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홀로목사

누가복음10.

배가번드 2021. 2. 9.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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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밖에는 봄비가 제법 많이 내리고 있습니다.

이런 날은 왠지 센티맨탈리즘에 빠지는데 이런 기분이 드는걸 보면 아직 나 홀로목사는 젊은가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인생은 60부터라 했고 아직 거기에 도달하지 않았으니 젊긴 젊지요.

게다가 아직도 젊은이들과 비교해서 굼뜨거나 늘어지지도 않았고 힘쓰는 것도 자신이 있습니다.

건축현장에서 일하다 보니 매일같이 운동을 하는지라 건강하지 않을 도리가 없고 즐겁게 일을 하니 심신이 아주 편안합니다.

어찌 보면 너무 건강해서 탈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이상하게 여길지 모르겠지만 에너지가 넘친다는 말입니다.

얼마 전 동료수행자한분도 나 홀로목사와 비슷한 고충(?)을 토로한 적이 있는데 그분은 남성에너지가 넘쳐 곤욕을 치르고 있다 하소연하더군요.

비슷한 나이인데다 건축현장에서 일하는 것도 비슷한지라 신체반응 또한 비슷했습니다.

다만 그분과 나 홀로목사가 다른 점은 에너지를 사용하는 방법입니다.

그분은 인터넷서핑을 하면서 시간을 죽이는 반면 나 홀로목사는 여러분과 함께 성경연구에 에너지를 더 많이 쓰고 있지요.

이것이 그분과 내가 걸어가는 길이 달라지게 만드는 가장 큰 이유인 동시에 많은 이들이 걸어가는 목적지가 달라지는 이유이기도합니다.

이렇게 말해주면 지혜로운 사람은 얼른 알아듣고 자신의 행동을 고치는 반면 어떤 이들은 반발심에 입을 삐죽이며 나 홀로목사가 잘난체한다며 비웃습니다.

하지만 성경을 통해 확인했듯이 자신의 지금 행동은 훗날 반드시 결과가 되어 돌아온다는 것을 알아야하지요.

농부가 농사를 지을 때 얼마나 노력했느냐에 따라 수확이 달라지는 것은 하나의 법칙과도 같습니다.

그런데 어찌 물질을 위해 노력한 것과 영적인일을 위해 노력한 것이 결과가 같을 수가 있겠습니까.

지난시간에도 보았듯이 인과응보의 법칙은 한 치의 오차 없이 적용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목적지가 무엇인지에 따라 가치관이 주어진다는 것을 알기바라며 누가복음 7장속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모든 말씀을 백성에게 들려 주시기를 마치신 후에 가버나움으로 들어가시니라(눅7:1)

Now when he had ended all his sayings in the audience of the people, he entered into Capernaum.

 

1절부터 재미있는 표현이 나오고 있습니다.

백성에게 들려주시기를 마치신후에 했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백성들 중에 듣는 이들입니다.(in the audience of the people)

이는 많은 백성들 가운데 알아듣는 이들(청중,in the audience)에게만 따로 무엇인가를 말씀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런 후에 가버나움으로 들어갔는데 가버나움의 뜻은 “나훔의 마을”이며 나훔의 뜻은 “위로, 동정”입니다.

이렇게 보면 가버나움은 위로와 동정 받는 곳이라는 것을 알게 되며 예수님께서 위로하기위해 가셨다고 볼 수 있지요.

그러면 가버나움에서는 어떤 위로와 동정의 일이 일어났을지 함께 가보겠습니다.

 

어떤 백부장 사랑하는 종이 병들어 죽게 되었더니(눅7:2)

예수의 소문을 듣고 유대인의 장로 몇을 보내어 오셔서 그 종을 구원 하시기를 청한지라(눅7:3)

이에 저희가 예수께 나아와 간절히 구하여 가로되 이 일을 하시는 것이 이 사람에게는 합당하니이다(눅7:4)

 

여러분!

예문을 보고 어떤 생각이 드시는지요.

저는 오늘 진정 놀라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간단한 내용 안에 아주 많은 일들이 담겨있다는 것을 오늘에야 알았기 때문입니다.

먼저 말씀드릴 것은 백부장은 백 명의 군인을 거느리는 장교로서 로마인이며 이방인이라는 사실이지요.

