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물있는 곳에 마음도 있다.
성경을 연구해본결과 빛이신 성령을 모르고는 영생을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빛을 경험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할 것이라 생각됩니다.
성경에는 이러한 일에 대해 언급한 내용이 나옵니다.
네 보물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마6:21)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몸이 밝을 것이요(마6:22)
The light of the body is the eye: if therefore thine eye be single, thy whole body shall be full of light.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하겠느뇨(마6:23)
But if thine eye be evil, thy whole body shall be full of darkness. If therefore the light that is in thee be darkness, how great is that darkness!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6:24)
21절을 보면 우리가 무엇을 보물로 여기는가에 따라 그것이 보물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가 무엇을 가치 있게 여기는가에 따라 그것이 보물이 된다는 말이며 절대적인가치를 가진 그 무엇인가는 없다는 거지요.
예를 들어 누군가 수석을 수집한다면 그 사람에게 있어 수석이 보물일 것이고 난을 소중하게 여기는 이에게는 난이 보물이 될 거라는 말입니다.
일반인들 눈에는 돌멩이와 하찮은 풀에 불과하겠지만 수석이나 난을 귀하게 여기는 이들의 눈에는 분명히 보물이며 보석보다도 소중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영혼을 소중하게 여기는 이에게 있어서 영적인 가르침은 세상 그 무엇보다도 소중한 겁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종교를 가진 이들이 교회나 절에 자신의 재산을 아낌없이 바치고 있습니다.
제한적인 육신의 삶보다 영혼의 앞날을 걱정하기 때문이지요.
그렇지만 보통의 경우 자신의 영혼이 있다는 생각조차 하기 어려우며 영혼이 영생을 얻는다는 사실을 알지도 못합니다.
그러므로 세상은 성령에 대해 알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한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요한복음14장17절)
그런데 예수님은 놀랍게도 영혼에 대해 알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는 겁니다.
두 눈을 하나로 만들면(thine eye be single) 온몸이 빛으로 가득할거라고 했으니(thy whole body shall be full of light) 그저 놀라울 따름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눈을 하나로 만드는 방법에 대해 생각해봐야 합니다.
바보가 아니라면 멀쩡한 눈을 찔러서 하나로 만들지는 않을 것이며 예수님도 이런 뜻으로 말씀하신 것은 아닙니다.
이는 빛이신 성령을 보기 위해서는 육신의 눈이 아니라 영의 눈, 즉 지혜안을 열어야한다는 뜻입니다.
아마도 어떤 이들은 이러한 말을 너무나 막연하다 생각하며 일반인들로서는 불가능하다 여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종교를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으며 각자의 믿음의 대상에게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크리스천들은 눈을 감고 기도를 하고 불교도들은 눈을 감고 명상을 하지요.
이러한 점을 볼 때 기도와 명상은 같다는 사실을 알 수 있으며 대상만 달랐을 뿐 모두 의식을 한곳에다 집중한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사실 우리가 본다하지만 그것은 엄밀하게 따져서 인식을 하는 겁니다.
눈이 사물을 비추고 신경조직이 인식을 하여 우리가 판단을 하게 됨으로 진정한 의미에서는 눈이 보는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불가에서는 육근(六根)이 육진(六塵)을 만나 육식(六識)을 낳는다는 말을 합니다.
안이비설신의(눈, 귀, 코, 혀, 피부, 뜻)가 대상인 색성향미촉법(색깔, 소리, 냄새, 맛, 촉감, 법)을 만나게 되면 아름답다, 추하다 판단을 하게 되거나 듣기 좋다, 싫다, 향기롭다, 맛있다, 부드럽다, 옳다 그러다는 판단을 하게 되는 거지요.
구태여 이렇게 문자를 통해 설명할 필요도 없이 자신의 몸을 들여다봐도 알 수가 있습니다.
누구나가 꿈을 꾸기 마련인데 그러한 점만 보더라도 우리가 사물을 보는 것이 눈이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는 겁니다.
분명히 우리는 꿈속에서 누군가와 대화를 하고 온갖 일을 경험합니다.
생시와 똑같이 보고 듣고 인식하기에 간혹 꿈을 꾸는 동안 눈물을 흘리거나 웃기도 하는 겁니다.
이렇게 말하면 누군가는 꿈과 현실은 분명히 다르다고 말하겠지요.
그러면 죽었다가 살아난 분들의 이야기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고 싶습니다.
또 살아있는 가운데 유체이탈을 경험하신 분들도 숱하게 많은데 그런 일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대답해 보기 바랍니다.
사후세계나 유체이탈을 경험하신 분들 모두는 살아있을 때와 조금도 다름없이 사물을 보고 듣고 했다고 합니다.
몸이 없는 상태에서 보고 들을 수 있었다는 것은 눈과 귀로 보고 듣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확실하게 알 수가 있는 겁니다.
육신 외에도 인식체가 따로 있다는 점을 알 수가 있으며 그 너머에도 더 높은 영의세계가 있다는 것은 이제 더 이상 신기한 일도 아닙니다.
이러한 점을 알고 나면 성령에 대해 안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알 수 있으며 성령과 하나 되는 영혼의 영광스러움은 세상 그 무엇으로도 비견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왜 어떤 이들은 살아생전 빛이신 성령을 경험하는가 하면 어떤 이들은 볼 수 없는 걸까요?
여기에 대한 해답은 23절에 나옵니다.
한글 성경은 눈이 나쁘면 온몸이 어둡다 했지만 영어 성경은 눈이 악하면 온몸이 어둠으로 가득 찬다고 합니다.(if thine eye be evil, thy whole body shall be full of darkness)
그렇다면 누군가의 눈이 악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여기에 대한 해답을 예수님은 24절에 상세하게 설명해 놓았습니다.
사람이 빛이신 성령을 볼 수 없는 것은 육(물질)을 영보다 귀하게 여기기 때문이라 말하고 있지요.
모든 가치관이 물질적이고 육적인데 맞춰져 있으므로 빛이신 성령을 볼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모르긴 하지만 많은 이들이 이 말을 인정하기 싫어하리라 생각됩니다.
두 가지 모두를 가질 수도 있지 않느냐는 말을 하겠지요.
그렇지만 우리가 알아야할 것은 영생을 얻기 위한 마지막 관문의 시험이 바로 물질적인 것들과 육적인 것들로부터의 결별임으로 그렇게 될 수가 없는 겁니다.
영적인 길을 걷는 이에게 과한 재물이 생긴다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재물의 신을 모시고 있는 것으로 봐야합니다.
물론 본인이 만족하고 살아간다면 이 또한 나쁘다고 볼 수는 없으며 다만 빛이신 성령을 체험하고자 할 경우 이렇다는 말입니다.
예수께서는 이러한 일에 대해 명확하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가로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마19:16)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마19:21)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마19:22)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마19:23)
단순하게 천국 가는 것을 바란 것이 아니라 영생 얻기를 원했기 때문에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던 겁니다.
영생을 얻는다는 것은 빛이신 성령과 하나 됨을 뜻하는 것으로 하나님과 하나 된다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빛을 체험하지 못했으면 성령이 드러난 이와 인연이라도 맺어 놓아야 합니다.
그래야 다음 생에서라도 영생을 얻게 됩니다.
빛을 경험하고 싶은 이들은 들으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