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어진 현실이 우리의 영적 수준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말처럼 쉽지가 않습니다.
말은 쉽겠지만 사랑을 실천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어려운 일입니다.
아무리 내가 사랑하려 해도 상대방이 받아들이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으므로 사랑은 일방적일수도 없지요.
그러므로 사랑은 서로 상호작용(相互作用)이 되어야하는 것이며 손뼉이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것처럼 서로가 함께 하는 겁니다.
간혹 어떤 이들은 사람의 사랑과 달리 신의 사랑은 그렇지 않다 말하지만 깊게 생각해보면 사람이나 신의 사랑은 결코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가 쉽게 생각해보면 신의 속성이 사랑이므로 우리가 무슨 짓을 해도 용서하며 사랑으로 감싸 안을 것 같지만 이렇게 되면 세상의 질서가 유지되지 않을 뿐 아니라 사랑은 곧 폭력이 되고 맙니다.
내가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해서 성추행이나 폭력을 행사했을 경우 그것이 용인(容認)된다면 세상은 폭력이 난무하여 짐승이나 사람이나 구별되지 않게 됩니다.
아마도 누군가는 아직도 신의 사랑은 인간의 것과 다름을 주장하고 싶겠지만 하늘의 태양과 같은 하나님의 사랑역시 일방적일 수는 없습니다.
신의 사랑은 태양과 같아서 하늘에 항상 떠 있으며 우리를 비춰줌으로 사랑은 영원합니다.
사람의 본신은 원래 완전한 영의 세계에서 하나님과 함께 하고 있는 성령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육신을 입음으로 인해 빛과 분리가 일어났으며 우리 스스로가 신의 세계를 떠나 인간이 되기를 선택한 겁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누군가는 이제 더 이상 신과의 분리를 경험하고 싶지 않아서 신의 세계로 복귀(復歸)하고자 하는 거지요.
그렇지만 세세생생 인간으로 살아온지라 반복적인 경험을 통해 생긴 고정관념과 가치관으로 인해 육과영이 충돌을 일으키게 됩니다.
그러므로 어떤 이에게 성령이신 빛은 너무나 뜨겁게 느껴지며 누군가에게는 온화하게 느껴집니다.
영생을 상속받은 이에게는 따스한 봄바람과 같겠지만 아직 물질세상을 더 살고자 하는 이에게는 뜨거운 화염(火焰)검과 같을 거라는 말입니다.
성령의 불꽃은 다분히 영적이고 가벼우므로 무거운 물질과 육신을 태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영적인 길을 걸어가기 시작할 때는 물질적이고 육신적인 축복이 주어지지만 갈수록 험난하며 종내에는 모든 것들을 내려놓아야 하는 겁니다.
이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지요.
○그러므로 너희가 선지자 다니엘이 말한 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 (읽는 자는 깨달을진저)(마24:15)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어다(마24:16)
지붕 위에 있는 자는 집 안에 있는 물건을 가지러 내려 가지 말며(마24:17)
밭에 있는 자는 겉옷을 가지러 뒤로 돌이키지 말지어다(마24:18)
멸망의 가증한 것은 성령을 가리킵니다.
빛이신 성령이 드러나면 육적인 것들이 멸하게 됨으로 이렇게 비유하고 있는 겁니다.
성전(육신)에 성령이 있음을 보았다면(내재함을 알았다면) 하나님 찬양하는 이들은(유대인들은) 높은 인식을 갖추라는(산으로 도망함) 말을 하고 있으며 영적인 길에서 내려서지 말라고 합니다.(물건을 가지러 내려가지 말라)
또한 영적인 결실을 맺으려 노력하는 이는(밭에 있는 자) 외형적인 일에(세상사) 미련을 가져서는 안 된다고 했지요.
이 내용은 제자들이 성전이 무너질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느냐에 대한 질문에 대한 답으로서 성령이 드러날 때의 현상을 묘사하고 있는 겁니다.
이러한 까닭에 하나님께서 어떤 이에게는 빛이신 성령을 경험하지 못하게 막고 있으며 우산이 해를 가리듯이 눈을 가려놓고 있습니다.
아직도 준비가 되지 않는 이에게 빛을 갑자기 열어 보여주게 되면 받아들일 수가 없으므로 단계별로 적절한 상황을 주시는 거지요.
그래서 높이 올라갈수록 뜨겁게 여기게 되며 이 같은 일은 해아래 놓인 사람에 비견됩니다.
우리가 뜨거운 햇빛아래 놓이게 되면 견디기 어려워 양산을 쓰거나 그늘로 피하게 되지요.
