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주면 너희에게 주어질 것이다.
며칠 전 사고가 났습니다.
갑자기 오토바이 키를 잃어버리는 바람에 차를 몰고 출근을 하였는데 앞차가 급정거를 하는 바람에 부딪혔던 겁니다.
범퍼에 약간의 스크래치가 나는 정도였지만 몹시 놀랐지요.
앞차를 운전하던 외국인도 놀랐는지 급히 뛰어내려와 보더니만 별다른 문제가 없었는지 미안하다며 손을 들어 인사를 하고 헤어졌습니다.
우회전을 하던 도중 직진 차량을 뒤늦게 발견하고 급정거를 했으니 미안한 마음이 들었던 모양입니다.
놀란 가슴을 진정하고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를 생각해보니 외국인과 나 사이에 얽혀있던 인과의 고리를 풀기위한 하나님의 안배라는 생각과 함께 더 큰 사고를 막아주려는 하나님의 손길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지요.
외국인의 입장에서 볼 때 그 많은 나라 중에 한국에서, 또 하필이면 그 많은 사람 중에 나를 만나 사고를 당하게 되었을까를 생각해보면 인연도 보통 인연이 아닌 것은 틀림없습니다.
성경에 기록되기를 심는 대로 거둔다 하였으므로 어떤 경우에도 이러한 법칙을 벗어나는 일은 없다 생각됩니다.
보통 인과응보라 하면 불교를 떠올리겠지만 이 같은 일은 종교와 관계없이 물질세상의 법칙과도 같습니다.
우리가 밭에 콩을 심으면 콩을 거두고 팥을 심으면 팥이 나는 것과 동일한 것으로 인과응보가 어떤 종교의 전유물이 될 수는 없는 겁니다.
다만 불교는 윤회설의 작동원리로 인과응보를 주장하기 때문에 마치 불교만의 것으로 오해를 하게 되는 것이지만 성경에도 윤회설을 나타내는 구절들이 많으므로 실상은 동일하다 볼 수 있지요.
대표적인 예로 영생을 상속받는 다는 구절이 있으며 갈릴리예수라는 말에도 윤회사상이 내포되고 있습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관련구절을 살펴보겠습니다.
현세에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하시니라(눅18:30)
○갈릴리의 가버나움 동네에 내려오사 안식일에 가르치시매(눅4:31)
그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라니 이는 그 말씀이 권위가 있음이러라(눅4:32)
누가복음18장에는 현생과(this present time) 내생을(come life) 분명히 구분 짓고 있습니다.
그리고 갈릴리의 뜻은 ‘원, 순환, 반지, 고리’이고 가버나움의 뜻은 ‘나훔의 마을’이며 나훔은 ‘위로 자“이므로 성령인 예수가 이 세상에 위로자로서 돌아왔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인과응보나 윤회설이 특정종교의 것이 될 수는 없는 겁니다.
그렇다면 왜 성경에는 윤회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을까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정답부터 말하자면 우리가 이생에 집중하기 위해서는 전생을 기억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내가 전생에 왕이었을 경우 인과응보의 법칙에 따라 이번 생에는 신하의 신분이 되어야하는데 전생을 기억하게 되면 신하의 역할에 충실하지 못하게 되지요.
또한 성경의 목적은 사람들로 하여금 영생을 얻게 하는데 목적이 있으므로 단계별의 영적세계를 말하지 않고 있는 겁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러한 일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요14:2)
In my Father's house are many mansions: if it were not so, I would have told you. I go to prepare a place for you.
아버지의 집에는 저택이 많다고 했으니 이상합니다.
방이 많은 것이 아니라 저택이 많다고(many mansions) 했으니 다 같은 집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알 수 있지요.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예수와 같은 인자를 믿고 따르면 각자의 영적수준에 따라 하늘로 올라가는 것은 분명하다는 사실입니다.
적어도 짐승과 같이 지옥으로 떨어지지는 않는다는 겁니다.
교회에서는 이 말씀을 상급이 다르다는 뜻이라고 하지만 영어성경을 보면 그렇지 않다는 점을 분명히 알게 됩니다.
