돌아오더라도 결국에는 성령을 깨닫게 된다
는 것과 누구에게나 하나님의 품성이 담겨있음을 말하고자 했던 겁니다.
이렇게 해서 누가의 목적을 알게 되었으니 오늘의 시간은 여기에서 마무리 지어야하겠군요.
부디 여러분이 열네 대째 위치에 자리하지 않아도 성령이신 하나님을 담고 있는 귀한존재라는
것을 깨닫길 바라며 누가복음 3장의 문을 닫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