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7.
홀로(holo) 되신 하나님의 말씀을 배달하는 전령(傳令) 나 홀로 목사입니다.
성경을 들여다보면 아주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볼 때마다 다른 장면들이 연출되는데 아침에 볼 때와 저녁에 볼 때가 다르며 기분이 좋을 때 다르고 기분이 나쁠 때 보는 것이 다릅니다.
지금까지 해놓은 성경에 대한 해석을 완전히 바꾸어 놓을 수도 있을 만큼 달라 보이기도 하는데 이것이 바로 어떠한 인식으로 보느냐에 따라 그림이 달라진다는 것을 증명하는 일입니다.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 홀로 목사의 이 같은 말에 동조할 수가 없을 겁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의 인식이 한곳에 고정이 되어있기 때문으로 그들의 역할이 그렇게 만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길거리에 피켓을 들고 나와서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외치는 것이 그들로서는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고 있을 뿐이라는 거지요.
그가 이 세상에서 맡은 역할이 그렇기 때문이며 그분의 인식으로는 예수를 세상에 알리는 것이 마지막 사명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분의 인식에서는 그것이 옳은 일이며 그것이 진리일겁니다.
하지만 나 홀로 목사가 말하는 것은 그러한 분들의 생각과는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그분들의 예수와 나 홀로 목사의 예수는 같은 예수라도 의미가 다르다는 말입니다.
예수가 육화된 하나님이라는 것은 동일하지만 사람의 이름처럼 육화된 하나님의 이름이 된다면 하나님은 예수라는 사람의 몸 안에만 갇히게 됩니다.
성경에는 그리스도 예수라는 말이 상당히 많이 나오는데 왜 예수라고만 하지 않고 구태여 그리스도 예수라고 할까요?
가끔씩 크리스천들이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의 이름 받들어 기도드린다고 하는데 그 말에는 아주 깊은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예수라는 사람에게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에게 기도한다는 것을 밝히기 위함입니다.
그리스도라는 말은 헬라어인데 히브리어로는 메시아입니다.
성경을 만들 때 히브리어 메시아에 해당하는 단어로 그리스도라는 말을 썼는데 오늘날은 예수를 가리키는 말로서 고정이 되어버렸지요.
메시아라는 말은 하나님으로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고 하기도 하고 축성(祝聖)을 받은 자라 하기도 합니다.
축성이라는 말은 하나님이 거룩하게 만들었다는 의미로서 기름부음을 받은 것과 마찬가지의 뜻이지요.
가톨릭에서 축성을 드린다는 말을 자주 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그 사물이나 사람을 거룩하게 하신다는 것을 나타내 보이기 위함입니다.
이 같은 일을 보면서 우상숭배라고 비웃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렇게만 여길 문제가 아닙니다.
누군가 어떠한 사물을 보거나 누군가를 볼 때 정말 하나님이 축성을 하신물건이라 여기거나 하나님으로부터 기름부음을 받아 거룩해진 사람이라고 여긴다면 그 사람에게는 정말 그렇게 여겨질 것입니다.
하지만 믿지 않는 이나 부정적으로 보는 이들 눈에는 웃기는 짓을 하는 것으로 보이기 마련입니다.
이러한 모든 것이 인식에 의해서 일어나는 일이며 믿음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습니다.
인식의 세계란 참으로 무궁무진하며 그 가운데서 최고의 정점은 모든 형상을 넘어선 빛의 세계라 할 수가 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하나님과 하나가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실체라고 할 수 있는 인식세계의 정점에 도달했다는 말이며 그러한 상태를 하나님으로부터 거룩함을 받았다, 기름부음을 받았다고 해서 그리스도라는 칭호를 앞에다가 붙이는 겁니다.
그렇다면 왜 바울을 비롯한 많은 사도들 이름 앞에는 붙이지 않을까요?
그것은 육신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영에 초점을 맞추게 하려는 그들의 배려입니다.
성경을 통해 이 같은 사실을 확인할 수가 있는데 아직은 그 같은 구절을 확인할 시기가 아닌지라 예문을 올리지는 않겠습니다.
나 홀로 목사가 지금 이 같은 말을 하는 이유는 같은 크리스천들끼리도 많은 오해와 불신을 하며 서로 반목을 하고 있는 현실이 안타까워서입니다.
이모두가 자신 안에 그리스도가 내재함을 확인하지 못했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며 성령이신 빛이 자신 안에서 드러나는 순간 모든 것을 알게 됩니다.
