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없기를 바라지 말라.
함께 일하던 동료가 신세한탄을 했습니다.
“형님! 내가 이 짓을 하려고 세상에 태어났나 싶어요.”
땀으로 범벅이 된 얼굴로 쓴웃음을 짓는 그의 넋두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나 역시 이러한 불만을 토로(吐露)했던 적이 있는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내 기억에는 없지만 나도 모르게 신세한탄을 한 적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한증막 같은 곳에 쭈그리고 앉아 땀을 콩죽같이 흘리며 일하는 것이 얼마나 힘이 들었으면 저런 말을 할까 싶은 마음도 들었지만 한편으로는 잘못된 생각을 고쳐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무슨 소릴 합니까. 우리가 누구를 속이고 이익을 챙기지도 않고 누군가를 이용하거나 나쁜 짓을 하지도 않으며 오로지 본인의 노력만으로 살아가고 있는데 자랑스럽게 생각해야지요.”
나 역시 힘이 들지만 현실을 받아들이는 방식이 다르다보니 이렇게 말에 차이가 났던 겁니다.
처음 현장에 올 때부터 여기저기 아프다는 말을 했고 지금도 가끔씩 근육 치료를 받는다고 하소연 했던 만큼 자신의 신세한탄이 자연스럽게 나왔을 거라 생각됩니다.
불과 3년 전만 하더라도 나 역시 심한 근육통으로 힘들어 했었기에 이양반의 하소연이 남의 일 같지가 않았지요.
체조시간에 한쪽 팔이 올라가지 않았고 손이 뒤로 돌아가지 않을 정도로 심하게 아팠지만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이겨냈던 것은 이모든 순간을 신이 주시는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누구도 하지 않으려고 하는 부레카 작업을 일 년 이상 혼자서 하면서도 불평하지 않았고 남들보다 더 많이 해낼 수 있었던 것은 신의 도움이 있었다고 확신을 하고 있습니다.
평상시에는 심하게 아프던 팔이 이상하게 일을 하면 아픔을 느낄 수 없었고 갈수록 통증이 줄어드는 겁니다.
이독제독(以毒制毒)이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오십 견으로부터 탈출한 것만은 분명합니다.
대신 냉증으로 고생을 했고 지금도 냉증치료를 하는 중입니다.
수년 동안 치료를 했는데도 불구하고 완치가 되지 않고 있으며 오히려 힘든 일을 하는 요즘 신체의 변화가 빠르게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있지요.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심하게 땀을 흘리고 나면 기분이 좋아지고 냉증이 줄어드는 느낌이 들고 있습니다.
사실 치료를 하는 동안 몇 사람으로부터 충고 아닌 충고를 들어야만 했는데 이 또한 내게는 아주 기분 좋은 일로 작용합니다.
네가 성령을 깨달았다면 육신이 병들지 말아야하고 적어도 자신의 몸은 스스로 치료할 수 있어야하지 않겠냐는 말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좀 더 적나라하게 표현해서 신이 네 안에 있고 깨어났다면 어찌 네 몸의 병이 낫지 않는가라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겁니다.
직접적으로 말은 하지 않고 이런 치유방법이 있고 저런 사람이 용하다는 말을 했지만 내게 전달되는 느낌은 그러한 말을 하고 있었으며 네가 말하는 신은 너 자신조차도 구원하지 못한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거지요.
여기에 대해 성경은 정확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가로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눅22:39)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가로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눅22:40)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눅22:41)
가로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하니(눅22:42)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눅22:43)
아마 기독교인들은 이 내용으로 예수님의 특별함을 말할 겁니다.
그렇지만 알고 보면 그렇지가 않으며 함께 십자가형을 받은 죄수조차 영생을 얻을 수 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본인의 지은 죄는 육신이 갚아야 한다는 점을 확실하게 알고 있으며 예수님이 육신이 아니라 성령으로 이 땅에 임하신 인자라는 사실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보다시피 똑같이 십자가형을 받고 있지만 예수님은 본인의 역할에 의해 십자가에 매달렸음을 알고 있으며 이러한 예수님을 보면서 느끼는 점이 사람마다 다름을 보여주고 있지요.
한 죄인은 육에 속한 사람으로서 예수가 성령이 드러난 사람이라면 기적을 행사하라는 말을 하고 있고 또 다른 사람은 육과 영의 일을 알아서 인자이신 예수를 하나님과 하나 된 분으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생각해볼 점은 만약 예수님이 십자가형에 처해지지 않았다면 이 장면이 연출되지 않았을 거라는 사실입니다.
스스로가 충분히 피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육신으로 재앙을 받아낸 것은 바로 이 장면을 연출하기위해서 이었던 겁니다.
만약 예수님이 기적을 행사하여 육신적으로 완벽함을 보이거나 물리적으로 완전함을 보여주었더라면 사람들은 영원히 신과 하나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합니다.
그저 우상 숭배자의 위치에 머물러야하며 성령과 하나 되어 영생의 하늘에 올라 하나님우측에 앉는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 되고 맙니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병이 없기를 바라서는 안 되며 육신이 완전해지기를 바라서도 안 됩니다.
육신은 그저 껍데기에 불구하고 내재하신 성령만이 우리의 진짜 주인임을 깨달아야한다는 말이지요.
예문에 등장하는 죄인 중 한사람은 예수님을 칭송해서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라 본인의 인식레벨이 이미 성령에 대해 정확히 알고 있을 정도로 높았습니다.
41절을 통해 말했듯이 육신을 자신으로 알고 있는 사람은 당연히 죄에 대한 벌로서 재앙을 불러들이지만 성령을 깨달은 사람은 목적이 따로 있기 때문에 고난과 역경을 당한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알고 있는 겁니다.
예를 들어 성령에 대해 아는 이가 갑자기 몸이 아파 수술을 했다고 쳤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이 본인의 병 하나도 제대로 못 고치는가를 말하게 되겠지만 여기에는 일반인들이 알 수 없는 인과의 작용이 숨겨져 있습니다.
과거 전생에 누군가에게 치료를 해준 적이 있다고 가정했을 때 그러한 일에 대한 응보(應報)를 받아야만 합니다.
잘한 일은 잘한 대로 못한 일은 못한 대로 돌려받게 된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되려면 몸이 아파야 하고 수술을 받으려는 마음을 먹고 수술을 받게 되는 겁니다.
결과가 좋다면 내가 좋은 인과를 맺어놓은 것이고 나쁜 결과가 왔다면 과거의 내 잘못을 갚은 것이 됩니다.
성령을 깨닫지 못한 사람은 결과가 나쁘면 수술한 의사를 욕하겠지만 성령에 대해 알고 있는 이는 어떤 결과도 감내(堪耐)하며 본인 탓으로 돌립니다.
뿐만 아니라 한발 더 나아가 나쁜 결과가 온 것으로 내 잘못을 갚을 기회를 주신 하나님이신 성령께 감사의 기도를 올릴 겁니다.
성령이 내재함을 안다면 이렇게 기도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런 이유로 더운 날씨에 일을 하게 만드신 것과 아직도 일할 수 있는 몸을 허락하신 성령께 감사를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