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홀로목사

누가복음11.

배가번드 2021. 2. 17. 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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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십니까.

나 홀로목사의 성경강해시간에 오신 여러분 반갑습니다.

봄소식이 코끝에 매달린 3월초입니다.

추운겨울이 지나 새로운 꽃이 피듯이 나 홀로목사의 성경강해도 새로운 마음으로 시작하려 합니다.

지난시간 인사말은 간략하게나마 했으니 거두절미하고 본론으로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이 후에 예수께서 각 성과 촌에 두루 다니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반포하시며 그 복음을 전하실새 열 두 제자가 함께 하였고(8:1)

And it came to pass afterward, that he went throughout every city and village, preaching and shewing the glad tidings of the kingdom of God: and the twelve were with him,

시작부터 재미있는 말씀이 담겨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반포하셨다는 말씀은 복음을 전하셨다는 말인데 그저 전한 게 아니라 기쁜 소식(the glad tidings)을 전하였다고 했지요.

하나님왕국을 찾으면 그 모든 것이 더해진다는 성경내용을 생각해보면 이보다 더 기쁜 소식은 없는 겁니다.

그래서 이렇게 기록한 것이며 열두제자가 함께 했다는 말은 이러한 소식을 받아들여 천국의 기쁨을 누린 이들이 있었다는 것을 나타내보이기 위해서입니다.

앞선 시간에 몇 차례 말씀드렸듯이 12는 하나님의 완전한 숫자(성부성자성령)3과 인간의 숫자4가 연합한(3×4) 숫자이지요.

하나님과 완전히 하나 된 이들이 많았다는 것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이렇게 연합된 무리 속에 들어갈 수 있을는지요.

성경을 통해 알아보도록 합시다.

또한 악귀를 쫓아내심과 병 고침을 받은 어떤 여자들 곧 일곱 귀신이 나간 자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와(8:2)

And certain women, which had been healed of evil spirits and infirmities, Mary called Magdalene, out of whom went seven devils,

이 내용은 조금 더 심도 있게 들여다봐야합니다.

악귀를 쫓아냈다 에 해당하는 영어성경을 보면 해석에 약간의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had been healed of evil spirits and infirmities”

evil spirits를 악귀로 해석해서 안 될 것은 없겠지만 보다 현실감 있고 친근감 있게 순화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렇게 강한 표현을 하게 되면 마리아라는 사람이 평범한 사람이 아닌 것으로 되기 때문입니다.

이럴 경우 우리와는 별개의 사람이 되지요.

evil이라는 단어가 악외에도 부도덕한사악한나쁜불길한등을 뜻한다는 것과 spirits 라는 단어가 영으로만 쓰이는 것이 아니라 정신마음원기등의 뜻도 있다는 것을 생각해볼 때 evil spirits는 부도덕한 정신이나 나쁜 마음이라 해도 무방할 거라는 거지요.

이렇게 해석이 되게 되면 이어지는 단어 infirmities는 자연스럽게 번역되어집니다.

한글성경에 infirmities를 병이라고 해석을 하게 된 것이 이어지는 내용의 영향 때문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infirmities의 뜻이 약한허약한가냘픈연약한박약한 등으로 쓰인다는 사실과 앞에 접속사 and가 있음을 감안하면 따로 해석하기보다 evil spirits와 함께 해석해야 마땅합니다.

그렇게 되면 앞 구절의 해석은 “부도덕하고 굳세지 못하고 여린 정신으로부터 치유된” 이 되고 뒤이어지는 일곱 귀신이 나간 자(out of whom went seven devils)와 조화롭게 해석이 됩니다.

부도덕하고 굳세지 못하고 여린 마음의 소유자는 일곱 귀신이 들린 것과 마찬가지라는 결론을 얻게 된다는 거지요.

아마도 이러한 나 홀로목사의 해석을 두고 구태여 그렇게 복잡하게 할 필요가 있을까라는 의구심을 가진 분들이 있을 줄로 압니다만 그렇게만 생각할 문제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연약하고 굳세지 못하고 여린 마음은 귀신에 사로잡힌 것으로 봐야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술담배를 끊지 못한다든지 도박과 여색을 밝힌다던지 하는 행위들은 약한 정신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에 귀신들린다는 것이 특별한일이 아니라는 거지요.

부도덕하고 사악한 마음이 드는 것도 마음 안에서 마귀나 악귀가 작용하기 때문인지라 이렇게 표현해놓은 겁니다.