지금까지 성경을 통해 보았던 것이 바로 이러한 일들을 확인하는 과정이었는데 이와 같은 사실을 알아야만 우리들이 타인들에게 내리고 있는 심판의 칼날을 멈출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궁극적으로는 우리 자신이 심판을 받지 않기 위함이기도 합니다.
앞서 출발점부터 일관되게 주장하는 나 홀로목사의 의도는 여러분들이 심판받는 천국에 가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영광을 말하는 것이며 심판받지 않는 천국을 말하는 것입니다.
크리스천들의 목표가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것이라고 한다면 같은 크리스천들끼리 반목을 해야 할 이유가 없으며 서로가 이해를 하고 화합을 해야 마땅한 일이지 자신의 인식과 다르다고 해서 이단취급을 하고 공격의 대상으로 삼는다면 진정한 의미에서 예수의 제자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원수조차도 사랑하라고 했던 예수님의 사랑과는 전혀 반대의 길로 걸어가고 있음을 알아야한다는 겁니다.
오늘 우리는 이러한 예수님의 사랑을 산상수훈을 통해 확인하며 지금까지 내리고 있던 심판의 칼을 내려놓는 시간을 가져보도록 하겠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마5:3)
Blessed are the poor in spirit: for theirs is the kingdom of heaven.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5:4)
Blessed are they that mourn: for they shall be comforted.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마5:5)
Blessed are the meek: for they shall inherit the earth.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마5:6)
Blessed are they which do hunger and thirst after righteousness: for they shall be filled.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마5:7)
Blessed are the merciful: for they shall obtain mercy.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마5:8)
Blessed are the pure in heart: for they shall see God.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5:9)
Blessed are the peacemakers: for they shall be called the children of God.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마5:10)
Blessed are they which are persecuted for righteousness' sake: for theirs is the kingdom of heaven.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마5:11)
Blessed are ye, when men shall revile you, and persecute you, and shall say all manner of evil against you falsely, for my sake.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마5:12)
Rejoice, and be exceeding glad: for great is your reward in heaven: for so persecuted they the prophets which were before you.
마태복음 5장의 말씀을 많은 이들이 예수님이 산에서 대중들을 상대로 설교를 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실상은 제자들에게만 깊은 의미가 담긴 말씀을 해주신 것 입니다.
제자들에게 영적인 길을 걸어가게 되면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해 주신 것이며 자신들의 행위에 따른 결과가 어떻게 돌아온다는 것을 말씀해 주신 것이지요.
이해가 되지 않는 분들을 위해 성경에서 이 같은 사실을 알아보겠습니다.
먼저 1절의 내용을 살펴보도록 하지요.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마5:1)
And seeing the multitudes, he went up into a mountain: and when he was set, his disciples came unto him:
산에 올랐다는 말은 최고로 높은 인식에서 말씀을 하신 것이라는 의미로 산 정상에서 내려다 본 시각으로 제자들에게 말씀을 하셨다는 겁니다.
인간세상을 내려다보는 하나님의 인식에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는 거지요.
만약 이것이 대중을 향해 설교를 하신 것이라면 예수님의 목소리가 천둥처럼 커야 합니다.
이해가 되었으리라 생각하며 예수님의 가르침에 집중을 해보겠습니다.
3절의 말씀은 지극히 높은 인식을 말씀하신 것으로 심령이 가난하다는 의미는 한계 짓지 않는 영을 말하는 겁니다.
영혼이 커다 작다 하는 것은 아직까지 하나님과 완전한 하나가 되지 못한 상태이니 등급이 있다는 말입니다.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이 몸을 떠난 상태에서도 큰 영혼이 있고 작은 영혼이 있다고 한다면 전체적인 영의 모습은 아니라는 말이며 영이 가난하다는 의미는(the poor in spirit) 이러한 규정지어지는 영의 상태를 넘어서는 것입니다.
그러한 상태에서는 천국도 그러한 영에게 속한 상태가 된다는 말이지요.
그러나 이러한 말씀을 겸손한분들은 자신의 영을 모르는 사람을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라 여기며 하나님께 매달리는 뜻이라 말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해석해도 틀리다고 볼 수는 없는데 자신의 영혼을 온전하게 하나님께 돌리는 의미로서 말한다면 옳은 해석이 됩니다.
지금 나 홀로 목사의 말을 듣고서 많은 이들이 자신들이 그러하다고 손을 드는군요.
하지만 모두들 가슴에 손을 얹고서 생각들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 모두는 자신들은 천국에 갈 수 있다고 생각하며 다른 이들은 모두 지옥을 갈 거라고 하지 않습니까?
