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생각 긴여운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배가번드 2024. 1. 19. 04:09
728x90

내가 바쁘게 살기는 하나 봅니다.

아들 생일도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전화를 받고서야 아차 싶었습니다.

보통의 경우 카톡이나 페이스북에서 알림메시지가 뜨는데 올해는 이상하게 예고를 하지 않는 바람에 생일임을 모르고 지나친 겁니다.

어찌 생각하면 아들이 서운할 수도 있겠지만 이제 어른이 된지 오래인 만큼 이해하리라 생각합니다.

물론 이 같은 생각은 미처 아들생일을 챙기지 못한 내 변명이기는 하지만 며느리가 생겼으니 아들에 대한 사랑은 느슨해져도 되지 않을까 싶다는 거지요.

성경을 파고들다보면 세상적인 일을 까맣게 잊어버릴 때가 많은지라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생각되며 그저 마음속으로 이해해주길 바랄뿐입니다.

사실 아들은 내 인생에 있어서 크나큰 기쁨이고 행복을 느끼게 만드는 위안처이기도 합니다.

문득 삶이 힘들고 외롭다는 생각이 들 때 아들이 있다는 생각을 하면 괜히 기분이 좋아지곤 했던 기억이 납니다.

아들에게 도움을 받아서가 아니라 내분신과 같은 아들이 있다는 마음만으로 흐뭇해집니다.

그래서 인지 아들이 결혼을 하는 날만큼은 파계를 하고 사돈과 술 한 잔하고 싶었지요.

그런데 우연인지 필연인지 사돈이 술을 못하시는 바람에 내 계획은 무산되고 말았습니다.

그렇지만 마음만큼은 흠뻑 취하고 있었으며 내 인생에서 이런 날이 있었나 싶어 저절로 이런 감탄사가 나오는 겁니다.

 

허!

그것참.

 

너무나 기쁜 일이 생기게 되면 뭐라 표현할 길이 없기에 이런 말만 되풀이 하게 됩니다.

옛날 어른들 말씀에 자식목구멍에 밥 넘어가는 소리만큼 좋은 소리가 없다는 말을 실감하고 있는 셈입니다.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어서 인지는 모르겠으나 내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순간을 꼽으라면 아들에게 학비를 보내주지 못해 멀쩡하게 다니던 학교를 그만두고 아들이 중국으로 건너왔던 때라 할 수 있습니다.

그때처음으로 스승과 내면의 신을 향해 원망의 화살을 퍼부었지요.

이미 내적인 체험으로 내재하신 신과 스승이 하나라는 점을 알고 있었으며 낙엽하나가 떨어져도 신의 뜻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 때 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주어진 현실의 고통은 나를 사정없이 바닥으로 끌어내리고 있었던 겁니다.

사실 이러한 일은 아들의 고통을 내가 안기위해 내 육신에 초점이 맞춰졌기 때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아들의 고통이 내 아픔이 되고 있었던 거지요.

인천항에서 배를 타고 중국으로 건너오는 동안 바다에 몸을 던지고 싶었다는 아들의 말은 내게는 너무나 큰 아픔이었습니다.

두 달 남짓 아들과 함께 하는 시간에도 김치공장의 어려움은 여전했고 개선의 기미가 보이지 않았는데 결국에는 내가 교회를 나가고 성경을 손에 들게 되는 시간이 주어졌던 겁니다.

밀린 공장세를 내주겠다는 동생의 말에 솔깃할 수밖에 없는 지경으로 내가 몰리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김치공장이 망하지 않았더라면 한국으로 돌아오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성경을 들여다보는 시간도 없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물론 이것은 내 인생에서 받아들이는 과거의 모습들이고 아들의 입장은 다를 겁니다.

하지만 아들역시 중국에서의 경험으로 많은 인식의 변화를 겪게 되었을 거라 생각됩니다.

어찌 보면 현실에 대한 비관으로 빗나갈 수도 있었겠지만 아들의 인생을 보면 결코 그러한 운명을 타고나지 않았다는 점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서울에서 지방으로 전학을 가서 겪어야 했던 여러 가지 일들은 아들의 성장에 피가 되고 살이 되었으리라 본다는 거지요.

고등학교 때 담임선생님 말씀에 따르면 연, 고대까지 바라볼 수 있다고 했지만 크게 의미부여를 하지 않았던 것도 이러한 관점에서 인생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소위 말하는 출세(出世)에 초점을 맞추어서 사람의 인생을 논하지만 영적인 눈으로 보면 전혀 다른 판단을 하게 됩니다.

