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과 나는 다같은 하나님의 자녀.
일요일 하루만큼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쉬고 싶어 유튜브만 줄기차게 보았습니다.
그러다가 우연히 방송국에서 올려놓은 동물의 세계라는 동영상을 보게 되었지요.
영국의 생물학자들이 올빼미에 대해 집중적으로 연구하는 내용이었는데 놀라운 장면을 보게 되었던 겁니다.
야생의 올빼미로부터 알을 구해와 부화를 시키고 키우는 전 과정을 촬영한 것인데 지금껏 알지 못했던 여러 가지 일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놀라웠던 것은 부화가 임박해진 알이 사람의 말에 반응을 한다는 사실이었지요.
알에서 깨어나기 위한 몸부림인지는 모르겠지만 바깥의 소리에 응답을 한다는 자체는 신기하기 짝이 없는 일입니다.
그 옛날 우리네 조상님들이 태교를 말한 이유를 내 눈으로 확인을 한 셈이었습니다.
이런 일은 성경에도 기록되어 있지요.
이 때에 마리아가 일어나 빨리 산중에 가서 유대 한 동네에 이르러(눅1:39)
사가랴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문안하니(눅1:40)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문안함을 들으매 아이가 복중에서 뛰노는지라 엘리사벳이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눅1:41)
큰 소리로 불러 가로되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으며 네 태중의 아이도 복이 있도다(눅1:42)
내 주의 모친이 내게 나아오니 이 어찌 된 일인고(눅1:43)
And whence is this to me, that the mother of my Lord should come to me?
보라 네 문안하는 소리가 내 귀에 들릴 때에 아이가 내 복중에서 기쁨으로 뛰놀았도다(눅1:44)
For, lo, as soon as the voice of thy salutation sounded in mine ears, the babe leaped in my womb for joy.
믿은 여자에게 복이 있도다 주께서 그에게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리라(눅1:45)
And blessed is she that believed: for there shall be a performance of those things which were told her from the Lord.
산중의 유대동네는 높은 의식의 세계를 가리키는 것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의 인식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이 내용은 높은 영의세계에서 일어난 일로 보는 것이 보다 합리적일 것 같습니다.
사가랴는 아비야 반열에 들은 제사장이며 아비야의 뜻은“내 아버지는 야혜시다”이고 엘리사벳은 “하나님은 나의 맹세”입니다.
사가랴와 엘리사벳은 세례요한의 부모로서 마리아와는 친척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액면으로만 봐도 이두사람은 상당히 영적인 사람들임을 알 수 있지요.
그런데 이 내용을 상세히 살펴보면 태중의 아이들이 서로가 알아보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이것은 단순하게 육신의 차원에서의 일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에 대해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43절은 말해줍니다.
또한 하나님이신 성령에 대해 제대로 믿게 되면 이심전심으로 통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45절에 이와 같은 연극이 이루어 질것이라 한 것은 (shall be a performance of those things) 이 내용을 액면대로 볼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봐야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겁니다.
그렇지만 분명한 사실은 태중의 아이라 할지라도 의식이 있다는 것이며 특히 성령으로 말미암아 태어나는 아이는 이미 생의 목적을 가지고(운명을 가지고) 태어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성경말씀을 통해 알아야할 중요한 일은 예수와 요한이 태어나게 된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례요한의 아버지 사가랴(스가랴)는 제사장이었고 어머니인 엘리사벳도 영적인 사람이었으며 예수의 아버지 요셉과 마리아역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었다는 거지요.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을 찬양하며(유대인) 살아가는 이들이었기에 성령이 임하시기에 충분한 자격을 갖추었던 겁니다.
가끔씩 주변을 둘러보면 자식걱정을 많이 하는 부모들을 보게 됩니다.
도대체 저놈은 누구를 닮아서 저모양인가를 말하며 자식 타박하는 부모들이 많은데 다시금 잘 생각해봐야 합니다.
자식이 잘못되었다면 본인의 잘못이 크다는 점을 알아야한다는 말입니다.
부모 닮지 않는 자식이 없다 했는데 자식욕을 하면 본인 욕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은 흔히들 개천에서 용 난다는 말을 쉽게 하지만 이 같은 말은 어디까지나 물질적인 시각에서 나온 말일뿐 영적인 것은 아닙니다.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고 출세한 이들을 가리켜 이런 말을 하지만 영적으로 보자면 왕대밭에 왕대난다는 말이 합당합니다.
7대가 복을 지어야 수행자 한사람이 그 집안에 태어난다 한 것을 보면 구도의 길을 걷는 이가 있다는 것은 그 집안 전체의 복인 겁니다.
취직을 못하고 빈둥거리기만 한다고 타박할 것이 아니라 말썽부리지 않고 착하고 건강하게 살아준다면 고마워해야지요.
일반인들이야 삶의 목표가 물질적인 성공에 있으므로 취직 못한 자식에 대해 원망의 말을 쏟아 내겠지만 적어도 하나님을 믿는 이들이라면 시각을 달리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보모자식간은 어쩌다가 맺어지는 인연이 아니며 영적인 에너지가 통해야만 인연관계가 성립이 됩니다.
부모가 영적인 사람이고 평상시 기도를 많이 한다면 반드시 영적인 아이가 태어날 것이고 아이를 갖고 부부싸움을 많이 하고 화를 많이 냈다면 성질이 못돼먹은 아이가 태어날 겁니다.
드물긴 하지만 어쩌다가 기형아가 태어난 이유를 살펴보면 부모가 아이를 가졌을 때 음식을 잘못 먹거나 약을 잘못 먹어서라고 하는 것만 보더라도 자식의 못난 점만 탓할 일이 아니지요.
나에게 자식이 많지 않아 속을 썩어보지 않아서 인지는 모르겠으나 사람에 대한 평가는 절대적인 기준이 있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좋게 보면 한없이 좋게 볼 수 있으며 나쁘게 보려면 한이 없는 법입니다.
내가 낳은 자식을 내가 좋게 보지 않으면 누가 좋게 보겠습니까.
아이가 태중에 있을 때부터 내가 좋은 본보기를 보여주었다면 아이가 지금보다 더 좋은 상황이 되었을 것이라 생각하면 오히려 미안하게 생각해야지요.
그러므로 자식의 못난 모습이 보이면 탓하기보다 격려와 용기를 주어야합니다.
그리고 한걸음 더 나아가 자식의 내면에도 내안에도 하나님이신 성령이 있음을 인정하고 기도를 한다면 나도 자식도 성령의 보살핌을 받게 될 겁니다.
자식과 내가 동일한 하나님의 자녀 됨을 아는 이만 들으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