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생각 긴여운

풍랑을 잠재우신 예수.

배가번드 2023. 8. 13. 0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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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가뭄 끝에 비가 내리면 사람들 모두는 좋아합니다.

그렇지만 처음에는 좋아하다가 조금 많이 내린다 싶으면 걱정을 하게 되고 심하게 많이 오면 하늘에 구멍이 났나보다며 하늘까지 원망하게 됩니다.

이런 가운데 어느 날인가 갑자기 해가 나오면 반색을 하며 하늘의 축복에 감사를 드리게 되지요.

하지만 이렇게 감사하는 마음도 잠시일 뿐 또다시 햇빛아래 뜨거운 날이 지속되면 감사의 마음은 달아나버리고 원망이 그 자리를 차지합니다.

사람의 감정이라는 것은 항상 이런 식이기에 사람마음만큼 간사한 것이 없다 말하는 겁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마음의 변화를 나무날수만은 없습니다.

좋으면 좋다하고 싫으면 싫다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기에 이러한 변덕스러움이 잘못되었다고 단정 짓는 것은 변화하는 날씨를 나무라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지요.

날이 맑았으면 하는 사람에게는 비가 원수 같겠지만 가뭄 끝에 비를 맞이한 사람에게는 축복임으로 변화무쌍한 날씨를 나무랄 필요가 없는 겁니다.

그저 비가 오면 오는 대로 해가나면 해가 나는 대로 받아들이면 됩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보자면 홍수가 나서 피해를 입기도 하고 가뭄 끝에 막심한 피해를 보기도 하는지라 마냥 좋게만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 세상살이입니다.

그러므로 날씨에 대한 반응은 개인에게 달린 것이며 누군가의 불평불만을 제삼자가 판단할 문제가 아닌 거지요.

이것은 어디까지나 개인의 업장과 연관이 있으며 본인의 수행력과 인식의 폭의 문제라 할 수 있습니다.

똑같은 날씨를 마주하고 있지만 마음상태는 판이하게 다릅니다.

여기에 대해 성경은 아주 상세하게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배에 오르시매 제자들이 좇았더니(마8:23)

And when he was entered into a ship, his disciples followed him.

바다에 큰 놀이 일어나 물결이 배에 덮이게 되었으되 예수는 주무시는지라(마8:24)

And, behold, there arose a great tempest in the sea, insomuch that the ship was covered with the waves: but he was asleep.

그 제자들이 나아와 깨우며 가로되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마8:25)

And his disciples came to him, and awoke him, saying, Lord, save us: we perish.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하시고 곧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신대 아주 잔잔하게 되거늘(마8:26)

And he saith unto them, Why are ye fearful, O ye of little faith? Then he arose, and rebuked the winds and the sea; and there was a great calm.

 

예수를 따라 배에 올랐다는 것은 성령이 깨어나신 예수 같은 분을 따라 영적인 길을 가게 되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23절)

24절에 바다는 세상을 비유한 것으로 거대한 폭풍은(a great tempest) 삶속에서 마주하는 온갖 풍상(風霜)을 뜻하며 영적인 길을 걸어감에 있어 세파의 시달림을 당하게 되었지만 성령이 깨어나지 않았다는 것을 예수가 잠들어 있다는 것으로 표현한 겁니다.

구도자가 영적인 길을 걸어감에 있어서 마주하는 세상을 바다와 배에 비유한거지요.

25절은 일반적인 믿음의 형태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처음 구도(求道)의 길을 걸을 때는 신에게 의지하며 신께 기도를 하게 됩니다.

당면한 어려움을 신에게 호소하며 고통스러운 현실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 기도합니다.

바로 이와 같이 기도하는 행위를 예수께 나아와 구해 달라 한 것으로 묘사한 겁니다.

여기에서의 예수는 육신이 아니라 성령으로서 우리의 몸 안에 잠들어 있는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우리들이 신앙생활을 함에 있어 믿음의 대상에게 기도할 때 초발심에는 높은 하늘에다 초점을 맞춥니다.

아니면 예수님과 같이 성령이 드러난 영적스승에게 자신의 원하는 바를 기도하게 되지요.

