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궁극적 목적은 영육의 행복.
모르긴 하지만 이곳을 방문하는 이들 가운데는 평소 듣지 못하던 성경내용으로 혼란스러워하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성경을 집중적으로 연구하고 있는 나 역시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일반적으로 한글성경만 읽는 분들이야 오죽하겠습니까.
언제나 말했듯이 내가 먼저 결말을 내고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연구와 함께 글쓰기를 병행하는지라 놀랍기는 매한가지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생각해볼 점은 과연 앞뒤가 맞지 않는 성경말씀을 언제까지 믿고 있을 거냐는 겁니다.
무조건 하나님말씀을 기록한 책이니 믿어야한다는 말을 할 것이 아니라 보다 이성적이고 현명한 판단으로 번역의 오류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거지요.
성경을 통해 하나님도 말씀하셨듯이 성경을 상고해야만 하며 성경이 하나님 말씀인 만큼 빛이고 성령이신 하나님의 시각으로 성경을 봐야 합니다.
이렇지 못하면 지구멸망이라는 허황된 논리에 빠져 영원한 미궁 속을 헤매게 됩니다.
무려 2천년이 넘는 시간을 지구가 멸망할거라는 교리를 믿고 우주 어디엔가 있다는 영적무덤에서 잠들어 있는 영혼들과 합류할거라는 말입니다.
예수만이 구원자요 예수가 와야만 진정한 구원이 이루어진다면 도대체 2천년이 넘는 동안 지구촌을 다녀간 그 많은 영혼들은 어디 갔는지를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봐야만 하는 겁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예수가 보낸다는 보혜사가 2천년동안 오지 않았다는 것이 말이 되는지요.
지금도 세상에는 수없이 많은 목사님들이 있고 그분들의 입을 통해 예수의 가르침이 전해지고 있는데 그들 스스로는 누구의 힘을 입어 가르침을 전하고 있는지를 생각해봐야 합니다.
그들이 성령을 힘입어 복음말씀을 전하고 있다면 그자체로 구원이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으며 그렇지 않으면 마귀의 장난에 놀아나고 있는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예수가 와야 구원을 받고 영생을 얻는다 말한다면 본인자신의 영혼의 앞날부터 걱정해야 됩니다.
아마도 아직까지 나 홀로목사의 성경강해를 불신하는 이들이 있을 거라 생각되지만 그런 분들에게 전해줄 말이 있습니다.
성경을 액면대로 믿으려면 뭣 하러 이곳을 서성거리는지요.
세상에 널리고 널린 것이 교회이고 넘쳐나는 것인 목회자들인데 그곳을 가라는 말씀입니다.
성경에 담긴 뜻을 알고 싶어서 이곳을 방문했다면 속뜻을 살펴야지 자꾸만 활자에 초점을 맞춰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을 통해 봐야할 것은 글자가 아니라 그 속에 담겨있는 하나님의 뜻이라는 점을 다시 한 번 말씀드리며 오늘도 사도행전의 알맹이를 찾으러 성경 속으로 뛰어들겠습니다.
수일 후에 벨릭스가 그 아내 유대 여자 드루실라와 함께 와서 바울을 불러 그리스도 예수 믿는 도를 듣거늘(행24:24)
벨릭스의 뜻은“행복”으로 물질계를 관장하는 힘이라는 말씀을 드린바 있습니다.
같은 맥락으로 드루실라의 뜻은 “이슬”이란 뜻으로 순수한 영혼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지요.
그런데 여기에서는 벨릭스가 하나님을 대변하는 것이 아니라 물질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을 가리킨다고 봐야 합니다.
행복(벨릭스)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사람 중에 하나님을 찬양하는 이가(유대 여인=드루실라) 성령과 하나 된 바울을 통해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에 관심을 기울인다는 뜻입니다.
벨릭스가 로마사령관이라는 점을 볼 때 그가 유대여인을 아내로 맞아 들였다고 볼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당시 시대 상황을 고려하여 보면 유대여인과 로마사령관이 혼인한다고 보기는 어려우므로 이 내용은 당연히 비유의 가르침으로 봐야하는 겁니다.