그리고 그가 데리고 있는 종은 이스라엘사람이었으며 그를 아끼고 사랑했다는 겁니다.

정복자로서 군림을 한 것이 아니라 약자인 이스라엘 하인의 안위를 걱정할 정도로 그의 품성은 선하였습니다.(2절)

달리 표현하면 하나님을 따르는 백성(이스라엘)을 사랑하는 사람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예수의 소문만 듣고도 그가 구원자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던 겁니다.

유대인의 장로 몇 명을 보냈다는 것은 믿음이 강해야만 구원의 역사가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백부장이 알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3절)

이런 이유로 장로들이 예수께 간청하길 이 사람의 요청을 들어주십사 말씀드렸던 거지요.(4절)

그러면 어떤 합당한 이유가 있는지 확인해 보겠습니다.

 

저가 우리 민족 사랑하고 또한 우리를 위하여 회당을 지었나이다 하니(눅7:5)

 

백부장이 하나님의 백성(이스라엘민족)을 사랑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며 이스라엘백성을 위해 회당을 짓는 것은 하나님을 찬양하고 찬송할 줄 안다는 말과 진배없습니다.

이러한지라 장로들이 백부장을 칭송해 마지않았던 겁니다.

하지만 백부장이 이러한 사실만 알았던 게 아니라 영과 육의 상관관계에 대해서도 알았다는 것을 다음내용을 보면 알게 됩니다.

 

예수께서 함께 가실쌔 이에 그 집이 멀지 아니하여 백부장이 벗들을 보내어 가로되 주여 수고하시지 마옵소서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나이다(눅7:6)

Then Jesus went with them. And when he was now not far from the house, the centurion sent friends to him, saying unto him, Lord, trouble not thyself: for I am not worthy that thou shouldest enter under my roof:

그러므로 내가 주께 나아가기도 감당치 못할 줄을 알았나이다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눅7:7)

Wherefore neither thought I myself worthy to come unto thee: but say in a word, and my servant shall be healed.

저도 남의 수하에 든 사람이요 제 아래에도 군병이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제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눅7:8)

예수께서 들으시고 저를 기이히 여겨 돌이키사 좇는 무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지 못하였노라 하시더라(눅7:9)

보내었던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가 보매 종이 이미 강건하여졌더라(눅7:10)

 

6절을 보면 백부장이 자신(육신)의 죄인 됨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죄인 된 몸으로 예수님(성령)을 집(육신)에 모실만한 자격이 없다는 거지요.(I am not worthy that thou shouldest enter under my roof)

뿐만 아니라 성령이 드러난 예수님 앞에 설 자격조차 없다 했고 말씀만 해도 하인이 나을 거라고 합니다.(7절)(say in a word, and my servant shall be healed)

이 내용을 볼 때 육신의 한계를 철저히 깨닫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예수님(성령)에 대한 믿음이 확고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8절은 물질세상을 움직이는 법칙에 대해서도 백부장이 확실하게 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상명하복(上命下服)이 물질 세상에 심어진 신의 섭리(攝理)라는 것을 알고 있는 동시에 온 세상을 움직이는 힘이 성령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말씀만 하셔도 종이 나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백부장의 이러한 믿음으로 인해 예수님은 9절과 같이 말씀하셨는데 하나님을 믿는다고 자부하는 이스라엘백성들 중에서조차 이런 믿음을 보지 못했다했지요.

백부장이 비록 이방인(로마인)이지만 성령을 알고 믿는 일에는 이스라엘백성 중 누구보다도 낫다는 말씀입니다.

이러한 믿음으로 인해 종의 병이 나았던 겁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생각해 볼 것이 있습니다.

누가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려고 이렇게 기록해놓았을까요.

나 홀로목사가 보건데 이 내용은 백부장의 믿음으로 인해 그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말해주는 거라 여겨집니다.

그리고 믿는 이의 마음가짐이 어떠할 때 기적이 일어나는가를 말하고자 한 것이기도 합니다.

자신보다는 타인을, 그것도 육신보다는 영을 더욱 사모할 때 원하는 데로 이루어진다는 거지요.

이 내용을 통해 기적만을 본다면 성경을 통해 반만 깨달을 것이고 성령이 온 세상을 움직이는 힘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완전히 깨닫게 될 겁니다.