자신들의 영혼에 우수성을 말하고 있는데 어떻게 심령이 가난합니까?
정말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심판의 자리에서 내려온 사람을 뜻합니다.
이래도 자신 있게 자신들만이 천국을 갈 거라고 주장하고픈 사람들이 있습니까?
이제는 아무도 손을 드는 이가 없나봅니다.
다음구절을 보겠습니다.
4절의 말씀은 믿음의 길을 걸어가는 구도자들의 생활상을 그려놓은 것인데 사는 동안 고통스럽고 힘든 날을 보내는 것이 나쁘지 않다는 것을 말씀하신 겁니다.
애통해 한다는 것은 뭔가 슬픈 일을 당했다는 말인데 이러한 일들은 결국 어떠한 일에 대한 결과물이 왔다는 겁니다.
애통하고 슬퍼해야할 그 어떠한 일을 내가 저질렀다는 말이 되겠지요.
이러한 연유로 고통을 당하는 지금당장은 힘이 들지라도 자신도 모르게 저질러놓은 일들을 갚고 있는 겁니다.
그것이 전생이 되었건 이생이 되었건 받아들여야하고 그러한 인과관계가 끝이 나야 천국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을 사는 동안 고통스러움이 오는 것은 육신으로 인해 지어놓은 모든 일들에 대한 과보를 받는 것이라 할 수 있으며 내세에는 천국에서 위로를 받게 된다는 말입니다.
또한 여기에는 또 다른 의미도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고통스럽고 슬픈 현실을 거부하고 싶어 하지만 고통과 슬픔을 겪어보지 못하면 기뻐할 수조차 없다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자신이 애통한 일을 당해 보지 않으면 다른 사람의 힘든 상황을 이해를 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도움을 줄 수조차 없습니다.
이럴 경우 착한 일을 할 기회조차 없게 됩니다.
물론 일부러 고통스러운 일을 자초해서 애통해 한다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겠지만 다가오는 현실 때문에 애통해 한다는 것은 어떠한 경우에도 결말은 좋다는 겁니다.
다음구절을 보겠습니다.
5절의 말씀은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을 말씀하신 것으로서 현실에 순응하고 타인들에게 유순하게 대하며 복종을 잘하면(the meek) 물질적인 보상(inherit the earth)이 따른다는 말입니다.
믿음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지키기 힘든 일이기도 하지요.
세상과 부합해서 잘 처신을 해야 물질적인 보상이 있을 것인데 조금만 영적인 길에 어긋난다 싶으면 단칼에 잘라버리니 물질적인축복이 오려야 올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많은 분들이 동감을 할 것 같은데 예수님께서 이러한 말씀을 하신 것을 보면 그 시대에도 오늘날과 똑같은 어려움들이 있었던 것 같고 예수님은 영적인 축복과 물질적인 축복의 의미를 제자들에게 가르치고자 하신 것 같습니다.
어찌 보면 이 말씀은 착하고 순하게 사는 사람은 복을 받는다고 말씀하신 것 같지만 영적으로 보면 완전반대의 의미가 됩니다.
영과 육이 세상적인 일과 영적인일의 양면을 말한다고 볼 때 세상에 부합하고 세상살이 방식에 순응하고 복종하는 것은 물질적인 성과를 가져오게 될 것이며 영적인 일에만 관심을 가지고 오로지 믿음생활에만 전념한다면 물질과는 거리가 멀어지게 될 겁니다.
그렇다고 해서 오는 물질을 걷어차라는 말은 아니며 타고난 복이 많은 이들은 그다지 심하게 노력을 하지 않아도 물질적인 축복이 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와 같은 일들은 구태여 나 홀로 목사의 입을 빌리지 않아도 자신들의 삶을 들여다보면 명확하게 드러나게 되어있습니다.
믿음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물질에는 관심이 멀어지게 되어있으며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물질은 물을 주지 않는 화초와 같아서 점차 시들어만 가지요.
그러나 물질세상의 화초는 시들어가겠지만 천국에 만발한 기화요초(琪花瑤草)는 점점 더 풍성해져 갑니다.
시간이 지나 물질세상의 화초가 내 마음 안에서 완전히 시들게 되면 이 땅위에서 천국의 꽃이 만발하게 되는데 그 꽃의 이름은 만족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어떠한 어려움도 감내하며 순종하는 삶을 살아온 이는 자신이 살아있는 동안 이 꽃을 보게 됩니다.
