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
범사(凡事)에 감사하라는 말이 성경에 나옵니다.
이 말이 아주 간단한 것 같지만 사실은 엄청난 깨달음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온 누리에 가득한 하나님의 손길을 깨달았을 때 범사에 감사할 수 있으므로 득도(得道)의 경지에 도달해야만 이 같은 말을 실천하게 됩니다.
이러한 일을 불가(佛家)에서는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일반적으로 사람이 살아감에 있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절대 범사에 감사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만물을 발아래 두게 되면 그것이 가능해 집니다.
육신을 부정하고 성령이 주인 되게 만들면 마음에 들지 않는 순간조차 하나님이 주시는 것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비록 육신적으로는 불합리한 순간에 화를 내지만 이러한 모습을 지켜보는 또 다른 내가 있음을 알았으므로 겉으로는 울고 속으로는 웃을 수 있는 거지요.
성령의 내재하심을 알고 하나 된다는 것은 이러한 혜택을 가져옵니다.
물론 이 같은 일은 하루아침에 되지는 않으며 인고의 세월을 필요로 합니다.
반복된 훈련 속에 어느 날인가 자연스럽게 내 삶에 녹아들게 됨으로 돈오돈수인 동시에 돈오점수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임하심은 즉각적으로 일어나지만 육신이 성령과 하나 되는 것은 일생동안 지속되는 겁니다.
이러한 일에 대해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만일 죽은 자들이 도무지 다시 살아나지 못하면 죽은 자들을 위하여 세례를 받는 자들이 무엇을 하겠느냐 어찌하여 그들을 위하여 세례를 받느냐(고전15:29)
Else what shall they do which are baptized for the dead, if the dead rise not at all? why are they then baptized for the dead?
또 어찌하여 우리가 언제나 위험을 무릅쓰리요(고전15:30)
And why stand we in jeopardy every hour?
29절 내용은 지난 시간의 연장선에서 해석되어야 합니다.
한글성경을 보자면 마치 죽은 사람을 위해 세례를 받는 것처럼 해석이 되고 있지만 이는 그런 것이 아니라 내면의 성령이 잠들거나 죽어버렸기 때문에 세례를 받는다는 뜻입니다.
만약 죽음에서 부활하지 않고 그만이라면(if the dead rise not at all) 왜 죽음에 대하여 세례를 받겠느냐는 말이지요.(why are they then baptized for the dead?)
즉, 우리가 세례를 받는 것은 내안에서 잠들거나 죽어버린 성령을 일깨우기 위해서라는 겁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되살아나게 만들어 영육이 하나 되기 위해 그토록 힘들게 삶을 영위하지 않느냐고 30절에서 되묻고 있습니다.
매순간 위험에 빠져있다는(in jeopardy every hour) 말은 세상에 역행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살아남기 위해 불철주야 노력해도 모자랄 판에 출세와는 전혀 관계없는 일에 관심을 기울이기에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 거지요.
이러한 일에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15:31)
I protest by your rejoicing which I have in Christ Jesus our Lord, I die daily.
바울이 형제들의 기쁨에 대해 이의를 제기한다 했지요.(I protest by your rejoicing)
형제들이 가진 기쁨이란 바울이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가진 것이라(which I have in Christ Jesus our Lord) 했으니 성령으로 거듭난 것을 가리킵니다.
즉, 예수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매달려 육을 죽이고 영을 살리는 가르침을 주셨으므로 그로인해 성령이 되살아났다는 뜻입니다.
그렇지만 자신은 매일같이 죽는다고 했습니다.(I die daily)
한번 죽는 것으로 끝이(돈오돈수) 아니라 매일같이 죽어야한다 했으니 영육이 하나 되기 위해서는 반복되는 학습이 필요하다는(돈오점수) 뜻이지요.
습관에 물들어 있는 육신의 사고를 바꾸려면 매일같이 새롭게 태어나는 기분으로 살아야한다는 겁니다.
이러한 이유로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사람의 방법으로 에베소에서 맹수와 더불어 싸웠다면 내게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지 못한다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고전15:32)
If after the manner of men I have fought with beasts at Ephesus, what advantageth it me, if the dead rise not? let us eat and drink; for to morrow we die.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고전15:33)
Be not deceived: evil communications corrupt good manners.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고전15:34)
Awake to righteousness, and sin not; for some have not the knowledge of God: I speak this to your shame.
32절에 나오는 에베소의 뜻은 “바람직한”으로 올바른 신앙생활을 뜻합니다.
그래서 사람의 방식을 따라(after the manner of men) 에베소에서 짐승과 싸웠더라면(I have fought with beasts at Ephesus) 무슨 이익이 있냐고 한 겁니다.
우리가 영적인 길을 걷는 것은 영육간의 전쟁과도 같은 것인데 영적으로 부활이 없다면(if the dead rise not) 세상과 더불어 싸울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내일이면 죽을지도 모르는데 먹고 마시자 하지 않겠냐는 거지요.
그러므로 바울은 33절에서 기만당하지 말라고 합니다.(Be not deceived)
악한 정보는 좋은 행실을 더럽힌다 했는데(evil communications corrupt good manners) 이는 내적인 갈등을 뜻하는 겁니다.
육신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서는 안 된다는 뜻으로 악한 의사소통이라는 표현을 한거지요.(evil communications)
이러한 이유로 바울은 34절에서 의로움에 깨어있고(Awake to righteousness) 죄를 짓지 말라 했습니다.(and sin not)
그리고 이렇게 말한 이유에 대해 말해줍니다.
그 당시 형제들 가운데는 하나님에 대해 모르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하며 그들로 부끄러움을 느끼게 만들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하나님이 대해 알려면 제대로 알라는 말이지요.
이렇게 말하고 보니 지나간 30년 세월이 주마등같이 지나갑니다.
한순간 성령의 역사하심을 경험하고 영적인 길에 접어들어 영육간의 전쟁을 지금껏 이어오고 있습니다.
하루 한두 시간만 자는 것은 물론 하루 한 끼만 먹고 산 것도 여러 해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어느 한순간 내안에서 무너졌습니다.
되고자하는 그 무엇을 내가 내려놓는 순간 온 우주를 가슴으로 안고 있음을 알았던 거지요.
그러므로 나 홀로목사 역시 바울과 같이 매일같이 죽을뿐만 아니라 매순간 죽고 있다는 말씀을 드리며 강해를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