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9.
하나님과 하나 되어 홀로(holo)되신 예수님의 발자취를 찾아 인식의 높은 곳과 지상을 넘나들며 말씀을 퍼 나르는 배달부 나 홀로 목사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기다리는 많은 분들의 요청에 따라 지난시간에 이어지는 말씀을 곧바로 보겠습니다.
또 옛 사람에게 말한바 헛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마5:33)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마5:34)
땅으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발등상이요 예루살렘으로도 말라 이는 큰 임금의 성임이요(마5:35)
네 머리로도 말라 이는 네가 한 터럭도 희고 검게 할 수 없음이라(마5:36)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 나느니라(마5:37)
But let your communication be, Yea, yea; Nay, nay: for whatsoever is more than these cometh of evil.
예문에 나온 구절들 역시 지난시간에 보았던 말씀의 연장선에 있는 내용으로서 육신의 한계점을 말씀하신 동시에 만물동일체의 개념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33절 말씀은 레위기 19장 12절의 말씀을 인용한 것인데 잠시 볼까요?
너희는 내 이름으로 거짓 맹세함으로 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라 나는 여호와니라(레19:12)
And ye shall not swear by my name falsely, neither shalt thou profane the name of thy God: I [am] the LORD.
예문을 보면 모세시대에도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들먹이며 맹세를 많이 했던 것 같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많이 저지르는 일이기도 하지요.
많은 이들이 자신의 말이 맞는다는 것을 주장하거나 누군가와 약속을 할 때 하늘에 맹세코 그것이 사실이라고 하거나 약속을 지키겠다는 말을 자주하는데 바로 이와 같은 일을 말하는 겁니다.
예수님시대에도 모세시대와 마찬가지로 헛맹세들을 많이 했을 것이 분명한데 그러한 일들의 허구성(虛構性)을 말씀하시고자 한 동시에 하나님의 실체를 말씀해 놓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오지 않은 것이 없으며 하나님의 신성이 담겨져 있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비유로서 말해놓은 거지요.
이 말씀들을 액면그대로 해석해서 땅을 하나님의 발등으로 여긴다거나 하늘을 하나님이 앉는 의자로 생각한다면 정말 존경스럽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분이야말로 너무나 순수해서 하나님께 보호를 받아야할 정도로 착한분입니다.
놀리는 말이 아니라 진실 되게 말씀드리는 것이며 지금껏 사기를 당하지 않고 살았다면 하나님이 그분을 보호하셨으리라 생각됩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만물동일체의 의미를 가르치고자 하신 말씀으로서 무엇을 두고 맹세를 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두고 맹세한다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말이며 맹세가 지켜지지 않을 때는 하나님을 욕되게 만든다는 뜻입니다.
그러기에 대화를 나눌 때(let your communication)는 옳다 그르다 말만 하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은 맹세 하는 것을 악에서 난다고 했을까요?
이것을 알려면 우리들의 마음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우리들이 누군가와 약속을 하거나 자신의 의견을 주장할 때 맹세를 하는데 맹세라는 것은 약속이나 목표를 반드시 지키겠다는 스스로의 다짐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다짐은 지켜질 수도 있고 지켜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반드시 지킨다는 것을 나타내 보이기 위해 맹세를 하는 겁니다.
자신을 믿어달라는 말이지요.
이것은 무엇을 말해주는 겁니까?
이미 자신스스로도 지켜질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아마도 많은 이들이 이러한 나 홀로 목사의 말을 실감하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약속만큼은 철두철미하게 지키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지요.
한때는 나 홀로 목사도 약속을 칼처럼 지키는 사나이 중에 사나이였던 적이 있었습니다.
스스로 약속을 잘 지키며 의리를 목숨처럼 아낀다고 자부를 하고 살았었기에 맹세도 자주 했었지요.
그러나 신을 알고부터 이러한 맹세는 지켜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은 내가 계획하고 맹세하는 모든 일들을 철저하게 무산시켜버렸습니다.
