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오(解悟)와 확철대오(廓撤大悟).
깨달음의 길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습니다.
하나는 해오(解悟)의 경지이고 또 다른 하나는 확철대오(廓撤大悟)입니다.
해오의 사전적 의미는 진리를 깨달아 안다는 것이고 확철대오는 테두리가 없이 크게 깨닫는다는 뜻이지요.
얼핏 보면 같은 말인 것 같지만 많이 다릅니다.
해오의 경지는 두뇌의 작용이 미치는 경계로서 지식적으로 아는 것을 뜻하지만 확철대오는 그야말로 영육의 경계가 무너져 시공간이 없어진 상태를 가리킵니다.
우리가 진리의 말씀을 듣고 아는 것은 머리가 좋으면 가능하며 기억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영육간 경계의 울타리를 허물고 지혜를 여는 것은 쉽지가 않은 겁니다.
이 같은 경지는 영적인 체험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본인의 진정한 자아가 깨어나야 하며 이 같은 일을 일러 견성성불(見性成佛)이라 말하기도 하지요.
내재한 불성을 보는 것을 이렇게 말하는 것인데 큰 빛을 보는 것을 견성한다 말하고 있습니다.
아미타불이 무량한 빛이라는 말을 몇 번이나 했으므로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을 거라 여겨집니다.
빛을 보아야 견성을 한 것이고 참으로 내재한 부처를 보았다 말할 수 있는 겁니다.
이 같은 상태를 지혜를 연다 말하는 것인데 한번 본 빛은 없어질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강력한 체험은 없어지지 않고 죽는 날까지 이어질 것이며 살아생전 인과법이 철저하게 지켜지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의 법칙과도 같아서 바꾸어 질수가 없으며 하나의 등식과도 같은 거지요.
빛을 보는 순간부터 인식이 달라지고 가치관이 달라지며 물질보다 영을 사모하게 되어 돈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게 됩니다.
조금 더 상세하게 말하자면 영혼이 깨어나게 되면 물질보다는 영을 사모하게 됨으로 물질세상과는 거리를 두기 마련입니다.
처음에는 육신의 습관이 많이 남아있음으로 하는 일마다 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영혼의 강력한 요청에 따라 물질을 떠나보내고 있는 겁니다.
육신의 인연은 정리단계에 접어들게 되며 영혼이 영생을 얻는데 필요한 인연만 남기게 되지요.
영적인 길을 걸어본 이들은 알겠지만 강력한 영적체험이 주어지면 그동안 알던 인연들과는 자연스럽게 이별을 하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므로 도를 닦는데 물질적으로 정도이상의 부가 주어진다면 뭔가 이상한 것이며 자신이 득한 깨달음은 확철대오가 아니라 해오의 경지라고 봐야합니다.
이러한 일에 대해 성경은 정확하게 길을 제시해줍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6:24)
No man can serve two masters: for either he will hate the one, and love the other; or else he will hold to the one, and despise the other. Ye cannot serve God and mammon.
mammon은 부의 신입니다.
어찌 보면 영적인 삶을 살아가는데 물질적 풍요가 주어진다면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는 말일수도 있지만 이는 그런 뜻이라기보다 물질을 목표로 삼아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물질을 추구하는 삶을 살아서는 내재한 성령을 깨달아 하나님과 하나 될 수 없다는 거지요.
어떤 이들은 이런 말을 듣고 심하게 반발할 것이 분명하지만 이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물론 본인이 복이 많아 저절로 돈이 벌어진다면 좋은 일이겠지만 돈이 사람의 인성을 바꿔놓는다는 사실을 보게 되면 그다지 좋아할 일만은 아닙니다.
돈을 많이 벌어 좋은데 쓰면 된다고 말하지만 좋은 일 하는 사람은 돈이 없어도 자신이 할 만큼 합니다.
돈이 없어 좋은 일을 하지 못한다는 말을 하는 사람은 돈이 생겨도 좋은 일에 쓰지 않습니다.
남들 눈을 의식해서 생색을 내는 정도에만 그치며 육신을 위하는 일에만 신경 쓰기 마련입니다.
스스로가 생각할 때 영혼이 깨어나 성령과 하나 되는 일에 얼마만큼 투자하는지를 보면 스스로의 상태를 정확히 알 수가 있지요.