부디 많은 이들이 이러한 축복을 받으시길 바라며 다음구절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6절의 말씀은 의롭게 사는 것을 이름인데 자신들이 의롭지 못하다고 여기는 사람(hunger and thirst after righteousness)은 의롭게 살기위해 늘 노력을 할 것이 분명하니 의로움으로 채워지게 될 거라는(shall be filled) 말이지요.
스스로의 행위가 의롭지 못하다고 여기고 의롭기 위해 노력을 기울인다고 한다면 언젠가는 그 사람의 삶 전체가 의로움으로 가득해 질 거라는 말입니다.
성경을 공부하는 어떤 분은 인간의 육신으로는 의롭다할 이가 아무도 없다는 성경구절을 들먹이며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을 다르게 해석하시는 분들도 있습니다만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되리라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똑같은 말이라도 쓰이는 장소와 대상에 따라 의미가 완전하게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구절은 산상수훈(山上垂訓)의 내용으로서 예수가 제자들에게 특별하게 교육을 시킨 내용임으로 축복의 말씀이라고 봐야하며 그분이 말씀하시는 성경구절과는 다르다고 봐야합니다.
의로움에 관한 이야기는 10절에서 다시 한 번 더 말할 기회가 있으므로 여기에서 멈추고 다음구절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7절의 말씀은 선행을 베풀게 되면 선행으로 돌려받게 된다는 말인데 세상을 슬기롭게 살아가는 방법에 대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이 말씀 또한 구도자들이 자신들의 삶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는데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면 그기에 따른 보상이 당연히 따른다는 것을 알아야하며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해도 도움을 받을 수 없다고 한다면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한 가지 숨겨진 사실이 있습니다.
심은 대로 거둔다는 것은 이세상의 법칙이기에 물질세상에서 베푼 것은 물질로 돌아오는 것이 당연할 테지만 사람에 따라서는 물질이 아니라 영적인 성과물이 돌아오기도 한다는 겁니다.
아마 어떤 사람들은 말을 할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을 도와주고 은혜를 베풀었는데 돌아오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으며 은혜를 원수로 갚는 이들도 있더라 하고 말입니다.
이러한 분들은 아직까지 성경말씀대로 살아간다고 말하기 어렵다고 봐야합니다.
구도자의 시각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는데 하나는 육신의 시각으로 보는 것이며 또 하나는 영혼의 시각으로 보는 것입니다.
만약 육신의 시각으로 본다면 아무것도 돌아오지 않는다는 말이 맞게 되겠지만 그분은 성경을 믿는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에는 심은 대로 거둔다는 말이 나와 있기 때문에 반드시 결과가 따르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같은 사실을 어떻게 생각해야할까요?
바로 영적인 시각으로 보게 되면 물질로는 돌아오지 않았지만 영적인 성과물이 주어진다는 말이 되는 겁니다.
이 세상에서 하는 그 어떠한 행위도 보상이 따른다는 의미는 자비로운 행위는 물론이며 잘못된 행위도 마찬가지라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스스로 생각할 때 분명히 잘못된 행동을 했는데 불구하고 아무런 과보(果報)가 주어지지 않는다고 한다면 영적인 세상에서 무언가가 쌓이고 있다는 말이 됩니다.
어떤 분들은 죽으면 아무것도 없다고 말들을 하지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살아생전 하나님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자신에게는 물론 누구에게도 간섭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이 없다고 합니다.
어찌 보면 그 말씀이 맞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무것도 없다는 말은 자신이 하나님과 완전하게 하나가 된 사람이 하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그러한 분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누구에게도 간섭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육신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그 누구도 그러지 못합니다.
이러한 사람일수록 자신에게 누군가가 잘못을 저지르게 되면 죽어도 곱게 못 죽고 좋은 곳에 못갈 거라고 악담을 합니다.
만약 아무것도 없다고 한다면 아무것도 생겨날 수도 없습니다.
그렇지 않나요?
뭔가가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바탕으로 이러한 세상이 만들어졌습니다.
아무것도 없다는 말은 이세상의 모든 이치를 완전하게 알게 된 이가 말을 하는 것이며 육신너머 영의 세계를 완전하게 알았으며 하나님과 하나가 되었다는 말인데 그러한 이의 말을 함부로 자신의 인생에 적용시키게 되면 화를 부르게 됩니다.
이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은 그림을 그리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도화지에 빨간색으로 칠을 하면 빨간색이 그려지고 파란색을 칠하면 파랗게 됩니다.
