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덴 동산은 우리의 마음밭.
성당 다닐 때 신부님으로부터 고백 아닌 고백을 들었던 적이 있습니다.
신자들을 상대로 고해성사를 통해 보속(補贖)을 주시는 신부님께서 일요말씀 도중에 자신도 모르게 스스로의 죄상을 밝혔던 겁니다.
본인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신부의 직분을 가지고 있지만 차를 몰고 도로만 나서면 자신도 모르게 욕설이 튀어나온다는 말씀을 하신거지요.
그 당시만 하더라도 신부님정도 되면 일반인들과는 다를 것이라 여겼기에 그 말을 듣는 순간 약간은 실망했습니다.
성직자가 일반인들과 같은 반응을 보인다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여긴 탓입니다.
그렇지만 오랜 기간 구도의 길을 걸어보니 몸을 가진 채 육신의 감정을 초월한다는 것은 불가능함을 알 수가 있었고 지금은 신부님의 말씀을 올곧게 이해할 수 있게 되었지요.
물론 무작정 감정에 충실 한다는 말이 아니라 육신의 반응을 지켜보는 관조자의 입장이 되었다는 겁니다.
이런 일에 대해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16:24)
Then said Jesus unto his disciples, If any man will come after me, let him deny himself, and take up his cross, and follow me.
이 내용은 예수님의 육신을 통해 역사하는 성령이 하시는 말씀으로 봐야합니다.
성령을 따르기 위해서는 육신의 자기를 버리고 예수님(성령)을 따라야 한다는 말이지요.
자기 자신을 부인하라는 말은 육신의 신체적 반응을 완전히 무시하라는 뜻이 아니라 성령의 뜻에 부합한 것인지를 살피라는 겁니다.
자신의 신구의(身口意)가 영생을 얻기에 합당한 것인지를 살펴 취할 건 취하고 버릴 건 버리라는 말입니다.
만약 우리가 육신의 반응을 무조건 무시해버리게 되면 목석이나 다름없지요.
이래서는 나무나 바위보다 나을 것이 없습니다.
이럴 바에는 아예 바위로 태어나는 것이 나을 테지만 이 말씀은 그런 것이 아니라 육신과는 무관한 성령을 제대로 알라는 뜻입니다.
평소 생활함에 있어 본능적인 반응이 일어날지라도 그것이 나의 진정한 모습이 아니라 습관에 의해 일어나는 신체적 반응으로 생각하고 항상 지켜보는 관조자가 되라는 겁니다.
신부님처럼 운전을 하다 욕설이 튀어 나오는 것을 느낄 때마다 내가 또 습관에 의한 반응을 보이고 있구나 하고 이것이 자신의 참모습이 아님을 인정하는 훈련을 하라는 뜻이지요.
한마디로 요약하면 지켜보는 관조자가 되라는 말입니다.
이런 일에 대해 제대로 느껴보려면 본인의 꿈을 떠올려보면 됩니다.
꿈을 기억한다는 것은 꿈을 꾸는 나와 그것을 지켜보는 내가 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내가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을 인식한다는 것은 나 자신의 신구의(身口意)를 지켜보는 이가 있기에 가능합니다.
이런 일을 반복적으로 하다보면 어느 순간 육신과는 별개의 내가 있음을 깨닫게 되고 육과 영이 분리되는 체험을 할 수도 있습니다.
이정도가 되려면 반드시 삶의 목표가 영생에 있어야 하며 내재하는 성령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하는 겁니다.
어떠한 시험도 이겨낼 거라는 확고한 신념과 의지가 필요하기에 예수께서 자신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나를 따르라 말하고 있지요.
아주 간단한 것 같지만 이 내용은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물질적인 세상에서조차 목표에 따른 시험이 오는데 영생을 얻는 과정에서 시험이 없다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오죽하면 성경에 기록해 놓았겠습니까.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 내시고 에덴 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창3:24)
So he drove out the man; and he placed at the east of the garden of Eden Cherubims, and a flaming sword which turned every way, to keep the way of the tree of life.
생명나무가 영생을 뜻한다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으며 하나님왕국을 영생과에 비유했다는 점을 쉽게 알 수 있지요.
불타는 검이란(a flaming sword) 빛을 뜻하며 케루빔이 순수함을 뜻하는 아기천사임도 알 수 있습니다.
영생을 얻으려면 빛을 보거나 순수한 영혼(성령)을 깨달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일에 대해 몇 번이나 거듭해서 말한지라 나와 함께하는 이들은 귀에 딱지가 앉았을 겁니다.
그렇지만 에덴동산에 대한 뜻을 제대로 헤아리기는 어려울 거라 생각됩니다.
에덴의 뜻은 “광야, 평평한 땅, 비옥한 들, 즐거움” 등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살펴보면 뜻이 완전히 상반되는 것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광야(廣野)는 삭막하고 넓은 땅을 가리키며 즐거움과는 상반됩니다.
또한 평평한 땅도 비옥한 들과는 반대되는 뜻입니다.
이러한 점을 볼 때 창세기에 기록된 에덴동산은 우리의 마음과 같다 볼 수 있으며 우리스스로의 마음상태를 평정한 후에라야 영생을 얻게 된다는 가르침임을 알 수 있지요.
성령을 깨닫는다는 것이 그만큼 어렵다는 말이며 이원성의 극복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천국과 지옥, 선과악의 구분이 있는 이상 영생을 얻을 수 없다는 말이니 육신너머 영혼의 세계를 알아야하며 성령이 드러나야 한다는 겁니다.
이러한 까닭으로 성경은 다음의 내용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 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창3:22)
And the LORD God said, Behold, the man is become as one of us, to know good and evil: and now, lest he put forth his hand, and take also of the tree of life, and eat, and live for ever:
선악과를 먹었다는 것은 선악의 구분이 없어졌다는 뜻입니다.
육신을 가진 이상 선악을 구분 짓지 않을 수 없는지라 이 말은 곧 성령을 깨달았다는 거지요.
그래서 하나님과 같아졌다고 말하고 있으며 또한 하나님과 하나 된 영혼이 많기에 우리중 하나같이 되었다 기록하고 있습니다.(the man is become as one of us)
자신을 부인하고 성령을 따를 이들만 들으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