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생각 긴여운

육신의 명철과 영의 지혜.

배가번드 2023. 9. 2. 0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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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를 가기위해 집을 나서는데 하늘이 비가 올 것처럼 흐려있었습니다.

버스를 탈까하다가 비가 오면 비를 맞을 각오를 하고 오토바이를 타고 갔지요.

그런데 가는 도중에 마스크가 바람에 날아가 버리는 겁니다.

마스크가 없이 교회에 들어갈 수는 없는지라 다시 집으로 돌아가 다른 마스크를 하고서 참석을 했습니다.

그 바람에 찬송 듣는 시간을 놓치게 되었지요.

평상시 같으면 조금 일찍 들어가는데 이번에는 지각을 한 셈입니다.

사실 교회를 가기로 마음먹고 집을 나서는 순간부터 갈등은 시작이 되었는데 구름 낀 하늘을 보면서 버스를 탈까 오토바이를 탈까 고민을 했던 것은 출발시간을 너무 타이트하게 잡아 놓았기 때문이었습니다.

30분전에 출발하면 될 것을 미리 오토바이 탈것을 예상해서 15분전에 나섰던 겁니다.

이렇게 두뇌로 판단하고 계획을 세우자 신은 어김없이 나에게 시험을 준거지요.

마스크가 바람에 날아가는 순간 신이 교회를 가지 말라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잠시하게 된 것이 바로 시험이라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언제나 그렇듯이 목표가 정해지면 어김없이 시험이 다가 옵니다.

교회를 가겠다고 마음을 먹는 순간부터 방해요소가 생길 수 있으며 말씀을 듣는 도중에 시험이 올수도 있습니다.

평상시 아무렇지 않던 마스크가 거짓말처럼 바람에 날아가 버린다는 점만 보더라도 이 같은 일은 신이 주시는 시험이라 볼 수 있는 겁니다.

물론 이것은 우연히 일어나는 일이라고 볼 수도 있고 가지 말라는 신의 신호로 해석할 수도 있지요.

내가 신의 시험이라 단정 짓는 것은 교회 가는 것을 목표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일단 목표가 설정되고 나면 그 목적지에 다가서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방해요소는 모두가 시험으로 봐야합니다.

솔직히 교회를 한번 안나가간다고 해서 큰일이 나는 것은 아닙니다.

동생하고 약속한일을 취소하는 메시지를 보내면 될 일이지요.

하지만 나 자신과의 약속을 어기는 일은 결코 작은 일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내면에 성령을 담고 있음이 확실하다면 개인 간의 약속조차 신의 뜻으로 봐야하는 것이며 정말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약속은 지켜져야만 하는 겁니다.

약간의 어려움이 온다고 해서 약속파기를 즐겨한다면 믿음이 성장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합니다.

더군다나 성령과 함께한다고 자부하는 사람이 누군가와 약속을 했다면 그것은 더 이상 개인의 약속이라 할 수가 없으며 신의 대리인 자격으로서 약속을 한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정말 어찌할 수 없는 지경에 처해진 것이 아니라면 반드시 약속을 지켜야만 하며 날씨나 마스크 따위가 약속파기의 원인이 되게 해서는 안 되는 거지요.

비록 교회목사님 교리가 나와 맞지 않는다 할지라도 일단 가기로 마음먹게 되고 약속을 한 것은 이유가 있으며 해야만 하는 일이 됩니다.

도착과 동시에 내 귀에 들려온 목사님 기도는 내말이 맞는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었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 성령이 함께 하심을 믿으며......”

 

우리가 가끔씩 누군가의 말을 들을 때 신이 그분의 입을 통해 역사하심을 느낄 때가 있지요.

목사님이 하나님이신 성령이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믿게 되면 성령의 에너지는 함께 하기 마련입니다.

성령에 대해 믿음이 크다면 본인도 모르게 성령의 임하심이 작용하여 이심전심이 일어나게 될 것이 분명합니다.