이와 같은 이치로 자비롭게 타인들을 보살피고 도와주었다고 한다면 그기에 따르는 보상은 물질로든 영으로든 반드시 돌아오기 마련입니다.
어느 누구와의 관계 속에서도 이러한 법칙은 마찬가지로 통용되고 스승과 제자사이에서는 더욱더 명확하게 드러나게 되며 하나님과 인간들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의 법칙이 적용됩니다.
8절의 말씀은 구도자가 자신을 들여다보며 반성하고 앞으로의 마음가짐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보여줍니다.
순결한 마음(the pure in heart)이 하나님을 보게 된다는 말은 자신이 없어진 상태를 말한것으로서 영과 육이 분리되는 것을 뜻합니다.
아직까지 하나님을 보지 못했다면 순결한 마음을 갖지 않았다는 말인 동시에 영과 육이 분리된 상태를 경험하지 못했다는 것을 알아야하며 영과 육이 분리됨을 경험한 사람을 통해 배워야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만약 살아서는 하나님을 볼 수 없다는 성경말씀을 인용하려 든다면 수많은 성경속의 선지자들이나 사도들의 말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사람이니 그들은 거짓말을 입에 담으면서 성경을 믿는다고 말하는 거짓전도사들입니다.
자신이 하나님을 보지 않았다는 사실을 밝히는 동시에 자신의 순결하지 못한 마음상태가 사람들에게 드러남을 감추기 위해 하는 말입니다.
하지만 누군가 말씀이 바로 하나님이라고 한다면 나 홀로 목사는 전적으로 찬성을 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따르는 사람일 경우입니다.
다음에 이어지는 구절이 어떠한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사람인가를 보여줍니다.
9절의 말씀은 화평케 하는 자는 (the peacemakers) 복이 있으며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고 했는데 과연 여기에 합당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많은 목회자들이 이러한 말씀을 외형적인 일들에 적용을 시킵니다만 절대 그렇지가 않다는 것을 실천해본 이들은 압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세상이 화평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것이 외형적이고 물질적일 것 같았으면 예수가 이러한 일을 했어야하며 예수이전의 많은 선지자들이 했어야만 합니다.
화평케 한다는 것은 그러한 뜻이 아니라 자신 내면에서 완전한 평화를 이룬 상태를 말하며 예수와 같이 큰 빛을 본이를 가리키는 것으로 마음이 평정된 상태에 이르렀다는 겁니다.
정말 세상이 화평하길 바라며 세상을 향해 화평하라고 말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먼저 화평해져야한다는 말이지요.
예수는 자신의 내면이 완전하게 평정된 상태가 되었다는 것을 말했으며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는 것을 말한 겁니다.
이제는 세상을 향해 평화를 외치는 것보다 자신안의 평강이 중요한 것을 알았으리라 여겨지는바 다음구절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10절의 말씀은 의로움을 위해서(for righteousness' sake) 핍박을 받는다면 천국에 간다는 말씀인데 이 말씀은 어떠한 특정 종교를 말한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다만 자신이 의롭다고 여기는 그 어떠한 일에 대해서도 보상이 따른다는 의미로서 우리인간들의 마음 안에 심겨진 대로 선악의 구분을 할 수 있는 양심에 딸린 문제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것이 의로운 삶을 살아가는 걸까요?
성경을 믿는 많은 분들은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것이 의롭다고 하겠지만 나 홀로 목사는 그렇게만 여기지는 않습니다.
자신이 맡은바 임무에서 각자가 최선을 다하며 그 일에 의로움을 느낄 수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분명 의로운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을 믿는 많은 이들이 자신들이 걸어가는 믿음의 길이 유일하게 의롭다 할 테지요.
그러나 정말 성경을 믿는 믿음의 길이 유일하다할지라도 이미 의로움이 여러 갈래라는 것이 증명이 됩니다.
성경을 통한 믿음의 유형만 해도 수없이 많다는 것을 우리들은 익히 알고 있지요.
예수를 믿는 이들의 종류만 따져도 수없이 많으니 벌써 의롭다는 말이 수천갈래로 나뉘었음이 증명이 되었습니다.
어떤 기독교인은 믿음의 차이는 있어도 예수를 믿는 것은 한가지이기 때문에 그것을 여러 갈래로 나눌 수는 없다고 합니다.
정말 이분의 생각이 이렇다고 한다면 나 홀로 목사는 쌍수를 들어 환영합니다.
