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은 경계의 벽을 허용하지 않는다.
하나님을 사랑함에 있어 그 마음을 유지하기란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내 삶이 편안하고 순조로울 때야 누구라도 하나님을 경외할 수 있지만 막상 시련과 고난이 닥치면 사랑은 한순간에 식어집니다.
그래서 인간 세상에는 가난이 방문을 열고 들어오면 사랑은 창문을 열고 도망간다는 말이 있는 겁니다.
하지만 내면의 성령이 깨어나는 순간 거짓말처럼 사랑은 문을 사라지게 만듭니다.
확장된 사랑은 그 어떤 경계의 벽도 허용하지 않으며 편재하고 무소부재 합니다.
다만 본인이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장벽을 쌓는 것이고 외면하고 있는 거지요.
성경은 우리에게 이러한 점을 가르쳐주고 있으며 바울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표본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변함없이 바울의 행적을 통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을 알아보겠습니다.
이제는 왜 주저하느뇨 일어나 주의 이름을 불러 세례를 받고 너의 죄를 씻으라 하더라(행22:16)
And now why tarriest thou? arise, and be baptized, and wash away thy sins, calling on the name of the Lord.
지난시간에 보았듯이 바울은 성령을 영접하였습니다.
그러니 성령과 하나 된 예수를 알아볼 수밖에 없으며 그가 죄 사함의 권세를 가졌음을 알기 마련이지요.
거듭난다는 것은 성령의 세례를 받는 것과(arise, and be baptized) 같고 죄를 씻는(wash away thy sins)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므로 이어지는 내용은 빛(성령)의 세례를 받고 난후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후에 내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성전에서 기도할 때에 비몽사몽간에(행22:17)
보매 주께서 내게 말씀하시되 속히 예루살렘에서 나가라 저희는 네가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말을 듣지 아니하리라 하시거늘(행22:18)
바울은 육신이 성전(예루살렘) 되어 성령을 영접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내재하신 성령과 대화를 나눌 수 있었던 거지요.
그러나 18절에서 언급된 예루살렘은 육신의 성전 됨을 모르고 있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겁니다.
그리스도 예수가 성령이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바울의 말을 듣지 않는다는 것은 성령과 함께할 자격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렇지만 사도 바울은 이러한 내적울림에 대해 다르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내가 말하기를 주여 내가 주 믿는 사람들을 가두고 또 각 회당에서 때리고(행22:19)
And I said, Lord, they know that I imprisoned and beat in every synagogue them that believed on thee:
또 주의 증인 스데반의 피를 흘릴 적에 내가 곁에 서서 찬성하고 그 죽이는 사람들의 옷을 지킨줄 저희도 아나이다(행22:20)
And when the blood of thy martyr Stephen was shed, I also was standing by, and consenting unto his death, and kept the raiment of them that slew him.
바울이 거듭나기 전에 사람들을 영혼의 감옥에 가두고(I imprisoned) 말로서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believed on thee) 때렸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표현해서 사람들을 잘못 가르치고 있었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모든 교회에서 때렸다고 한 겁니다.(beat in every synagogue)
스데반의 뜻은“면류관”으로 성령과 하나 된 성인(聖人)을 가리킵니다.
그런 사람이 순교자로서 피를 흘리고 있을 때도 방관하고(when the blood of thy martyr Stephen was shed) 그의 죽음을 동의 했으며(consenting unto his death) 죽이는 사람들의 옷을 지켰다고 했으니(kept the raiment of them that slew him) 당연히 이 내용은 깊은 뜻이 담긴 겁니다.
즉, 성령을 죽이고 육신(의복)을 지키는 가르침을 펼쳤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모든 사실을 그들 또한 안다고 했습니다.(they know that)
일반인들조차 내면에는 성령이 담겨있으므로 육신은 인식을 못하지만 성령은 이러한 모든 사실을 알고 있다는 말이지요.
그러므로 다 같은 예루살렘에 머물고 있어도 육신의 성전 됨을 아는 자와 모르는 자는 이렇게 차이가 난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이러한 까닭으로 하나님과 하나 되신 예수께서 바울의 내면에게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나더러 또 이르시되 떠나가라 내가 너를 멀리 이방인에게로 보내리라 하셨느니라(행22:21)
And he said unto me, Depart: for I will send thee far hence unto the Gentiles.
입으로는 믿는다 말하지만 성령에 대해 모르는 믿음은 차라리 이방인보다 못하다는 뜻입니다.
이방인들은 적어도 성령을 공격하지는 않는다는 말이지요.
이러한 나 홀로목사의 해석이 합당함을 다음내용은 밝히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 말 하는 것까지 저희가 듣다가 소리질러 가로되 이러한 놈은 세상에서 없이 하자 살려 둘 자가 아니라 하여(행22:22)
떠들며 옷을 벗어 던지고 티끌을 공중에 날리니(행22:23)
And as they cried out, and cast off their clothes, and threw dust into the air,
여기까지의 내용은 바울의 간증이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육신을 성전 되게 만들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성령이 함께 하지 않는다는 말에 유대인들이 발끈한 겁니다.
얼마나 분했으며 살려둘 자가 아니라는 말을 했겠습니까.
그런데 23절에서 옷을 벗어던졌다고(cast off their clothes )한 것은 육신을 벗고 영이 되었다는 것으로 성령을 죽이면 영혼이 공중의 먼지가 된다는 뜻입니다.
그렇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속뜻을 말하는 것이며 액면대로라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먼지가 날릴 정도로 소란스러웠으니 로마의 관리가 나서야겠지요.
천부장이 바울을 영문 안으로 데려가라 명하고 저희가 무슨 일로 그를 대하여 떠드나 알고자 하여 채찍질하며 신문하라 한 대(행22:24)
The chief captain commanded him to be brought into the castle, and bade that he should be examined by scourging; that he might know wherefore they cried so against him.
이야기의 흐름상 소동을 피해 바울을 성안으로 데려갔다(The chief captain commanded him to be brought into the castle) 묘사했지만 바울은 성령으로서 성전 안에 있다는 뜻이지요.
그런데 천부장이 바울을 채찍질하여 시험하라 명령을 내렸다고 했는데(bade that he should be examined by scourging) 이는 성령과 하나 된 바울의 영혼은 이미 성전에 들어서 있지만 육신은 성령에 반대하는 무리들에 의해(they cried so against him) 채찍질 당한다는 말입니다.
즉, 세상 죄를 짊어지고 가는 어린양, 예수와 같아서 하나님이 주시는 고통과 고난을 시험으로 받아들인다는 겁니다.
아마도 성경을 읽는 많은 이들은 아직도 나 홀로목사의 강해를 믿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액면대로 보면 더욱 말이 안 된다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모르긴 하지만 지금껏 사도행전에 대해 의문을 가진 이들이 많으리라 생각되며 그런 이들에게 나 홀로목사의 강해가 시금석(試金石)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아직은” 이라고 말한다면 가능성이 있는 것이고 “이미” 라고 말하면 믿는다는 말이니 함께 하는 것만으로도 절반은 완성되었음을 말씀드리며 다음시간에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