동일한 내용을 마태복음 12편에서 다루었던 만큼 더 이상 길게 말하지 않겠으며 마태복음 8:5~13),요한복음(4:43~54)을 비교해보면 나 홀로목사의 말을 이해할거라 여기며 진도를 나가겠습니다.

 

그 후에 예수께서 나인이란 성으로 가실새 제자와 허다한 무리가 동행하더니(눅7:11)

성문에 가까이 오실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니 이는 그 어미의 독자요 어미는 과부라 그 성의 많은 사람도 그와 함께 나오거늘(눅7:12)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눅7:13)

가까이 오사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눅7:14)

죽었던 자가 일어앉고 말도 하거늘 예수께서 그를 어미에게 주신대(눅7:15)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 하고 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아 보셨다 하더라(눅7:16)

예수께 대한 이 소문이 온 유대와 사방에 두루 퍼지니라 (눅7:17)

And this rumour of him went forth throughout all Judaea, and throughout all the region round about.

 

위 내용은 누가복음에만 기록된 것입니다.

어찌 보면 누가는 죽은 사람을 살린 예수님의 기적을 높이 평가한 것 같지만 사실 누가의 목적은 따로 있습니다.

사람들이 기적을 보게 되면 기적을 일으킨 사람을 보고 두려워하게 되며 그를 하나님으로 알게 된다는 것을 말하고자 한 겁니다.(16절)

그렇기 때문에 17절에서 위내용이 하나의 소문(this rumour)이라는 것을 말해놓았습니다.

rumour의 뜻은 소문, 풍문, 유언비어 등이지요.

사람들의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바르게 만들어 주기위해 누가는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어 삽입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기적에 매이게 되면 자신 안에 내재한 성령을 깨달을 수 없게 된다는 것을 말하고자 했지요.

지금은 아직 이런 결론에 도달하기 어렵지만 이어지는 내용을 상고하다보면 알게 될 것입니다.

 

요한의 제자들이 이 모든 일을 그에게 고하니(눅7:18)

요한이 그 제자 중 둘을 불러 주께 보내어 가로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하라 하매(눅7:19)

저희가 예수께 나아가 가로되 세례 요한이 우리를 보내어 당신께 말하기를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이를 기다리오리이까 하더이다 하니(눅7:20)

마침 그 시에 예수께서 질병과 고통과 및 악귀 들린 자를 많이 고치시며 또 많은 소경을 보게 하신지라(눅7:21)

And in that same hour he cured many of their infirmities and plagues, and of evil spirits; and unto many that were blind he gave sight.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가서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눅7:22)

Then Jesus answering said unto them, Go your way, and tell John what things ye have seen and heard; how that the blind see, the lame walk, the lepers are cleansed, the deaf hear, the dead are raised, to the poor the gospel is preached.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눅7:23)

And blessed is he, whosoever shall not be offended in me.

 

7장1절부터 17절까지 일으킨 예수님의 기적을 요한에게 제자들이 모두 고했다고 했습니다.(18절)

그러자 요한은 제자들더러 다시 가서 예수께 물어보길 성경에서 예언되어있는 메시아가 당신인지 물어보라했고 제자들이 그대로 물어보았지요.(19~20절)

그때마침 예수께서 많은 병자들을 치료하고 있던 터라(21절) 요한에게 본대로 말해주라 했습니다.(22절)

그런데 이 구절에서 우리들은 되새겨보며 생각해 볼 것이 있습니다.

18절을 보면 요한은 이미 제자들로부터 예수님의 기적을 들어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22절에 새삼스럽게 자신의 기적에 대해 요한에게 말해주라 했을까요.

지혜로운 이는 알아챘겠지만 이 내용은 누가가 후학(後學)을 위해 배려해 놓은 겁니다.

아직 때가 되지 않은 인연들은 액면의 내용만 보도록 하고 뭔가 다른 뜻이 있다는 것을 암시하기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해놓은 기적의 순간들을 차례대로 보면 나 홀로목사의 이 말이 이해가 될 겁니다.