우리자신의 마음 안에도 여리고 약한 면들이 있으며 마귀나 악귀와 같은 사악하고 부도덕한 품성들이 있다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이렇게 묘사해놓았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또 하나 알아야할 것은 일곱 귀신들로부터 자유로워진 여인의 이름이 마리아라는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거지요.

마리아의 뜻은 가장 높으신 분귀한 분등인데 자신의 연약한 마음을 제어하고(귀신을 쫒아내고영생을 향한 길을 예수와 함께 걸으면 존귀한사람이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어떻습니까?

이제 왜 이렇게 해석해야하는가를 알았을 겁니다.

그러면 다음구절을 볼까요.

또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또 수산나와 다른 여러 여자가 함께하여 자기들의 소유로 저희를 섬기더라(8:3)

요안나의 뜻은야훼께서 은혜를 주신다.”이며 수산나의 뜻은 “백합화입니다.

백합의 꽃말이 순결과 변함없는 사랑이라는 것을 보면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받은 자와 마음이 순결한 사랑으로 넘치는 이들은 자신의 소유물로 예수님을 섬긴다는 말이 됩니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 은혜 속에 사는 이들과 마음이 순순한 자들은 예수님처럼 성령이 드러난 분을 알아보고 하나님처럼 섬긴다는 말이지요.

3절까지 해석한 내용을 종합해서 살펴보면 예수님처럼 하나님왕국을 발견하신분과 같이 되려면 하나님과 완전히 연합하여야하고(12제자마음에 사악하고 부도덕한 면들로부터 자유로워져야하며(일곱 귀신이 나간 자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만큼(요안나마음이 순수하고 깨끗해야(수산나)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되려면 예수님의 가르침이 어떤 것인지를 알아봐야 되겠지요.

함께 예수님 가르침에 집중해 봅시다.

각 동네 사람들이 예수께로 나아와 큰 무리를 이루니 예수께서 비유로 말씀하시되(8:4)

씨를 뿌리는 자가 그 씨를 뿌리러 나가서 뿌릴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밟히며 공중의 새들이 먹어버렸고(8:5)

더러는 바위 위에 떨어지매 났다가 습기가 없으므로 말랐고(8:6)

더러는 가시떨기 속에 떨어지매 가시가 함께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8:7)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나서 백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이 말씀을 하시고 외치시되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8:8)

이 내용은 마가복음 5편에서 다루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때와 지금 느끼는 점은 다를 수 있으니 나름의 해석을 해보기로 하지요.

여기에서 씨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씨이며 씨 뿌리는 이는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말씀을 전하는 메시아를 가리킵니다.

이런 분이 열심히 말씀을 전하지만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하찮게 여기는지라(길가에 떨어짐밟힌다고 했고 공중의 새들이 먹어버렸다는 말은 허공에 대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여서 정작 듣는 사람에게는 도움이 되지 못했다는(새들이 먹어버림것을 말합니다.

말씀을 듣는 이가 소중하게 여기지 않았다는 말씀이지요.(5)

그리고 6절에 바위에 떨어졌다는 것은 너무나 강직한 성품의 소유자를 가리키며 고정관념으로 똘똘 뭉친 굳은 마음을 비유한 겁니다.

이런 사람은 말씀을 받아들이기는 하나 마음속 깊이 받아들이지는 못한다는 말입니다.

또한 7절의 가시떨기는 부정적인마음을 가리키는데 이런 마음의 소유자는 말씀을 듣는 것과 동시에 부정적인 생각도 함께 일어나는지라 믿음이 커지지 않는다는 거지요.

말씀을 듣기는 하되 늘 의심과 부정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더 이상 발전이 어렵다는 겁니다.

그러나 드물게도 좋은 땅에 떨어지기도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어떤 마음이 좋은 마음일까요.

앞서 말한 것과는 반대되는 마음이 좋은 마음이겠지요.

적당한 수분을 머금고 바위나 돌이 없고 해가 잘 드는 땅이 좋은 땅이듯이 매사 긍정적인 마음과 밝은 마음으로 어떤 가르침도 받아들일 줄 아는 마음의 소유자가 많은 결실을 맺게 된다는 말입니다.(8)

어떤가요?

마태복음에서도 이 내용을 다루었고 마가복음에서도 다루었으나 약간씩은 다릅니다.

