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을 깨달으면 가치관이 바뀐다.
성경을 연구하면 할수록 하나님의 손길이 각 방면에 작용한다는 점을 확인하게 됩니다.
아무리 성경을 달달 외우더라도 그 속뜻을 알려면 반드시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있어야한다는 점을 알게 되기에 성경은 보물 상자와도 같습니다.
겸손치 못한 마음에는 눈과 귀를 가려 하나님을 부정하게 만든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하는 가련한 인생들을 위해 바늘귀와 같은 기회를 마련하셨으니 바울과 같은 사도들은 우리에게 천국으로 향하는 길을 제시하고 있는 겁니다.
과연 그러한지 고린도후서 7장을 통해 알아보고자 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편지로 너희를 근심하게 한 것을 후회하였으나 지금은 후회하지 아니함은 그 편지가 너희로 잠시만 근심하게 한 줄을 앎이라(고후7:8)
For though I made you sorry with a letter, I do not repent, though I did repent: for I perceive that the same epistle hath made you sorry, though it were but for a season.
비록(For though) 편지로서 너희를 유감스럽게 만들었지만(I made you sorry with a letter) 과거와는 달리 후회하지 않는다고 합니다.(I do not repent)
왜냐하면 편지가 일시적인 것일지라도(though it were but for a season) 사도서간과 같이(the same epistle) 너희로 유감 되게 했음을 인식했기 때문이라(for I perceive) 했습니다.
즉, 성령을 깨닫기 전에는(사도가 되기 전에는) 자신들의 말이 하나님을 대변 한다 여기지 못했지만 이제는 기름부음을 받아 사도가 되었음을 확신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는 겁니다.
내가 지금 기뻐함은 너희로 근심하게 한 까닭이 아니요 도리어 너희가 근심함으로 회개함에 이른 까닭이라 너희가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게 된 것은 우리에게서 아무 해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후7:9)
Now I rejoice, not that ye were made sorry, but that ye sorrowed to repentance: for ye were made sorry after a godly manner, that ye might receive damage by us in nothing.
유감스럽게 만든 것을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I rejoice, not) 회개함을 위해(to repentance) 너희가 슬퍼하기 때문이라(ye sorrowed) 했습니다.
경건한 태도를 갖춘 후에(after a godly manner) 유감스럽게 만들었다는(ye were made sorry) 것은 사도들의 말로서 사람들이 경건함을 갖게 되어 회개했다는 뜻이지요.
즉, 사도들의 가르침이 사람들에게 경건함을 갖추게 한 것 외에 어떤 해도 받지 않게 했다는 말입니다.(ye might receive damage by us in nothing)
앞서 우리가 보았듯이 디도는 사람이 아니라 공경하는 마음이었음을 밝혀주고 있는 겁니다.
시간관계상 또다시 이 같은 점을 설명할 수는 없지만 디도가 사람이라고 할 경우 성경은 앞뒤가 맞지 않게 되며 원래의 뜻을 알 수가 없게 됩니다.
다음내용을 보면 바울이 왜 이렇게 비유로서 말하고 있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고후7:10)
For godly sorrow worketh repentance to salvation not to be repented of: but the sorrow of the world worketh death.
경건함의 슬픔은(godly sorrow) 구원을 위한(to salvation) 회개로 작용함으로(worketh repentance) 후회하지 않는다고(not to be repented of) 했습니다.
그렇지만 세상의 슬픔은 죽음으로 작용한다 했지요.(but the sorrow of the world worketh death)
이 말씀인즉, 영적인 가르침으로 슬퍼하는 것은 영혼으로 하여금 회개하게 만들어 구원을 얻게 하지만 세상적인 것으로 슬퍼하는 것은 영혼이 사망에 이르게 한다는 뜻입니다.
그만큼 하나님을 경건하게 여기고 공경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이지요.
지금까지 우리가 보았듯이 바울은 우리에게 성령이신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고 있음을 말하여 왔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 역시 내재하신 성령을 깨닫고 영적인 삶을 살라는 뜻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어지는 내용을 보면 바울의 이러한 마음이 그대로 반영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증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 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그 일에 대하여 일체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고후7:11)
이와 똑같은 일을 보라(behold this selfsame thing) 했고 경건한 일들 이후로 슬퍼함으로 인해 얼마나 네 안에 조심스러워 하는 일을 유발했고(what carefulness it wrought in you), 네 자신을 정화했으며(clearing of yourselves), 분개하고 두려워하며(what indignation, yea, what fear), 극렬하게 욕망했는가(what vehement desire) 했습니다.
영적인 길을 걷기 시작함과 동시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생겼고 내면에 성령의 씨앗이 심어지게 되었으므로 매사에 조심하게 되며, 스스로를 깨끗케 하고 때로 물질적인 일에 굴복하는 자신에게 분노하기도 하며, 하나님의 징계를 두려워하는 가운데서도 극렬하게 성령과 하나 되기를 바랐다는 겁니다.
또한 열성적이고(what zeal) 설욕(雪辱)했다(what revenge) 했는데 이 말씀인즉, 열과 성을 다해 노력하였으므로 명예를 회복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뒷부분에서 너희가 이 문제에 있어서(in this matter) 너희자신이(yourselves) 분명히(to be clear) 증명했다 말하고 있습니다.(approved)
즉, 바울이 전해준 말씀을(편지) 믿고 따름으로 인해 생활상에 불편을 초래했겠지만 결국에는 성령이 드러나게 될 거라는 말이지요.
다음 내용을 보면 이와 같은 나 홀로목사의 해석이 옳다는 것이 증명됩니다.
그런즉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그 불의를 행한 자를 위한 것도 아니요 그 불의를 당한 자를 위한 것도 아니요 오직 우리를 위한 너희의 간절함이 하나님 앞에서 너희에게 나타나게 하려 함이로라(고후7:12)
Wherefore, though I wrote unto you, I did it not for his cause that had done the wrong, nor for his cause that suffered wrong, but that our care for you in the sight of God might appear unto you.
바울의 편지 내용은 옳고 그름을 따지고 누군가의 불의함을 가리려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의 시각에서(in the sight of God) 너희를 위한(for you) 우리의 염려가(our care)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might appear unto you) 했습니다.
앞서 말한 대로 바울 및 사도들은 하나님의 시각을 갖추고 있다는 말인지라 성령과 하나 되었다는 뜻이며 이와 같은 말씀을 믿고 따르면 그들에게도 성령의 역사하심이 일어날 거라는 말이지요.
사실 이 말씀은 경험자만이 느낄 수 있는 내용입니다.
성령의 불씨가 우리 몸 안에 심어지고 나면 내 몸과 마음은 물론 온 세상이 달라지고 우주도 변화를 일으킵니다.
육신의 눈이 감기고 영의 눈을 뜨게 됨으로 이렇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세상 가치관이 바뀌지 않았다면 아직은 영적이지 못하다는 점을 알고 겸손에 겸손을 더하시기를 간곡히 바라며 그린도 후서 7장의 두 번째 시간을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