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을 받고 싶은가?
사람의 인생길이 언제 어떻게 바뀔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알아야 할 것은 인생길이 갑자기 바뀌는 것 같아도 이면에는 바뀌어할 운명까지 잠재되어 있었다는 일입니다.
이런 일에 대한 이야기 하나가 생각납니다.
옛날에 어떤 관상가(觀相家) 한사람이 한마을을 지나던 중 어떤 부잣집을 찾게 되었다고 합니다.
날은 저물었는데 마땅히 머물 곳을 찾지 못한지라 부잣집 문을 두드리게 되었던 거지요.
사정의 딱함을 들은 주인이 관상가를 집으로 불러들여 식사와 함께 잠자리 제공까지 해주었던 겁니다.
그런데 밥을 먹던 관상가는 자꾸만 주인얼굴을 쳐다보았습니다.
주인양반 관상이 아무리 살펴보아도 거지팔자인데 부자로 사는 것이 이상해서 물어보았던 거지요.
도대체 인생에서 어떤 좋은 일을 했기에 부자로 살 수 있었나를 물었더니 놀라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고 합니다.
일생을 통해 딱히 좋은 일이라고는 해본일이 없으며 단지 자신이 거지였을 때 소낙비를 피하려 남의 집 처마 밑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데 개미굴에 빗물이 들어가는 것을 보았고 개미들이 피할 수 있게 지푸라기 하나를 놓아 준 것이 자신이 기억하는 선행의 전부였다는 겁니다.
이 말에 관상가는 무릎을 치며 탄복을 했습니다.
뭇 생명을 구한일이야 말로 선행 중에 선행이었음을 생각하고 팔자도 고칠 수 있음을 깨달았던 거지요.
비근한 이야기가 성경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베드로가 여짜오되 보옵소서 우리가 우리의 것을 다 버리고 주를 좇았나이다(눅18:18)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자는(눅18:19)
금세에 있어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하시니라(눅18:20)
Who shall not receive manifold more in this present time, and in the world to come life everlasting.
겉보기에 이 내용과 앞서 말한 이야기가 틀리는 것 같지만 속 깊은 내막을 보면 완전히 일치되는 내용입니다.
다만 베드로는 물질보다는 영을 우선시 여겼을 뿐이고 거지는 그저 선행을 베풀었을 뿐이었지요.
이것은 어디까지나 인생의 목표점에 대한 이야기로서 돌려받는 것을 보면 자신이 원했던바가 무엇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번 생에서 내게 주어진 것이 물질이라면 물질을 득할 만큼의 선행을 언젠가는 베풀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불가(佛家)에서는 스님으로 하여금 탁발(托鉢)을 하게 만듭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수행자에게 덕을 베풀고 선행을 쌓을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해서 이지요.
사실 이것은 어디까지나 물질을 축복으로 여기는 범주에서 행해지는 일이긴 하지만 이러한 행위가 가져오는 결과는 실로 엄청난 거라 말할 수 있습니다.
탁발을 받는 스님이나 시주(施主)를 하는 사람의 마음상태에 따라 결과가 완전히 달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진정으로 자신이 영원한 해탈을 원하고 스님께 시주를 했다면 이번생이나 다음 생에서 인생의 변화가 일어날 것이며 물질적이고 육신적인 축복을 원했다면 거기에 상응하는 보답이 있을 겁니다.
예문을 보면 베드로는 부모형제 및 처자식 모두를 버릴 정도로 영생을 앙망(仰望)했음을 알게 됩니다.
예수를 도와 천국복음 전파에 나섰던 만큼 베드로는 초대교황으로 불리게 되었던 겁니다.
아마도 물질을 원했더라면 큰 부자가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따라서 이번 생에서 부자로 살게 되고 수행을 하게 되었다면 지난 생에서 예수님과 같은 분과 인연을 맺어두었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물질적으로 도움을 주거나 복음전파에 노력을 기울였다는 말입니다.
이 같은 일은 교회 목사님이나 스님과는 무관하게 이루어지는 것으로 볼 수도 있지요.
성직자들이 사리사욕에 눈이 멀어 교세 확장에만 신경을 쓴다면 영생을 얻지 못할 것이 분명하며 그들의 말을 믿고 복음전파에 나선 사람들은 분명히 영생을 상속받게 됩니다.
성경이 진리라면 이렇게 되지 않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이 같은 일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 너희가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되지 말라 저희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마6:5)
And when thou prayest, thou shalt not be as the hypocrites are: for they love to pray standing in the synagogues and in the corners of the streets, that they may be seen of men. Verily I say unto you, They have their reward.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마6:6)
But thou, when thou prayest, enter into thy closet, and when thou hast shut thy door, pray to thy Father which is in secret; and thy Father which seeth in secret shall reward thee openly.
5절에 외식하는 자는 위선자를(the hypocrites) 가리킵니다.
자신이 얼마나 하나님을 잘 믿고 있는지 사람들 앞에서 자랑하는 것은 결코 좋은 일이 아니라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져 유명해지고 교세가 확장되는 것은 이미 그 자체만으로 보상을 받았다고 하니 오늘날 대형교회의 목사님들은 가슴에 손을 얹고 반성을 해야 할 겁니다.
특히 교회신자들을 자신의 재산으로 여기는 성직자들은 영생과는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알아야지요.
사실 이러한 말은 내가 할 것도 없습니다.
본인이 한 행위에 따라 하나님이 상과 벌을 주실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장사판으로 만들거나 목사자리를 세습(世襲)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무엇인가를 돌려받을 겁니다.
6절을 보다시피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일거수일투족(一擧手一投足)을 훤히 알고 계십니다.
closet은 벽장이라는 뜻도 있지만 “드러나지 않는, 본인만이 알고 있는” 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너의 골방이란(thy closet) 자신의 내면을 가리키는 것이며 우리의 내면 깊숙이 들어않은 하나님을 은밀한 중에 계신다고 표현한 겁니다.
우리가 진정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중시 여긴다면 이러한 말씀에 주목해야하며 자신 안에 성령이 내재함을 인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렇게 되어야 성령이 드러나게 되어 하나님과 하나 되는 영광을 얻게 되는 거지요.
사실 알던 모르던 성령은 우리 내면에서 우리의 행동을 지켜봅니다.
그래서 내가하는 생각과 말과 행동하나하나가 기록이 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한 일들 모두가 내 앞날을 결정짓는 요소가 되는 겁니다.
따라서 어느 날 문득 내 인생길이 바뀐 것이 아니라 어느 때인가 심어놓은 것이 꽃을 피운 거지요.
팔자(八字)를 고치고 싶은 이들은 들으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