왜냐하면 그때그때의 상황에 따라 느낌이 다르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궁극적인 가르침의 목적지는 매한가지입니다.

그러면 나 홀로목사가 즉흥적으로 해석한 것과 예수님이 2천 년 전에 해석해주시는 것을 비교해보겠습니다.

제자들이 이 비유의 뜻을 물으니(8:9)

가라사대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다른 사람에게는 비유로 하나니 이는 저희로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8:10)

다음구절로 넘어가기 전 예수님께서 심오한 말씀을 하셨는데 5절에서 8절까지의 내용이 비유로 이루어져있었던 것은 일반인들이 들어도 모르게 하기 위해서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인즉 믿음이 없는 일반인들에게는 이런 말을 해봐야 쓸데없다는 말입니다.

천국의 문은 예수님처럼 깨달은 분을 알아보는 이들에게만 열린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만큼 성령이 드러난 분을 만나는 것은 행운이라는 말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여러분은 복이 터졌습니다.

그러면 복 많은 여러분과 함께 예수님이 해주시는 해석에 집중해보겠습니다.

이 비유는 이러하니라 씨는 하나님의 말씀이요(8:11)

길 가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니 이에 마귀가 와서 그들로 믿어 구원을 얻지 못하게 하려고 말씀을 그 마음에서 빼앗는 것이요(8:12)

역시 예수님은 다르신 것 같습니다.

길가에 있다는 것을 도()라고 해석하셨군요.

도를 깨달음의 길이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말씀을 듣는 것이 깨닫기 위한 과정으로 볼 수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공중의 새를 마귀에 비유했습니다.

영생을 얻는 것이 깨달음을 얻는 것(득도)과 마찬가지라는 것을 안다고 하면 많은 사람들이 다니는 길이란 세상에 널려있는 많은 가르침과 영적스승들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지요.

제대로 된 스승과 가르침을 만난다는 것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비유로서 자신이야말로 제대로 된 영적스승이라는 것을 밝힌 겁니다.

이렇게 보면 성령이 드러나지 못한 스승들은 마귀와(공중의 새같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정말 기가 막힐 노릇입니다.

어쩌면 자기자랑을 이렇게 멋있게 할 수 있는지요.

감탄은 그만두고 다음구절을 보겠습니다.

바위 위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을 때에 기쁨으로 받으나 뿌리가 없어 잠깐 믿다가 시험을 받을 때에 배반하는 자요(8:13)

They on the rock are they, which, when they hear, receive the word with joy; and these have no root, which for a while believe, and in time of temptation fall away.

바위는 굳은 마음을 나타내는 것인데 어찌 보면 좋을듯하지만 그다지 좋지 못하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추측컨대 예수님은 그 당시 유대사람들의 신앙심을 꼬집은 것 같습니다.

오랫동안 구약의 가르침을 제사장들을 통해 들어왔던지라 새로운 가르침을 받아들일 마음자세가 되지 못했다는 거지요.

예를 들자면 일반적인 기독교신자들이 나 홀로목사의 성경강해를 못 받아들이는 것과 마찬가지의 일이 일어난다는 말입니다.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외치는 종파의 사람들과 기타종교를 목숨처럼 아는 사람이 어떻게 나 홀로목사의 이런 해석을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바로 이런 상황을 말씀하신 거라 보면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13절의 마지막 부분에 대한 해석은 약간 수정을 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시험을 받을 때는 배반한다.” 보다는 “시험을 받게 되면 믿음이 약해진다.”로 하는 것이 맞는다는 거지요.(which for a while believe, and in time of temptation fall away)

배반한다는 것은 대상이 뚜렷한 것이라 육신으로서의 예수님을 배반하는 것이 되지만 믿음이 약해진다는 것은 성령으로서의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약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해가 되셨으리라 믿고 다음구절을 보죠.

가시떨기에 떨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니 지내는 중 이생의 염려와 재리와 일락에 기운이 막혀 온전히 결실치 못하는 자요(8:14)

And that which fell among thorns are they, which, when they have heard, go forth, and are choked with cares and riches and pleasures of this life, and bring no fruit to perfection.

딱 봐도 가시떨기는 어려움과 고난을 나타낸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 가지 인생길 가운데 험난한 운명을 타고난 사람을 가리키는데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업장이 두꺼운 사람을 말합니다.

