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홀로목사

마태복음10.

배가번드 2016. 3. 25. 2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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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말씀을 머리에 얹고 사는 나 홀로 목사입니다.

요즘 나 홀로 목사의 하루는 성경으로 열고 성경으로 닫히고 있습니다.

이러다보니 건강을 등한시하게 되는데 하나님말씀도 중요하지만 자신의 건강도 챙겨야한다는 생각이 문득 들곤 합니다.

육신이 없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도 없으며 이해하지도 못하고 전달할 수조차 없다는 것을 알아야하지요.

하루 종일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것이 그다지 좋은 일이 아니며 운동량이 절대적으로 부족해집니다.

노동일이긴 하지만 힘들게 일을 하고 짧은 시간이나마 성경을 보는 것이 건강상으로 아주 좋다는 거지요.

그리고 성경을 하루 종일 들여다본다고 해서 성경 속에서 좋은 진리의 말씀을 찾아내는 것도 아닙니다.

이것은 마치 경치 좋은 마을에 사는 사람은 그들이 얼마나 좋은 곳에 살고 있는지 모르는 것과 마찬가지의 이치입니다.

주말이 되거나 여행시즌이 되면 많은 이들이 방방곳곳에 산재해 있는 관광지를 찾아 여행을 떠나며 멀리는 해외까지 가곤하지요.

힘들게 그곳에 가보면 어느 곳이든 사람들이 살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들에게는 그곳을 구경 간 우리들이 구경거리이지요.

그곳에 사는 분들 중에는 자신들이 얼마나 좋은 곳에 사는지를 모르고 있는 분들도 있고 아는 분들도 있습니다.

모르는 분들은 자신들이 살고 있는 고장에서 태어나 그곳을 벗어난 일이 없는 분들이며 아는 분들은 바깥구경을 많이 다녀본 분들이지요.

개중에는 다른 고장의 경치가 좋아서 이사를 가기도 하지만 결국 얼마못가서 지루함을 느끼게 됩니다.

그렇게 몇 번을 반복하다보면 다들 그렇고 그런 곳에서 살고 있으며 마을마다의 경치가 모두 특색이 있으며 도시나 시골이나 저마다의 매력이 있음을 알게 되지요.

구태여 이사를 다닐 필요 없이 시간이 나고 여건이 허락할 때마다 여행을 가면된다는 결론을 얻습니다.

이사를 갈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고 자유자재가 된다는 겁니다.

진리를 찾는 구도자의 여행길도 이와 마찬가지인데 가끔씩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믿음의 길에서 멀어질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종교를 바꾸라는 것이 아니라 시각을 넓혀보라는 말입니다.

물론 이 말은 여행을 다닐 만큼 성장한 어른들에게 해당되는 것이며 아직 집안에서 어른들 보호를 받아야할 아이들에게 적용될 말은 아닙니다.

또한 여행을 다니는 것보다 여행을 해본사람에게 듣는 것이 훨씬 나은 경우도 있지요.

우리들이 성경을 통해 얻어야 할 것은 영적으로 하나님과 하나가된 사람을 숭배하는 자가 되기 위함이 아니라 그들의 경험담을 듣고 그러한 점을 내 생활이 윤택해지고 보다 풍성해지도록 만드는 지혜라고 생각됩니다.

이러한 마음의 자세로 우리들의 오랜 영적 경험자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6:1)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상을 이미 받았느니라(6:2)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6:3)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6:4)

 

많은 이들이 예수님의 이 말씀을 보편적으로 쓰고 있으며 익명으로 좋은 일을 하시는 많은 분들도 있는 줄 압니다만 좋은 일에도 많은 종류가 있습니다.

금전으로 남을 돕는 일도 좋은 일이고 육체적으로 봉사를 하는 일도 그러하며 좋은 말씀을 남들에게 전해주는 일도 좋은 일이지요.

이렇게 놓고 보면 예수님의 말씀을 액면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좋은 일을 할 때 밖으로 알려지는 것이 반드시 나쁘지는 않다는 거지요.

