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란트와 므나는 화폐가 아니다.
달력이 또한 장 넘어가고 있습니다.
한해가 얼마 남지 않았듯 우리네 인생도 얼마 남지 않았나 봅니다.
그래서인지 교회에서 나누어주는 달력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지요.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벧전4:7)
But the end of all things is at hand: be ye therefore sober, and watch unto prayer.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찌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벧전4:8)
And above all things have fervent charity among yourselves: for charity shall cover the multitude of sins.
이 내용을 교회에서는 지구 멸망이 다가 왔으므로 구원을 받아야하는 것으로 말합니다.
그렇지만 영어성경을 보면 그렇지가 않으며 죽음에 이르기 전에(the end of all things is at hand) 기도하는 이를 주목하라는(watch unto prayer) 내용입니다.
나 자신이 죽게 되면 내게 있어서는 온 우주가 멸(滅)하는 것과 같으므로 죽음을 맞이하기 전에 내안에서 나를 위해 기도하는 성령을 깨달으라는 거지요.
만약 이 내용이 정말로 지구멸망을 말해놓은 것 같으면 왜 2천년동안 멸망하지 않았는지부터 설명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베드로가 8절에서 서로 사랑하는 것이 무수한 죄를 덮는다고 했으니(cover the multitude of sins) 이 내용은 지구멸망을 말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원래 달력에는 7절 내용만 나오지만 이러한 점을 말하기위해 8절까지 올린 겁니다.
인생 다산 노인네들이야 목사님말씀대로 지구멸망이 코앞에 다가와 있겠지만 앞날이 구만리 같은 청년이나 어린아이들은 이 내용을 지구멸망이라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성경말씀이 특정한 부류를 위해 기록된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적용될 가르침이라는 점을 생각해볼 때 나 홀로목사의 해석은 너무나 당연하지요.
죽음에 이르기 전에 성령을 깨달아야 하며 내재하신 성령을 깨닫고 나면 서로 사랑하게 되는 것이 마땅하며 긍휼(矜恤)한 마음이 생겨서 모든 죄를 용서하게 된다는 것이 이 내용의 핵심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성령을 깨닫는다는 것은 삼라만상을 통해 역사하시는 성령을 아는 것과 같으므로 뭇 생명들을 중시 여기게 되어 있으며 자연조차 사랑하게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채식주의 자가 되거나 자연보호운동에 나서라는 말이 아니라 만물을 사랑하는 마음이 절로 생긴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되어야 젊은이들조차 성경말씀을 진리로 받아들여 서로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는 거지요.
인생초입에 들어선 젊은이들이 멸망을 걱정하며 살아가야 한다면 그야말로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멸망의 가르침은 해서도 안 되며 받아들여서도 안 되는 겁니다.
혹여 누군가 이러한 말을 하더라도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 들어야한다는 심정으로 지혜롭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이러한 가르침을 경계하라는 뜻으로 다음과 같은 내용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섯 달란트 받았던 자는 다섯 달란트를 더 가지고 와서 가로되 주여 내게 다섯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겼나이다(마25:20)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 하고(마25:21)
한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가로되 주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마25:24)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받으셨나이다(마25:25)
그 주인이 대답하여 가로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마25:26)
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두었다가 나로 돌아 와서 내 본전과 변리를 받게 할 것이니라 하고(마25:27)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어라(마25:28)
똑같은 내용이 누가복음에도 있지만 일부러 마태복음을 올린 이유는 그 속뜻을 헤아리는데 좀 더 도움이 될 것 같아서입니다.(누가복음19장11~27절과 동일함)
마태복음은 “재능과 재주”를 뜻하는 달란트로 묘사되어 있지만 누가복음은 “씨, 믿음, 형상”을 뜻하는 므나로 표현하고 있지요.
마태복음은 하나님께서 사람마다 재능을 주었음에도 노력하지 않고 하나님의 능력만 믿고 있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말해주고 있으며(육적인 면) 누가복음은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고 믿음만 내세워서는 안 된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영적인 면)
일반적으로 기독교에서는 달란트나 므나를 화폐단위로 해석하고 있지만 알고 보면 전혀 그렇지가 않으며 마태복음은 육신에 초점을 맞춘 것이고 누가복음은 영에 초점을 맞춘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즉, 육적으로 보더라도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재능을 발휘하여 맡은바 직분에 최선을 다해야하며 영적으로 보더라도 하나님과 하나 된 인자가 심어준(전해준) 믿음의 불씨를(성령의 불씨) 꽃피우기위해 노력해야한다는 뜻입니다.
면밀히 분석해 보면 누가는 마태복음을 보고 그 속뜻이 영적인데 있음을 깨닫고 므나라는 단어를 선택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 생각해보면 영과 육이 하나라는 점을 마태오도 누가도 알았던 거지요.
다시 말해서 성령을 깨닫고 나면 세상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적극적으로 세상일에 참여하게 된다는 뜻이 됩니다.
육적이고 세속적인 것들이 우리영혼으로 하여금 성령과 하나 되게 만들기 위한 발등상 됨을 알고 맡은바 직분에 최선을 다한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일조차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 소견에는 사람이 자기 일에 즐거워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나니 이는 그의 분복이라 그 신후사를 보게 하려고 저를 도로 데리고 올 자가 누구이랴(전3:22)
Wherefore I perceive that there is nothing better, than that a man should rejoice in his own works; for that is his portion: for who shall bring him to see what shall be after him?
자신의 재능을 십분 발휘하여 능력껏 쟁취하는 것은 얼마든지 허락되는 일이며 해야 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전도자는 자신의 맡은바 직분을 즐거워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은 없다 말하고 있는 겁니다.(nothing better, than that a man should rejoice in his own works)
하지만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너무나 직분에 심취하다보면 우리의 궁극적 목적지를 잊어버릴 수 있다는 거지요.
우리의 위대한 영혼인 성령의 차원에서 생각해보면 목적지가 영생의 하늘에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평상시 영적인 사람과 연결고리를 가지고 있는 것이 중요하며 자신과 인연이 있는 종교를 선택하여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좋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전도자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은줄이 풀리고 금 그릇이 깨어지고 항아리가 샘 곁에서 깨어지고 바퀴가 우물 위에서 깨어지고(전12:6)
Or ever the silver cord be loosed, or the golden bowl be broken, or the pitcher be broken at the fountain, or the wheel broken at the cistern.
성령과 연결되어 있는 것을 은줄에 비유했으며, 성령을 담고 있는 육신을 금 그릇과 항아리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성령과 생명을 담고 있는 육신이 깨어진다는 것은 영혼의 죽음을 가리키며 바퀴는 가르침의 수레바퀴를(법륜) 뜻하므로 가르침이 쓸모없게 된다는 뜻이지요.
이러한 까닭으로 살아생전 종교를 가지는 것은 자신의 영혼을 위해 좋은 겁니다.
자신의 영혼이 걱정되는 이들만 들으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