제발 크리스천들끼리라도 통일된 모습을 보이고 화합을 하며 서로 욕을 하는 등의 추태를 보이지 말아주시기 바랍니다.
자식들이 싸우면 아버지가 매들 드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회초리로 두들겨 팰 겁니다.
지금까지 타종교를 욕하고 자신들 외의 크리스천들을 이단이라고 말한 것에 대해 하나님이 어떠한 징계도 내리지 않았음으로 자신들이 올바른 길을 걸어가노라 큰소리칠지 모르지만 한심한 발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수십 년을 구도의 길을 걸어가고 하나님을 알리는데 공을 들였는데 불구하고 하나님이신 성령을 단 한 번도 본적이 없는 것이 왜라고 생각하십니까?
성경공부를 해본 적이 없는 누군가는 성경에서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없는데 어떻게 수십 년 세월을 성경만 들여다본 이들이 모르는 구절이 있을까요?
만약 여러분들이 하나님이 성경 안에만 존재한다고 믿는다면 그러한 하나님은 성경 속에 갇힌 하나님이며 천지창조는 물론 우주만물을 만드신 하나님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먼 하나님임을 아셔야합니다.
이스라엘 사람 중에 몇몇 사람이 하나님을 알게 되었고 그 같은 일을 기록한 것이 성경일 뿐 그것이 하나님의 전부는 아니라는 것을 아십시오.
하나님이 빛이라는 의미가 온 세상을 비추어주기 때문에 빛이라는 것인데 그러한 빛을 성경 안에만 머물고 있다고 한다면 그야말로 웃기는 노릇이 아니겠습니까?
타인들의 종교를 비난하거나 다른 종파를 욕하는 행위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을 욕을 하는 거와 마찬가지라는 것을 알아야하며 그러한 행위가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오는 빛을 가린다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은 나 홀로 목사의 말에 어떠한 불순한 목적이 없으며 순전히 여러분들의 안위를 걱정한다는 것을 아십시오.
만약 나 홀로 목사가 불순한 목적이 있는 것 같으면 특정한 어떤 종교나 종파를 지적해서 욕하지 말라고 했을 것이 아니겠습니까?
아직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한다면 한 가지 물어보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는 일이 이 세상에서 일어날 수 있다고 여기십니까?
만약 그렇다고 대답하신다면 그분은 성경을 제대로 보지 않았거나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라고 봐야하며 그 마음 안에 마귀가 들어앉아 있다고 봐야합니다.
무소부재(無所不在)하고 전지전능(全知全能)하신 하나님이라는 말의 뜻은 하나님의 섭리와 뜻이 만물 안에 미친다는 말이며 모르는 것이 없으며 못하는 것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어찌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은 일을 해낼 수가 있다는 말인지요?
만약 있다고 한다면 하나님을 능가하는 그 무엇인가가 있다는 말인지라 그 마음 안에 하나님을 능가하는 마귀를 만들고 있음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제는 이해가 되었으리라 생각되며 예수를 믿는 것은 모두가 하나라고 하는 분들은 이번 기회로 다시는 다른 종파나 다른 크리스천들을 심하게 태클을 걸지 않으시리라 믿겠습니다.
말을 하다 보니 주제와는 약간 방향이 틀어진 것 같은데 원점으로 돌아가서 결론 맺도록 하겠습니다.
분명 예수님께서는 성경 안에만 국한시키지 않고 하나님의 시각으로 보셨을 터 온 세상 사람들의 의로움에 대해 말씀을 하셨을 것이고 그러한 말씀에 따라 모든 이들의 의로움은 각자의 마음 안에 있다고 하겠습니다.
이러한 상태의 의로움은 세상의 그 어떠한 종교도 만족시키고 개인도 만족시키는 의로움이 될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의로움을 위해 핍박을 받는 이들에게는 천국이 주어진다는 말입니다.
이제 예문으로 올렸던 11절과 12절이 남았는데 이두구절은 하나로 묶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는 만큼 한꺼번에 보기로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 때문에 핍박을 당한다면 복이 있다고 했는데 여기에서 말한 예수님은 그냥 인간으로서의 예수님이 아니라 하나님을 대변하는 예수라는 사실을 우리들이 알 필요가 있습니다.
처음 예문을 올릴 때 미리 말을 했듯이 하나님의 시각으로 내려다본 인간세상의 일들을 제자들에게 말을 해준 것이니만큼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말입니다.
제자들이 세상에 나가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할 때 사악한 태도로(all manner of evil against you falsely) 대하거든 기뻐하라는 말이지요.
