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생각 긴여운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 있지 않았다.

배가번드 2024. 3. 26. 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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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가 부활절이었다는 사실을 교회 가서야 알았습니다.

부활절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고 돌아가신 후 삼일 만에 되살아나신 일을 기념하는 날인데 목사님의 설교가 그다지 가슴에 와 닿지는 않았지요.

요나의 기적과 예수님의 부활이 동일한 것이라는 말씀을 하셨지만 속뜻을 모르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에 감동적이지 못했던 겁니다.

그렇지만 신기하게도 교회에 앉아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재미있어하며 목사님의 말씀을 경청하는 듯이 보였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보는 성경과 그들이 보는 성경이 다른 것이 아닐까 생각이 되어 다시 한 번 봐야겠습니다.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쳐서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하였음이니라 하시니라(욘1:2)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낯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선가를 주고 배에 올랐더라(욘1:3)

여호와께서 이미 큰 물고기를 예비하사 요나를 삼키게 하셨으므로 요나가 삼일 삼야를 물고기 배에 있으니라(욘1:17)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그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여(욘2:1)

물이 나를 둘렀으되 영혼까지 하였사오며 깊음이 나를 에웠고 바다 풀이 내 머리를 쌌나이다(욘2:5)

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 나의 서원을 주께 갚겠나이다 구원은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나이다 하니라(욘2:9)

But I will sacrifice unto thee with the voice of thanksgiving; I will pay that that I have vowed. Salvation is of the LORD.

여호와께서 그 물고기에게 명하시매 요나를 육지에 토하니라(욘2:10)

 

니느웨의 뜻은 “합의”이며 요나의 뜻은“비둘기”, 욥바는 “아름다움” 다시스는 “금속의 정련(精鍊)”의 뜻이 있습니다.

비둘기는 평화의 상징으로 요나는 하나님으로부터 평화의 소식을 전달하는 선지자라는 사실을 알 수 있지요.

욥바는 사람들이 아름답게 여기는 세상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으며 다시스 역시 영혼을 정금(성령)으로 만드는 세상을 뜻하는 겁니다.

그러므로 이 내용은 요나가 하나님으로부터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내재하신 성령과의 합일을(니느웨) 이루어 평화를 얻게(에덴동산=평평함=하나님왕국) 만들기 위한 임무를 부여받았는데(요나) 세상의 아름다움에 취해(욥바, 다시스) 잠시 옆길로 빠졌다는 것을 비유한 것으로 봐야 합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사람들이 세상에 태어난 것은 세상을 통해 영혼이 정련의 과정을 거쳐 정금 같은 성령으로 되살아나기 위해서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으로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물고기 뱃속에서 삼일 밤낮을 보냈다는 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깨달을 때까지 세상에 빠져있다는 뜻이지요.

성부이신 하나님이 성자인 우리 육신 안에 성령으로 임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본뜻입니다.

이 같은 사실을 깨닫게 되면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 즉 인자가 되는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그냥 사람에(잘못하면 짐승의 수준으로 떨어짐) 불과하게 됩니다.

그래서 요나서 2장1절에 기록하기를 물고기 뱃속에서조차 기도했다고 했습니다.

또한 세상을 바다에 비유하고 영혼까지 세상에 물들어 있었다고 했으며 걱정근심이 머리를 채우고 있었음을 풀이 머리를 싼 것으로 비유하고 있지요.

이렇게 세상살이에 찌들어 살고 있지만 항상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sacrifice unto thee with the voice of thanksgiving) 하나님과의 약속을 반드시 지키겠다 말하고 있으며(I will pay that that I have vowed) 진정한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짐을 말합니다.(Salvation is of the LORD)(2장9절)

이것이 간단한 것 같지만 아주 어렵고도 힘든 일입니다.

감사의 기도를 드린다는 것은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과 같은 것으로 성령이 함께 함을 깨달으라는 뜻이지요.

우리가 살다보면 알게 모르게 신과 약속을 하게 되는데 위기에 순간을 맞이할 때마다 기도를 통해 약속을 합니다.