불교적인 표현을 해서 미안하지만 험난한 인생살이를 업장보다 더 좋게 표현할 단어는 없는 것 같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시련이야 있기 마련이지만 어떤 인생은 심하게 꼬여있지요.

이런 사람을 일러 업장이 두껍다고 말하는데 업장의 사전적 의미는 말동작마음으로 지은 죄로 인해 생긴 장애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심은 대로 거둔다는 말과 정확히 일치됩니다.

이런 상황을 예수님께서 아셨기 때문에 이렇게 말씀하신 겁니다.

여기에도 번역상의 문제점이 약간 보이는군요.

마지막 부분에 온전히 결실치 못한다고 한 것은 “영생을 얻지 못한다.”로 해석해야 마땅합니다.

완전한 결실(fruit to perfection)이라 했으니 바로 영생을 뜻하지요.

그런데 우리가 좀 더 깊이 있게 들여다봐야할 것은 예수님 말씀 중에 이생이라는 단어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생(this life)이란 지금의 세상즉 물질세상을 가리킵니다.

사람이 생을 영위함에 있어(go forth) 많은 어려움이 닥치게 되면 그것이 걸림돌이 되어 막힌다는 말입니다.(are choked with cares and riches and pleasures)

결국 이 말씀은 사람이 살아가는데 있어 물질적인 일에 지나친 관심을 기울이게 되면 영생을 얻기가 어렵다는 말이 됩니다.

목적을 영생에다 두지 못할 경우 물질적인 일과 생각에 사로잡혀 더 이상 앞으로 나갈 수 없다는 거지요.

각자가 자신의 삶을 들여다보면 이 내용이 뜻하는바가 뭐라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다는 걸 말씀드리며 다음구절을 보겠습니다.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8:15)

But that on the good ground are they, which in an honest and good heart, having heard the word, keep it, and bring forth fruit with patience.

15절 내용은 아주 중요함으로 번역 문제부터 말씀드려야겠습니다.

착하고 좋은 마음에 해당하는 단어 honest  good 은 정직함과 선함으로 해석되어야합니다.

문장서두에 on the good ground에 쓰인 good은 좋은 이라 해석하는 것이 맞지만 뒤에 나오는 good은 선함으로 해석되어야 한다는 거지요.

정직하고 솔직한 뜻을 가진 honest 가 쓰인 까닭은 이 내용이 아주 영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앞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일반인들이 알아서는 안 되는 비밀스러운 가르침이 여기에 들어있습니다.

좋은 땅은 훌륭한 자질을 가진 구도자의 마음을 비유한 것인데 이런 사람은 이미 마음 안에 성령이 어느 정도 깨어난 상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직하고 선한마음을 가졌다고(which in an honest and good heart)했으며 말씀을 듣고 지킨다고 말한 겁니다.

성령이 어느 정도 깨어나 있으니 하나님과 하나 된 예수님 같은 분을 알아보고 그 말씀을 청종(聽從)할 수 있는 거지요.

이렇게 해석하고 보니 좋은 자질을 가진 수행자가 따로 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비록 성령이 드러나지 않았더라도 어려움과 고난을 참고 이겨내며 믿음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며 자신에게 정직하고 선한이(깨달음을 얻은 이참된 성직자)의 가르침을 순종하여 따르면 영생을 얻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쉽지는 않겠지만 그다지 어려울 것 같지도 않습니다.

어차피 믿음의 길을 걸어가던 아니던 어려움과 고난은 닥칠 것이고 그러한 현실을 받아들이는 마음자세가 영적인 것이 자신에게 훨씬 도움이 될 것입니다.

모든 것은 자신의 선택에 달렸다는 것을 말씀드리며 다음가르침에 집중해 보겠습니다.

누구든지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평상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는 들어가는 자들로 그 빛을 보게 하려 함이라(8:16)

No man, when he hath lighted a candle, covereth it with a vessel, or putteth it under a bed; but setteth it on a candlestick, that they which enter in may see the light.

숨은 것이 장차 드러나지 아니할 것이 없고 감추인 것이 장차 알려지고 나타나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8:17)

For nothing is secret, that shall not be made manifest; neither any thing hid, that shall not be known and come abroad.

그러므로 너희가 어떻게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누구든지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줄로 아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하시니라(8:18)

Take heed therefore how ye hear: for whosoever hath, to him shall be given; and whosoever hath not, from him shall be taken even that which he seemeth to have.

