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은 목자이자 어린양.
성경을 머리에 이고 살다시피 하다 보니 가끔씩은 일상생활에서 불편을 야기할 때가 있습니다.
안 그래도 기억력이 좋지 않은데 성경을 연구하다보면 어제한 일조차 기억이 나지 않을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일과시간을 마치고 저녁을 먹고 나서 컴퓨터에 앉아 자판을 두드리고 새벽4시에 일어나 두 시간 가까이 성경을 연구하다보면 어제 한일을 까먹기 일쑤이지요.
그러다보니 몇 번이나 반복한일도 기억하지 못할 때가 많은지라 여간 불편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함께 일하는 분들에게 묻게 되는데 짜증 섞인 말을 들을 때면 속이 상합니다.
도면을 들여다보면 알 수 있기는 하지만 때에 따라서는 작업자가 임의로 위치를 바꾸기도 하는지라 묻지 않을 수도 없는 겁니다.
이런 일이 일어날 때마다 졸업할 때가 되었구나 하는 생각을 절로 하게 됩니다.
어차피 65세 이상이면 현장근무가 불가능하게 됨으로 이제는 정말 분식점이라도 차려야하는 시기가 다가오고 있는 거지요.
나에게 있어 일하는 것은 언제나 즐거운 일인데 사람사이에서 일어나는 마찰은 그다지 즐거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되도록 이면 내가 알아서 일을 하고 접촉을 적게 하려 노력합니다.
아마도 이런 이유로 과거 수행자들은 산으로 들어가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꼭 수행자가 아니어도 주변에는 늘그막에 시골로 내려가 살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나보다 한 살 아래인 사촌동생도 고향에 집을 사서 텃밭을 가꾸며 살려는 생각을 하는걸 보면 이러한 현상은 자연스럽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람들의 생각을 통해 한 가지 공통점을 발견하게 되는데 이런 사람들 대부분이 복잡하고 바쁜 일상을 싫어한다는 사실입니다.
알고 보면 사람은 누구나가 본능적으로 회귀본능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시기의 차이가 있을 뿐 연극이 끝나면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기에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하지만 연극이 끝나지 않아 좀 더 세상에 머물고자 하는 사람들은 생각이 다릅니다.
항상 무엇인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일을 벌이길 좋아합니다.
주로 젊은 층에서 이런 생각을 많이 하는데 아직은 세상에 즐길 거리가 많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젊은 층과 노년층의 생각이 다르며 세대 간의 차이가 발생하는 겁니다.
물론 이 같은 현상은 나이에 국한시킬 일은 아닙니다.
사람이 이생만 사는 것이 아니라 몸을 바꿔가며 산다는 생각에 이르면 태생이 처음부터 다른 사람들도 많기 때문입니다.
세상에는 영적인 길을 걷도록 정해져 내려오는 영혼들이 있으며 그들의 삶은 처음부터 일반인들과는 많이 다릅니다.
세상에 가장 많이 알려진 예수의 탄생 설화(說話)를 살펴보면 이 같은 점을 명확하게 인식 할 수 있습니다.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눅1:31)
저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위를 저에게 주시리니(눅1:32)
영원히 야곱의 집에 왕노릇 하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눅1:33)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눅1:34)
천사가 대답하여 가로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눅1:35)
보라 네 친족 엘리사벳도 늙어서 아들을 배었느니라 본래 수태하지 못한다 하던 이가 이미 여섯 달이 되었나니(눅1:36)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눅1:37)
이 내용을 두고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예수가 탄생했다 말하지만 속뜻을 살펴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이는 성령이 인간의 육신 안에 담기는 과정을 설명한 것일 뿐 육신적으로 동정녀가 아이를 낳았던 것이 아닙니다.
만약 이렇게 받아들이게 되면 예수만이 유일한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일반사람들은 영원히 하나님과 하나 될 수 없는 겁니다.
성경의 목적이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만드는데 있는 것이며 예수의 탄생도 하늘의 일을 모르는 일반인들을 하나님왕국으로 인도하는데 그 목적이 있는 것인데 이런 식으로 받아들이면 누군들 예수의 가르침을 따를 수 있겠냐는 말입니다.
동정녀의 몸으로 태어나지 못했다면 예수처럼 하나님과 하나 되지 못한다는 말과 같은 것인데 누가 성경을 제대로 믿을 수 있겠냐는 거지요.
그러므로 이 내용을 액면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되는 겁니다.
예문을 보아서도 알 수 있듯이 누가는 사람들이 미혹에 빠지는 것을 우려해 엘리사벳을 등장시켜 동정녀의 뜻을 알리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엘리사벳의 뜻은 “하나님은 나의 맹세”로서 삶 전체를 하나님께 바친 인물임을 알 수 있지요.
여섯 달은 부활을 뜻하며(삼위일체 하나님의 거듭남 3×2=6) 성령의 임하심을 뜻합니다.
이러한 점을 볼 때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의식 상태는 다양한 것이 맞으며 이번 생에서 영생을 얻을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생각은 다르기 마련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예수님은 다음과 같은 말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요10:27)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10:28)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요10:29)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요10:30)
언뜻 보기에는 예수님은 목자이고 따르는 사람들은 양으로 보입니다.(27절)
하지만 28절에서 예수께서 영생을 준다했으니 양과 목자의 구분은 무의미합니다.
영생을 얻는다는 것은 하나님과 하나 됨을 뜻하는데 구분이 있을 리가 없지요.
빛의 세계에서 성령으로 하나 되는 것이 영생이므로 누군가가 뺏을 수도 없다 했으며(29절) 성령(예수)은 곧, 하나님과 하나라고 했습니다.(30절)
그러므로 예수와 같은 이를 따르는 것은 양이 되려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깨어나 하나님과 하나 되기 위한 겁니다.
처음에는 예수님과 같은 이들로부터 성령의 불씨를 받아 믿음을 키워가는 어린양에 불과하지만 종내에는 세상 죄를 짊어지고 가는 양이 될 것이며 많은 새가 쉬어가는 거목이 됩니다.
물론 모두가 사도의 길을 걸을 수는 없으며 목자의 길을 걷지는 못합니다.
그렇지만 그들을 도움으로 인해 자신영혼의 앞날을 기약 받을 수는 있습니다.
이런 일에 대해 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지요.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막10:29)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막10:30)
언제나 말하지만 성경에 나오는 예수는 육신이 아니라 성령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예수의 육신부활을 믿게 되며 예수가 육신으로 재림하는 때를 기다리게 됩니다.
이렇게 믿게 되면 이번 생에서 영생을 얻을 수 없으며 또다시 윤회를 하기 마련입니다.
다만 살아생전 예수와 같은 인자를 도왔으므로 사는 동안 물질적 보상이 주어질 수도 있고 다음 생에서 영생을 보장받을 수도 있습니다.
성경에는 이웃을 진심으로 도와도 하나님을 돕는 것과 같다고 했는데 예수님과 같은 인자를 돕는 일에 보상이 따르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므로 성직자를 돕는 것은 자신의 영혼을 도우는 길이라고 할 수 있지요.
돕는다는 것은 물질적으로만 돕는다는 말이 아니라 마음으로 돕는 것도 포함이 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몸과 마음을 다하여 이웃을 도우라 한 겁니다.
오해 없이 받아들일 사람만 이 말씀을 받으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