왜냐하면 그 같은 일이 밖으로 알려져서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좋은 일을 하게 된다면 그것이야말로 값진 일이 될 테니까요.

만약 교회에다 헌금을 하는 일이나 목회자들이 교인들에게 설교를 하는 일을 감추면서 해야 한다는 예수님말씀을 올곧게 적용한다면 헌금을 받아서도 안 되고 성경강연을 하는 행위도 해서는 안 됩니다.

모르긴 해도 나 홀로 목사의 이 같은 말을 듣고 교회의 많은 목사님들이 속으로 흐뭇하실 겁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교회에는 익명으로 십일조를 받는 것이 아니라 십일조를 내는 분들의 이름이 밝혀지도록 되어있으니 하나의 면죄부를 받는 셈이지요.

사실 이러한 일들은 액면그대로의 예수님말씀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일인데 이런 식으로 십일조를 받는 이유가 서로 간에 경쟁심을 부추긴다는 것을 절대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남들 앞에 공개가 될 경우 낯부끄러워 적게 낼 수가 없는 점을 교묘하게 이용하는 것으로서 수입이 얼마라는 것은 함께 교제를 하다 되면 자연스럽게 드러나며 수입에 따른 십일조를 적게 낼 경우 알게 모르게 부담감을 느끼게 되는지라 비공식적으로라도 공개를 하는 겁니다.

말로는 예수님말씀을 토시하나 틀리지 않게 믿어야한다 말을 하면서도 이러한 구절들은 융통성이 어찌 그리도 많은지요.

참으로 놀랍도록 신축성이 있는 융통성인데 그렇게 좋은 융통성을 왜 다른 이들을 향한 심판의 잣대에는 적용시키지 못하는지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누군가는 예수님이 하신 이 말씀을 자선행위에 관한 이야기라고 말씀하시는데 분명이 예수님께서는 너희 의를 행함에 있어 밖으로 드러나지 않도록 하라 말씀하셨습니다.

의롭다는 행동에는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조차 포함된다고(6:5) 말씀하셨는데 어찌 예외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남들 앞에 자신을 내세우는 이들은 이미 상을 받았고 남들 앞에서 큰소리로 기도하는 자들도 외식하는 자들과 같다고 했습니다.

외식하는 자들이란 위선자(hypocrites)들을 말하는데 예수님께서 이렇게까지 심하게 말씀하신 데는 이유가 있지요.

영적인 일을 가르치는 자들이 남들에게 보이는 외형의 모습을 중시여기는 행태를 나무라는 동시에 간단한 말씀으로 아주 높은 법문을 심어 놓으신 겁니다.

이해가 되지 않겠지만 이 말씀은 절대 표면적으로 보이는 행위에 따른 보상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이 의로운 일을 행할 때의 마음가짐을 말씀하신 것인데 행위에 따른 결과물을 그 어떤 식으로든 바라지 말라는 말이지요.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하는바가 없이 하라는 말입니다.

어렵습니까?

하긴 그렇기도 하겠습니다.

육신을 가지고 있는 우리들이 어떤 행위를 할 때 이것은 착한일 저것은 나쁜 일이라 규정을 짓고 행동으로 옮기게 되는데 어떻게 함이 없이 할 수가 있겠는가 싶을 겁니다.

바로 여기에 해답이 담겨있지요.

예수님은 육신의 불완전성을 말씀하신 것이며 바로 영을 깨닫게 만들어주려는 의도였던 겁니다.

아직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분들이 참으로 많군요.

그렇다면 한 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누군가 장사를 하는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그 사람은 지금 현실이 어려워서 많은 이들에게 도움을 청하고 있지요.

나에게도 도움을 청해왔는데 사정이 딱해 보여서 도와주었다고 가정했을 때 나는 좋은 일을 한 걸까요?

많은 이들이 당연히 좋은 일을 한 거라고 하시는군요.

그러나 나 홀로 목사는 그렇게만 여길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을 돕지 않았더라면 장사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적당한 일을 찾아서 보다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을 테니까요.