!

여러분!

나 홀로목사는 또다시 감동하고 말았는데 이 내용을 보니 마가복음 때와는 전혀 다른 그림이 그려지기 때문입니다.

16절을 보면 불이 켜진 등불(lighted a candle)을 그릇으로 덮거나 평상아래 두는 이는 없으며(No man~ covereth it with a vessel, or putteth it under a bed)등경(촛대)위에 둔다고 했습니다.(setteth it on a candlestick)

그이유가 들어가는 이가 빛을 볼 수 있게 하기 위해서라고 했지요.(they which enter in may see the light)

이 내용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빛을 얻은 자는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게 자신을 드러내게 된다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들어가는 이는 영적인 길을 걷고자하는 초심자를 말하는데 이런 사람들의 길잡이가 되는 사람이 바로 촛불을 켠 사람인지라 높은 곳에서 빛을 밝혀야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자신을 높이는 것일 뿐 스스로를 높이고 싶어서가 아니라는 말이지요.

또한 이 세상에 비밀이 없기 때문에(For nothing is secret)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that shall not be made manifest)

뿐만 아니라(neither) 어떤 감춘 것이라도(any thing hid) 알려지지 않고 나타나지 않을 수는 없다고(that shall not be known and come abroad)했는데 예수님처럼 빛을 얻은 자(성령을 깨달은이)는 자신을 감추려 해도 감출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18절에 그분의 말씀을 잘 새겨들어야 한다고 했지요.(Take heed therefore how ye hear)

깨달은 분의 말씀을 잘 들어야하는 이유는 단순하게 가르침을 잘 받아들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가진 이는 받을 것이고(whosoever hath, to him shall be given) 없는 자는 가졌다고 생각하는 것마저도 뺏긴다고 했습니다.(whosoever hath not, from him shall be taken even that which he seemeth to have)

그러면 무엇을 가지고 못 가진 것일까요?

이제 감이 조금 잡히는 것 같지 않습니까.

앞서 말한 대로 내면의 성령이 약간 깨어난 사람은(좋은 땅에 비유된 사람가진 사람이니 성령이 완전히 드러난 예수님말씀을 듣고 더욱더 많이 드러나게(성령이될 거라는 말이지요.

하지만 성령이 드러나지 못한 사람은(앞서 열거한 좋지 못한 경우오히려 반대의 결과가 나올 거라는 겁니다.

그러면 왜 이러한 결과가 나오게 될까요.

이것을 보다 확실하게 이해하려면 10절에서 말씀하신 내용을 다시 되새겨봐야 합니다.

제자들에게는 허용되었다고 했는데 여기에서의 제자들은 12제자들과 요한나 수산나와 같은 제자들을 가리킵니다.

하나님과 연합되고 은혜 받은(요한나순수하고 선한 마음의 소유자(수산나)들은 가진 이들이니(성령이 어느 정도 드러남더 많이 받을 것이라는(영생을 얻음말이며 그렇지 못한 이들에게는 일부러 가린다고 한 것은 정말 하나님이 영생을 얻지 못하게 막는다는 것이 아니라 말해주어도 알아먹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만약 비유로서 말하지 않고 풀어서 해석해 주게 되면 지식적으로 받아들이게 되어 오히려 역효과가 나타난다는 거지요.

그렇기 때문에 가졌다고 생각하는 것마저도 뺏긴다고 한 겁니다.

예문을 보면 이 사람은 이미 자신이 가졌다고 생각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even that which he seemeth to have)

교만과 자만심으로(자신의 의()가 앞섬마음을 채우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과 같은 분들의 말씀을 자신이 임의로 해석하고 행동한다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으로부터 뭔가를 얻을(from him shall be taken) 자격이 없지요.

이제는 어느 정도 이해가 되었으리라 생각하고 진도를 나가겠습니다.

예수의 모친과 그 동생들이 왔으나 무리를 인하여 가까이 하지 못하니(8:19)

Then came to him his mother and his brethren, and could not come at him for the press.(KIV)

Now Jesus' mother and brothers came to see him, but they were not able to get near him because of the crowd.(NIV)

혹이 고하되 당신의 모친과 동생들이 당신을 보려고 밖에 섰나이다(8:20)

And it was told him by certain which said, Thy mother and thy brethren stand without, desiring to see thee.

갈수록 태산이라는 말은 이럴 때 써야할 것 같습니다.