많은 분들은 일이 실패하는 원인을 하나님이 돕지 않아서라고 하거나 마가 끼어서 그렇다고들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들은 물질 지향적 삶을 살아가는 분들에게는 적용되겠지만 영적인 삶이 목표인 구도자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개념입니다.
이미 신을 알고자 구도의 길을 걸어가기 시작할 때부터 물질과는 거리가 먼 생활을 하고 있는데 불구하고 물질지향적인 일들을 했기 때문에 하나님께로부터 징계를 받았던 겁니다.
징계라기보다 목표설정에 따른 결과물이라고 말해야하겠지만 시각에 따라서는 징계로 볼 수 있다는 거지요.
많은 실패와 물질적 멸망을 겪은 후 나 홀로 목사에게는 한 가지 버릇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맹세를 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며 누군가와 약속을 할 때조차 함부로 단정적인 얘기를 하지 않게 된 겁니다.
아직도 이해가 가지 않으십니까?
여러분 모두는 생각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구도의 길을 걸어가고 있다고 한다면 하늘에 두고 맹세하고 말고 할 일이 없습니다.
하늘에 맹세코 하나님을 따르겠다고 말할 필요가 없지요.
누군가는 하나님께서 무엇인가를 준다면 하나님께 무엇인가를 드리겠다고 맹세하기도 하는데 그것이 영적인 것이든 육적인 것이든 모두가 거래라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목회자가 하나님께서 저에게 지혜를 주신다면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며 평생을 복음을 전파하며 살겠다고 맹세하는 것도 물질적인 일이라는 겁니다.
지혜나 깨달음을 물질적인 것으로 여겼기 때문에 그렇게 바랄수가 있는 것이니 이미 그 마음이 선하지 못하며 악하다는 것을 스스로 밝히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맹세를 악에 비유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겁니다.
모든 맹세가 물질적인 것들을 추구하고자 할 때 성립이 됨으로 그러한 마음을 경계하라는 의도였지요.
그렇다고 해서 물질적인 일들이나 영적인일들을 바라지 말라는 말은 아니며 단지 맹세를 하는 행위를 말한다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맹세에 따라 일어나는 또 다른 측면의 일도 있습니다.
어떠한 일을 함에 있어 우리들이 맹세를 하게 되면 그기에 따른 시험이 온다는 거지요.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그 어떠한 일도 마찬가지인데 내가 목표로 삼고 있는 것이 영적인 것이든 물질적인 것이든 반드시 시험이 따르게 되어있다는 겁니다.
네가 정말 지킬 수 있는지 보자는 식의 시험이 온다는 거지요.
따라서 누군가 맹세코 무엇인가를 하겠다든가 약속을 지키겠다고 말한다면 시험을 불러오는 결과를 초래하여 오히려 일을 망치게 되고 그 결과 약속을 망치는 동시에 내재한 성령을 욕되게 만든다는 겁니다.
이러한 시험을 예수님은 몸소 경험을 했기에 맹세하는 일을 악으로 규정지었던 거지요.
이해가 되었으리라 생각하며 다음구절로 넘어가겠습니다.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마5:38)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치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마5:39)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마5:40)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마5:41)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마5:42)
38절은 출애굽기 21장과 레위기 24장에서 인용한 글인데 예수님과 모세의 말씀에 어떠한 차이가 있는지 보기위해 구약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출21:24)
파상은 파상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을지라 남에게 손상을 입힌 대로 그에게 그렇게 할 것이며(레24:20)
예문에 나와 있는 출애굽기는 모세가 생존당시 그 당시 사람들이 살아갈 때 지켜야할 생활 규범을 말해놓은 겁니다.
그런데 출애굽기를 살펴보다가 참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하였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전해 듣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해줄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의 생활이 어떠했는지를 알게 되었지요.
오늘날과 같이 법이 정해져서 사람들의 생활을 통제할 수 있는 제도적인 장치가 없었다는 것이며 그러한 무질서한 상태의 이스라엘 사회를 강제할 수 있는 법령이 없었기에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 당시 법을 세운 겁니다.
그 시대에 필요한 율법이었다는 말이며 하나님의 율법이라 해도 오늘날까지 사회적으로 지켜져야 할 만큼 절대적이지는 않다는 거지요.
