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겁의 세월이 찰나(刹那)에 담겨 있다.
요즘 갑자기 축구에 관심이 있어졌습니다.
그동안은 격투기를 간간히 보곤 했었는데 동영상에서 풋살 경기를 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풋살은 미니 축구를 말하는 것으로 기존의 축구장과는 크기도 다르고 인원도 다르지만 축구의 특점들은 모두 갖춘 축소된 축구경기로 보면 됩니다.
평소에 축구를 직접 할 정도로 좋아하지는 않기에 국가대항 경기가 아니면 축구경기를 잘 보지는 않습니다.
그러던 중 우연히 “골 때리는 그녀”라는 타이틀로 모방송국에서 방영되는 경기를 유튜브를 통해 보게 되었던 거지요.
여성들로 구성된 팀원들이 열심히 달리는 모습도 보기 좋지만 의외의 실력자들이 있기에 더욱더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그런데 동영상을 보던 중 놀라운 일을 경험했습니다.
9분 남짓한 짧은 동영상을 보았는데 마치 수십 분이 지난 것 같더라는 겁니다.
전후반 40분의 경기를 축약시켜놓은 동영상을 보아서 인지는 모르겠지만 보는 내 입장에서는 무척 많은 시간이 흐른 것 같더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지겹다는 것과는 다른 문제로서 우리인식의 문제였던거지요.
경기가 워낙 박진감 있게 진행됨으로 시간이 금방 지날 것 같지만 장면이 워낙 다양하게 비춰지는지라 두뇌에 각인된 정보데이터가 많았던 탓에 시간이 길게 느껴진 겁니다.
이것은 우리네 인생에 가져와보면 많은 부분에서 인식의 변화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내가 살아가는 모습만 보더라도 이점을 명확하게 인식하게 됩니다.
새벽에 일어나 성경연구를 하고 출근을 하여 일과를 보낸 후 돌아오기 바쁘게 샤워를 하고 저녁식사를 마친 후 또다시 글 쓰는 일을 하다보면 하루가 얼마나 길고도 짧게 여겨지는지 모릅니다.
아침 점심은 직장에서 먹고 오지만 저녁은 스스로 해결해야 함으로 간혹 간단한 요리도 해야 합니다.
이러다 보니 남들보다 세배는 넘게 인생을 사는 셈입니다.
그렇지만 하루가 얼마나 빨리 지나가는지 모를 지경이지요.
눈 깜짝할 사이에 하루가 지나고 한 달이 지나며 일 년이 지나갑니다.
95년 명상단체에 입문을 한 후부터 지금까지의 세월이 순식간에 지나갔다는 것은 결코 농담이 아닙니다.
매일같이 영의 세계를 넘나들며 중국으로 호주로 돌아다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오늘날에 이른 겁니다.
중국에서의 5년과 호주에서의 3년 세월동안 겪었던 일을 말할라치면 얼마나 긴 시간이 필요할는지 모릅니다.
게다가 인생전체를 말하게 되면 내 나이만큼이나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요.
하지만 지나가 버린 과거의 일은 이제 영원 속에 묻혔으며 찰나의 순간 속에 간직되어 있습니다.
내가 끄집어 내지 않는 이상 기억의 저편에 자리하며 시공간을 상실한 세계 속에 머물고 있을 뿐입니다.
살았던 경험은 이미 기억이라는 느낌의 세계로 들어가 있으며 현실을 만들어내는 밑거름이 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인생에서 남는 것은 살았던 경험뿐이라 말하는 거지요.
이러한 까닭에 본인의 인생이 지겹고 길게만 느껴진다면 만족하지 못하는 인생을 사는 것이며 재미있고 짧게만 느껴진다면 떠날 때 많이 아쉬울 것이 분명합니다.
이 같은 점을 볼 때 똑같은 세상에서 동일한 조건의 몸을 가지고 살아가지만 시간은 같지가 않으며 인생을 대하는 인식이 다르다는 점을 알게 됩니다.
군대생활이나 교도소에서 수감 중인 사람에게 시간은 지겨울 것이고 게임이나 도박에 빠진 사람에게 시간은 너무나 짧게 느껴집니다.
같은 시공간에 갇혀있지만 인식은 천차만별이라는 말입니다.
설핏 생각하게 되면 재미있고 짧게만 느껴지는 삶을 사는 것이 만족하는 삶이라 여기기 쉽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재미있는 삶이란 육신의 즐거움에서 오는 것이기에 육이 소멸하면 자동적으로 사라집니다.
하지만 그 느낌은 살아있는지라 살아생전 즐거움과 괴로움이 둘이 아님을 인식하지 못하면 죽어서도 경계의 벽을 허물지 못하게 되어 스스로를 가두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육신은 죽어도 의식의 일부분이 특정한 경계에 머물게 되며 영생을 얻지 못하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현명한 것인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에 대해 성경은 분명한 길을 제시합니다.
그러므로 내 소견에는 사람이 자기 일에 즐거워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나니 이는 그의 분복이라 그 신후사를 보게 하려고 저를 도로 데리고 올 자가 누구이랴(전3:22)
Wherefore I perceive that there is nothing better, than that a man should rejoice in his own works; for that is his portion: for who shall bring him to see what shall be after him?
전도서는 지혜의 왕인 솔로몬에 의해 작성된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솔로몬의 뜻이 “평화롭다” 임을 볼 때 하나님과 하나 되어 영생의 하늘에 올랐음을 알 수 있지요.
그런 그가 말하길 자신의 역할을 즐거워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좋은 일이라 말하고 있는 겁니다.(nothing better, than that a man should rejoice in his own works)
자신의 맡은바 역할에 즐거워할 수 있다는 것은 마음에 만족을 얻었다는 말이며 우주 전체의 섭리를 깨달았음을 뜻합니다.
이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삼라만상이 창조된 근본원인을 알게 되었다는 뜻으로 인식의 확장이 이루어졌다는 말입니다.
한마디로 축약하면 만물동일체의 경지에 올랐다는 거지요.
만물이 동일하다는 것은 삼라만상의 근본이 하나에서 비롯되었음을 알게 되었다는 뜻이며 본인의 진정한 영혼인 성령을 깨달았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래서 신후사를 보게 하고 데리고 올 자가 누구냐고 묻고 있는 겁니다.
신후사(身後사事)는 죽음이후에 일어나는 일을 말하는 것으로 영의 세계를 가리킵니다.
자신의 일을 만족하는 것이 좋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영생의 하늘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는 뜻이지요.
진정으로 만물동일체의 경지에 올랐다면 시공간의 제한이 없는 영생의 하늘에 대해 알아야하며 평화로워져야 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진정으로 평화로워 진다는 것은 육신을 벗어난 상태가 되었다는 뜻으로 성령과 하나 되었다는 말입니다.
자신의 삶을 지켜보는 관조자가 되는 훈련이 필요하다는 것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 겁니다.
다른 이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내 눈에는 이렇게 보이고 있습니다.
억겁의 세월이 찰나(刹那)에 담겨 있음을 아는 자는 들으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