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을 염려치 말고 본인을 걱정하라.
이사를 한지 벌써 두 달이 다되어갑니다.
이제는 어느 정도 적응이 되었고 주변 환경에 익숙해지고 있습니다.
언제나 그렇듯이 아직도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에 즐거워하고 있으며 누군가 나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이 나를 흥분하게 만듭니다.
뿐만 아니라 퇴근 후 성경연구를 하는 것 자체도 나에게는 크나큰 기쁨입니다.
아침에 출근할 때는 일할 수 있는 사실에 기뻐하고 퇴근하고 나면 성경연구를 할 수 있다는 사실에 흥분하지요.
이러다보니 일과 성경연구가 명상과 기도가 되고 있으며 내가 살아가는 이유가 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나에게만 일어나는 일로서 나를 바라보는 사람들은 그렇지가 않나 봅니다.
얼마 전 동료수행자 한분이 전화를 걸어왔는데 왜 명상하러 나오지 않는지 따져 묻는 겁니다.
그래서 이제는 앉아서 하는 명상이 아니라 일상을 통한 명상을 한다고 했더니 황당해 하며 전화를 끊었지요.
전화를 끊고 난후 한동안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왜 그분은 내가 명상하러 가지 않는다는 사실에 화를 내는 것인지, 또 자신처럼 생각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실망하는 것인지를 고민해보았던 겁니다.
명상하는 이유가 나를 위한 것도 아니고 명상의 목적 또한 내가 아닐 것인데 어째서 내가 명상하러 나오지 않는 점에 대해 그리도 화를 내고 실망을 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지요.
기회가 있을 때마다 말했지만 이미 오래전부터 행주좌와 어묵동정은 내 삶의 일부가 되어있으며 명상과 일이 둘이 아닌 상태가 되어있으므로 이러한 동수들의 반응은 그야말로 나를 실망스럽게 만드는 일입니다.
게다가 어쩌다 만나면 내가 글 쓰는 일을 두고 비아냥거리는가 하면 툭하면 뒷담화를 하는지라 함께 하고 싶은 마음이 없어지고 있습니다.
좋은 소리만 들려와도 내가 처한 현실에서 명상하러 가기가 어려운데 이러한 지경에서 함께하기를 바란다는 자체가 나에게는 넘사벽이지요.
예전 같으면 애들 장난이라 여기고 명상을 하러 다녔지만 요즘같이 분초를 다툴 정도로 바쁘게 지내는 중에 시간을 내기도 어려울 뿐 아니라 곱지 않은 시선을 무릅쓰고 명상하러 가고 싶지가 않은 겁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런 일을 말한다는 자체도 내게는 곤욕입니다.
힘든 노동일을 마치고 성경연구를 하는 것만 하더라도 엄청나게 힘든 일인데 철없는 아이들의 투정을 받아줄 만큼 한가롭지가 않기 때문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글을 쓰게 되는 것은 나와 인연 있는 분들이 보내오는 상념 때문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나와 가까이 지내던 분들이 요즘 계속해서 꿈에 보이고 있으므로 무시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겁니다.
그런데 한 가지 분명하게 해둘 것은 나와 인연이 깊은 이들은 내면으로 이미 연결되어 있으므로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입니다.
억지로 함께 하고자 명상을 통해 상념을 보낼 필요가 없으며 지금의 자리에서 자신이 할 일을 묵묵히 하면 됩니다.
이미 성경을 통해 확인했다시피 사람에게는 누구나 성령이 들어있습니다.
그러므로 함께 명상하지 않거나 교회를 나가지 않아도 성경말씀을 통해 내면적으로 연결이 되어 있지요.
내게 등을 돌리지 않는 이상 이것은 불변하는 진리와도 같으며 영원히 지속됩니다.
사실 우리가 명상을 하고 기도를 하는 근본이유는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각자가 생각하는 하나님이 명칭을 달리한다해도 최고의 신을 만나기 위해 명상과 기도를 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명상을 하거나 기도를 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어떤 기간이 정해져있고 어떤 조건이 갖춰져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우리 안에 빛이자 성령이신 하나님이 들어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믿으면 됩니다.