이렇게 기도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내면에 거하는 성령을 모르고 있거나 알아도 깨어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죽음에 이르게 되었을 때는 그야말로 큰일이므로 소멸된다는 표현을 했습니다.(we perish)

사람들이 만약 영의 세계에 대해 모르고 육신을 자신의 전부로 알게 되면 육신이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 모든 것이 끝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겁니다.

제자들의 이러한 기도에 대해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해 믿음이 없는 자들이라 호통을 칩니다.

예수께서 이렇게 제자들을 꾸짖은 것은 평소에 세상을 마주하는 마음자세에 대해 가르쳐 주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가르침을 제자들이 제대로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이렇게 화를 냈던 겁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평상시 가르침은 무엇이었을까를 생각해봐야 합니다.

앞서 예문을 통해 보았듯이 예수님은 제자들과 달리 성령이 깨어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이신 성령에 대해 알뿐만 아니라 성령이 깨어나 타인들에게 성령을 심어줄 권한을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그리스도였지요.(그리스도의 뜻은 기름부음을 받은 자)

그래서 항상 가르침이 일정했으며 세상을 따르지 말고 성령을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왕국이 너희 안에 있음을 알라하셨으니 성령의 내재함을 알라는 것이 가르침의 핵심입니다.

이렇게 가르쳐주었는데도 제자들이 믿음을 가지지 못하고 세파의 시달림에 속절없이 무너지자 나무란 겁니다.

이러한 점을 제대로 인식하려면 우리 삶을 들여다보면 확실하게 인식할 수 있습니다.

보통의 경우 우리들이 기도를 할 때는 뭔가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기도의 목적은 물질적이거나 육신적인 것들이 대부분이며 이러한 것들을 통틀어 세상 적인 것들이라 표현합니다.

세상 모든 종교의 신앙인들의 기도제목은 거의가 동일하며 육적이거나 물질적인 것들이지요.

삶속에서 어려움과 고통이 없으면 기도할 생각조차 않게 됩니다.

이러다보니 삶속에서 물질적인 어려움에 봉착하거나 육신적으로 병이 들면 기도를 하게 됩니다.

이번 어려움만 해결해주시면 앞으로 어떤 식으로 살겠다는 식의 기도를 하지만 막상 어려움이 해소되거나 감소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약속을 지키지 않습니다.

평상시 생활이 안정이 되고 자신의 계획대로 삶이 흘러가면 기도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리고 나중에서는 신의 존재조차 망각해버리고 맙니다.

하지만 영적인 길을 걷는 구도자는 다릅니다.

영적인 길에서 조금만 멀어지려해도 어김없이 시험이 다가옵니다.

바로 이러한 일들을 바다에서 풍랑을 만난 배에 비유한거지요.

예수와 같이 배에 올랐다는 것은 영적인 항해에 나섰다는 말이며 각종 시험이 온다는 것을 거대한 폭풍에 비유한 것이며 세파에 시달림을 받는다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가 진정 삶의 목표를 영생에 두고 성령이 깨어남을 원한다면 세상적인 것들에 마음을 뺏길 이유가 없는 겁니다.

날씨가 흐리면 흐린 대로의 의미를 찾고 뜨거운 햇살은 햇살대로의 역할이 있음을 자각할 때 그것들이 우리를 괴롭히는 일이 없어짐으로 예수님이 바다와 바람을 꾸짖는다고 말해놓았습니다.

성령이 드러난 이와 그렇지 못한 이의 차이가 있음을 알라는 말이지요.

조금만 힘들어도 신에게 기도를 하고 조금만 좋아지면 자신을 신으로 여기는 위선된 마음을 스스로 볼 수 없다면 아직은 성령과 먼 삶을 살아가고 있음을 알아야합니다.

하지만 일반인들과는 달리 묵묵하게 날씨의 변화를 지켜볼 수 있다면 스스로의 어려움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인즉 신은 우리의 삶에서 한걸음 물러서 지켜볼 것입니다.

따라서 신은 당신의 기도에 응답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한마음이 될 때까지 지켜보고 있습니다.

 

영육이 하나 됨을 깨닫는 자는 들으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