이 내용과 동일한 것이 마태복음 1246~50,마가복음 331~35절에 나옵니다.

벌써 두 차례나 보았던 이내용안에 엄청난 뜻이 담겨있다는 것을 이제야 알았기에 갈수록 태산일 수밖에 없습니다.

19절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예수님의 친족들이 예수님에게 왔으나 가까이 하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약간 이상한 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NIV를 보게 되면 전혀 무리 없게 해석되지만 KJV는 잘못 해석되었음을 알 수 있지요.

한글성경에 무리를 인하여 라는 말은 KJV에는 없는 내용입니다.

KJV내용만 해석하게 되면 예수의 모친과 동생들이 왔으나 가까이하지 못했다가 되는데 이렇게만 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20절 내용에 담겨있습니다.

누군가가(혹이)(by certain)예수께 고하기를 가족들이 당신을 보려고 밖에 섰다했는데 그저 서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무엇이 없이 서있었는데(stand without)그 무엇은 뒤에 따라오는 내용당신을 보고자하는 열망(desiring to see thee)없이 입니다.

여기에서의 당신은(thee) 성령으로서의 예수이며 육신의 예수가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합니다.

혈연으로 이루어져있는 가족조차도 예수와 가까이 할 수 없었다는 것은 육신으로서의 예수가 아니라 성령으로서의 예수라는 것을 말해주는 거지요.

다시 19절로 돌아가 보면 아주 중요한 사실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단순하게 가까이 가려했으나 못한 것이 아니라 그이상의 의미가 있다는 겁니다.

press는 밀착하다 누르다 압착하다 등의 뜻이 있습니다.

이런 사실을 감안해서 영어성경을 보게 되면 for the press 는 완전히 하나 되는 의미를 담고 있다는 거지요.

이런 식의 해석으로 보자면 가족들이 예수와 연합하기 위해 다가갔으나 갈수 없었다는 말이며 그 이유는 성령의 예수를 보고자하는 열망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말입니다.

달리 표현하면 성령을 알고자하는 갈망이 없었다는 말인 동시에 성령은 육신(혈연)과는 무관하다는 겁니다.

아직도 나 홀로목사의 해석이 믿기지 않는다고요.

그러면 다음구절이 여러분께 답을 줄 겁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 모친과 내 동생들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이 사람들이라 하시니라(8:21)

And he answered and said unto them, My mother and my brethren are these which hear the word of God, and do it.

하나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이들이야말로 자신(성령으로서의 예수)의 부모형제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나 홀로목사가 해석한 것이 맞는다는 것을 증명해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너무 놀랍지 않습니까.

여태껏 열어주지 않던 지혜를 오늘에 열어주신 성령이신 주님께 감사를 드리며 다음내용에 집중해 보겠습니다.

하루는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오르사 저희에게 이르시되 호수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매 이에 떠나(8:22)

Now it came to pass on a certain day, that he went into a ship with his disciples: and he said unto them, Let us go over unto the other side of the lake. And they launched forth.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오르셨다는 말은 함께 영적항해의 길에 나섰다는 말이며 호수의 반대편은 피안(彼岸)의 세상즉 영생을 가리킵니다.

영적스승으로서 제자들을 받아들이고 영생을 향해 걸어가는 것을 비유한 거지요.

또한 이것은 영적 길을 걸어가는 구도자가 믿음의 대상인 예수(성령)와 함께하는 과정을 말해 놓은 것이기도 합니다.

이어지는 내용을 들여다보면 이 같은 나 홀로목사의 해석이 타당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보시죠.

행선할 때에 예수께서 잠이 드셨더니 마침 광풍이 호수로 내리치매 배에 물이 가득하게 되어 위태한지라 (8:23)

But as they sailed he fell asleep: and there came down a storm of wind on the lake; and they were filled with water, and were in jeopardy.

제자들이 항해하는 동안 예수님은 잠을 잤다고 나옵니다.(as they sailed he fell asleep)

액면의 내용을 보자면 예수와 제자들이 함께 세상의 풍파를 겪고 있어도 상황은 전혀 다르다는 것을 말해준다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또 다른 뜻이 담겨있는데 외형의 모습 외에 우리내면의 진정한 자아(自我)인 성령은 잠들어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배에 물이차서 위태롭다는 것은 물질 세상에 굴복하여 영적인 길을 포기하는 것을 뜻하지요.