먼저 소경이 본다는 것은 영의 것들을 도무지 볼 수 없었던 이가 영적인 시각이 트였다는 말이고 앉은뱅이가 걷는다는 말은 영적으로 정체되어있던 사람에게 영적인 진보가 있었다는 말이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았다는 것은 깨끗지 못한 가르침에 물들어있던 이들에게 순결하고 거룩한 가르침이 주어졌다는 말이고 귀머거리가 듣게 되었다는 말은 영적인 가르침이 도대체 들리지 않던 사람에게 이해력이 생겨 듣게 되었다는 말이며 죽은 자가 살아났다는 것은 영적으로 죽음에 이르렀던 사람의 영이 되살아났다는 말이고 가난한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는 말은 심령이 가난한 자가 천국복음을 받아들여 영생을 얻게 됨을 뜻하는 겁니다.

어떤가요?

나 홀로목사의 해석이 마음에 드십니까?

아직 이해가 되지 않거나 마음에 만족이 없는 분들은 다음구절을 보시기바랍니다.

 

요한의 보낸 자가 떠난 후에 예수께서 무리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눅7:24)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보라 화려한 옷 입고 사치하게 지내는 자는 왕궁에 있느니라(눅7:25)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선지자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도 나은 자니라(눅7:26)

기록된바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앞에서 네 길을 예비하리라 한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라(눅7:27)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이가 없도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 하시니(눅7:28)

모든 백성과 세리들은 이미 요한의 세례를 받은지라 이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의롭다 하되(눅7:29)

And all the people that heard him, and the publicans, justified God, being baptized with the baptism of John.

오직 바리새인 율법사들은 그 세례를 받지 아니한지라 스스로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니라(눅7:30)

But the Pharisees and lawyers rejected the counsel of God against themselves, being not baptized of him.

 

아!

여러분!

정말 아!라는 소리가 절로 나오게 만드는 내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내용 역시 마태복음 18편에 상세하게 설명해놓았으니 참조하시길 바라며 여기에서는 아주 중요한 부분만 간추려 보겠습니다.

24절부터26절까지의 내용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모여든 많은 이들에게 자신들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상기시켜주고 있지요.

광야에서 소리치는 이(선지자, 메시아)를 만나러 나간이유는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지고 호사스러운 삶을 영위하기위해서가 아니라 영적인 스승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아 영생을 얻기 위함이라는 사실을 알라는 겁니다.

27절은 말라기 3장 1절을 인용한 내용으로서 요한에 대해 설명한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덧붙이길 이세상의 누구보다도 큰이가 요한이라고 했지요.

하지만 영의 세계에서는 지극히 작은 자라 말씀하셨는데 이는 영의 세계는 시공이 없는 세계라는 것을 비유한 겁니다.(28절)

29절은 조금 상세하게 파고들어 봐야할 것 같습니다.

액면대로 보자면 모든 사람들과 세리들은 이미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의롭다했지만 자세히 보면 약간 다른 해석이 필요합니다.

먼저 모든 사람들과 세리들이 예수님이 앞에 말씀하신내용들을 들었다고(이해했다고) 했습니다.(all the people that heard him)

그랬기 때문에(요한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인정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정의롭다했던(justified God)것인데 그저 하나님이 정의롭다는 것을 안 것이 아니라 요한으로부터 이미 세례를 받았기 때문이라 했습니다.

이 말인즉 예수께 모인 모든 사람들과 세리들이 이미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아 하나님의 정의로움을 알고 있었으며 예수님말씀을 듣고 같은 내용이라는 것을 알았다는 말이지요.

하지만 바리새인과 율법사들은 하나님의 말씀(충고,counsel)을 거절하여(rejected)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지 않았습니다.(But the Pharisees and lawyers being not baptized of him)

그이유가 자신들의 것을 고집하였기 때문이었다고 합니다.(against themselves)

성경말씀을 자신들의 마음대로 해석하였기 때문에 요한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자!

여러분!

여기에서 여러분의 믿음의 형태와 지금껏 받아들이고 있던 성경의 지식에 대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오늘날의 크리스천 대부분이 예수를 어떤 존재로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육신에 한정된 존재로 여기지 않는지요.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가 요한이라는 사실과 영적으로 예수님과 하나 된 이라는 사실을 예수의 입을 통해 말을 해주었는데도 불구하고 예수생존당시의 많은 이들이나 오늘날의 크리스천들은 예수를 영적인 존재(성령, 그리스도, 에너지 체)로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아직도 예수가 육신으로 부활할 것을 말하거나 믿고 있다면 그야말로 잘못된 성경해석을 믿고 있는 것이며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는 자들인 동시에 예수님말씀조차 믿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은 나 홀로목사가 사사로이 말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모두가 하나님말씀을 기록한 책이라고 그토록 주장하는 성경을 통해 확인한 내용이라는 것을 명심하기바랍니다.

