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생각 긴여운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서다.

배가번드 2024. 5. 3. 0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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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같이 명상수행 하는 분 가운데 불교신자였던 이가 있습니다.

그분 말씀에 따르면 불자로서 생활할 때만 하더라도 하는 일마다 잘되고 금전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만족한 삶을 살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막상 명상수행을 하고보니 일이 안 풀리는 것은 물론 인간관계가 원활하지 못하게 되었다며 하소연하였지요.

하지만 이렇게 불만을 토로하는 한편으로 명상을 하면 너무나 평온하며 이루 말할 수 없는 지복(至福)을 느낀다는 겁니다.

이분만 이러한 일을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아는 많은 수행자들이 이러한 일을 경험하고 있으며 나 역시 이분들과 조금도 다름없는 경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처음 내가 명상을 시작할 때만 해도 장사가 너무 잘되어서 감당이 안 될 정도였으며 명상할 시간이 항상 부족했지요.

그러다보니 늘 명상에 대한 욕구가 컸으며 틈만 나면 눈을 감고 귀를 틀어막았던 겁니다.

이러한 날들이 계속되자 잘되던 장사가 갑자기 부도가 나고 생활에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으며 환란의 시간이 주어지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세상적인 일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영적인 일에 초점을 맞추다보니 이러한 일이 일어났지 않을까 생각하며 지내왔는데 성경을 통해 이러한 일이 생기는 확실한 이유를 알게 되었지요.

현재를 살아가는 오늘날의 구도자뿐만 아니라 과거의 선지자들 및 구도자들도 마찬가지의 일을 겪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감람산 위에 앉으셨을 때에 제자들이 종용히 와서 가로되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마24:3)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처처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마24:7)

이 모든 것이 재난의 시작이니라(마24:8)

그 때에 사람들이 너희를 환난에 넘겨주겠으며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가 내 이름을 위하여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으리라(마24:9)

그러므로 너희가 선지자 다니엘의 말한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 (읽는 자는 깨달을찐저)(마24:15)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찌어다(마24:16)

지붕 위에 있는 자는 집안에 있는 물건을 가질러 내려 가지 말며(마24:17)

밭에 있는 자는 겉옷을 가질러 뒤로 돌이키지 말찌어다(마24:18)

 

3절 내용은 육신예수가 임하는 때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서의 예수님이 임하시는 때를 가리킵니다.

또한 세상 끝은 세상멸망이 아니라 육신의 죽음을 뜻합니다.

즉, 성령이 임하게 되는 징조가 어떠하냐를 묻는 겁니다.

육적 속성이 죽고 성령이 되살아나는 과정전체를 이렇게 묘사하고 있는 거지요.

멸망의 가증한 것은 성령을 가리키는 것으로 거룩한 곳은 성전입니다.

성령이 임하게 되면 육신은 성전이 됨으로 더 이상 육신적이고 물질적인 일에 미련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본인이 의도치 않아도 저절로 일이 이렇게 흘러가게 됩니다.

내적으로 변화가 일어났음으로 당연히 외적으로도 변화가 일어나기 마련이지요.

성령의 불씨(가르침)를 전해 받고 영적으로 성장하게 되면 성령으로 거듭나게 되는지라 물질세상은 내적으로 멸망을 맞이합니다.

육신은 아직 습관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여 가치관이 바뀌지 못하고 있지만 내재하신 성령은 영적인 축복만을 줌으로 서로 엇박자가 나게 됩니다.

이러한 이유로 마음먹은 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다 말하신 분은 알고 보면 영적으로는 상당히 고양되어 있는 겁니다.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본 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모든 이가 이렇게 환란의 시간을 맞이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이들은 물질적 축복 속에서 평안한 구도의 길을 걷기도 합니다.

본인이 지어놓은 복덕이 많다면 당연히 물질적 풍요가 오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가 깊이 있게 생각해볼 점은 성령은 언제나 사람과 함께 한다는 겁니다.