이해가 가지 않는 분들을 위해 성경을 통해 확인시켜드리겠습니다.
사람을 쳐 죽인 자는 반드시 죽일 것이나(출21:12)
만일 사람이 계획함이 아니라 나 하나님이 사람을 그 손에 붙임이면 내가 위하여 한곳을 정하리니 그 사람이 그리로 도망할 것이며(출21:13)
사람을 죽였다고 해도 무조건 죽일 수는 없다는 것을 말해놓은 것이며 때에 따라서는 정당방위가 허용된다는 말입니다.
누군가 이러한 법은 오늘날에도 적용이 되고 있다는 분이 있군요.
그렇습니다.
바로 그러한 점을 나 홀로 목사가 말하고자 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율법이라고 생각해서 잘못 받아들이게 되면 어처구니없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거지요.
여기에 대한 좋은 사례가 있습니다.
과거 중동지역에 한참 건설 붐이 일어날 때 우리나라 건설인력들이 진출을 많이 했는데 운전을 하다 사고를 내어 아이가 차에 치여 죽는 일이 일어났었답니다.
그때 그 나라 사람들은 바로 이러한 율법을 내세워 사고를 낸 사람의 아이도 데려와서 차에 치어 죽여야한다고 주장했다 하지요.
결국 사고를 낸 이는 추방을 당하게 되었고 회사는 일정한 돈을 지불하는 것으로 마무리를 하였다고 하는데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문에서도 보았듯이 모세는 분명히 율법이 예외 없이 무조건적으로 지켜질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했는데도 불구하고 오늘날까지도 모세의 율법을 액면그대로 적용하는 이들이 많다는 겁니다.
이러한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예수님은 모세의 율법이 어떻게 해석되어져야하는지를 말해야했던 거지요.
비록 과거에는 모세가 무지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서 그러한 율법을 말했다 하더라도 오늘날(예수시대)에는 달라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들여다보니 달라도 너무 달라진 것 같습니다.
모세시대에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하며 인(因)과 과(果)가 한 치의 양보 없이 대등하였는데 예수님은 오른뺨을 맞거든 왼쪽 뺨도 내밀라고 하며 상대방이 원하는 것을 더욱 많이 해주라고 합니다.
도대체 왜 이러는 걸까요?
육신의 한계를 느끼게 만들려는 예수님의 가르침이라고 말씀하시는 누군가가 보이는군요.
훌륭한 녹음기를 가지고 계시나 봅니다.
물론 그 말도 맞긴 하지만 여기에는 영적인 성장의 깊은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모세는 구도의 과정을 여러 단계로 나누어서 말해놓았는데 믿지 않는 이방의 마음에서 하나님을 믿는 마음으로 향하는 것을 출애굽기에 담았고 하나님의 성전에 기도를 올리는 것을 레위기에 담았지요.
하나님을 향해 걸어가는 구도자의 여정에서 일어나는 일을 이야기 형태로 말해놓은 동시에 무질서하던 사람들에게는 그 당시 지켜야할 생활규범을 정해주었습니다.
그러한 상황을 예수님께서 정확하게 보았기 때문에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설법을 펼치신 겁니다.
물론 이 같은 영적인 일들은 내 외형이 둘 일수가 없지요.
안으로 깨닫게 되면 밖으로 드러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이해가 잘 되지 않는다고요?
그런 분들은 자신의 삶을 돌이켜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믿는 구도의 길을 걸어감에 있어서 어떠한 마음가짐이 되고 있었던가요?
처음에는 타인들로부터 공격을 받을 때 곧바로 성경말씀의 눈에는 눈 이에는 이처럼 되었지요.
타인들의 행동을 볼 때도 저 사람의 행동은 지옥을 가는 일 저 사람의 행동은 천국을 가는 일이라고 판단하며 심판의 잣대를 함부로 휘두르며 인과응보의 법칙을 그대로 적용시켰을 겁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보다는 훨씬 상회하는 법문을 하셨습니다.
인과를 뛰어넘어 사랑의 실천을 말씀하신거지요.