이렇게 양산을 쓰거나 그늘로 피하는 것이 종교라고 할 수 있으며 잠시 해를 가리는 역할을 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성경은 이러한 일을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낮에는 여호와의 구름이 성막 위에 있고 밤에는 불이 그 구름 가운데에 있음을 이스라엘의 온 족속이 그 모든 행진하는 길에서 그들의 눈으로 보았더라(출40:38)
For the cloud of the LORD was upon the tabernacle by day, and fire was on it by night, in the sight of all the house of Israel, throughout all their journeys.
사람이 활동하는 시간에는(by day) 교회(성전=육신)위에 하나님의 구름이 있고 밤에는 구름위에 불이 있다고 했지요.(fire was on it by night)
육신을 가지고 바쁘게 살다보니 미처 성령의 내재함을 깨닫지 못하고 살지만 육신을 잠들게 하면(밤=육의 속성을 잠재움) 성령이 드러나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영적인 여정을 통하여(throughout all their journeys) 이스라엘(하나님의 백성)의 모든 집이(all the house of Israel) 이를 본다고(in the sight) 한 겁니다.
즉, 영적인 길을 걷는 이들의 시야 안에(in the sight) 성령이 들어온다는 말이지요.
스승인 모세를 따라 영적인 길에 나선 이스라엘백성들이 각자의 믿음에 따라 성령을 볼 수 있음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어떤 이들은 극도로 빛을 싫어하여 완전히 음지에서 지내는 사람들도 있으며 해가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살아가는 이들도 있는데 그들을 일러 눈뜬 봉사라 부릅니다.
하늘의 해를 볼 수 없으면 육신적인 장님이고 내면의 성령을 볼 수 없으면 영적인 장님입니다.
그러나 누군가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가르쳐주면 느낄 수도 있고 알 수도 있지요.
사실 이러한 일도 내 외면이 동시에 작용하고 있는 겁니다.
외적으로는 누군가의 가르침이 있고 내적으로 호응을 할 때 가르침이 효과를 발휘함으로 사랑하는 남녀가 결실을 맺는 것과 같은 과정을 겪는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어떤 경우에도 가르침이 강압적이거나 일방적이 되어서는 곤란합니다.
내게 이렇게 좋은 가르침을 어떻게 너는 받아들이지 않느냐고 말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잘못된 거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강요해서는 안 되는 것이며 스토커가 되어서는 안 되는 겁니다.
대표적인 예로 스님들을 둘러싸고 찬송가를 불러대거나 이슬람국가에 전도활동을 하다 목숨을 잃는 경우가 여기에 해당한다 할 수 있지요.
이러한 행위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오해한 것이며 아무리 취지가 좋다할지라도 해서는 안 되는 짓입니다.
과거에 있었던 십자가 전쟁을 형태를 바꾸어서 하는 것이나 진배없으며 본인이 성령을 깨닫지 못했다는 사실을 만천하에 밝히는 짓이나 다름없습니다.
설사 상대방이 하나님에 대해 모르고 있고 잘못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할지라도 직접적으로 지적을 하거나 나무란다면 격한 반응이 나올 것은 당연한 것이며 이러할 때 오른쪽 뺨을 맞아도 싼 것이고 왼쪽 뺨까지 맞아야 합니다.
사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아무런 이유 없이 맞았을 때 이렇게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 내 뺨을 때린다는 것은 무엇인가 내가 잘못을 했거나 적어도 상대방의 입장에서 내가 잘못된 걸로 보일 때 입니다.
뺨을 때릴 정도가 되었다면 격하게 다툼이 벌어졌다는 것이며 이미 도를 넘어섰다는 뜻이지요.
성령보다 육신의 감정이 앞서있으므로 화를 가라앉히고 육적인 본능을 억제하라는 뜻에서 이런 말씀을 하신 겁니다.
진정 성령의 내재함을 깨닫고 있다면 대화로 풀거나, 참거나, 아니면 상대를 하지 않거나 할 것이며 사태를 이 지경에 이르게 만들지 않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지 못하고 주먹다짐에 이르렀다는 것은 이유가 무엇이든지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의 것이 아니라는 것이니 맞아도 쌉니다.
싸움이 일어났다는 것은 서로의 이익을 도모하기 위해서 일 것이 분명하고 어느 한 쪽이 양보를 하지 않아서 벌어지는 일이지요.
그러므로 나 홀로목사는 감히 말합니다.
지금 그대에게 주어진 것이 그대의 영적 레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