구약속의 많은 선지자들이 하나님을 위해서 그와 같이 핍박을 받았으니 자신의 제자들도 나가서 선지자들처럼 기쁘게 핍박을 받으라는 겁니다.
어찌 보면 상당히 이기적인 말일수도 있으며 제자들에게 자신을 알리라고 말한 것이라 볼 수도 있는데 그렇게만 여긴다면 우리들은 성경을 통해 영적인 발전을 가질 수가 없게 됩니다.
예수님이 산상수훈을 말씀할 때가 2천년이 더 되었다는 것을 상기해보면 이와 같은 예수님의 말씀은 충분히 이해가 될 일이기도 합니다.
그 당시만 하더라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약의 내용들을 보며 하나님을 믿고 있었으며 영적인 시각보다는 다분히 물질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을 겁니다.
다들 성경에 나오는 메시아가 자신 안에서 살아나야 하는 것을 모르고 있었으며 육신을 가진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기에 예수는 그러한 사람들을 위해 힘겨운 역할을 자청했던 거지요.
이와 같은 사실은 모세오경을 보면 좀 더 사실적으로 우리들에게 다가오는데 창세기를 비롯하여 출애굽기 등에 등장하는 하나님은 거의 외계인에 가깝습니다.
이모두가 모세시대에 필요한 말씀 이었으며 그 당시 사람들에게 필요했던 하나님의 모습들이었지요.
그렇게 믿어오던 하나님에 대한 일들을 예수가 타파하기 시작했으니 그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로서는 어마어마하게 충격적인 이야기였을 것이 분명합니다.
다분히 물질적이고 육신적인 가르침을 펼치던 그 당시 성경학자들이나 권력자들이 예수를 비롯하여 그 제자들을 반대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였겠지요.
이러한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던 예수는 자신은 물론 제자들에게 어떠한 공격이 퍼부어질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산상수훈을 통해 제자들에게 당부의 말씀을 하신 겁니다.
나 홀로 목사의 이 같은 말이 사실임을 증명해주는 말이 다음구절에 이어집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마5:13)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마5:14)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마5:15)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5:16)
그 당시 만연해 있던 물질지향적인 성경가르침에 반하여 엄청난 파장을 불러일으킬 복음전파가 가지는 참된 의미를 알고 많은 이들에게 모범된 행동을 보이라는 말입니다.
또한 제자들이 복음을 전하는데 있어서 사람들이 감동을 받거든 그 모든 영광조차 하나님께 돌리라는 거지요.
16절의 말씀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많은 성직자들이 새겨들어야할 대목이기도 하며 세상의 어떠한 믿음의 길을 걸어가는 구도자에게도 적용될 말이기도 합니다.
성경 말씀을 전하다보면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게 되며 물질적으로나 영적으로나 고귀하다 여김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할 때 자칫하면 자신이 신의 자리에 오름으로서 많은 사람들을 우상숭배자가 되도록 만들게 되는데 예수는 이러한 점을 경계하라고 제자들을 단속했던 겁니다.
여기에서 우리들은 한 가지 의문점이 생길 수 있습니다.
예수 자신이 제자들에게 스스로가 하나님이라고 했고 이미 사람들에게 숭배의 대상이 되었으니만큼 자신이 한말에 대한 책임을 다하지 못한다고 볼 수 있지 않겠냐는 겁니다.
물론 이렇게 생각하게 되면 당연히 그럴 수 있으며 이스라엘 사람들이 오늘날까지 예수를 믿지 않는 결정적 이유도 여기에 있다 볼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은 예수라는 이름에 의미를 두어서는 안 되며 그리스도라는 참뜻을 헤아려야 한다는 거지요.
지금까지 나 홀로 목사는 마태복음에서 인용되어진 구약의 말씀을 통해서 예수가 왜 하나님이라고 칭송받아 마지않는가를 말해왔습니다.
구약속의 많은 선지자들을 비롯하여 예수는 물론이며 예수의 제자들까지 모두가 빛을 본이들이 대부분이며 그들이 하나 같이 성령이 빛이라는 사실을 증명을 하고 있는데 성령이신 빛이 인간세상에서 일을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사람의 몸을 입어야하기에 성경속의 많은 인물들 안에서 나타내 보였던 겁니다.
이 같은 일은 하나님이 드러나게 해주었다고 표현되지만 자신 안에 내재한 하나님이신 성령이 바깥으로 드러나게 된 거라 봐야합니다.