아마도 많은 이들이 이점을 이해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누구든지 자기가 당하는 일에 대해 복수심을 갖게 마련이고 원망하는 마음이 일어날 테니까요.
그러나 그렇게만 여긴다면 영적인 발전이란 있을 수 없으며 예수님과 하나 됨은 꿈도 꾸지 못할 일이 되고 맙니다.
어렵더라도 해내야만 하고 장애물이 있다면 헤쳐 나가야 합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 이와 같은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할 수 있으며 인과를 뛰어넘을 수가 있을까요?
당연히 육신이 우리의 참모습이 아니라 성령이 우리의 참주인 이며 그와 하나 되는 것이 인과를 뛰어넘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생각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기에 힘이 드는 것인데 그 해답을 예수님이 말씀하신 겁니다.
자신안에서 성령을 드러내게 된다면 어떤 마음가짐을 가지게 되는가를 말해놓은 것이며 본인이 직접 생활에서 실천을 해봄으로서 깨달음에 이르게 만들라는 말씀입니다.
너무나 어려운 것 같지만 사실은 아주 쉽기도 합니다.
어렵다는 분들의 가장 큰 문제점은 이러한 말을 자신에게만 적용시키지 않고 세상 모든 이들에게 적용시키려고 하기 때문에 어려운겁니다.
조금 어려웠나요?
그러면 좀 더 쉽게 접근을 해보겠습니다.
구도의 길을 걸어가는 누군가에게 한사람이 와서 뺨을 때린다고 할 때 그러한 일이 그저 일어날까요?
아니면 어떠한 이유인지는 모른다 하더라도 심은 대로 거두는 걸까요?
성경을 정말로 믿는 사람이라면 분명 말씀대로 일어나는 일이라고 할 것이 분명합니다.
그럴 경우 내가 알지 못하더라도 어떠한 짓을 했기 때문에 결과가 왔다 생각하게 될 것이며 상대방이 화가 풀릴 때까지 때리라고 할 겁니다.
하지만 예외의 경우도 분명하게 있습니다.
사람들이 의도적으로 믿는 사람을 시험할 때입니다.
네가 정말 인과를 넘은 사람이라면 내가 공격을 해도 받아낼 수 있어야한다고 생각하며 그를 시험하는 경우이지요.
이것이 바로 마귀가 하는 장난이며 누군가 구도자를 향해 이러한 시험을 했다고 한다면 씻을 수 없는 큰 죄가 되는 겁니다.
불교에서는 이러한 죄를 범하게 되면 다음 세상에 불구자로 태어난다고 하며 불구자는 부처의 제자가 될 자격이 없다고도 합니다.
물론 이 같은 법문은 비유의 말로서 현시대의 불구자모두가 그러한 죄악 때문에 태어난다는 말은 아니며 그 죄의 막중함을 말하고자 하는 말입니다.
많은 이들이 아직까지도 이러한 습성을 버리지 못하고 똑같은 짓들을 반복해서 하고 있는데 그분들이 살아생전 뉘우치고 회개하지 못하면 큰 화가 미치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나 홀로 목사의 주변에는 이러한 사람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누군가 깨달음을 얻었다하면 온갖 방법으로 시험들을 하며 공격을 일삼지요.
모두 위험천만한 짓들을 스스럼없이 잘도 하고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정말 내가심은 일들이 돌아왔는지 누군가 나를 시험하는지를 어떻게 알 수가 있을까요?
먼저 내가 피할 수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심은 일이라고 볼 수가 없습니다.
몇 번이나 피했는데도 자꾸만 다가온다고 한다면 그것은 내가 심어놓은 것이지요.
그리고 누군가를 만났을때 나에게 도움을 요청하거나 혹은 요청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내 마음이 움직였다고 한다면 그것은 분명 심어놓은 무엇인가가 돌아온 것이 분명합니다.