이러한 내말을 믿는다면 구태여 내가 명상을 하러 가지 않거나 교회를 다니지 않는다고 해서 안타까워할 이유가 없는 거지요.
다시 말하자면 내가 명상하러 오지 않는다고 화를 내거나 교회 다니지 않는다고 실망한다면 내말을 믿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과는 굳이 내가 함께할 필요가 없다 여깁니다.
이미 오래전부터 명상하지 않고 교회 다니지 않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성령에 대한 믿음만 가지면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데 이제 와서 명상을 하지 않으면 큰일이 날것처럼 여긴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지요.
만약 이렇게 여길 경우 명상을 하지 않으면 깨달음을 얻지 못한다거나 교회를 다니지 않으면 영생을 얻지 못한다는 공식이 생기게 됨으로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지 않게 됩니다.
성경을 통해 확인해본바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진리에 이르기를 원하신다고 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나 같은 사람이 이와 같은 역할을 해야 하는 거지요.
아마도 여전히 명상하는 사람들이나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내말을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이곳을 방문하시는 많은 이들이 나와 이런저런 일을 통해 인연을 맺은 사람들입니다.
그분들은 명상에 대해서도 모를 뿐 아니라 교회를 다니지도 않습니다.
그런 이들에게도 하나님은 영생을 얻을 기회를 주고자 하며 성경은 이러한 일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욘1:1)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향하여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되었음이니라 하시니라(욘1:2)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여(욘2:1)
이르되 내가 받는 고난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더니 주께서 내 음성을 들으셨나이다(욘2:2)
And said, I cried by reason of mine affliction unto the LORD, and he heard me; out of the belly of hell cried I, and thou heardest my voice.
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 나의 서원을 주께 갚겠나이다 구원은 여호와께 속하였나이다 하니라(욘2:9)○여호와께서 그 물고기에게 말씀하시매 요나를 육지에 토하니라(욘2:10)
And the LORD spake unto the fish, and it vomited out Jonah upon the dry land.
아밋대의 뜻은 “정직한, 진실” 이며 요나의 뜻은 “비둘기”입니다.
그러므로 1절은 여호와께서 요나에게 진실을 전하는 비둘기가 되라 말씀하신 것으로 봐야합니다.
그리고 2절 니느웨의 뜻은 “합의”로서 세상과 적당하게 타협하고 살아가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그들에게 진리의 말씀을 전하라는 뜻이지요.
지면관계로 모두를 올릴 수는 없으나 1장의 전체 내용은 요나가 여호와가 주신 임무를 따르지 않고 세상의 아름다움에 취해 살게 된 것을 큰 물고기가 삼킨 것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2장 1절에서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기도를 했다 한 겁니다.
세상이 생긴 이래로 물고기 뱃속에서 삼일 간을 지내고도 살 수 있는 사람은 없으므로 이 내용은 당연히 비유의 가르침입니다.
2장2절을 보다시피 요나는 지옥의 배 밖으로 외쳤다고 했습니다.(out of the belly of hell cried I)
물고기 뱃속이라 했다가 다시 지옥이라 말한 것은 이 내용이 비유의 가르침이라는 사실을 알라는 뜻이지요.
그런데 정말 중요한 것은 지옥 같은 세상에 빠져서도 요나는 늘 기도했다는 겁니다.
2장9절을 보면 항상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자신을 바치며(제사하며) 하나님과 맺은 약속을 지키겠다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구원은 오로지 하나님의 은총에 달렸다 말하고 있지요.
육신의 노력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구원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되자 여호와께서 세상으로부터 요나가 자유롭게 만들어 주셨다고 합니다.(10절)
이와 마찬가지로 나 홀로목사 역시 요나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으로부터 임무를 부여받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명상하지도 않고 교회를 다니지도 않는 사람들에게 성경을 통해 영생을 얻게 하라는 명령을 하달 받은 겁니다.
내말을 믿거나 말거나 이것은 기정사실이며 내가 걸어가야 할 길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명상을 하지 않고 교회를 다니지 않는 것에 신경을 쓸 것이 아니라 자신이 영생을 얻을 자격이 있는지부터 살피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