이어지는 내용을 보면 이 같은 해석이 가장 합리적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바울이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을 강론하니 벨릭스가 두려워하여 대답하되 시방은 가라 내가 틈이 있으면 너를 부르리라 하고(행24:25)
And as he reasoned of righteousness, temperance, and judgment to come, Felix trembled, and answered, Go thy way for this time; when I have a convenient season, I will call for thee.
동시에 또 바울에게서 돈을 받을까 바라는고로 더 자주 불러 같이 이야기하더라(행24:26)
다가올 심판에 따른 절제와 의로움에 대해 가르쳤으므로 벨릭스가 두려워했다고 합니다.
이 말씀인즉, 죽음이후에 심판이 있으므로 살아생전 자신의 행복만을 추구하고 살기보다 절제되고 정의로운 삶을 살아야함을 가르쳤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벨릭스가 흔들렸다고 했으며 적당한 때에 바울을 부르겠노라 기록하고 있는 겁니다.
행복을 추구하고 살아가는 것이 사람의 기본소양이기는 하지만 사후 심판을 생각하게 되면 절제되고 의로운 삶을 생각할 수밖에 없으므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적당한 때라는(a convenient season) 것은 사는 동안 사후 심판을 생각할 수밖에 없는 순간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나거나 충격적인 경험을 한 후라는 뜻이지요.
본인의 생활이 평온하고 순조로울 때는 사후심판 따위는 생각도 않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라는 점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26절을 보면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분명 25절에서 적당한 시기에 부른다 했으니 약간의 텀을 두고 바울을 부를 것 같은데 수시로 돈을 받을까 불렀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는 기복적인 신앙을 가리키는 것으로 사람들이 영생보다는 사는 동안의 행복을 높이 평가한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봐야 합니다.
사람들이 성령이신 하나님을 수시로 부르는 이유는 모두가 물질을 통해 얻을수있는 행복때문이라는 말이지요.
예나지금이나 기복신앙은 모든 종교의 기본 베이스라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점을 바울은 익히 알고 있었던 겁니다.
이러한 점을 나무랄 수도 없습니다.
어차피 이래나 저래나 사람은 행복을 추구할 수밖에 없으며 그 행복의 주체가 영이냐 육이냐며 영육모두가 행복해지는가의 문제만이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마음을 사도행전은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태를 지내서 보르기오 베스도가 벨릭스의 소임을 대신하니 벨릭스가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 하여 바울을 구류하여 두니라(행24:27)
But after two years Porcius Festus came into Felix' room: and Felix, willing to shew the Jews a pleasure, left Paul bound.
보르기오 베스도의 뜻은“기쁨, 즐거움”입니다.
사람의 마음을 지배하는 것은 행복(벨릭스)이며 그 마음은 결국 기쁨과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보르기오 베스도)과 동일하다는 뜻이지요.
2년은 상대계인 물질세상과 사람을 뜻하고 바울은 성령을 가리키므로 하나님을 진정으로 찬양하려면(진정한 유대인이 되려면) 성령이 드러나야 한다는 것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는 겁니다.
육신적이고 물질적인 행복은 순간적으로 주어지는 기쁨과 즐거움이지만 진정한 행복은 영혼이 자유로워질 때라는 사실을 알라는 말입니다.(감옥으로부터의 해방)
이 같은 해석이 합당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영어성경을 보면 나타납니다.
밸릭스의 방으로 보르기오 베스도가 왔다고한(Porcius Festus came into Felix' room) 대목을 소임을 대신하는 것으로 번역했지만 이는 성경의 근본취지를 몰라서라고 봐야 합니다.
방주인만 바뀌었을 뿐 육신이 추구하는 것은 육적인 즐거움과 기쁨이며 그러한 것들로 부터 사람은 행복을 느낀다는 점을 말하기위해 이렇게 기록해 놓은 겁니다.
만약 한글 성경대로 벨릭스가 유대인을 마음을 얻기 위해 바울을 2년 동안 가둬놓았을 것 같으면 그 당장 죽여 버리면 됩니다.
앞선 시간 몇 차례나 확인했듯이 유대인들의 바람은 한결같았으며 그것은 바울의 죽음이었습니다.
이러한 까닭에 나 홀로목사의 강해가 타당하다는 점을 강조하며 여기에서 24장의 막을 내리고 25장에서 뵙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