이런 까닭으로 누군가를 만나지도 않고 요청받지도 않았는데 불구하고 사람들을 돕기 위해 헌신을 하거나 물질적인 도움을 주는 행위들은 사랑의 실천이며 그자체가 성인의 마음일수밖에 없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종교에 관계없이 천국을 허락하실 것이며 그들이 원하는 것이 물질이면 물질에 대한 보상으로 영적인 것이면 영적인일에 대한 보상으로 갚으실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자신이 심어놓은 것이 왔다고 생각한다면 그보다 더욱 많이 줌으로서 인과를 뛰어넘는 사랑을 실천하라는 겁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덧붙이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아무리 누군가 피할 수 없이 몰아치며 요구를 해도 자신의 형편이 안 되면 절대 무리를 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소위 성전 건립이다 선교활동이다 하며 성도들로부터 무리하게 돈을 요구하는 목회자들의 말에 현혹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거지요.
이 같은 일은 어떠한 종교나 믿음의 길에도 공히 적용될 말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을 위한 일이라고 해도 내형편이 어려울 지경이면 하나님을 위하기보다 자신을 위해야 한다는 겁니다.
나 홀로 목사의 이와 같은 말을 듣고 일을 하는 주최 측에서는 발끈할지 모르지만 실상은 그들을 도우는 말이라고 봐야합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좋은 일이라고 자신의 능력을 넘어선 자선을 했다고 했을 경우 스스로 장애를 겪게 되면서 하나님을 원망하는 일까지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훗날 자신이 생각한 바대로 일이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그때껏 목숨을 바칠 듯이 존경하던 믿음의 대상을 공격하는 사람이 되는 거지요.
이모두가 외형적인 일들로서 바깥에서 진리를 찾고자 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진정한 성전이란 마음 안에서 이루어져야하며 진정한 선교활동 또한 스스로 모범적인 신앙생활을 할 때 남들이 보고 판단을 하는 것이지 외형적인 일에 목을 매는 자체가 이미 하나님과는 거리가 먼 행위들입니다.
말이 나왔으니 좀 더 신랄하게 비판을 해볼까요?
소위 말하는 목회자들은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들을 해봐야합니다.
정말 하나님이 교회가 필요할까요?
진정 하나님이 그분들이 해석한대로의 성경말씀이 진리의 말씀이기에 나가서 전파하라고 하시겠냐는 겁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데 필요해서 교회가 필요한 것이지 하나님이 교회가 필요하고 복음말씀이 필요한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교회가 좁아서 넓히는 것이 목적이라고 한다면 얼마든지 해결할 방법이 있습니다.
예배시간을 늘리면 되지 않습니까?
주야로 시간배정을 하거나 평일에도 예배시간을 정하게 되면 일요일에 좁아서 바글거리는 폐단을 줄일 수 있습니다.
성당에서 몇 차례에 걸쳐 미사시간을 정해놓은 것은 참으로 잘한 일이라 여겨집니다.
이미 보았듯이 모세시대의 율법은 그 시대가 필요로 하는 율법이었으며 예수님은 이러한 율법을 뛰어넘는 율법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유독 교회에 금전을 끌어들이는 데만 모세의 율법을 주장하는 저의가 뭔지 심히 궁금합니다.
입으로는 예수님을 하나님이라 부르면서 예수를 팔아먹는 행위가 아닌 바에야 어찌 교회확장에만 열을 올릴 수 있는지요?
우리나라의 자살률이 O. E. C. D 국가 중 1위라는 사실은 벌써 알려져 있지만 최근에는 더욱더 많은 사람들이 자살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불과 몇 해 전만 하더라도 하루에 35명이 자살을 하다가 올해 들어 42명이 넘고 있습니다.
사랑이 가득한 하나님의 말씀이 대한민국 방방곳곳에 넘쳐흐른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는 목회자들은 여기에 대한 책임이 전혀 없다고 할 수 있습니까?
자신들 교회의 성도들이 어떠한 어려움에 처해있는지 제대로 알기나 하는가 말입니다.
당신들이 성지순례를 위해 비행기를 타고 돌아다니는 동안 생활고에 시달리던 성도는 연탄불을 피워놓고 가족들과 자살을 할지도 모른다는 말이지요.
너무 심했나요?