괜히 어설프게 도와준 탓에 장사를 그만두지도 못하고 숱한 세월을 자금난에 허덕이면서 고생을 하게 만들 수도 있다는 겁니다.

이것은 극단적인 결말을 가정한 것입니다만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가 될 수 있습니다.

그분이 불행 중 다행으로 나의 도움으로 사업이 성공을 거둘 경우 물질적인 풍요는 얻을지 모르겠지만 그로인해 자신을 돌아볼 여유조차 없이 바빠진다고 한다면 그 또한 좋다고 여길 문제는 아니겠지요.

주야 없이 바쁜 탓에 병이라도 덜컥 얻는 날엔 오히려 원망이 돌아올 겁니다.

또한 이것은 그분이 적당한 선에서 사업 확장을 꾀하지 않고 만족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다고도 생각할 수 있는데 그럴 경우 물질적으로 만족한 탓에 영적인 면을 등한시 한다면 그다지 좋다고 여길 문제는 아니라 할 수 있습니다.

어떤가요?

저기 눈매가 매서운 분은 이렇게 말씀하시는군요.

 

만족하는 마음이야말로 대단히 높은 인식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어떻게 오늘은 다른 말씀을 하시나요?”

 

기억력도 좋고 머리회전도 빨라서 세상살이는 어렵지 않게 꾸리겠습니다만 지혜와는 거리가 있겠습니다.

분명히 나 홀로 목사는 만족하는 마음이야말로 최고의 인식이라고 말씀을 드렸고 그것은 오늘도 변함이 있을 수 없습니다.

정말 마음에 만족을 얻었다고 한다면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하지는 않겠지요?

만족하는 마음을 얻었다는 것은 더 이상 무엇인가가 필요하지 않은 상태인데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할 일을 만들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불구하고 누군가에게 손을 벌려야할 정도의 일을 만들었다는 것은 만족하는 마음을 못 얻었다는 말이 되는 거지요.

당연히 예외는 있는데 하나님이 자신의 영을 깨닫지 못한 사람을 구제하기 위해 인연을 맺어 도움을 받도록 만드는 경우가 그러하다 하겠습니다.

이러한 경우를 제외한 대부분의 경우는 그렇다는 말입니다.

누군가는 이러한 말을 듣고 화를 내면서 이렇게 말씀을 하시는군요.

 

그렇다면 남을 돕지 말라는 겁니까?”

 

그거야 본인이 알아서 할 문제겠지만 예수님의 말씀은 그런 뜻이 아니지요.

우리들이 아무리 좋은 취지에서 말을 하고 행동을 한다 하더라도 절대 완전할 수가 없음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며 육신이 알고 있는 바는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다를 수 있다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의로운 일을 할 때는 그 결과가 어떠한가에 대해 생각하지말로 그저 묵묵히 행동하라는 말입니다.

아직도 이해가 가지 않는 분들을 위해 한 가지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불쌍한 누군가가 왔을 때 우리들은 측은한 마음이 들것입니다.

이러할 때 진정 하나님을 아는 분들이라면 불쌍한 사람이 나에게 온 것은 하나님이 보내셨다 여길 겁니다.

그러면서 생각하기를 하나님께서는 이 사람을 도와주라고 하셨으니 내 형편에 맞게 도와주리라 하겠지요.

이럴 경우 이분은 자신이 불쌍한 사람을 돕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불쌍한 사람을 도와 준거라 생각할겁니다.

왜냐하면 이분은 이미 삼라만상을 움직이는 것은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육신이란 하나님의 도구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의 의도가 무엇이라는 것을 정확하게 알고 있으며 심지어 내가 계획하지 않은 것까지도 아시기에 무엇보다도 먼저 해야 할 것은 내재하는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지요.

바로 이러한 점을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했기에 성경을 통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지요.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6:6)

But thou, when thou prayest, enter into thy closet, and when thou hast shut thy door, pray to thy Father which is in secret; and thy Father which seeth in secret shall reward thee openly.