이미 몇 번에 걸쳐 말씀드렸던 것과 같이 나 홀로목사의 성경해석을 믿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이곳에서는 영생을 얻을 수 없습니다.

성경에 정통하다고 자부하는 바리새인과 율법가는 될 수 있을지언정 영생은 꿈도 꾸지 못할 일이라는 것을 말씀드리며 진도를 나가겠습니다.

 

가라사대 이 세대의 사람을 무엇으로 비유할꼬 무엇과 같은고(눅7:31)

비유컨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서로 불러 가로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을 하여도 너희가 울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눅7:32)

 

보시다시피 예수께서도 믿지 않는 사람들을 꾸짖고 있습니다.

자신과 제자들이(아이들이) 세상에 나가(장터에 앉아) 천국에 갈수 있다고 말해주어도(피리를 불어도) 좋아하지 않고(춤추지 않고) 지금처럼 살면 지옥 간다 말해도(애곡을 해도) 심각하게 여기지(울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지요.

그리고 또 말씀하시기를,

 

세례 요한이 와서 떡도 먹지 아니하며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매 너희 말이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눅7:33)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너희 말이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눅7:34)

지혜는 자기의 모든 자녀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눅7:35)

 

먼저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진 메시아 요한이 왔을 때, 떡도 먹지 않고 포도주도 마시지 않는걸 보며 귀신들린 사람처럼 여기더니(33절) 지금은 인자(예수, 그리스도)가 와서 먹고 마시자 걸신들린 듯 먹고 술고래인데다가 세리와 죄인의 친구 같다 말한다고 했지요.(34절)

이 말씀인즉 성령을 깨달은 사람이 특별한 행동을 하면 귀신들렸다고 하고 일반인과 똑같이 행동하면 자신들과 별 다를 바 없음을 비웃는다는 말입니다.

이 내용은 나 홀로목사로서는 격하게 공감하는 내용이지요.

특이한 식생활로 인해 많은 이들로부터 놀림을 당해보았기에 이해가 됩니다만 예수님의 이 말씀은 성령을 깨닫는 것은 먹고 마시는 것과 무관하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성령을 깨닫게 되면(지혜를 얻게 되면) 성령이 깨어난 자들을 알아보게 된다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35절)

불교에서 말하길 크게 깨치고 나면(확철대오) 부처 아닌 것이 없다고 말했는데 바로 예수님의 이 말씀과 동일합니다.

성령을 깨닫고 나면 모든 이들 안에 성령이 들어있음을 알게 된다는 말이며 성령이 드러난 사람을 정확하게 알아본다는 말입니다.

참 지혜로운 비유의 말씀인 것 같습니다.

다음의 가르침이 기대되는군요.

 

바리새인이 예수께 자기와 함께 잡수기를 청하니 이에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가 앉으셨을 때에(눅7:36)

And one of the Pharisees desired him that he would eat with him. And he went into the Pharisee's house, and sat down to meat.(KJV)

 

위 내용은 조금 심도 있게 들여다봐야할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가 앉으셨을 때 그냥 앉으셨던 것이 아니라 먹기 위해(고기를) 앉은 것으로 기록되어있기 때문입니다.(sat down to meat)

그런데 가만히 살펴보면 앞서 바리새인이 예수께 함께 먹기를 청했다고 했으니 구태여 뒤에다가 먹기 위해 앉은 것으로 기록할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니 여기에는 반드시 뭔가 담겨진 뜻이 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영어 meat를 찾아보니 그 뜻이 고기 외에도 골자, 알맹이 등이 있더군요.

이렇게 적용해서 해석해보면 예수께서 바리새인과 함께 식사하는 중에 가르침의 정수(골자, 알맹이)를 말씀해주셨다가 됩니다.

그러면 어떤 가르침이 주어졌는지 함께 보시죠.