나 홀로 목사는 교회가 필요 없다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며 모든 기독교 교회가 그렇다는 것도 아닙니다.
나 홀로 목사가 지적하는 대로 행동하는 교회를 말하는 것이며 지나치게 금전을 필요로 하는 일을 만들지 말라는 말이지요.
말이 길어진 것 같으니 궤도수정을 하고 42절에서 멈추었던 발걸음을 다시 이어가겠습니다.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마5:43)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5:44)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마5:45)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마5:46)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 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마5:47)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5:48)
43절의 말씀도 구약의 말씀을 인용한 것 같으니 비교를 위해 잠시 보겠습니다.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나는 여호와니라(레19:18)
Thou shalt not avenge, nor bear any grudge against the children of thy people, but thou shalt love thy neighbour as thyself: I [am] the LORD.
비교를 하고 보니 뭔가 문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분명 예수님의 말씀은 레위기의 내용을 인용한 것인데 내용이 많이 다릅니다.
모세는 분명 원수를 갚지 말고 동포를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는데 어째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을까요?
이것은 분명 예수님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약의 내용들을 오해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렇다면 왜 그 시대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구약의 말씀을 오해하고 있었을까요?
그 당시 서기관들이나 바리새인들을 비롯하여 정치적인 세력들이 사람들을 가르칠 때 로마로부터 독립을 꾀하기 위해 성경내용을 변형시켜 가르쳤던 겁니다.
이미 지난 시간에서 보았듯이 예수님은 구약 속에 비유의 말씀도 훤히 알고 있었으며 구약속의 가르침과 율법들이 구도자의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구약의 말씀을 이용하여 정치적인 독립을 쟁취하려는 세력들과는 말씀이 달랐던 거지요.
물질적인 것과는 전혀 상관없는 영적인 것만을 추구하는 진정한 스승이었습니다.
만약 예수가 그 당시 서기관들이나 바리새인들처럼 정치세력과 야합을 하여 이스라엘의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노력했더라면 오늘날 이렇게까지 전 세계인들로부터 사랑을 받았을까요?
반대적으로 보자면 이스라엘 사람들로서는 예수가 미울 수밖에 없을 겁니다.
자기들 나라를 위해서 목숨을 바쳐도 시원치 않을 상황에서 원수를 사랑하라고 외쳤으며 심지어 그들을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를 하라고 했으니까요.(마5:44)
이 모든 것이 영적인 시각을 갖지 못하고 육적인 시각에 머물렀기 때문에 일어난 일입니다.
따라서 오늘날 목회자들이 성경말씀을 이용하여 물질적인 무엇인가를 획책(劃策)하고 있다고 한다면 그것이 아무리 취지가 좋다고 해도 영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다는 말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이 이와 같은 말이 맞는다는 것을 증명을 하고 계시는바 45절의 말씀을 다시 한 번 더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마5:45)
That ye may be the children of your Father which is in heaven: for he maketh his sun to rise on the evil and on the good, and sendeth rain on the just and on the unjust.
원수를 사랑하게 되면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것은 뭔가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이해하겠지만 하나님이 빛을 악인이나 선인에게 비취게 한다는 말은 어렵지요?
게다가 축복의비를 의로운 자에게나 불의한 자에게 공히 내려주신다고 하시니까요.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얼마나 크게 깨달은 분인가를 보여주는 결정적인 증거입니다.
이제 예수님의 이 말씀을 올곧게 이해하기위해 하나씩 분석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우선적으로 우리들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기 위해서 알아야할 것은 원수를 사랑하려면 어떤 인식을 해야 할까를 생각해봐야합니다.
우리들의 서두에 예문으로 들었던 33절에서 37절 내용을 보면 여기에 대한 해답을 찾을 수가 있습니다.
모든 만물에 하나님의 품성이 들어있지 않은 것이 없다는 말은 비록 원수일지라도 그이의 안에는 하나님의 성령이 들어앉아있다는 말이지요.
육적인 시각에서는 말도 되지 않겠지만 영적인 시각에서는 충분히 가능한 일입니다.