 

 

자신 안에 하나님이 있음을 모르는 사람들은 교회나 거리에서 기도하는 것을 좋아하지만 그들의 기도는 물질적이고 형상적인데 치우쳐 있으므로 하나님과 함께할 수 있는 영광과는 거리가 멀다는 말입니다.(6:5)

많은 분들은 지금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내용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르겠지만 6절의 말씀은 하나의 수행방법을 말해놓은 겁니다.

진정으로 하나님께 기도를 하는 것은 말로서 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이며 자신의 내면에서 하나님을 만나야 된다는 것을 말씀하신거지요.(6:7)

6절에서 말씀하신 골방이란 영어로 closet 인데 이 단어에는 여러 가지 뜻이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자신만이 알고 있는 밀실이나 드러나지 않는 곳이라는 뜻이 있는데 그곳은 바로 자신의 내면을 말하는 겁니다.

여러분들도 생각을 해보면 이해가 될 것입니다.

다락방이나 골방이라면 식구들이 모두 알고 있는 장소이겠지만 자신만이 알고 있거나 드러나지 않는 곳이란 자신의 마음 깊숙한 곳입니다.

눈을 감고 자신의 내면 깊숙한 곳에 계시는 하나님께 기도하라는 말이며 바로 묵상(명상)을 뜻하는 거지요.

나 홀로 목사는 이러한 명상법을 십 수 년 해온 것을 부인하지 않을 것이며 여러분들에게 이러한 명상을 하라고 권하지도 않겠습니다.

다만 예수님말씀의 뜻하는바만 진솔하게 말씀 드리고 있으며 지금까지 보았듯이 성경속의 많은 인물들이 하나님과 하나가 될 수 있었던 이유가 깊은 묵상(명상) 속에서 성령이신 하나님을 보았기 때문이라는 것을 말씀드리고자 하는 겁니다.

바벨탑의 진실 편에서 말을 했듯이 말이 필요한 단계는 하나님과 거리가 몹시 떨어진 곳이지요.

오늘날에도 세계 곳곳에 산재한 수도회에서는 기도와 묵상을 하며 공동체생활을 하고 있는데 바로 예수님의 이와 같은 말씀을 실천하고 있다고 보면 됩니다.

기도는 많은 사람들이 한자리에 있을 때 한사람이 대표로 하는 것이며 묵상은 혼자서 하는 기도라 할 수 있는데 깊숙한 내면에 자리하고 계시는 성령이신 하나님께 드리는 진정한 기도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소리내어하는 기도가 필요 없다는 것은 아니며 진실한 마음을 담아 드리는 기도소리는 하나님도 감명을 받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사람들에게 기도를 할 때 어떤 마음으로 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셨는데 잠시 보기로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6:9)

나라 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6:10)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6:11)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6:12)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6:13)

 

 

모두들 아시는 바와 같이 이 내용들은 그 유명한 주기도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내면의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는 방법을 일러주셨지요.

하지만 이 기도를 그저 말로만 할 것이 아니라 그 뜻하는 바를 제대로 인식을 해야 진정한 주기도라 할 수 있습니다.

먼저 기도하는 이가 가져야하는 마음가짐은 하나님을 거룩하게 여겨야하며 이 땅에 이미 하나님의 왕국이 임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미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라는 말인데 천국과 이세상이 둘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분별의 벽을 넘어서 있는 사람들의 눈에는 이미 이세상은 있는 그대로 완벽하고 하나님의 왕국이 이 세상에 내려와 있음이며 하나님의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이 없다는 것을 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신다는 의미는 우리들이 살아가는 모든 순간들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움직여지고 있다는 것이며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는 것도 내가 아니라 내안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하시는지라 내가 지은 죄도 하나님이 용서하신다는 겁니다.

이해가 가지 않겠지만 예수님께서는 아주 심오한 진리의 말씀을 주기도문에 심어놓았지요.

