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생각 긴여운

내 부모가 나를 키울 때 얼마나 힘이 들었을까.

배가번드 2025. 2. 14. 03:14
728x90

얼마 전 손녀의 돌잔치가 있었습니다.

우리 때만 하더라도 집안 식구들만 모여서 식사하는 정도였는데 요즘은 결혼식에 준할 만큼 행사를 거창하게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요.

시대에 따른 변화인지라 이러한 점에 대해 내가 이러쿵저러쿵할 수는 없고 세월이 많이 변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사진으로만 보다가 가끔씩 만날 때마다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는 점을 생각하는 한편으로 며느리가 얼마나 힘들까를 생각하게 됩니다.

잘 놀고 있을 때는 너무나도 귀엽지만 한 번씩 잠투정을 하면 주변사람들을 쩔쩔매게 만드는지라 많은 시간을 아이와 지내야하는 며느리의 고충이 짐작되기 때문입니다.

지금 와 돌아보면 아들을 키울 때도 잠투정을 했으며 다만 아이가 무엇을 원하는가를 미리 알고서 대처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안고서 방안을 왔다 갔다 하기도 하고 업고서 달래곤 했지요.

지금이야 벌써 30년도 훨씬 지난 일인지라 쉽게 키운 것 같지만 당시에는 나름의 어려움이 있었으며 아이엄마가 무척 고생을 했으리라 봅니다.

그러므로 어떤 아이든 성장하는 과정에서 부모를 힘들게 하지 않는 경우는 없습니다.

우리아이는 너무나 순해서 그런 것 모르고 키웠다고 한다면 그 사람 자체가 아이를 너무나 사랑하는 동시에 아이가 원하는 것을 잘 캐치하고 대응을 잘했다고 말할 수 있지요.

물론 아이의 타고난 성품이 순해서 일수도 있지만 부모 닮지 않는 아이가 없다는 점을 감안하면 나는 괜찮았는데 내 아이가 별나다는 말은 모순된 겁니다.

결국 손녀가 잠투정을 심하게 한다면 나 역시 그러한 유전자를 물려받았고 주었으므로 나또한 잠투정을 했을 거라는 결론을 얻게 됩니다.

결국 내 어머니가 나를 키울 때 잠투정 없이 키웠다면 어머니가 훌륭했다는 말입니다.

실지로 내 아들의 경우 감기가 심하게 들어 코가 막히면 아이 엄마가 코를 입으로 빨아내곤 했습니다.

나는 흉내조차 낼 수 없는 사랑의 마음으로 아이를 키웠던 거지요.

또한 이모들 가운데 셋째가 엄마이상으로 아이를 사랑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몇 달 동안을 부모를 떠나 이모와 살면서도 투정 없이 살았다는 것은 이모의 사랑이 어떠했을지 충분히 짐작이 가는 일이며 이모부의 품성까지도 알 수 있습니다.

신혼부부가 아이도 없는 상태에서 조카를 자식처럼 키운다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은 아니며 아이가 부모조차 찾지 않고 살 수 있는 것도 쉽지 않은 일입니다.

뿐만 아니라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도 심심찮게 아이를 데리고 놀러 다니시곤 했지요.

이렇게 주변사람들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으니 큰 어려움 없이 성장할 수 있었던 겁니다.

사람들 대부분은 자신이 저절로 어른이 된 것처럼 여기지만 사실은 많은 이들의 폭넓은 사랑이 있었고 이해와 인내의 시간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아이를 키우다 힘이 들면 부모를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내 부모가 나를 키울 때 얼마나 힘이 들었을까를 생각해야한다는 말입니다.

솔직히 나 역시 이러한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아들이 돌을 맞이할 무렵 지방에서 직장생활을 하였고 성장과정에서도 지방으로 장사를 다녔으므로 힘들게 아이를 키워보지 못했던 겁니다.

그저 아이가 자는 모습을 주로 보았고 기껏해야 주말에나 아이와 함께 하는 정도였지요.

이러한 까닭에 이번에 손녀가 태어나고 나서 느끼는 점은 남다를 수밖에 없으며 과거를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엄마의 한량없는 사랑을 깨닫게 되니 요양원에 계신 어머니가 더욱더 안타깝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도(道)를 위해 세상을 버리는 선택을 하는 순간부터 가족들에 대한 사랑을 두 눈 질끈 감고 외면하며 지내왔지만 도(道)가 세상에 널려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부터 단한순간도 사랑을 외면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요.