모세도 해내었고 예수도 해내었으며 성경속의 많은 선지자들과 사도들도 해냈었지요.
모세가 레위기 19장 18절에서 원수를 갚지 말고 동포를 원망 말라고 했는데 동포라는 말을 영어로 보면 the children of thy people 입니다.
직역하면 네 백성의 아이들이라는 말이며 다 같은 이스라엘자손을 뜻합니다.
결국 나의 원수도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다 같은 피조물들이며 하나님의 입김으로 만들어졌다는 말이 되는 겁니다.
지나간 시간에도 언급이 있었듯이 성경을 보다보면 곳곳에 인간들의 계보가 기록되어있지요.
그것이 뜻하는 바는 거슬러 올라가면 아담에서 통일이 되며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것을 나타내 보이고 있는 겁니다.
이러한 시각을 가지는 것이 중요한 이유가 비록 나와 대적하여 원수관계에 있다하더라도 그도 하나님의 다 같은 자녀라고 생각하게 되면 사랑하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같은 말은 이 세상을 완전히 벗어나 하나님과 하나가 되어 영광을 누리고자 하는 사람의 인식이며 아직까지 아귀다툼의 세상살이를 지속하고픈 사람들의 인식은 아닙니다.
또한 이것은 아직도 선악의 경계에 머물고 있는 구도자들의 것도 아닙니다.
대부분의 구도자들은 선악간의 경계가 분명하여서 옳고 그르고 좋고 나쁘며 선하고 악한 일을 구분하지만 하나님의 시각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예수님이 말씀하셨지요.
원수를 사랑할 수 있을 정도면 선도 악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며 하나님의 빛이 선악을 구분하지 않고 비추어진다는 것도 안다는 말입니다.
아직도 이해가 가지 않는 많은 분들이 보이는군요.
그러한 분들은 자신들의 외형적인 믿음의 형태를 자신의 내면으로 돌려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먼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 안에 성령으로 존재한다고 보았을 때 어떠한 일이 벌어지는가를 확인해 보라는 겁니다.
원수라는 말은 누군가 나에게 해를 끼친 사람을 말하는 것이며 악한 일을 행한 사람이지 않겠습니까?
이러한 원수조차 사랑하게 된다면 이미 선도 악도 없는 인식에 도달하게 되었다는 겁니다.
지금까지 보고 있는 관점이 달라졌다는 말이며 판단하는 기준이 달라진다는 말이기도 한데 그때는 그 사람에게 악인도 선인도 없으며 하나님의 품안에서는 만물동일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며 삼라만상 안에 깃든 하나님의 품성을 볼 수 있게 된다는 거지요.
지금껏 알고 있던 악한사람에게도 선한 사람에게도 하나님의 빛이 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며 그때껏 의롭다고 여기던 사람에게도 불의하다고 여기던 사람에게도 하나님의 축복의 비가 내리고 있다는 것을 보게 된다는 말입니다.
어렵습니까?
아는 것도 이렇게 어려운데 실천하기란 얼마나 어려울까요?
너무 급하게 마음먹을 것이 아니라 조금씩 걸어 나가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도 원수를 사랑하기 힘든 우리들의 상황을 이해하셨기에 격려의 말씀으로 달래주셨지요.
우리가 어려운 것을 해낼 때 값어치가 있다는 말씀을 세리에 비교해서 말씀하신 겁니다.
세금징수원인 세리에게 세금을 충분히 내면 좋아하는 것이 당연한 것같이 우리에게 잘해주는 이에게 잘하는 것은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이며 그러한 일을 해서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기는 힘들다는 말입니다.(마5:46)
또한 예수님은 국경을 초월하고 종교의 벽을 넘어서는 큰 사랑의 실천을 요구하셨습니다.
자신의 나라사람만 위하고 자신과 동일한 종교 사람만 사랑한다고 한다면 무슨 값어치가 있느냐는 것이며 그와 같은 행위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방인들조차 하고 있다는 말입니다.(마5:47)
이 얼마나 크신 사랑입니까?