이 같은 개념은 이미 자신 안에서 성령을 경험한 이들이 알 수 있는 것인데 성경을 글자로만 알아서는 절대 알 수 없습니다.

아마도 많은 분들이 지금의 해석을 두고 그다지 값진 것이라 여기지는 않을 겁니다.

웬만한 사람들은 이러한 해석을 충분히 할 것이라 여기기에 그렇게 생각하겠지만 절대 그렇지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해석을 접하는 것은 쉬울 수 있으나 내 생활에 접목을 시킨다는 것은 그야말로 어렵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깨달은 사람들의 말을 인용하여 써먹을 수는 있다하여도 성령이 함께 하지 않은 상태에서 실천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거지요

아직도 이세상이 지옥 같아서 천국을 가기위해 마음먹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왕국이 이 땅에 임하지 않고 있다는 말이며 입으로만 주기도문을 외우고 있을 뿐 그 뜻을 알지는 못한다는 말입니다.

조금 심한 것 같지만 적어도 나 홀로 목사와 함께 하는 이들은 그저 글자를 외우는데 그치지 말고 실천하는 기도가 되길 바랍니다.

절대 남들을 함부로 심판을 하거나 지옥을 가리라 협박을 하지 말라는 거지요.

진정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는 이들이 맞는다고 한다면 다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을 간과(看過)하지 않을 겁니다.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6:14)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6:15)

 

타인들을 향해 심판을 말아야하거나 지옥 간다는 말을 삼가야하는 가장 큰 이유는 자신이 용서받기 위함이란 것을 알아야 한다는 거지요.

또한 예수님은 금식(禁食)에 관한 말씀도 하셨는데 여기에도 아주 깊은 뜻이 담겨있습니다.

이미 성경을 통해 보았듯이 모세도 금식을 하였고 예수도 금식을 하였는데 그러한 행위가 이스라엘에서는 전통적으로 내려오고 있었지요.

금식의 근본적인 취지는 내면에 함께 하는 영을 깨닫는데 있다 할 수 있는데 많은 이들이 자신이 얼마나 인내심이 있으며 신앙심이 대단한가를 나타내 보이는데 목적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심하게 나무랐던 겁니다.

여기에 대한 증거의 말씀이 성경에 기록되어있지요.

 

너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6:17)

이는 금식하는 자로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오직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보이게 하려 함이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6:18)

 

성경을 아는 많은 분들은 모세가 시내 산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십계명을 받아 내려온 사건을 아실 겁니다.

출애굽기 34장을 보면 하나님으로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모세가 얼굴에 광채가 났다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예수님이 바로 그러한 상태가 되어야한다는 말을 암시해 놓은 거지요.

금식하는 자의 마음가짐이 올바를 때 이러한 일들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며 우리들의 마음가짐이 어떠하다는 것을 하나님은 정확하게 알고 계신다는 겁니다.

아울러 한 가지 당부의 말씀을 드리고자합니다.

성경에 나와 있는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서 함부로 금식하시지는 마시기 바랍니다.

나 홀로 목사주변에는 금식 끝에 유명을 달리하거나 낭패를 당한 이들이 적지 않는데 본인의 처지는 생각지도 않고 과욕을 부린 탓에 사고를 당하게 되었지요.

예수님의 이 말씀은 어디까지나 앞서 말씀하신내용 끝에 나온 것으로서 주기도문처럼 마음가짐이 올바를 때 이와 같은 상태에 이를 수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말씀드릴 것은 반드시 금식을 해야만 하나님을 볼 수 있는 것도 아니며 하나님을 봐야만 하나님을 제대로 믿는 것도 아니며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서 모두다 천국을 가는 것도 아닙니다.

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들의 마음가짐인데 예수님말씀처럼 살아갈 수 있다면 하나님을 본 것과 마찬가지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말씀을 좀 더 경청해볼까요?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마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6:19)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6:20)

네 보물이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6:21)

 

예수님께서는 보물을 땅에 쌓지 말고 하늘에 쌓아두라고 했는데 여기에서 말하는 보물은 단지 재물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소중하게 여기는 모든 것들을 뜻합니다.