이러한 이유로 나 같은 경우 어떤 일이 일어나면 항상 그 원인을 먼저 찾게 되는 것이며 사고의 원인제공자가 나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좋은 일이던 나쁜 일이던 내가 심어놓은 것이 돌아온다 생각한다는 거지요.
아마도 누군가는 그렇게 살면 항상 손해를 보지 않는가 말하지만 결코 그렇게 여길 일이 아닙니다.
나에게 불이익을 가하거나 모함이나 모욕적인 말을 하는 것은 나로서는 감사할일이고 그런 행위를 한사람에게는 또 다른 인과가 형성됨으로 내가 손해 볼 것은 조금도 없는 겁니다.
이런 일 역시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5:4)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마5:5)
애통해한다는 것은 뭔가 슬픈 일을 당했다는 뜻이므로 불이익의 순간들 모두가 포함되는 말입니다.
무엇인가 내가 안 좋은 것을 심어놓았기에 이런 일을 당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과거에 지은 죄를 갚는 결과가 됨으로 위로를 받는다고 했습니다.(4절)
마찬가지로 온순한 이에게는 물질적인(땅의 것) 축복이 주어지는 당연한 겁니다.
말을 곱게 하고 마음씀씀이가 온화하면 당연히 고운 말이 돌아오는 것은 물론 베푼 것보다 더 많은 것들이 주어지게 됩니다.
이런 이치로 나에게 함부로 대하는 사람은 내 업장을 가져가는 결과를 초래함으로 나에게는 축복으로 작용하고 자신에게는 재앙을 심는 꼴이 되는 거지요.
그러므로 나 같은 경우에는 웬만하면 누군가와 다투지 않습니다.
정말 내 가족 같아서 그 사람의 업장을 내가 가져오겠다고 마음먹지 않는 이상 싸우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일을 할 때면 항상 내가 먼저 움직이게 됩니다.
내가 할 일을 타인에게 전가시킨다면 그 또한 신세를 지는 일이라 생각하고 있으며 언젠가는 반드시 반대되는 일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항상 쉬운 일보다는 힘든 일을 자청합니다.
이런 일 역시 성경에는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눅6:38)
Give, and it shall be given unto you; good measure, pressed down, and shaken together, and running over, shall men give into your bosom. For with the same measure that ye mete withal it shall be measured to you again.
주면 너희에게 주어질 거라고 합니다.(Give, and it shall be given unto you)
또한 좋게(넉넉하게) 측량하여(good measure) 흔들어 채워(shaken together) 넘치도록(running over) 주면 사람들이 너희가슴에 안겨줄 거라고 했습니다.(men give into your bosom)
이 말씀은 그저 베풀라는 말이 아니라 상대방의 모든 것을 좋게 받아들이게 되면 좋은 것이 돌아온다는 뜻입니다.
누군가의 어처구니없는 행동을 액면대로 받아들여 똑같이 대응하게 되면 그것이 부메랑이 되어 또다시 나쁘게 돌아오게 됨으로 좋게 해석하여 좋은 결과가 돌아오게 만들라는 거지요.
그래서 너희의 측량한대로 돌려받는다 한 겁니다.(ye mete withal it shall be measured to you again)
한마디로 표현해서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들으라는 말입니다.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같은 말을 실감하지 못할 것이 분명합니다.
어떤 이들은 베풀지 않는 것은 물론 죄를 짓고도 잘 먹고 잘살아감으로 성경말씀이 완전히 맞는 것은 아니라고 하겠지요.
그러나 내가 살아본 결과 이 같은 일이 벗어나는 법은 없었습니다.
아직은 혈기가 왕성하여 못 느끼고 있겠지만 지은 죄가 너무나 커서 미처 돌려받지 못하고 있음을 죽음에 이르게 되면 알게 될 겁니다.
이미 몇 차례에 걸쳐 말했듯이 나는 지옥을 세 번이나 다녀온 사람입니다.
내말을 믿고 안 믿고는 자유겠지만 인과응보는 인류가 존재하는 한 영속하는 불변의 법칙이라는 말씀을 드리며 사고(事故)에 대한 변(辯)을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