이렇게 크신 사랑을 말씀하신 예수님의 가르침을 교회에다 가두고 성경 안에만 가두는 것이 진정 예수의 제자들이 할 짓인가 오늘날의 목회자들에게 물어보고 싶습니다.
내 교회 형제들에게만 사랑을 베푸는 예수님을 원한다면 그들에게는 당연히 그러한 예수님의 가르침이 임할 것이며 그들의 성경해석도 거기에 맞춤형으로 맞춰질 것입니다.
자신이 믿고 있는 하나님이 어떠한 하나님이며 자신이 지금껏 받아들이고 있던 성경의 말씀이 어떠한 것이었나 하는 것은 예수님말씀이 증명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원하고 있지요.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그 너머 하늘에 계신 하나님과 완전히 하나가 되라고 말입니다.(마5:48)
지금까지 보았듯이 예수님은 자신을 무조건 믿는다고 해서 천국을 간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으며 자신의 말씀을 믿고서 실천하는 자가 하나님나라에 갈 수 있으며 하나님의 아들이 될 자격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또한 하나님이 온전한 것과 같이 온전해지라고 했는데 이 말씀을 모세도 말씀하셨지요.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고하여 이르라 너희는 거룩하라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fp19:2)
Speak unto all the congregation of the children of Israel, and say unto them, Ye shall be holy: for I the LORD your God [am] holy.
이제 예수만이 유일한 하나님의 독생자라는 구시대적인 발상은 벗어낫겠지요?
오늘 예문에는 올리지 않았지만 모세는 율법을 출애굽기에서도 말해주었고 레위기에서도 말했는데 약간씩의 변형들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시대마다 율법들이 변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로서 율법은 그 시대가 만들어 낸다는 것을 보여주는 거지요.
자신들이 살고 있는 시대와 환경에 따라 지켜져야 하는 율법이 따로 있다는 것이며 절대 고정적이 될 수가 없다는 겁니다.
하지만 과거, 현재, 미래를 막론하고 바뀌지 않고 사는 환경에 관계없이 지켜져야 하는 율법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양심에 기록된 율법인데 우리들 안에 살고 있는 하나님이 정해주시는 율법이기도 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정말 무서운 율법이지요.
마찬가지의미로 하나님의 말씀이 시대마다, 말씀을 전해주는 사람마다, 달라질 수는 있지만 어떠한 경우에도 변하지 않는 것은 우리들 안에서 적용될 때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실천하는 것이 사람들의 내면의 것으로 받아들여지게 되면 시대가 바뀌고 사람이 바뀐 다고해도 결코 달라질 수가 없습니다.
이러할 때 우리들은 진정한 하나님을 만나게 되며 성경의 모든 말씀들이 이해가 되는 겁니다.
모쪼록 빠른 시일 내에 여러분들에게 이러한 영광이 주어지길 바라며 오늘시간을 마치겠습니다.
온 누리에 넘치는 하나님의 사랑이
때로는 폭력과 파괴로 나타나며
사람들로 하여금 공포에 떨게 합니다.
죄 많은 그들의 통곡소리도 아랑곳 않고
사정없이 휘두르는 당신의 정의로운 검은
세세생생 쌓아놓은 거짓진리들을
남김없이 잘라버립니다.
애통해 하고 절규하는 목소리가
당신에게 도움을 청하며 울부짖을 때
당신은 폭력과 파괴를 자행하는
육중한 검을 선물하지요.
수없이 많은 생을 두고 쌓아둔
잘못된 인식의 산이 시야를 가리고
도움을 청하는 목소리를 막음에
크나큰 칼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장막이 되어 높다란 성벽같이 가로막혀진 고정관념들이
당신의 칼날아래 멸망을 맞이할 때
당신은 사랑의 부드러운 빛을
비처럼 내려주시겠지요.
악하거나 선한 사람에게나…….
의롭거나 불의한 사람에게나…….
그때서야 비로소 당신을 보리니
태초부터 당신은 우리 모두의 안에서
웃고 있음입니다.
눈이 열린 이에게는 보일 것이고
귀가 열린 이는 들을 것이며
하나님은 그들과 함께 함일지니라.
아멘! 아멘!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