그들의 믿음에 불꽃이 자신들안에 심어져 마침내 결실을 맺은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들은 그들처럼 자신 안에서 하나님의 성령을 보는 것이 힘듭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보고 하나 됨의 영광을 입은 누군가가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모습을 가르쳐주어야하는 것이며 그들을 우리들은 그리스도라고도하며 메시아라고도 부르지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세상에 많은 신들이 있으며 저마다 유일한 신이라 하지만 자신들이 믿는 신이야말로 최고의 신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엄격하게 말하면 그 모두는 하나의 하나님이며 그 외에는 신이 없습니다.
인간들의 두뇌가 그렇게 인식을 하며 서로가 최고의 신을 믿는다고 믿고 있을 뿐 최고라는 것은 단 하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불교를 많은 사람들이 자비로운 부처가 세상 사람들을 구제하는 종교로 알고 있지만 실상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대다수 불교도의 경우는 이러한 사실을 믿고서 기복적인 신앙의 형태로 출발을 하지만 불교의 궁극적인 목표는 자신 안에서 불성(무량광, 빛)을 완전하게 드러냄으로서 신과 하나가 됨을 이루는데 있습니다.
크리스천의 경우도 출발은 분명 기복적인 측면이 많지만 마지막 목표는 하나님과 하나가된 예수와 동일해 지는데 있지 않습니까?
이것이 어떻게 둘 일수가 있는지요?
알라역시 하나님의 다른 이름이라고 봐야 한다는 것을 크리스천들이 더 잘 알 것입니다.
사람들은 알라신이라고 말하는데 그 같은 표현은 잘못된 것이며 아랍어로 알라는 하나님을 말하는 겁니다.
유대교 이슬람교 기독교도(크리스천)들의 성지가 모두 예수살렘에 있다는 사실하나만 봐도 인간들의 대단한 머리가 얼마나 오작동을 일으키는지 충분하게 알 수가 있는 일입니다.
이스라엘사람들이 여호와의 증인이라는 말은 참으로 진리인데 사람들의 분별 심을 한눈에 보게 하는 곳이 바로 이스라엘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 갈래로 찢어질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살아있는 증거인 셈이지요.
세상에는 다양한 종교와 다양한 형태의 믿음의 길이 있지만 그 모든 믿음의 여정의 끝은 한곳뿐입니다.
비록 예수를 믿는다고 할지라도 성령에 초점이 맞춰지지 않는다고 한다면 우상숭배일수밖에 없음이며 사이비 종교를 믿고 사이비교주를 따른다고 할지라도 성령에 초점이 맞춰진다고 한다면 하나님과 하나 됨의 길을 걸어가는 것이 맞습니다.
많은 이들이 나 홀로 목사의 지금 이 말에 반대의견을 쏟아놓는군요.
예수님과 사이비 교주를 어떻게 동격으로 볼 수 있냐고 하시는데 자신들의 믿음생활을 가만히 들여다보시기 바랍니다.
과연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을 통해 말씀하신 것들을 제대로 지키면서 살아가고 있는지요?
스스로가 생각하기를 세상에 소금과 빛이 될 만한 사람이며 세상을 화평케 하고 있습니까?
누군가 사이비 교주라 할지라도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과 같이 세상을 화평하게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고 한다면 나 홀로 목사는 그분을 하나님처럼 모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을 화평케 하는 것은 그분이 아니라 하나님이신 성령이 그분을 통해서 하시는 일이며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어떻습니까?
누가 나 홀로 목사의 하나님이 되시렵니까?
앞으로 많은 분들이 나 홀로 목사의 눈에 하나님처럼 보일 것이라 기대하며 오늘은 여기에서 마침표를 찍겠습니다.
구도자의 험난한 여정을
걱정근심으로 함께 하시는 홀로(holo)되신 하나님!
구도자의 삶이 편안하고 즐거움으로 가득할 때는
몸을 숨기시고
구도자의 여정이 험난하고 앞길이 막막할 때는
횃불처럼 어둠을 밝히시나이다.
세상사 즐거움에 빠진 이는 당신을 볼 수 없음에
슬퍼할 줄 모르고
세파에 시달려 심신이 지친 자는
당신을 찾은 후로 기뻐하며 당신을 찬양합니다.
당신을 알지 못하는 이에게 주는 금은보화는
독약과 마찬가지이며
당신과 함께하는 이에게는
당신이 내리는 저주조차 축복일 따름입니다.
눈이 밝고 귀가 열린 이는 이 말을 알아들을지니
하나님께서 함께 함일지니라.
아멘! 아멘!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