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은 우리를 통해 역사하신다.
말을 아주 쉽게 내뱉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분들의 특징은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다는 겁니다.
좋으면 좋다 싫으면 싫다는 표현을 분명하게 하는지라 대하기가 쉬울 때도 있지만 당혹스러울 때도 많습니다.
심할 경우 상대방의 직설적인 말로인해 관계자체가 틀어지는 경우도 있고 보면 마음에 일어나는 생각을 함부로 표현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볼 수도 있지요.
그런데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습관에 길들여진 나를 움직이게 만들려는 신의 뜻이라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언젠가 이런 일을 경험했던 적이 있습니다.
여름에 창문을 열어놓고 지내고 싶은데 모기가 들어오는 것이 걱정이 되어 방충망을 설치하려 마음먹은 적이 있지요.
막상 설치하려고 보니 여간 귀찮은 것이 아닌 겁니다.
우선적으로 치수를 재야하고 창문을 여닫을 때 걸림이 없게 만들어야함으로 고려해야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기에 거의 포기를 하고 살고 있었는데 어머니가 방문하셨습니다.
남의 일에도 참견을 좋아하시는 어머니가 아들의 게으름을 참지 못하고 조목조목 지적하는 바람에 결국 해야만 했지요.
하기 싫어하며 투덜대면서 했지만 알고 보면 이것은 내재하신 성령이 내 어머니를 시켜 나를 움직이게 만든 것입니다.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내재하신 성령은 어머니와 나를 통해 교통하신 겁니다.
이렇듯 현상계에서 일어나는 일은 그저 일어나는 법이 없습니다.
특히 구도의 길에 접어들어 믿음아래 놓인 이에게는 이런 일은 당연하게 일어나며 일어나야만 합니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참지 못할 만큼 어려운 시험이 다가오기도 하는지라 무조건 이렇게 받아들일 것은 아니지만 평소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훈련이 되어 있는 이는 상대방의 말이 성령에 의한 것인지 아닌지를 정확히 간파합니다.
내가 이미 마음먹은 던 것이 상대방의 입을 통해 나오는 것인지 상대방 개인의 생각인지 모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러한 우리의 마음을 알기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잠3:5)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3:6)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지 말지어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악을 떠날지어다(잠3:7)
Be not wise in thine own eyes: fear the LORD, and depart from evil.
성령을 깨달아 안다고 할지라도 육신에 담겨있는 이상 완벽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나만의 하나님이 아닌 우리의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성령이 내안에만 거하시지 않고 상대방의 안에도 거하시며 동시에 삼라만상을 통해 역사하심을 알아야하는 겁니다.
이렇게 하라는 뜻으로 너의 명철(판단력, 이해력)에 의지하지 말라 한거지요.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이신 성령을 네 안에만 가두지 말라는 뜻입니다.
나를 질타하는 상대방의 내면에도 성령이 있음을 안다면 나의 게으름을 지적하는 이는 상대방의 육신이 아니라 성령인겁니다.
하지만 이 같은 일은 상대방이 느끼는 것이 아니라 내가 느끼는 것이며 육신과는 무관하게 이루어지는 것으로 여겨야합니다.
이것이 아니라면 지적하는 사람자체가 하나님이 됨으로 우상숭배의 늪에 빠지게 되기에 극히 조심해야할 부분이지요.
이러한 점을 잘못 받아들이게 되면 내가 하는 말은 성령이 하는 말이라는 소리를 하거나 내가 하나님이라는 말을 하게 됩니다.
이 세상에 수많은 사이비교주가 이러한 과정을 통해 생겨난 겁니다.
이런 까닭에 7절에서 자신의 시각을 지혜롭다 여기지 말고(Be not wise in thine own eyes) 악으로부터 떠나라 했습니다.(depart from evil)
이 말인즉 육을 악으로 규정짓고 내재하는 성령에 의지하라는 뜻입니다.
이러할 진데 자신의 말이 성령의 말씀이라고 함부로 말해서는 안 되는 것이며 받아들이는 사람이 그렇게 느껴야합니다.
하지만 예외의 경우가 있으며 스승과 제자사이라면 다르게 적용할 수 있습니다.
누군가의 스승이 된다는 것은 제자들에게는 하나님과 같은 존재가 되어야 함으로 성령의 입장에 서야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너희가 나를 알았더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요14:7)
빌립이 가로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요14:8)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요14:9)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요14:10)
6절을 보면 예수가 성령의 입장에서 말씀하신다는 것을 확실하게 알 수 있습니다.
만약 이렇지 않다면 예수가 죽고난후 2천년동안 단한사람도 영생을 얻지 못한 것이 되며 예수님이 이 세상에 돌아와야 영생을 얻게 됩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하나님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깨달은 사람이 곧 하나님과 하나 된 이라는 말을 하는 겁니다.(7절)
빌립이 하나님을 보아야 만족하겠다는 말을 한 것은 오늘날의 우리들의 마음을 대변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이라는 절대자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내재하는 성령이 드러난 사람, 즉 인자이신 예수와 같은 이가 하나님과 하나 된 이라는 뜻으로 9절과 같이 말씀하신거지요.
이 같은 일은 예수님과 제자들에게만 적용되는 일은 아닙니다.
10절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시길 자신이 아버지 안에 있다 했는데 예수님만이 하나님 안에 있는 것은 아니며 우리 모두가 하나님품안에 들어있는 겁니다.
또한 하나님 아버지가 우리들 모두의 내면에 들어앉아 있습니다.
이러니 어찌 우리가 예수님과 다를 바가 있겠습니까.
다만 믿음의 차이가 있고 언행의 행사가 다를 뿐이지요.
성령이 드러난 이는 상대방 내면에도 성령이 있음을 앎으로 함부로 말하지 않습니다.
행여 누군가로부터 좋지 않은 말을 들었다 할지라도 똑같이 돌려주지 않는 것은 그이의 안에도 성령이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성령에 대해 믿는 이들만 들으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