이러한 때에 우리가 할 일은 무엇일까요.

다음구절에 해답이 나옵니다.

제자들이 나아와 깨워 가로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죽겠나이다 한대 예수께서 잠을 깨사 바람과 물결을 꾸짖으시니 이에 그쳐 잔잔하여지더라(8:24)

And they came to him, and awoke him, saying, Master, master, we perish. Then he arose, and rebuked the wind and the raging of the water: and they ceased, and there was a calm.

24절을 액면 적으로 보자면 제자들이 예수님께 구해주실 것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럴 경우 예수가 없으면 언제든지 위험에 노출될 수 있지요.

이렇게 되면 예수꽁무니만 죽어라고 쫓아다녀야하고 예수가 없어지면 여지없이 죽어야만 합니다.

바로 이런 이유로 오늘날의 크리스천들이 예수의 육신적 부활에 목숨을 거는 겁니다.

이것은 분명 잘못된 믿음입니다.

세상을 살다보면 어려움이 수시로 밀어닥치는데 그때는 어떻게 할 건지요.

예수가 올 때까지 기다려야합니까.

그래서 이제는 이런 내용에 대한 해석이 바뀌어야합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우리 안에 성령(하나님)이 거하고 있으니 잠자고 있는 성령을 일깨워야한다는 거지요.(예수의 부활)

이런 나 홀로목사의 해석이 마음에 들지 않는 분들에게 한 가지 묻고 싶습니다.

세상의 모든 성직자들이 신자들에게 하나같이 기도하라고 말하고 있는데 어디에 있는 누구에게 기도하라는 건지요.

하늘에 계신 하나님아버지께 기도하면 모든 것을 들어줄 경우 왜 이세상은 이렇게도 혼란스럽고 고통스러우며 지옥 같은지 대답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만약 하나님을 사람들이 믿지 않아서라고 한다면 당신들은 어떤지요.

적어도 하나님을 그토록 믿는 당신들의 기도는 하나님이 들어주실 것인데 왜 세상은 아직도 고통 속에 머무르고 있는 겁니까.

바로 이러한 이유로 하나님은 우리각자의 마음 안에서 성령으로서 잠들어 있다는 것이고 그 성령을 깨우는 순간이 우리가 고통스러운 세상으로부터 자유로워질 때 입니다.

2천 년 전 예수는 제자들에게 이러한 방법을 가르친 겁니다.

우리가 자신의 내면에 잠들어 있는 성령이신 예수를 깨움으로서 마음에 평화가 이루어진다는 것을 풍랑이 예수의 꾸지람에 잠잔 것으로 비유된 거지요.(Then he arose, and rebuked the wind and the raging of the water)

이제는 어느 정도 이해했으리라 믿고 다음구절로 넘어가겠습니다.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하시니 저희가 두려워하고 기이히 여겨 서로 말하되 저가 뉘기에 바람과 물을 명하매 순종하는고 하더라(8:25)

And he said unto them, Where is your faith? And they being afraid wondered, saying one to another, What manner of man is this! for he commandeth even the winds and water, and they obey him.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는 예수님의 일갈은 오늘날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이기도합니다.

우리들이 예수를 하나님처럼 믿는다 말하고 있으면서 그 예수님을 우리 안에서 부활시키지 못하고 있다는 거지요.

무소부재하시고 편재하시는 하나님은 분명 우리 안에도 거하실 것이 분명하고 그 믿음의 크기에 따라 부활하기도하고 사멸하기도 할 것인데 아직도 부활을 이루지 못했다는 것은 그만큼 믿음이 크지 않다는 반증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과 같이 자신 안에서 성령이 깨어난 분들의 삶의 모습을 보고 두려워하는 겁니다.(they being afraid wondered)

그러면서 말하길 어떻게 이것이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라 할 것인가 (What manner of man is this!)라고 한다는 거지요.

이것이 바로 2천 년 전의 예수제자들의 모습이 아니라 오늘날의 우리모습인겁니다.

어떤가요?

이제 우리가 걸어가야 할 목표점이 확실히 보입니까?

아직도 여러분이 2천 년 전 예수가 풍랑을 잠재우는 기적을 행사했다고 믿는다면 영생의 길은 아직 멀리 있다는 것을 아시길 바랍니다.

부디 이 같은 점을 깨달으시길 바라며 오늘의 성경강해는 여기에서 마무리 짓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