한글로 보면 물질적인 재화나 재물로 보이는 보물이(treasure) 영어로 보면 상당히 다양한 뜻을 담고 있음을 알 수가 있지요.

무엇을 보물로 여기는가에 따라 마음이 움직여진다는 말이며 영적인면과 물질적인면의 양면성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고 하늘에 쌓으라는 말은 영적인 것을 보물로 여기라는 말입니다.

물질적인 것들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일 뿐 하늘나라로 가는 데는 필요가 없다는 것을 우리들이 인식한다면 물질적인 것들을 보물로 여기지는 않을 것이며 영생을 사모하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들은 물질을 보물로 여기는 마음을 버리기가 쉽지가 않습니다.

그런 점을 예수님이 아시기에 영을 사모하는 마음이 어떻게 해야 생긴다는 것을 말씀해놓으셨지요.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몸이 밝을 것이요(6:22)

The light of the body is the eye: if therefore thine eye be single, thy whole body shall be full of light.

눈이 나쁘면 온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하겠느뇨(6:23)

But if thine eye be evil, thy whole body shall be full of darkness. If therefore the light that is in thee be darkness, how great [is] that darkness!

한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하게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6:24)

No man can serve two masters: for either he will hate the one, and love the other; or else he will hold to the one, and despise the other. Ye cannot serve God and mammon.

 

여러분 모두는 잘 보시기 바랍니다.

22절의 내용은 수행방법을 말해놓은 것인데 성경학자들이 기가 막힌 해석을 해놓았습니다.

눈이 몸의 등불이라는 것까지는 그렇다 하더라도 눈이 하나가 되게 하는 것을 눈이 성하면 이라고 해석한 것은 도대체 무슨 배짱으로 적어놓은 것인지요?

하기야 이해가 가기도 하는 것이 본인들이 눈을 하나로 만드는 방법을 모르는지라 이렇게 적을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나 홀로 목사는 이 같은 방법을 알고 있지만 직접말해주지는 않을 것이며 단지 22,23절의 해석만을 말하겠습니다.

 

 

눈은 몸을 비추는 빛이라 할 것이니 네 눈을 하나로 만들면 온몸이 빛으로 가득찰것이니라”(6:22)

그러나 너의 눈이 악해지면 너의 전체 몸도 어둠으로 가득 차게 되며 빛도 네 안에서 어둠이 될 것이니 그어둠이 얼마나 크겠느냐 ”(6:23)

 

이것은 분명 묵상(명상)을 하는 방법을 묘사해 놓은 것이며 지혜안(영안)을 여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나 영안(靈眼)을 연다하더라도 부정적이 되면(thine eye be evil) 온몸이 어둠속에 잠긴 것과 마찬가지가 된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내면에서 일어나는 영적인 일을 말한 것으로서 경험을 해보지 않은 사람들이 결코 알 수 없는 일입니다.

모두들 보다시피 영어로 된 성경을 보지 않았더라면 알 수가 없게 되어있으며 이 같은 내용을 우연히 알았다고 해도 넘어야 될 산은 아직도 많습니다.

예수님은 물질을 보물로 여기는 행위를 악으로 규정짓고 그러한 일들이 결국 자신 안에 존재하는 성령()을 가린다는 말씀을 하신거지요.

구도자가 지혜안을 열어 한순간 빛을 보았다 하더라도 늘 부정적인 면만을 보거나 물질적인 일을 추구할 경우 빛이 어둠으로 바뀌면서 암흑 같은 삶을 살아간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물질과 영을 두 주인으로 묘사하며 결코 함께할 수 없다고 말씀하셨는데 예수님 말씀을 밥벌이에 이용하는 분들은 심각하게 받아들여야할 말씀입니다.

교회가 외형적으로 커지고 헌금 통이 넘쳐 나는 것이 정말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인지 생각해봐야한다는 말이지요.