이번 일만 잘되게 해주시면 어떻게 살겠노라 서원(誓願)을 하지만 막상 위기의 순간을 벗어나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잊어버립니다.

본인은 모르고 있지만 자신도 모르게 일생을 통해 이런 일을 반복해왔으며 그로인해 업장을 초래하여 각종 어려움에 직면하게 되는 겁니다.

그러므로 이 같은 사실을 깨닫게 되면 어떠한 순간조차 내가 했던 약속을 지키라는 하늘의 뜻으로 받아들이게 되어 순종하게 되는 거지요.

이러한 자각의 순간이 다가올 때 비로소 하나님의 은총이 주어지게 됩니다.

또한 하나님이 저 하늘 높은 곳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내안에 있음을 깨닫게 되기에 여호와 하나님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뜻은“스스로 있는 자, 나는 나다”로서 영어로 표기하면 (I AM WHO I AM)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여호와 하나님은 무한한 크기로 우리 안에 담기는 것이며(우리가 하나님을 담는 그릇) 그 하나님은 성령으로서 우리 안에서 항상 지켜보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인식이 육신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에 성령이 내재함을 모르고 있는 겁니다.

그러므로 성령은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얼음 알같이 알고 있으며 성령이신 하나님이 우리를 심판하고 구원하는 겁니다.

이것은 협박도 아니고 겁을 주려는 것도 아닙니다.

본인들 내면에 성령이 있음을 알려주는 일에 불과합니다.

평상시 자신이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말을 하며 어떻게 행동했는지는 본인이 너무나 잘 압니다.

양심을 속이고 했던 말과 행동들 모두를 성령은 기억하고 있으며 심지어 본인이 인식하지 못하는 잘못까지도 성령은 알고 있지요.

이 같은 일은 교회를 다니거나 절을 다닌다고 해서 알게 되는 것이 아니며 본인스스로가 인정하면 됩니다.

먹지도 자지도 않는 성령이 우리 안에 있음을 알고 나면 인생길이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이고 거듭남이며 예수가 성령으로서 내안에서 되살아나는 길입니다.

우리는 부활을 아주 특별한 일로 여기고 있지만 알고 보면 그렇게 어렵거나 특별한 일은 아닙니다.

다만 인정하기가 어려운거지요.

교회 목사님께서는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이 요나의 기적과 같다고 말씀하시며 고래뱃속에서 살아난 일이 사실인 것처럼 말씀하셨지만 절대 그렇지 않음을 알아야 합니다.

고래뱃속에 들어가는 순간 곧바로 죽게 된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요나서에 기록된 기적이 비유의 가르침이라는 사실을 알 수가 있습니다.

본인이 구태여 이러한 일을 액면대로 믿는다면 어쩔 수 없는 노릇이기는 하지만 그런 일을 사실로 받아들이게 되면 영생과는 거리가 멀어진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에덴동산에 둘러쳐진 불 칼과 같이 하나의 시험과도 같은 일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에서 우리는 이것이 비유의 가르침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지요.

 

무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이 세대는 악한 세대라 표적을 구하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나니(눅11:29)

And when the people were gathered thick together, he began to say, This is an evil generation: they seek a sign; and there shall no sign be given it, but the sign of Jonas the prophet.

요나가 니느웨 사람들에게 표적이 됨과 같이 인자도 이 세대에 그러하리라(눅11:30)

 

만약 선지자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삼 일간 있었던 것이라 믿으면 악한세대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This is an evil generation)

액면대로 믿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이렇게 표현한 겁니다.

그리고 30절 내용은 요나가 평화의 사도가 되어 영육 간에 합일이 되는 것을 가르쳐 주었듯이 예수님도 몸소 십자가에 못 박혀 육을 죽이고 영을 되살리는 퍼포먼스를 하겠다는 뜻이지요.

다른 이의 경우는 내가 알바 아니고 내 눈에는 이렇게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