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생각 긴여운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는다.

배가번드 2025. 6. 5. 03:11
728x90

믿음의 길을 걷는다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은 걸어보아야 알 수 있는 일입니다.

그저 말만 해서는 알 수가 없으며 본인이 직접 경험해봐야 왜 어려운지를 알게 됩니다.

아마도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본인들이 이미 구원을 받았고 영생을 얻었다 생각할겁니다.

그러나 막상 현실적으로 고난과 고통이 찾아오면 믿음이 뿌리째 흔들린다는 것을 경험하게 되지요.

이러한 일을 오래전에 간접적으로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

온가족이 교회를 다니며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 형제가 있었는데 아이가 심하게 병을 앓게 되자 믿음의 길에서 내려서게 되었던 겁니다.

본인을 비롯하여 가족 모두를 교회로 인도하여 구원을 받게 하였는데 막상 아이가 불치병에 시달리다보니 믿음이 흔들렸던 거지요.

전지전능하신 그리스도 예수께서 어떻게 아이의 병 하나도 못 고치나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인데 이해가 가는 한편으로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구원이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영혼의 구원이며 육신을 완전케 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알아야 영생을 얻게 되는 것인데 성경을 오해했기 때문에 이러한 일이 일어난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게 되면 처음에는 병이 치유되기도 하고 때로는 마음먹은 대로 일이 이루어질 때도 있으며 기적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그와 같은 일은 어디까지나 초발심 때 일어나는 것으로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큰 어려움이 찾아옵니다.

물론 이러한 일은 사람마다 겪는 정도가 다르며 어려움의 종류도 다양하게 주어집니다.

어떤 이는 평생을 어려움 없이 지내는 경우도 있으며 어떤 이는 남들이 경험하지 못하는 어려움과 역경을 경험하기도 하지요.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하면 본인이 이 세상을 통해 얻어야할 것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만약 누군가가 지난 생에서 영생을 상속받았다면 이번 생에서 영생을 얻어야할 사람답게 많은 시련과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이며 물질적 풍요를 상속받았다면 거기에 상응하는 일들이 일어나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같은 교회를 다니고 동일한 가르침을 받지만 걷는 인생길이 다양한 것이며 경험치가 틀리는 겁니다.

아마도 기독교인 대부분은 믿지 않겠지만 성경에는 이러한 말이 분명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막10:29)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막10:30)

But he shall receive an hundredfold now in this time, houses, and brethren, and sisters, and mothers, and children, and lands, with persecutions; and in the world to come eternal life.

 

29절에서 말하는 나는 예수의 육신이 아니라 성령을 가리키는 겁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이신 성령을 위해 가족이나 재물을 버리라는 말이 아니라 빛이신 성령은 혈육이나 물질과는 별개의 존재임을 알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30절에서 이번 생에서(in this time) 백배나 돌려받는다(receive an hundredfold) 했습니다.

즉, 성령을 깨닫고 나면 믿음의 길을 걷는 사람들안에 성령이 되살아나게 되어 다 같이 하나님의 자녀 됨을 알게 된다는 겁니다.

그렇지만 성령을 깨닫는 순간부터 박해도 함께 받게 된다는(with persecutions)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뭇사람들로부터 조롱과 비웃음이 주어질 거라는 거지요.

이러한 점을 감안하여 생각해보면 믿음의 길을 걷는 이에게 물질적 풍요가 주어지는 것은 구도의 길을 걷는 이들을 도우라는 하나님 뜻으로 여길 수 있으며 영생을 상속받기 위한 행동을 하라는 뜻으로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일로서 타인이 이래라 저래라 말할 것은 못됩니다.

그러나 심는 대로 거둔다는 물질세상의 법칙에 따라 무엇을 심는데 대한 보응이 주어질 것이 분명합니다.

따라서 본인에게 고통의 순간이 연속적으로 주어지고 있다면 두 가지 측면이 있는 겁니다.

하나는 내가 지난 생에서 무언가 안 좋은 것을 심어놓은 것이며 두 번째는 성령으로 거듭나기 위한 진통의 순간이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이두가지는 하나로 귀결이 되며 그곳은 곧 영생의 하늘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인생길에서 마주하는 여러 가지 어려움들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는 오롯이 개인의 역량이라 할 수 있으며 믿음의 크기와도 결부(結付)되는 일이지요.

이것은 본인 영혼이 설정한 목표와도 연관이 있는 일이며 크신 하나님의 뜻과도 연결되어 있는 일입니다.

자신의 영혼이 이번 생에서 영생 얻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면 당연히 세상 죄를 짊어지고 가는 어린양이 될 각오를 해야 하며 거기에 상응하는 시험을 통과해야만 합니다.

이러한 일을 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사53:7)

 

우리가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영생을 얻는 말과 같으며 영생이란 하나님 우편에 앉는 일과도 같습니다.

그렇게 크나큰 목표가 있는 만큼 사람들로부터 핍박과 조롱은 물론 고난과 시련의 순간이 주어질 것은 자명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심한 고통 속에 있다는 것은 그만큼 결실이 클 것을 예고하고 있는 겁니다.

아마도 나는 이런 일을 원하지도 않았고 그런 일에 관심조차 없다 말하는 사람들도 있겠지요.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보면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내인생길이 달라진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내가 직면하고 있는 어려움을 통해 부모를 원망하고 주변사람들을 원망하며 종내는 하나님을 원망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현명한 것인지 영생을 얻기 위한 밑그림이라 여기는 것이 현명할지를 생각해봐야 한다는 말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나는 내인생을 이렇게 생각하고 있으며 내가 겪었던 수많은 고통의 순간들을 이렇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나 역시 처음 구도의 길을 들어설 무렵 많은 기적을 경험했었지요.

그러나 그와 같은 물질적 축복은 얼마가지 않았으며 곧바로 시련의 순간들이 물밀 듯이 밀려왔습니다.

성경을 통해 예수께서 말씀하신 다음과 같은 일들이 내 인생에서 일어났던 겁니다.

 

○예수께서 감람 산 위에 앉으셨을 때에 제자들이 조용히 와서 이르되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마24:3)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하지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아직 끝은 아니니라(마24:6)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곳곳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마24:7)

이 모든 것은 재난의 시작이니라(마24:8)

 

일반적으로 이 내용을 세상 멸망을 예언한 것으로 말하고 있지만 그것은 성경을 크게 오해했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제대로 읽어본 이들은 이 내용이 육신 안에 거하시는 성령이 드러나려면 어떤 일이 있어야하는가를 제자들이 물었고 그 대답을 예수께서 하셨음을 알겁니다.

만약 이 내용이 예수 재림을 말하는 것 같으면 다음 내용은 부정되어야 합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마16:28)

Verily I say unto you, There be some standing here, which shall not taste of death, till they see the Son of man coming in his kingdom.

 

여기서 있는 몇 명은 죽음을 경험하기 전에(shall not taste of death) 인자가(the Son of man) 그의 왕국에 들어오는 것을(coming in his kingdom) 볼 것이라 했습니다.

이 말씀인즉 예수생존당시 제자들 가운데 몇 사람은 육신을 성전(왕국) 되게 만들어 인자(성령과 하나 됨)가 될 것이라는 뜻이지요.

그러므로 지금부터라도 영생나무의 씨앗을 심으시길 바라며 회고(回顧)의 시간을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