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생각 긴여운

소천이냐 왕생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배가번드 2024. 2. 6. 0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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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죽게 되면 개신교에서는 소천 하셨다 말합니다.

소천(召天)은 하늘의 부르심을 받아 돌아간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사람의 죽음을 두고 왕생하셨다고 하지요.

왕생(往生)은 이승을 떠나 정토(淨土)에 가서 태어나는 일이며 정토는 부처가 사는 깨끗한 세상을 가리킵니다.

부처를 사전에서는 불도(佛道)를 깨달은 성인이라 적고 있으며 부처는 산스크리트어 붓다의 음역으로 “깨달은 자”를 뜻하는데 세상이치를 훤히 알아 진리에 이르렀다는 뜻이지요.

불도는 부처의 가르침을 뜻하는지라 자비와 사랑을 실천하라는 부처의 가르침대로 사는 것이 곧 부처 되는 길이며 깨끗한 세상에 이르는 길이 됩니다.

이 같은 점을 볼 때 부처가 사는 세상은 죄 없이 맑고 깨끗한 곳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까닭으로 불교도들은 사람이 죽으면 극락왕생한다 말하는데 극락은 아미타불이 살고 있는 정토(淨土)로서 괴로움이 없으며 지극히 안락하고 자유로운 세상이라 사전은 적고 있지요.

마찬가지로 기독교도들은 죽으면 천국(天國)을 간다 말하는데 그 뜻은 어떤 제약도 받지 않고 편안한곳으로 하나님이 지배하는 은총과 축복이 가득한곳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비교분석해보면 기독교에서 말하는 천국은 불교의 극락과 별반 차이가 없음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은 곧 성령이고 성령은 곧 빛이신지라 천국은 빛으로 가득한 세상이라는 점을 알 수 있으며 아미타불의 뜻은 “무량한 빛”을 뜻하는지라 천국과 극락은 동일하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빛을 보는 것을 견성성불(見性成佛)이라는 표현을 하며 지혜안을(영안) 열었다고 합니다.

견성을 우리의 본성을 깨닫는 것이라 말하는데 우리의 본성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숨결로서 빛이신 성령을 가리킵니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1:3)

All things were made by him; and without him was not any thing made that was made.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요1:4)

In him was life; and the life was the light of men.

 

만물 안에 하나님이 지으셨고 그 안에 생명인 빛이 있다고 했습니다.

빛은 곧 성령이라는 말도 성경에 기록되어있지요.

불교도 기독교도 빛을 가장 높은 경지라고 말하고 있으며 진리에 도달한 것이라고 합니다.

성경은 진리에 대해 확실하게 말해줍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2:4)

Who will have all men to be saved, and to come unto the knowledge of the truth.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영생을 얻는 것이며 영생을 얻는다는 것은 하나님과 하나 되는 겁니다.

성령이신 하나님은 빛이시니 빛을 본다는 것은 하나님을 보는 것과 같은 것이며 성령이 임하신 겁니다.

그러므로 빛을 본다는 것은, 곧 진리를 안다는 것과 같은 것이며 지혜안이 열리는 것과 동일합니다.

이러한 일에 대해서도 성경은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으며 빛을 보는 방법까지 설명해놓고 있습니다.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몸이 밝을 것이요(마6:22)

The light of the body is the eye: if therefore thine eye be single, thy whole body shall be full of light.

 

눈을 하나로 만들면(eye be single) 온몸이 빛으로 가득해질 것이라고 합니다.(whole body shall be full of light)

이 말씀은 멀쩡한 두 눈을 하나로 만들라는 말이 아니라 영혼의 눈을 뜨라는 말로서 지혜안을 열어야한다는 뜻입니다.

즉, 우리의 몸 안에 있는 영체의 눈을 떠야한다는 말로서 성령으로 거듭나야한다는 말이지요.

이렇게 되려면 육적인 속성이 완전히 죽어야만 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이 이러한 상태에 도달했음을 스스로 밝히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15:31)

I protest by your rejoicing which I have in Christ Jesus our Lord, I die daily.

 

이 내용은 참으로 재미난 표현입니다.

직역을 해보면 바울이 형제들의 기쁨에 대해 이의를 제기한다고 합니다.(I protest by your rejoicing)

형제들의 기쁨이란 바울이 주님이신 예수그리스도 안에 있음이라 했지요.(which I have in Christ Jesus our Lord)

그런데 바울이 매일같이 죽는다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I die daily)

종합해보면 사람들이 바울이 예수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기뻐하지만 속 깊은 내막을 들여다보면 좋아할 일 만은 아니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겁니다.

매일같이 죽어야만 우리구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거할 수 있다는 말이지요.

그만큼 성령과 하나 되는 것이 힘들다는 말이며 빛을 보는 것이 쉽지 않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일에 대해 예수님께서도 언급하신일이 있습니다.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눅9:23)

And he said to them all, If any man will come after me, let him deny himself, and take up his cross daily, and follow me.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눅9:24)

For whosoever will save his life shall lose it: but whosoever will lose his life for my sake, the same shall save it.

 

23절에서 부인해야하는 자기는(deny himself) 육신을 가리키며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은 영혼입니다.

성령이신 예수님과 하나 되려면 가르침을 따라야 한다는 거지요.

이것은 육신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길로서 세상에 역행하는 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24절에 예수를(성령을) 위하여(for my sake) 제 목숨을 버려야 구원을 한다고 말해놓은 겁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그것을 구한다 했는데(shall save it) 그것은 성령을 가리킵니다.

빛이신 성령을 얻게 된다는 말이니 곧 빛을 보게 된다는 뜻이며 바울이 매일같이 죽는다고 표현한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함으로 우리가 죽는다는 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소천이 되었건 왕생이 되었건 자신에게 이로운 죽음이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하늘에 부르심을 받아서 간다면 곧바로 영생의 하늘에 오를 것이 분명하며 진정한 왕생이라면 49제나 천도식 따위의 형식이 필요 없다는 점을 알아야한다는 겁니다.

평상시 죽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자신이 갈 곳이 정해진다는 점을 볼 때 이러한 인식은 너무나 중요한거지요.

적어도 나와 함께 하는 이들 가운데는 누군가에게 끌려가는 일이 없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한마디 해보았습니다.

 

소천과 왕생이 같음을 인정하는 이들만 이 말씀을 받으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