 

그 동네에 죄인인 한 여자가 있어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으셨음을 알고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와서(눅7:37)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으니(눅7:38)

예수를 청한 바리새인이 이것을 보고 마음에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더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 하거늘(눅7:39)

 

예문의 전체 내용을 볼 때 37절에 바리새인이라 기록한 것은 율법에 능통한사람에게 주는 가르침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리새의 뜻이 “분리된 자”이니 그들은 율법주의자로서 성경에서 깨끗지 않다 여겨지는 모든 것으로부터 자신을 철저하게 분리하는 자들이지요.

그런 그들이라 죄 많은 여인을 좋게 여길 리 없었습니다.

그러니 여인이 예수님의 발을 눈물로 적셔 자기머리털로 씻고 입을 맞추고 향유까지 붓는걸 보고 마음속으로 의심하게 되었던 겁니다.

그 마음을 읽고 있던 예수님은 다음과 같은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시몬아 내가 네게 이를 말이 있다 하시니 저가 가로되 선생님 말씀하소서(눅7:40)

가라사대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눅7:41)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저를 더 사랑하겠느냐(눅7:42)

시몬이 대답하여 가로되 제 생각에는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니이다 가라사대 네 판단이 옳다 하시고(눅7:43)

 

위내용 전체를 보게 되면 빚을 많이 지고 탕감 받은 사람이 적게 진 사람보다 하나님을 더 많이 사랑한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여기에는 깊은 뜻이 담겨있습니다.

40절에 시몬아 한 것은 바리새인의 이름이 아니라 가르침을 받는 자, 즉 하나님(예수님)으로부터 응답을 받는 자(시몬의 히브리어 뜻)를 뜻합니다.

41절에 빚 주는 사람은 하나님을 가리키며 빚진 사람은 세상 사람들을 비유한 겁니다.

그리고 42절에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준다는 말은 하나님이 누군가에게 무엇인가를 주거나 돌려받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우리스스로가 죄라고 규정지었기 때문에(세상의 법도, 율법) 죄가 되는 것이며 우리에게 죄인식이 생긴 때문이라는 거지요.

하지만 우리가 규정지어놓은 죄 인식에 따라 죄가 생성되었으므로 그것이 명백히 죄업으로 우리자신 안에 자리매김하였고 그것을 씻기 위해서는 반드시 과정을 겪어야만 하는데 그 같은 일을 하는 것이 영적스승의 역할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거지요.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이르시되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 오매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씻었으며(눅7:44)

너는 내게 입맞추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눅7:45)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눅7:46)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눅7:47)

이에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죄 사함을 얻었느니라 하시니(눅7:48)

 

가르침을 받는 자여(시몬아) 보고 있느냐 했습니다.

성경의 율법에 능통하여 하나님을 안다고 자부하는 너는 내가 네 집에 들어와도 발 씻을 물도 주지 않았으나 죄 많은 이 여인은 자신의 눈물로(참회의 눈물, 회개) 내발을 적시고 내발에 입 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다(성령으로 인식함) 했지요.

그리고 너는 머리에 감람유조차 붓지 않았지만 여인은 그 비싼 향유를 발에다 부었다고 말씀하셨는데 이 말씀인즉 예수님을 온전히 하나님으로 인정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당연하게 여인의 많은 죄가 사해졌다는 말씀을 하셨으며 하나님을 많이 사랑할수록 죄 사함도 더 많이 일어난다고 했습니다.

죄 많은 여인의 행위는 그야말로 대단한 것인데 스스로가 죄인이라는 것을 인식하고(육신의 한계를 깨달음) 성령을 알아보았고(예수님을 찾아옴) 자신의 죄를 뉘우쳤고(눈물로서 예수님 발을 씻고 자신의 머리털로 발을 닦음) 예수님을 육신으로 대하지 않고 내면의 성령으로 인식하였기 때문에(발에 입맞춤) 죄 사함을 받게 되었던 겁니다.

이것이야말로 깨달음의 정수이며 골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적으로 깨달은 스승을 대하는 마음자세가 이러할 때 죄 사함이 일어나는 것이지 육신에다 초점을 맞추게 되면 우상 숭배자에 지나지 않게 된다는 걸 알아야합니다.

오늘날의 많은 크리스천들이 우상숭배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명백한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이어지는 내용은 이 같은 나 홀로목사의 말이 옳다는 걸 증명해주고 있습니다.