본인의 인식여부와는 관계없이 빛이신 성령은 태초부터 지금껏 사람 안에 있으며 다만 본인이 느끼지 못하고 있을 뿐이지요.

이러한 상태에서 내면에 초 집중을 하게 되면 빛이 드러나게 됨으로 영적인 체험을 하게 됩니다.

예수께서 말씀해놓은 것이 바로 이것이며 불교에서는 이러한 일을 견성성불(見性成佛) 이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아마도 많은 이들이 이러한 말을 이해하기가 어려울 겁니다.

왜냐하면 가치관이 바뀌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서두에 언급된 구도자들도 영적체험을 했으나 육신의 습관으로 가치관이 바뀌지 않았기에 현실을 힘들어했던 거지요.

물질적으로 힘들어지고 육체적으로 고통이 찾아오는 것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것이며 자신이 걸어가는 길이 잘못된 것이 아닌가라는 후회의 마음이 들었던 겁니다.

그러나 분명히 말 하건데 그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라 지극히 당연하며 자신이 걸어가야 할 길이 정해져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이러한 일에 대해서도 성경은 정확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도 데리고 가고자 하나(행15:37)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한가지로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 하여(행15:38)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 서니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 타고 구브로로 가고(행15:39)

바울은 실라를 택한 후에 형제들에게 주의 은혜에 부탁함을 받고 떠나(행15:40)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다녀가며 교회들을 굳게 하니라(행15:41)

 

영적인 길로 접어들어 체험이 주어지는 것은 한번이면 족합니다.

성령이 내재함을 하나님이 보여주고 나면 다음부터는 혼자서 길을 걸어가야만 하기에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는 겁니다.

어린아이가 성장을 하여 어른이 되면 혼자서 모든 일을 감당해야 하는 것과 같은 거지요.

항상 하나님의(바나바=권위자) 은혜(요한=은총)가 비춰주기(마가=비추다)를 바란다는 것은 어린아이의 수준에 머물겠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영적체험에 매이지 않고(바나바와 결별) 철저히 육신과 함께 걸어가는(실라=길) 선택을 한 겁니다.

영적 체험이란 아직 성령이 완전히 드러나지 못한 이들에게 필요함으로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구브로(뜻: 구리)로 갔다고 했는데 아직 정금으로 거듭나지 못한 이들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비춰진다는 뜻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성령이 없어지거나 하나님의 은총이 없어진 것이 아닙니다.

영육이 하나 되었기에 바울은 38절에서 밤빌리아에서 마가가 떠났다고 했지요.

밤빌리아는 “혼합”이라는 뜻으로 영육이 혼재된 우리의 육신을 가리킵니다.

이미 성령의 내재함을 알고 거듭난 바울은 더 이상 영적체험이 필요하지 않기에 이렇게 묘사한 겁니다.

성령(바나바)의 역사하심과 은혜와 축복(요한, 마가)을 저버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하나 됨으로 인해 오히려 구도자들에게 은총을 베풀게 되었으므로 40절과 같이 기록한거지요.

은총을 받는 입장에서 은총을 베푸는 자리에 올랐다는 뜻입니다.

높은 인식(수리아)을 통하여 영적축복을 평범한 구도자들(길리기아)에게 내려준다는 것을 41절은 말하고 있습니다.

영적인 길을 걷는 이들을 위해 표본이 되는(확신을 주는) 선택을 했으며 그들에게 길을 제시해주는 길라잡이가 되었다는 겁니다.

같은 구도의 길을 걷더라도 가는 길이 다르다는 것을 사도행전은 보여주고 있는 셈입니다.

누군가는 구도의 길을 통해 물질적 풍요와 육체적으로 평안함을 얻게 될 것이고 누군가는 오로지 영적인 축복만을 얻을 것인즉, 어떤 길도 유일하다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만족하는 마음만이 중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