그날 준비해온 자료가 화면에 뜨지 않아 몇 번이나 보조하는 분이 단상에 올라와야만 했었지만 말씀이 끝나고 박수소리가 평소보다 크게 들린 것은 결코 우연히 일어난 일이 아니라 생각됩니다.

겉보기에는 정리되지 않은 것 같고 뭔가 허술해 보였지만 이분의 말씀 속에는 성령에 대한 믿음이 가득했고 무엇보다도 겸손이 묻어 있었습니다.

언성을 높이지도 않았고 준비해온 자료가 다른 목사님보다 정리된 것은 아니었지만 타종교에 대한 비방이나 비난이 없었을 뿐 아니라 신 앞에 겸손을 보이는 자세가 단연 돋보였지요.

어찌 보면 소극적으로 보일수도 있지만 모든 사람의 내면에 자리하는 성령을 감동시키는 연설을 한거라 생각되었으며 그 결과로 큰 박수가 나왔던 겁니다.

다른 이의 눈에 어떻게 보였을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 눈에는 이렇게 보였다는 말입니다.

언제나 그렇듯이 성령의 임하심은 인간두뇌의 범주를 벗어납니다.

사람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성령의 임하심이 일어남으로 우리가 함부로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지요.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잠3:5)

Trust in the LORD with all thine heart; and lean not unto thine own understanding.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3:6)

 

얄팍한 두뇌의 작용은 언제나 육신의 편안함을 추구합니다.

그래서 번번이 시험에 굴복하고 주저앉게 만듭니다.

작은 어려움이 다가와도 넘지 못하고 온갖 핑계를 대곤 합니다.

이번에 나 역시 이러한 일을 경험한 셈입니다.

교회를 가다가 넘어져 무릎이 까져 피가 난다해도 갈 것인데 마스크 벗겨진 일을 핑계로 가지 않는다는 것은 내재한 신을 욕되게 하는 짓이라 생각됩니다.

그런데 성경을 인용하면서 한 가지 새롭게 발견한 내용이 있습니다.

같은 잠언3장에 기록된 내용으로 함께 보도록 하지요.

 

지혜를 얻은 자와 명철을 얻은 자는 복이 있나니(잠3:13)

이는 지혜를 얻는 것이 은을 얻는 것보다 낫고 그 이익이 정금보다 나음이니라(잠3:14)

지혜는 진주보다 귀하니 너의 사모하는 모든 것으로 이에 비교할수 없도다(잠3:15)

 

분명히 5절에는 네 명철에 의지하지 말라했는데 13절에서 지혜와 명철을 얻은 자는 복이 있다 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명철을 상반되게 사용한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지요.

5절의 명철은 두뇌의 차원에서 일어나는 생각을 가리키는 것이고 13절의 명철은 지혜안을 열어 내재한 성령이 드러난 상태를 뜻합니다.

언젠가 말해주었다시피 두 눈을 하나로 만들라는 마태복음의 내용이(영어성경에만 있음) 바로 이러한 상태를 말해주고 있습니다.(지혜안을 여는 방법)

그렇다면 생각이 일어남에 있어서 어떤 생각이 육신의 것이고 어떤 것이 성령의 것인지 어떻게 구분 지을 수 있나 궁금할 겁니다.

생각이 내 육신을 이롭게 하는 것이면 두뇌의 명철이고 영혼을 이롭게 하거나 타인을 이롭게 하는 것이면 성령으로부터 전해지는 지혜로운 명철입니다.

상대방을 잘 이용하여 나를 이롭게 하는 명철은 마귀의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고 타인의 몸 안에도 나의 몸 안에도 성령이 내재함을 알아 주를 대하듯 한다면 그자체로 지혜가 열렸다고 볼 수 있습니다.

15절을 보다시피 육신이 좋아하는 그 모든 것과 지혜를 비교할 수 없다 했으니 지혜는 곧 성령을 뜻합니다.

 

이웃을 자신의 몸과 같이 사랑할 수 있는 이들은 들으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