아마도 어떤 이들은 내가 좀 더 일찍 정신을 차리고 아이에게 제대로 된 과외선생을 붙여주었더라면 연, 고대를 나와 좀 더 나은 직장에 다닐 수 있었다 말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었을 경우 오늘날의 나는 없었을 것이며 나 홀로목사는 탄생하지 않았을 겁니다.

마찬가지로 지금의 아들과 며느리도 내게 주어지지 않았을지도 모르며 내 입에서 “허! 그것참.” 이라는 감탄사가 나오는 순간이 주어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거지요.

물론 지금보다 더 나은 순간이 주어질 수도 있겠지만 지금 내가 느끼는 감정과 같은 순간은 주어질 수 없다는 말입니다.

만약 내 인생에서 완전하게 만족하는 순간이 있다고 할 경우 그 만족을 위해 과거의 그 모든 순간들은 단한장면도 틀려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깨닫는다는 것은 완전해 지는 것이며 완전해진다는 것은 과거, 현재, 미래가 하나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는 표현을 하는 겁니다.

지금도 사람들은 자신들의 인생을 만족하지 못한 채 살아갑니다.

좀 더 나은 생활을 위해서라는 명분을 내세우고 있지만 알고 보면 욕심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이지요.

이 같은 일을 보고 나쁘다좋다 판단할 일은 아닙니다.

다만 이 같은 선택을 하면 이런 결과가 주어지고 저 같은 선택을 하면 저런 일이 주어질 뿐입니다.

달리 표현하자면 결과에 대해 만족할 수만 있다면 그 어떤 선택도 자유롭다는 겁니다.

하지만 알아야할 것은 과한 욕심은 언제나 자신을 힘들게 한다는 거지요.

결과에 있어 완전함을 볼 수 없다면 그것은 허상에 불과하며 욕심을 부린 거라는 사실을 알아야합니다.

이 같은 점을 깨닫기 위해 우리에게는 반복되는 시험의 순간들이 주어집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나에게도 이러한 시험은 반복적으로 주어지고 있습니다.

가끔씩은 힘든 현실에서 탈피하여 좀 더 편안한 가운데 성경연구를 했으면 할 때가 있지요.

그렇지만 막상 쉬어보면 성경연구에만 몰두할 수 없게 됩니다.

생각 같아서는 하루 종일 성경만 들여다 볼 수 있을 것 같지만 막상 해보면 그렇지 않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는 말입니다.

작년 한해 몇 달을 쉬는 동안 성경에만 매달리고 싶었지만 이런저런 일이 생기는 바람에 오히려 평소보다 성경을 적게 보게 되었던 겁니다.

성경을 오랜 시간 많이 본다고 무엇인가를 더 많이 얻는 것은 아닙니다.

짧은 시간이라도 제대로 집중을 하게 되면 지혜의 문이 열리는 겁니다.

다시 말해 절박하고 절실하게 갈망하는 마음을 하나님이 보시는 거지요.

이와 마찬가지로 시간과 경제적으로 풍족해지면 무엇인가를 하겠다는 마음은 하나의 허상에 불과합니다.

진정으로 하고자 마음먹으면 하늘은 그 길을 열어주시며 열린 문을 보게 만듭니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마7:7)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마7:8)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면 돌을 주며(마7:9)

생선을 달라 하면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마7:10)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7:11)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마7:12)

 

하나님을 믿는 사람치고 구하지 않고 찾지 않으며 두드리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7,8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어지지 않고 열리지 않는 것은 하나님이 주시지 않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믿음이 부족한거지요.

정확하게 말하자면 우리의 욕심이 눈을 가려 그것을 볼 수 없게 만들어 놓았다는 말입니다.

아들이 원하는 것을 주고자하는 것은 아버지로서 당연한 것인데 어찌 주지 않겠냐는 말은 하나님께서는 이미 주고 있는데 우리가 모르고 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9~11절)

그 이유는 우리가 무엇인가를 심어놓지 못했기 때문이며 돌려받을 것이 없기 때문이라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12절)

다르게 표현하자면 고통스러운 현실은 내가 받아야할 업보(業報)일수 있다는 거지요.

그래서 현실에 대해 완벽을 볼 수 없다면 아직은 완성에 다가서지 못했다고 볼 수 있으며 정상에 향해 올라가는 중이라 볼 수 있는 겁니다.

이러한 의미로 나는 지금 또 다른 “허! 그것참.”의 순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