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은 사도의 표지판이다.
사노라면 이런저런 일로 힘이 들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그 모든 어려움의 출발점은 욕심이지요.
가만히 내 마음을 들여다보면 내가 무엇인가를 목표로 삼고 있기 때문에 어려움이 다가온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어려움과 고난이 싫어 자신의 목표를 내려놓으면 간단하게 어려움을 해소할 수는 있지만 삶의 의미가 없어집니다.
이러한 이치를 깨닫고 나면 어떤 어려움도 기쁨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영육간의 어떤 일도 이러한 패턴에서 벗어날 수는 없으며 그 모든 것은 선택입니다.
그렇다면 바울과 같은 사도의 선택은 어떠한 것이었는지 알아보고자 합니다.
○내가 어리석은 자가 되었으나 너희가 억지로 시킨 것이니 나는 너희에게 칭찬을 받아야 마땅하도다 내가 아무 것도 아니나 지극히 크다는 사도들보다 조금도 부족하지 아니하니라(고후12:11)
I am become a fool in glorying; ye have compelled me: for I ought to have been commended of you: for in nothing am I behind the very chiefest apostles, though I be nothing.
사도의 표가 된 것은 내가 너희 가운데서 모든 참음과 표적과 기사와 능력을 행한 것이라(고후12:12)
Truly the signs of an apostle were wrought among you in all patience, in signs, and wonders, and mighty deeds.
바울이 영광 속에서 바보가 되었는데(become a fool in glorying) 형제들이(구도자) 강요했기 때문이라고(ye have compelled me) 합니다.
구도의 길을 걷는 이들 모두가 원하는 것이 성령이므로 바울이 성령처럼 말하고 행동할 수밖에 없었다는 뜻이지요.
그래서 너희에게 칭찬을 받아야한다(I ought to have been commended of you)했으며 자신이 아무것도 아닐지라도(though I be nothing) 지극히 큰 사도들보다(the very chiefest apostles) 뒤처지지 않는다 말하고 있는 겁니다.
육신적으로는 별 볼일 없지만 성령을 깨달았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12절에서 자신이 사도의 표지판이라고(the signs of an apostle) 했는데 너희 가운데(among you) 모든 인내와 표적과 이적 및 전능한 행위가 야기했다고(were wrought) 합니다.
즉, 구도자들이 참고 인내하는 가운데 일어난 여러 가지 표적과 이적 및 전능한 행위들은 바울에 의해서라는 뜻으로 성령의 입장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이어지는 내용역시 육신 바울이 아니라 성령의 말씀이라고 봐야 합니다.
내 자신이 너희에게 폐를 끼치지 아니한 일밖에 다른 교회보다 부족하게 한 것이 무엇이 있느냐 너희는 나의 이 공평하지 못한 것을 용서하라(고후12:13)
For what is it wherein ye were inferior to other churches, except it be that I myself was not burdensome to you? forgive me this wrong.
○보라 내가 이제 세 번째 너희에게 가기를 준비하였으나 너희에게 폐를 끼치지 아니하리라 내가 구하는 것은 너희의 재물이 아니요 오직 너희니라 어린 아이가 부모를 위하여 재물을 저축하는 것이 아니요 부모가 어린 아이를 위하여 하느니라(고후12:14)
Behold, the third time I am ready to come to you; and I will not be burdensome to you: for I seek not your's but you: for the children ought not to lay up for the parents, but the parents for the children.
바울 자신이(I myself) 너희에게 부담주지 않은(was not burdensome to you) 것 외에(except it) 다른 교회에 비해(to other churches) 어떤 점에서 부족한가를 묻고(wherein ye were inferior) 있습니다.(13절)
이 말씀인즉 일반 교회에서는 형제들에게 물질적, 육신적으로 부담을 주지만 성령과 하나 된 바울은 어떠한 부담도 주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14절에서 세 번째 너희에게 갈 준비를 한다 했는데 이는 삼위일체 하나님, 즉 성령으로 너희에게 임할 준비가 되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너희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며 너희 소유물을 구치 않고 너희를 원한다(I seek not your's but you) 했으며 아이들이 부모를 위해 저장하지 않으며(the children ought not to lay up for the parents) 부모가 아이를 위해 한다 했지요.
바울이 원하는 것은 오로지 형제들이 성령을 깨닫는데 있다는 것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성령과 하나 된다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 되는 것과 같으므로 누군가에게 신세를 지거나 부족함이 없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내가 너희 영혼을 위하여 크게 기뻐하므로 재물을 사용하고 또 내 자신까지도 내어 주리니 너희를 더욱 사랑할수록 나는 사랑을 덜 받겠느냐(고후12:15)
And I will very gladly spend and be spent for you; though the more abundantly I love you, the less I be loved.
바울이 기쁜 마음으로 소비를 하는데(I will very gladly spend) 너희를 위하여 소비한다(be spent for you) 했습니다.
이 말씀은 성령은 물질을 필요로 하지 않지만 육신이 필요로 한다는 뜻이기도 하고 헌금을 받는 것조차 바울을 위해서가 아니라 형제들을 위해서라는 뜻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하나님을 위해 무엇인가를 하려면 대상이 필요합니다.
무턱대고 하나님을 위한다 말만 할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주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바울과 같이 성령과 하나 된 사람을 도울 필요가 있지요.
즉, 바울이 헌금을 받더라도 형제들을 위해서일뿐 바울자체가 필요해서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는 우리가 교회에다 헌금을 하는 것이 목사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자신 안에 내재하신성령을 위한 것이라는 말과 같은 겁니다.
그래서 너희를 보다 풍성하게 사랑한다 해서(hough the more abundantly I love you) 내가 사랑받음이 적겠느냐(he less I be loved)했습니다.
이는 성령의 사랑은 무한하다는 뜻으로 사도들이 사람들에게 헌금을 받는 것조차 사람들을 사랑하는 방식이라는 말이며 성령은 이미 그자체로 완전하다는 뜻입니다.
이러하므로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하여간 어떤 이의 말이 내가 너희에게 짐을 지우지는 아니하였을지라도 교활한 자가 되어 너희를 속임수로 취하였다 하니(고후12:16)
But be it so, I did not burden you: nevertheless, being crafty, I caught you with guile.
16절을 보건데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바울에 대해 많이 오해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말로는 짐을 지우지 않는다 해놓고 헌금을 받아 사용했으므로 교활하여(being crafty) 속임수로 사람들을 붙잡아둔다(I caught you with guile) 했던 겁니다.
그래서 바울은 변명 아닌 변명을 하고 있는 거지요.
이러한 이유로 나 홀로목사는 누구에게도 십일조를 받은바 없으며 앞으로도 받을 생각이 없습니다.
다만 자신이 속한 종교에 십일조를 하거나 종교가 없는 이들은 불우한 이웃이라도 도우라 권하고 있습니다.
입으로만 성령을 위한다 말할 것이 아니라 실천을 해보라는 말입니다.
자신의 것은 조금도 손해 보지 않으려하면서 무엇인가를 얻으려는 것은 도둑놈 심보라는 말씀을 드리며 오늘의 강해를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