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생각 긴여운

온 세상이 성령의 은총으로 가득하다.

배가번드 2025. 3. 9. 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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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에서 손님이 오셨는지라 포스팅이 늦었습니다.

구순(九旬)을 바라보는 연세에 먼 길을 마다않고 오시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며 성령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인연을 맺은 지가 20년도 훨씬 넘었으며 개인적으로 만남을 가진지도 십 수 년 되었으니 인연도 보통 인연이 아닙니다.

하던 사업이 망하고 폐휴지 줍는 일을 업으로 삼고 있음에도 영적인 길을 걷고 있으므로 참된 구도자(求道者)라 하겠습니다.

그래서 휴지 줍는 성자(聖者)로 불리고 있지요.

토요일 저녁시간에 오셔서 다음날 정오 무렵 지방으로 내려감으로 대화시간 이래야 불과 몇 시간 되지 않음에도 매달 오시다시피 합니다.

이러함으로 만사를 제쳐두고 환영할 수밖에 없으며 내 일정(日程)에 있어 일 순위가 될 수밖에 없는 겁니다.

이 같은 일은 육신적 차원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영적인 차원에서 일어나는 일로서 성령의 교류가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가 물질적이고 육신적인데 치우쳐 있었더라면 이럴 수는 없지요.

만남을 귀하게 여기고 대화 속에서 성령의 가르침을 찾을 수 있기에 매달 오시는 것이며 나 역시 환영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 사람이 모였을 때는 세상사에 관한 이야기를 주로하게 되지만 둘이 남게 되면 영적인 주제로 대화를 하게 되며 말하는 이와 듣는 이가 둘이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물질적이고 육적인데 관심을 기울이면 그러한 것들이 나에게 다가오고 영적인데 초점이 맞춰지면 그러한 것들이 주어진다는 것을 항상 확인하고 있는 셈입니다.

이러한 일은 성경에서도 확인되는 일이지요.

그러므로 지난시간에 이어 고린도전서에서 인용되었던 이사야서를 또다시 상고해보겠습니다.

 

그들이 이르기를 그가 누구에게 지식을 가르치며 누구에게 도를 전하여 깨닫게 하려는가 젖 떨어져 품을 떠난 자들에게 하려는가(사28:9)

Whom shall he teach knowledge? and whom shall he make to understand doctrine? them that are weaned from the milk, and drawn from the breasts.

대저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되 여기서도 조금, 저기서도 조금 하는구나 하는도다(사28:10)

For precept must be upon precept, precept upon precept; line upon line, line upon line; here a little, and there a little:

 

지난시간 보았다시피 물질적인 유혹에 빠진 성직자들은 옆길로 빠져 정견(正見)을 가지지 못하고 판단력이 흐려지게 됩니다.

그래서 그들이 누구에게 지식을 가르치고(teach knowledge) 교리를 이해시킬 거냐고(make to understand doctrine) 묻고 있는 겁니다.(9절)

한마디로 요약해서 성령을 깨닫지 못했으니 어떻게 사람들을 가르칠 것이냐는 뜻이지요.

그래서 10절에서 교훈에 교훈을 더해야만 하고(precept must be upon precept) 계율에 계율을 더한다고(precept upon precept)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성경의 이 대목 저 대목을(line upon line, line upon line) 약간씩 인용하여(here a little, and there a little) 가르치게 된다고 합니다.

성경의 여러 곳에서 교훈과 계율을 찾아내어 가르치지만 정작 핵심을 가르칠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까닭에 이사야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더듬는 입술과 다른 방언으로 그가 이 백성에게 말씀하시리라(사28:11)

For with stammering lips and another tongue will he speak to this people.

 

더듬는 입술이란(stammering lips) 온전치 못한 가르침을 비유한 것이며 다른 방언이란(another tongue) 진정한 영의 세계가 아닌 빗나간 영의 세계를 비유한 겁니다.

그렇지만 그조차도 하나님의 뜻에 의한 것이며 그 수준에 맞는 백성에게 가르침을 주시는 것이라 말하고 있습니다.(he speak to this people)

고린도 전서 14장에서 바울이 인용한 대목이 바로 이 구절입니다.

 

율법에 기록된 바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방언을 말하는 자와 다른 입술로 이 백성에게 말할지라도 그들이 여전히 듣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니(고전14:21)

 

하나님께서는 단번에 물질세상을 벗어나 영생의 하늘에 오르기 힘들어 하는 이들을 위해 약간 낮은 차원의 가르침을 마련했다는 것을 이렇게 말씀한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이 여전히 듣지 않는다 했으니 영적인 길을 걷는다는 것이 그만큼 어렵다는 뜻입니다.

아마도 다수의 기독교인들이 이러한 나 홀로목사의 해석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겠지만 이어지는 내용을 보면 공감할 수밖에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전에 그들에게 이르시기를 이것이 너희 안식이요 이것이 너희 상쾌함이니 너희는 곤비한 자에게 안식을 주라 하셨으나 그들이 듣지 아니하였으므로(사28:12)

To whom he said, This is the rest wherewith ye may cause the weary to rest; and this is the refreshing: yet they would not hear.

 

더듬는 입술과 다른 방언이(이것이) 지쳐있는 나머지 사람들에게 야기되는(cause the weary to rest) 부활의 가르침이라는(this is the refreshing) 점을 비유로서 말하고 있습니다.

보다 쉽게 표현하면 너무 어렵고 힘든 가르침에 지쳐있는 백성들에게 한 단계 낮은 가르침을 주신다는 뜻이지요.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조차도 듣지 않는다고 합니다.(they would not hear)

이 말씀인즉, 육적이고 물질적인 삶에서 영적인 삶으로 바꾸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러한 이들에게는 하나님께서 다음과 같은 일이 일어나게 만든다고 이사야는 말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고 여기서도 조금, 저기서도 조금 하사 그들이 가다가 뒤로 넘어져 부러지며 걸리며 붙잡히게 하시리라(사28:13)

But the word of the LORD was unto them precept upon precept, precept upon precept; line upon line, line upon line; here a little, and there a little; that they might go, and fall backward, and be broken, and snared, and taken.

 

앞서 10절에서 말한 것은 성직자들을 위한 말씀이고 지금 말씀은 백성(성도)들을 위한 말씀입니다.

물질적이고 육신적인 가르침을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이 둘이 아니라는 뜻으로 왜곡된 가르침에 따르다보면 퇴보하거나(fall backward) 중도에서 구도의 길을 포기하여(be broken) 물질세상의 유혹에 걸리게 된다고(snared, and taken) 합니다.

다르게 표현하면 육적이고 물질적인 유혹에 빠져 구도의 길에서 내려서게 될 수도 있다는 말이지요.

그러므로 나 홀로목사는 언제나 지금 있는 그 자리에서 정견(正見)을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 말하고 있는 겁니다.

본인이 영적인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면 어떤 종교, 어떤 교리 속에서도 진리의 말씀을 찾아내기 마련이므로 구태여 종교를 바꾸고 스승을 바꿀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처처불상이고 사사불공이며 태허가 진리로 가득하여 온 세상이 성령의 은총으로 가득한데 어디를 가고 오고 할 것이며 누군들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고 하나님의 입과 귀가 아니겠는지요.

부디 이곳을 방문하시는 여러분들이 이점을 깨닫게 되길 바라며 다음시간에 다시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