진정 영적인 수행의 길을 걸어가고자 하는 사람들의 마음가짐이 어떠해야 한다는 것을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6:25)

Therefore I say unto you, Take no thought for your life, what ye shall eat, or what ye shall drink; nor yet for your body, what ye shall put on. Is not the life more than meat, and the body than raiment?

 

이 구절에 쓰인 단어 목숨(life)은 생명이라고 번역이 되어야 더욱 생동감 있게 예수님의 말씀을 전달하게 될 것인데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모든 생명은 하나님께로 온 것이니 영을 나타냄이며 정말 값어치가 있는 것은 물질이 아니라는 말씀이지요.

사람이 하는 것이 아무리 값어치가 있다 여기더라도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입니다.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6:26)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자나 더할 수 있느냐(6:27)

 

만물에 깃들어 있는 하나님의 신성은 모든 생명체를 생동케 하시고 번성케 하신다는 말로서 인간들은 자신의 의를 내세우길 좋아하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는 데는 인색하다는 것을 말씀하신 겁니다.

입으로는 하나님을 믿는다하지만 자신의 의를 더욱 내세운다는 것을 비유한 것이지요.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6:28)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6:29)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 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6:30)

 

인간들의 의지로 아무리 큰 물질적성과를 거둔다하더라도 영원하지는 않다는 것을 알라는 말입니다.

꽃은 자신의 의지를 발휘하거나 노력을 하지 않지만 하나님의 보살핌아래 자라고 있다는 말이며 하나님의 성령을 담고 살아가는 인간들이 한낱 물질적인 일에 대한 걱정으로 살수가 있느냐는 질타를 하신 겁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6:31)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6:32)

 

이 말씀은 물질적인 것들을 구하지 말라고 한 것이 아니라 지나치게 욕심을 부리지 말라는 말이며 물질에 대한 걱정과 근심으로 매일을 보내는 것을 경계하신말씀입니다.

예수님생존당시나 지금이나 물질적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공통된 점들이 걱정근심이 끊이지 않습니다.

이모두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들이 하는 짓이며 진정 하나님을 믿고 있다면 이러한 일들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정말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다고 한다면 자신에게 닥치는 그 무엇도 하나님이 주시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간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구하기도 전에 무엇이 우리들에게 필요한가 알고 있다는 것이지요.

바꾸어 말하면 자신의 삶이 만족스럽지 못하거나 이 세상살이가 지옥 같다고 한다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크지 않다는 말과도 동일하다 할 것입니다.

주기도문에서 보았듯이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지 않았기 때문에 천국과 지옥이 극명하게 나뉘고 있으며 하늘과 땅이 두 개로 나뉘어 있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아직 이원성의 그늘아래 몸을 담고 있는 이들이 먼저 해야 할 것은 물질적인 일들이 아니라 자신내면에서 성령을 만나야한다고 말씀하신거지요.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6:33)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일은 내일 염려 할 것이요 한날 괴로움은 그날에 족하니라(6:34)

 

이 말씀을 많은 이들이 오해를 합니다.

하나님을 믿게 되면 물질적인 것들도 모두 생긴다고 여기는데 실상과는 많은 거리가 있는 해석이지요.

진정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알게 되면 삼라만상이 그 품을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며 더 이상 물질적인 것들을 추구하고자 하는 욕망이 없어진다는 말입니다.

물론 이 같은 나 홀로 목사의 말은 기본적인 생활을 위한 물질추구의 의지가 사라짐을 뜻하지는 않으며 지나친 물질에 대한 욕심을 말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나라와 의라는 것이 무엇일까요?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보았듯이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들 마음 안에 이미 내려와 있다는 말인데 이 말인즉슨 자신 안에서 성령을 만나야한다는 말이지요.

먼저 하나님의 왕국을 찾으라는 말은(seek ye first the kingdom of God) 자신내면에서 성령을 만나라는 말과 마찬가지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의라는 말은 하나님의 뜻을 말하는데 일정하게 정해진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을 개인마다 규정짓는 것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선택의 문제를 말씀하신 것이기도 한데 무엇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여기는가에 따라 주어지는 것들도 달라진다는 거지요.