내가 손녀를 귀하게 여기는 이상으로 내 어머니는 손자를 사랑했을 것이고 내가 목숨을 나누어주어도 아깝지 않게 여기는 아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나를 사랑했을 어머니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가끔씩 주변을 둘러보면 부모를 원망하는 이들이 있음을 봅니다.

내가 부모를 잘못만나 이렇게 고생을 한다고 여기는가 하면 이렇게 어려운데 왜 부모님이 나를 도와주지 않는가를 말하기도 합니다.

얼마나 힘이 들면 저렇게 말할까 이해가 되기도 하지만 한편생각해보면 가난한 집에 태어나 불우한 환경을 딛고 성공하여 부모에게 효도하는 이들도 있고 보면 부모 원망하는 마음은 못난이들의 것이라는 점을 알게 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본인이 태어난 것을 부모로 인해서라 생각하지만 사실을 말하자면 영혼이 부모를 선택하는 겁니다.

그러므로 부모를 잘못 만났다고 생각한다면 자신의 영혼이 지어놓은 복이 없어서라고 볼 수 있지요.

만약 본인이 지어놓은 복덕(福德)이 많다면 복을 누리기위해서 이 세상을 올 것이며 공덕(功德)이 많다면 공덕을 베풀기 위해서 옵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하는 일마다 잘 풀리고 마음먹은 대로 일이 이루어지는 지는 것이며 어떤 이들은 죽어라 노력해도 일이 꼬입니다.

운칠기삼(運七技三)으로 표현되는 이 같은 일은 세상을 살아가는 누구에게나 적용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같은 일은 어디까지나 육적인 사람의 것으로 영적인 사람의 것은 아닙니다.

영적인 사람은 공덕을 베풀기 위해서 옴으로 물질과 육적인 일들과는 무관한 삶을 살게 됩니다.

성직자들이나 영매들은 영적인일을 하기로 선택하여 내려온 영혼으로 삶의 방식이 일반인들과는 많이 다릅니다.

때로 이런 영혼들은 시련과 고난을 자처해서 세상에 내려옴으로 세상에서 가장 비천한 신분으로 오기도 합니다.

사창가에서 태어나기도 하고 사생아로 태어나기도 하며 부모덕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것은 물론 주변으로부터의 도움조차 받지 못하는 상태로 태어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엄청난 고통과 괴로움을 당하며 오랜 기간 인고(忍苦)의 시간을 갖게 되는 겁니다.

육신적으로 불구의 몸을 갖거나 물질적으로 가난한 삶을 살게 되거나 무소유의 삶을 사는 것 모두가 위대한 영혼의 선택으로 인해서라는 말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부유하고 풍족한 삶을 통해 영적인 각성이 일어나지 말라는 법은 없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복덕이 많다면 세상을 즐기기 바빠서 영적인 영광을 느낄 겨를이 없게 됩니다.

그러므로 물질적 가치관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는 반드시 물질세상과는 척(隻)지게 된다는 거지요.

이러한 까닭에 예수님은 다음과 같은 말씀을 남겼습니다.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눅16:13)

 

세상 사람들은 재물을 목숨처럼 여깁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이러한 말씀을 남기신 겁니다.

그러나 알아야할 일은 재물과 하나님은 동행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열차를 싣고 달리는 철길이 두 줄로 되어있듯이 영육으로 이루어진 몸체가 영과육의 길을 함께 달리고 있다는 거지요.

그렇지만 그 길의 끝은 극명하게 갈라질 것이며 하나는 땅으로 하나는 하늘로 올라가게 됩니다.

살아생전 내가 어느 쪽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나의 나중은 결정이 될 것이며 그 같은 선택은 또다시 내과거와 현재를 바꾸게 될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아들 며느리에게 복덕보다는 공덕 쌓기를 권하고 싶습니다.

어려운 사람을 돕는 것은 복덕을 짓는 것이지만 사람들로 하여금 영적인 길을 걷게 만드는 것은 공덕을 쌓는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성경은 모든 사람을 긍휼의 마음으로 대하고 사랑을 베풀라고 기록하고 있는 겁니다.

설날을 맞이하여 아들며느리를 비롯하여 모든 이들에게 내가 받고자하는 것은 없으나 이 같은 말은 주고 싶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하나님의 귀하디귀한 자녀라는 점을 말씀드리며 설날 떡국을 대신하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