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이법문(不二法門).
어떤 분이 말하길 내가 글을 아주 쉽게 쓴다고 말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그분 말씀이 맞기는 하지만 막상 내 입장에서는 그리 쉽게 써지는 것은 아닙니다.
읽는 사람 입장에서는 10분 내외의 시간만 투자하면 되는 짧은 글이지만 여기에는 엄청난 일들이 담겨 있습니다.
우선적으로 영감이 일어나야 하며 성령이신 하나님이 허락해야합니다.
느낌의 세계에서 영적인 감흥이 일어나야 가능한 것이지 무작정 글이 써지는 것은 아닙니다.
일상을 글로 옮기는 작업도 쉽지 않은 것이 단어선택에서부터 문장의 흐름까지 고려해야함으로 그렇게 한순간에 글이 작성되지는 않으며 많은 시간이 소요됩니다.
특히 성경을 다룰 때는 의식의 깊은 곳까지 들어가야 함으로 오랜 시간을 명상하는 것과 같습니다.
구약의 경우 한 구절을 두고 한 달을 상고한 적이 있을 정도입니다.
느낌이야 한순간에 일어나지만 그 느낌을 세상으로 가져온다는 것이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겁니다.
이러한 까닭으로 나 홀로목사라는 타이틀로 글을 쓸 때는 한편을 작성하는데 길게는 한 달 넘게 걸리기도 하고 짧게는 일주일정도의 시간을 필요로 합니다.
그만큼 느낌의 세계이고 창조의 영역에서 가져온 것들을 세상 적으로 풀어내는 것이 어렵다는 말이지요.
우리가 성경을 읽어보면 이 같은 점을 확실하게 인식하게 됩니다.
성경은 세상을 미리 살다간 선지자들이 자신들의 체함 담이나 영적인 길을 걷는 동안 일어났던 내면의 변화를 기록한 책입니다.
그러다 보니 그 내용이 이 세상 관점으로 보아서는 알 수 없는 것이 대부분이며 비유로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것을 풀어내려면 반드시 성경을 기록한 선지자들의 의식세계에 다가서야합니다.
이러한 일을 일러 신의식속으로 들어간다고 표현하지요.
성경을 읽어본 이들은 알겠지만 구약은 이스라엘의 영적스승들이 기록한 책이며 신약은 구약을 토대로 예수께서 하신말씀을 제자들이 기록한 겁니다.
그것도 액면대로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비유로서 말해놓았습니다.
그만큼 느낌의 세계인 신의식속에서 영적인 가르침을 세상으로 가져오기가 어렵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내가 사사로의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러한 많은 비유로 저희가 알아 들을 수 있는대로 말씀을 가르치시되(막4:33)
비유가 아니면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다만 혼자 계실 때에 그 제자들에게 모든 것을 해석하시더라(막4:34)
예수께서 이렇게 비유로서 말씀하셨다 했음에도 불구하고 성경을 액면대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는 넘쳐납니다.
그러다보니 성경을 통해 자신에게 기적과 이적이 일어나길 바라고 있지요.
오병이어의 기적과 같이 인간이 할 수 없는 일을 바라게 되는 겁니다.
실상을 보면 기적이라는 것이 다섯 개의 떡과 두 마리의 물고기로 오천 명을 먹이는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천 명의 사람이 예수로부터 말씀을 듣고 열두 명의(열 두 바구니) 제자가 생긴 것이 기적입니다.
12는 하나님이 인간과 연합한(3×4=12) 숫자로서 삼위일체를 나타내는 3과 인간의 숫자인 4를 곱한 값이지요.
많은 이들이 영적깨달음을 얻어 하나님이신 성령을 깨달았음을 오병이어에 비유한 겁니다.
마찬가지로 십자가의 부활도 이런 맥락으로 해석되어야합니다.
이것이 아니라면 예수님은 동정녀 마리아에게 태어난 분으로 죽었다가 되살아나신 분이 되고 맙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같이 평범한 이들에게는 절대로 하나님이신 성령이 되살아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부활은 육신이 죽고 성령이 되살아나는 것으로 받아들여져야 하며 인생을 통틀어 얻어야하는 기적은 바로 영적부활입니다.
로또에 당첨되어 수십억의 돈을 얻는 것은 사는 동안 필요한 것에 불과하며 돌아갈 때 단 한 푼도 못 가져갑니다.
하지만 영적부활은 우리영혼을 영생에 이르도록 만듭니다.
과연 어느 것이 더욱 중요할는지요.
이것은 어디까지나 선택의 문제이며 삶의 목표에 관한 문제입니다.
영을 목적으로 선택하면 영적부활을 기적이라 여길 것이며 물질과 육적인 것들을 목적으로 삼으면 오병이어나 예수의 육신부활을 기적이라 여길 겁니다.
하지만 육신이 없다면 영이 세상에 머물지 못한다는 사실은 짚고 넘어가야합니다.
영적인 길을 목표로 삼는다할지라도 육신을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된다는 거지요.
나 같은 경우 누구보다도 이 같은 점을 절실하게 느끼고 있습니다.
힘든 일을 하고나면 영적인 느낌을 세상으로 옮겨오기가 힘이 든다는 점을 항상 느끼게 됩니다.
느낌은 영적인 세상에 늘 있는 것이지만 그러한 느낌을 세상기준에 맞추어서 글로 옮기는 것은 육신이 해야 합니다.
그런데 너무 피곤하면 두뇌가 작동을 멈추고 육신은 늘어지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작업을 마치고 돌아와 컴퓨터 앞에 앉으면 한두 시간은 비몽사몽간을 헤매게 됩니다.
그러다가 겨우 정신을 차리고 작업을 하면 삼십분이나 한 시간 정도 집중을 하게 되지요.
우리가 기도나 명상을 하는 것도 마찬가지라고 볼 수 있습니다.
처음 한두 시간은 세상에서 묻혀온 잡다한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며 정작 깊은 기도나 명상은 십분도 못되는 겁니다.
그렇다고 해서 육신적으로 편안하면 명상과 기도가 잘될 것 같지만 반드시 그렇지만도 않습니다.
이럴 경우 세상의 유희에 빠져 아예 영적인 길을 포기하고 맙니다.
그러므로 영생을 향한 구도의 길을 살얼음판을 걷는 것과 같다고 하는 거지요.
하여 과거 선각자들은 이세상과 저세상이 둘이 아니라고 했으며 불이법문(不二法門)을 설하셨던 겁니다.
타인들의 경우는 내가 모르겠으나 나는 세상을 이렇게 여기며 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