여러 말 할 것 없이 빛은 가벼워 위로 올라가고 물질은 무거워 내려간다는 점만 기억하면 됩니다.
사실 영적인 길을 걷는 구도자들은 깨달음의 정도에 대해 무척 궁금해 합니다.
본인이 해오의 경지인지 확철대오를 한 것인지를 알고 싶은 겁니다.
성경은 여기에 대해 상세하게 말해놓았습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잠3:5)
Trust in the LORD with all thine heart; and lean not unto thine own understanding.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3:6)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지 말지어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악을 떠날지어다(잠3:7)
이것이 네 몸에 양약이 되어 네 골수로 윤택하게 하리라(잠3:8)
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잠3:9)
그리하면 네 창고가 가득히 차고 네 즙틀에 새 포도즙이 넘치리라(잠3:10)
내 아들아 여호와의 징계를 경히 여기지 말라 그 꾸지람을 싫어 하지 말라(잠3:11)
대저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기를 마치 아비가 그 기뻐하는 아들을 징계함 같이 하시느니라(잠3:12)
지혜를 얻은 자와 명철을 얻은 자는 복이 있나니(잠3:13)
이는 지혜를 얻는 것이 은을 얻는 것보다 낫고 그 이익이 정금보다 나음이니라(잠3:14)
지혜는 진주보다 귀하니 너의 사모하는 모든 것으로 이에 비교할수 없도다(잠3:15)
얼마 전에도 말한 적이 있지만 5절의 명철과 13절의 명철은 같은 단어이면서도 같지 않습니다.
앞의 명철은 육신의 범주에 머무르고 있는 인식상태에서의 알음알음을 뜻합니다.
책을 읽어 알고 있거나 누군가의 가르침을 들어 이해하는 상태를 말하고 있지요.
이것이 바로 해오의 경지를 나타내고 있는 겁니다.
그렇지만 범사에 여호와를(성령) 인정하고 모든 일을 성령이 지도하시는 줄을 알라했으며 스스로를 지혜롭다 여기지 말라고 합니다.(6,7절)
이렇게 생활을 하면 몸에 양약이 되고 골수로 윤택하게 된다 했지요.(8절)
9절에 재물은 육신을 가리키며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는 영혼을 가리킵니다.
영육을 다해 성령이신 여호와를 공경하라는 말입니다.
이렇게 되었을 때 만족하는 마음이 온다는 뜻으로 창고가 가득히 찬다했습니다.
그리고 새 포도즙이 넘친다는 것은 새 생명으로 가득차게 된다는 것으로 영적부활이 일어난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영적 부활이 일어나면 하나님의 징계를 경하게 여기지도 않고 꾸지람도 싫어하지 않게 된다고 합니다.(11절)
달리 표현하자면 하나님의 징계를 중히 여기고 꾸지람을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이면 영적부활이 일어난다는 말이 됩니다.
하나님의 징계와 꾸지람이 사랑하는 자식에게 하는 것과 같음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만이 가질 수 있는 마음가짐이지요.(12절)
이렇게 되었을 때 비로소 지혜를 얻고 명철을 얻게 된다는 말입니다.(13절)
지혜를 얻는 것에 대한 이익은 금은에 비할 바가 아니라고 했고 진주보다 값지고 귀하다 했으며 세상 그 어떤 것도 비교할 수가 없다고 합니다.(14,15절)
이 말씀을 보건데 결국 지혜는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이며 빛이신 성령이라는 뜻이지요.
따라서 해오와 확철대오는 명백한 차이가 있습니다.
알고 있는 영적지식을 실생활에서 써먹어야 한다는 것이며 성경은 그 방법까지 서술해 놓은 겁니다.
일찍이 맹자가 말하기를 진정으로 아는 자는 행한다고 했으니 행동 없이 말로만 떠들어대는 깨달음은 본인을 영생에 이르게 만들지 못함을 알아야 합니다.
영적체험을 했든지 못했든지 혹은 자신의 경지가 해오인지 확철대오인지 상관 말고 성령을 담고 있는 사람답게 살기 바랍니다.
진정한 깨달음은 누구의 인정을 바라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