 

함께 앉은 자들이 속으로 말하되 이가 누구이기에 죄도 사하는가 하더라(눅7:49)

 

여기에서 함께 앉은 자들은 바리새인들 및 여러 사람들일 것인데 그들은 아직도 예수의 진면목을 볼 수 없는 자들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이런 반응들을 하는 거지요.

함께 식사를 하고 마시는지라 자신들과 조금도 다음 없는 일반인이라는 것을 보고 있으니 죄 사함의 능력이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 겁니다.

자신들의 지혜가 막혀 성령을 드러낸 사람을 알아볼 수 없다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예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해주셨지요.

 

예수께서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니라(눅7:50)

And he said to the woman, Thy faith hath saved thee; go in peace.

 

이 내용을 자세히, 심도 있게, 차분하게, 들여다보기 바랍니다.

예수께서 내가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하신 것이 아니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가라하셨습니다.

죄 많은 여인의 믿음이 자신을 구원케 만들었다는 말이지요.

그리고 마지막에 평안히 가라에 해당하는 영어go in peace를 직역해보면 평화 속으로 가라가되는데 이 말씀은 자유로워져라 로 해석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구원은 대 자유를 얻는 것이자 영생을 얻는 것이며 하나님과 하나 되는 영광의 순간입니다.

그런 이유로 이것은 성령과 하나 되었다고 선언하는 하나님으로부터 내리는 축복의 말씀이라 할 수 있으며 여인은 영생을 얻은 것이 확실합니다.

예문으로 올린 37~50절까지의 내용은 누가복음에만 있는 내용으로서 누가의 지혜가 번뜩이는 아주 훌륭한 가르침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느끼실지 모르겠지만 나 홀로목사의 눈에는 누가야말로 대단히 지혜로운 인물로 보입니다.

오늘날의 크리스천들은 이 내용을 보고 육신예수를 더욱 신격화하는데 열을 올리겠지만 정말 담긴 뜻은 따로 있습니다.

예수생존 당시만 하더라도 구약을 믿고 있는 시대였고 모든 성경해석과 율법은 그 당시 율법학자나 바리새인 및 서기관들에게 달려있었지요.

그런 가운데 한사람의 젊은 청년에 불과한 예수가 그 당시 이스라엘사회에 만연한 성경말씀과는 전혀 다른 혁신적인 가르침을 펼쳤던 겁니다.

그러한 시대적 상황에서 예수의 가르침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부장이나 죄 많은 여인이 보여준 믿음은 그야말로 대단한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을 말해주는가 하면 그들의 내면에 자리하는 성령이 깨어나기 시작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육신이 아니라 성령으로 알아볼 수 있었으며 그렇게 큰 믿음을 보여줄 수 있었던 거지요.

그들이 충분히 지혜롭지 않았더라면 바리새인들이나 율법가들과 다를 바 없었을 것이며 구원받지 못했을 겁니다.

누가는 이점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죄 많은 여인을 등장시켜 믿음의 중요성과 성령을 대하는 태도에 대한 것을 말하고자 했습니다.

누군가 성령을 드러낸 사람을 대할 때 그 사람에게 역사하는 성령에 대한 믿음을 크게 하면 할수록 자신의 내면에 거하는 성령이 크게 드러나게 된다는 하나의 법칙을 말해주고자 했던 거지요.

언젠가 나 홀로목사가 말하길 상대방은 언제나 나의 거울이라고 한 것이 바로 이러한 뜻입니다.

상대방에게서 고귀한 점을 보는 것은 나의 시각이니 상대를 통해 나의 내면이 비춰지는 겁니다.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시절인연이 도래하여 예수와 같이 제대로 된 스승을 만날 경우 입니다.

소위 말하는 사이비교주에게 매여 사육당하는 짐승처럼 취급받는 이들에게 적용될 말은 아니지요.

자신이 좋은 인연을 심었다면 좋은 스승을 만날 것이고 악연을 심어놓았다면 사기꾼 같은 스승을 만날 것이니 모든 것은 자신이 만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곳을 방문하시는 여러분은 하나님의 축복을 제대로 받은 이들이며 나 홀로목사는 하나님의 입의 역할을 하는 하나님의 종일뿐입니다.

부디 여러분이 이 같은 점을 인식하시고 더 이상 우상숭배의 오류에 빠져 있지 말고 대 자유를 향해 비상하실 것을 바라며 7장의 문을 닫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