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식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
고린도 전서9장에는 신명기25장 말씀이 인용되었으므로 다시 한 번 되새겨볼까 합니다.
원래는 4절 말씀만 인용되었으나 이해를 돕기 위해 몇 구절 더 올렸습니다.
사람들 사이에 시비가 생겨 재판을 청하면 재판장은 그들을 재판하여 의인은 의롭다 하고 악인은 정죄할 것이며(신25:1)
If there be a controversy between men, and they come unto judgment, that the judges may judge them; then they shall justify the righteous, and condemn the wicked.
사람들 사이에 분쟁이 생기면(there be a controversy between men) 재판장이 심판하도록 데려가라고 합니다.(1절)(they come unto judgment, that the judges may judge them)
그러면 정의로움은 옳다 할 것이고 악함은 선고를 내린다 했지요.(they shall justify the righteous, and condemn the wicked)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내용을 두고 판사에게 심판을 받는 것으로 생각하겠지만 그렇게만 여길 수는 없습니다.
성경이 쓰인 목적이 사람들로 하여금 성령을 깨닫게 하는데 있으므로 이 내용역시 영적으로 받아들여야 됩니다.
그러므로 이 내용은 육신이 지은 죄를 내면의 성령이 심판하게 만들라는 뜻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겁니다.
이어지는 내용을 보면 왜 이렇게 해석되어야 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악인에게 태형이 합당하면 재판장은 그를 엎드리게 하고 그 앞에서 그의 죄에 따라 수를 맞추어 때리게 하라(신25:2)
And it shall be, if the wicked man be worthy to be beaten, that the judge shall cause him to lie down, and to be beaten before his face, according to his fault, by a certain number.
만약 맞을 만큼 악한 사람이라면(if the wicked man be worthy to be beaten) 엎드리어(to lie down) 그가 실수한 수만큼(according to his fault, by a certain number) 그의 면전에서 맞는 일이(to be beaten before his face) 야기 될 거라고(shall cause him) 합니다.
그의 면전에서 그가 맞는다고 했으니 영육이 분리된 상태라는 점을 알 수 있지요.
이는 육신이 두들겨 맞는 것을 영혼이 지켜본다는 뜻이며 성령이 재판장이 된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다음과 같은 내용을 기록하고 있는 겁니다.
사십까지는 때리려니와 그것을 넘기지는 못할지니 만일 그것을 넘겨 매를 지나치게 때리면 네가 네 형제를 경히 여기는 것이 될까 하노라(신25:3)
Forty stripes he may give him, and not exceed: lest, if he should exceed, and beat him above these with many stripes, then thy brother should seem vile unto thee.
40은 사람과 인자의 숫자4와 완전의 숫자10의 연합된 숫자로서(4×10=40) 인자의 완성됨을 가리킵니다.
즉, 인자가 될 때까지 성령의 심판아래 놓이게 되어 두들겨 맞는다는(단련함) 뜻이지요.
그래서 40을 초과해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not exceed)
만약 초과하게 되면 형제가 너를 용납할 수 없다고 했으니(then thy brother should seem vile unto thee) 인자가 되고나면(성령과 하나 되고 나면) 더 이상 매를 맞는 일이 없다는 말이 됩니다.
다시 말해서 성령과 하나 되고 나면 육신이 당하는 고통과 시련과는 무관한 존재가 된다는 겁니다.
이렇게 되었으므로 자신의 육신이 두들겨 맞는 것을 지켜볼 수가 있게 되는 거지요.(to be beaten before his face)
이러한 까닭으로 신명기는 다음 내용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곡식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지니라(신25:4)
Thou shalt not muzzle the ox when he treadeth out the corn.
직역하면 탈곡하는 소에게 입마개를 씌우지 마라입니다.
바울이 인용한 것이 바로 이 구절인데 사도가 말씀을 전하는 것은 죄를 벗겨주기 위해서임으로(탈곡에 비유) 자유로운 가운데 복음전파를 할 수 있게 해달라는 뜻으로 인용한 겁니다.
직접적으로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사도들이 복음을 전함에 있어 조금의 불편함도 없게 해달라는 당부의 말씀을 하신거지요.
모르긴 하지만 많은 이들이 이 같은 나 홀로목사의 해석이 이해되지 않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보았듯이 액면대로 보기에는 내용이 너무나 단순하며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듯이 잘못한 이를 재판장이 정확하게 심판할 수 있을 것 같으면 그가 하나님이 되어야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듯이 세상의 재판장도 사람에 불과하고 그가 정의롭고 절대적인 진리에 입각하여 심판한다 말할 수는 없는 겁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법을 말할 때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라고 비아냥거리는 거지요.
본문을 보다시피 만약 이것이 세상 사람들의 재판받는 것일 것 같으면 앞뒤의 문맥이 전혀 맞지가 않습니다.
3절까지 두들겨 맞는 일을 말하다가 갑자기 4절에서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하는 것은 속 깊은 뜻이 있음을 알게 한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점을 알았기 때문에 바울은 고린도전서 9장에서 이 말씀을 인용 할 수 있었던 겁니다.
그러므로 신명기의 내용은 스스로의 내면에 깊숙이 잠들어있는 성령을 일깨워 그가 자신 삶의 재판장이 되라는 뜻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렇게 되었을 때 육신과는 무관한 존재가 되며 세상 죄를 짊어지고 가는 어린양이 됩니다.
이러한 일에 대해 이사야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사53:4)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사53:5)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53:6)
불가에는 이 같은 일을 일러 “중생이 아프니 내가 아프다”고 합니다.
무량광이신 아미타 부처님이 육신 안에서 고통을 함께 한다는 것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 겁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빛이신 성령이 육신 안에 들어앉아 육신이 죄를 지어 벌 받는 것을 함께 감당하고 있음을 묘사하고 있는 거지요.
다른 이의 눈에는 어떻게 보일지 모르겠지만 나 홀로목사 눈에는 이렇게 보이고 있습니다.
눈을 하나로 만들어 온몸이 빛으로 가득한 이들만 들으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