조금 어렵습니까?

그렇다면 모두들 자신이 생각하는 하나님의 의를 떠올려 보시기 바랍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정의(正義)가 물질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당연히 물질이 주어지는 것이 하나님의 정의가 실현되는 것이라 여길 것인지라 하나님의 축복은 물질로서 올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가 하나님과의 완전한 합일에 있다고 할 경우 축복이란 물질적인파괴와 동시에 모든 육적인 것들의 멸망으로 이어질 것입니다.

이외에도 사람에 따라서 숱하게 많은 하나님의 의지가 따로 있을 것이며 자신이 처해진 환경과 처지에 따라 나눠질 텐데 그기에 따른 축복도 달라지겠지요.

이렇게 보면 하나님의 뜻이 고정적일 수는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데 이모든 경우를 하나로 통일할 수 있는 것은 자신 안에서 성령을 만날 때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성령이 자신 안에서 드러나게 될 때는 물질적인 것이든 영적인 것이든 관계없이 모든 것이 주어진다는 말이 됩니다.

아마 많은 이들은 내면에서 빛이신 성령을 만나게 되면 물질적인 부귀와 명예가 함께해야하지 않겠는가 하겠지요.

하지만 이러한 개념은 자신의 내면 안에서 성령을 만난 이들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가 물질적인데 있다고 여기는 사람들의 것입니다.

그들이 물질적인 시각을 벗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축복이 물질적이라 여기기 때문입니다.

이 같은 개념은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인데 자신의 내면에서 성령이신 빛을 만나게 되면 무조건 물질적 멸망을 맞이해야하고 비참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며 물질적 풍요로움 속에 있는 이들은 성령과 함께하지 않다 단정 지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또한 고정적인 시각일 뿐이며 절대적인 하나님의 뜻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하나님의 뜻을 하나의 고정된 시각으로 보는 견해일 뿐이라는 겁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물질적 축복이 내리는 것이나 영적인 축복이 내리는 것이나 모든 것은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주어진다는 것을 알라는 말이며 자신의 내면에서 빛이신 성령을 발견하는 순간 필요한 모든 것이 주어진다는 말입니다.

물질적인 축복이 와도 좋으며 물질적인멸망을 맞이해도 좋으며 그 모두가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일어나는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겁니다.

깨달음을 얻은 많은 이들이 물질적인 풍요나 명예에 집착을 갖지 않게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씀드리면 이미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인데 하나님과 하나 된 이가 새삼스럽게 그것을 쟁취하려 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육신의 덧없음을 말씀해 놓으신 겁니다.

우리들이 지금 제한된 시각으로 이 세상을 바라보게 되는 것이 육신을 입고 있기 때문인데 육신이 사라지는 순간 모든 것이 끝이 난다는 말씀이지요.

괴로움의 순간들은 살아있는 동안만 적용될 말이며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 이미 발견되어있는 하나님의 왕국으로 들어 올림 받는다는 말입니다.

물론 이것은 자신 안에서 성령을 만난 이들의 것이며 아직 빛이신 성령을 만난일이 없는 이들의 것은 아닙니다.

성령을 만나지 못한 이들은 예수님처럼 성령을 만난사람을 따라가야 할 사람이지요.

이 말은 나 홀로 목사가 주제넘게 함부로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하고 있는 생각과 말과 행동을 보면 정확하게 알 수가 있습니다.

타인들을 대하는 태도와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과 사람들을 가르치는 방법들을 보면 자신이 처해진 상황을 확인하게 되지요.

아직도 심판을 내리는 시각을 버리지 못하고 자신의 주장만을 일삼고 있다면 예수님제자라고 할 자격도 없을 뿐 아니라 예수님말씀을 믿는 자라 할 수도 없습니다.

진정 회개가 필요한 것은 타인들이 아니라 자신들이라는 것을 알기바라며 오늘의 시간은 여기에서 마치겠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