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아!(70)
아들아!
교도소를 나와 가족들과의 생활에 익숙해져 갈 무렵 한번은 경복궁엘 갔을 때였어.
사진을 찍던 관광객들에게 자리를 피해주려고 옆으로 비켜서는데 내 시선을 잡는 광고판이 보이는 것이 아니겠니.
외계인을 알고 싶으면 와서 보라는 문구였는데 평상시 외계인에 대한 관심이 있었고 호주에 머물 때의 경험도 있었기에 가보기로 하였지.
너에게 교육이 될 것 같기도 하여 겸사겸사 갔었는데 종로 3 가 지하에 위치한 전시장에는 각종 외계인 관련 사진들이 가득하게 복도를 장식하고 있더구나.
길게 늘어져 있는 전시장을 한 바퀴 온전히 돌아오니 한쪽 모퉁이에 책을 판매하고 있었어.
프랑스 사람이 쓴 책으로 자신이 외계인들이 사는 행성을 다녀왔다고 주장하는 내용이었지.
네가 앞으로 공부하는데 도움이 되겠다 싶어서 사왔는데 그때만 해도 네가 어려서인지 도무지 관심이 없어 하기에 결국은 내가 틈틈이 보게 되었어.
그런데 이 책을 읽다보니 엄청난 사실이 거기에 기록되어 있었는데 평상시 내가 생각하던 우주관과 너무나 동일한 내용인 데다가 성경 해석을 기가 막히게 앞뒤가 맞아떨어지게 해놓고 있었던 거야.
어떤 결점도 찾을 수가 없었고 틀리다고 할 내용을 발견할 수가 없었어.
어떤 일이 맞지 않다고 하기위해서는 그것이 틀리다고 해야 할 반박자료가 있어야 하는데 그들이 주장하는바가 사회적인 가치관을 벗어난 점을 제외한다면 그야말로 완벽하다 할 수밖에 없더라는 거지.
과학에 근거한 그들의 설명이 얼마나 리얼했냐하면 책에서 눈을 떼기가 두려울 정도였어.
게다가 스승님께서 평상시 가르쳐주시던 외계의 상황과 너무나 흡사 한데가 많았거든.
인간수명이 1.200살 까지 살수 있다는 것도 신기했고 무한대의 세계와 무한소의 세계가 결국은 하나로 귀결된다는 불교의 우주론과도 맞닿아 있었던 거지.
까비르가 말한 대양이 이슬 속으로 젖어들다 라는 말과도 상통하였으며 첨단과학이 보여주고 있는 복제인간의 가능성 정도가 아닌 완성을 말해주고 있더구나.
이 같은 단체를 사람들이 얼마나 사이비로 보는가 하는 것은 내가 잘 알고 있지만 나로서는 이들을 사이비로 볼 이유가 전혀 없고 사이비라고 생각하지도 않아.
그 당시 내가 이들에 대해서 아주 우호적이고 친근감까지 느끼고 있었는데도 불과하고 그들의 단체에 가입을 하지 않았던 몇 가지 이유는 이미 내가 그들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스승님을 통해 어느 정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들이 1.200년을 산다 해도 결국 죽어야 함으로 영원한 해탈을 말하고 있지는 않았기 때문이었어.
그들이 말하고자 하는 것 역시 제한된 어떤 물질세계를 말하고 있었고 내가 가고자 하고 추구하고자 하는 세상과는 거리가 있었기 때문이었지 그들의 말이 허구라거나 신빙성이 없어서 그들에게 동조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란 것을 네게 말하고 싶구나.
내가 너와의 대화를 통해 미리 말했듯이 이 우주에는 시장의 물건과 같이 다양한 정신세계가 펼쳐져 있으며 우리에게는 언제나 선택할 권리가 부여되고 있다는 생각이거든.
그들 역시 이와 같은 나의 말에는 동의 할 거라 여겨져.
만약 그들이 자신들이 추구하고자 하는 일에 반하는 행위를 하는 자는 모두가 지옥을 보내려한다거나 혹은 억지로 자신들 단체로 끌고 가고자 한다면 지탄을 받아야 하겠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그들의 주장을 터무니없다고 하고 사이비로 욕을 한다면 욕하는 이들이 잘못이라 생각해.
솔직히 내가 스승님을 미리 만나지 못한 상태에서 이들을 만났다면 나 역시 이들의 단체에 가입했을 거라 여겨지고 실지로 우리단체에 있던 동수가 이곳을 가게 된 일도 있었는데 뒤에 들리는 말로 그분역시 그 단체에서 나왔다고 하더구나.
아무래도 그 단체에서 주장하는 모든 교리를 소화시키기가 어려웠지 않았나? 볼 수도 있고 그들이 주장하는 것이 자신의 생각과 맞지 않았을 거라 생각 할 수도 있을 것 같아.
그분의 생각이야 그분 고유의 권한이겠지만 나로서는 이들에게서 구입한 책 덕분으로 시야가 넓어지고 있었으며 그들로부터 우주의 많은 부분을 공부 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으니 나에게 있어서는 그들 또한 스승이었고 고마운 존재들이었어.
그들에게 우주의 단편적인 공부를 하고 있을 무렵 또 다른 내 인생의 변화가 다가오고 있었지.
교도소에서 나온 뒤로 채식사업을 거들고 있다가 그 해 겨울쯤 네 고모가 보태준 돈으로 사무실을 조그마하게 열었어.
양털이불사업을 하자던 교도소에서 만난 k선생님과의 약속에 따라 사무실을 마련하고 기다렸는데 우선 그분이 나오실 동안 밑 작업을 하기로 했던 거야.
호주에서 양털이불을 하는 외삼촌에게 도움을 청했지만 거절을 당했고 온전히 내 힘만으로 재기를 해야 했는데 참으로 무모한 일이었던 것 같아.
어쩌면 내가 어리석어서 이기도 하겠지만 사람이 사람 말을 믿지 않으면 어떻게 살아가겠는가 하는 것이 내 생각이었고 변명 같지만 내가 모든 이들과 해야만 하는 역할 때문이었지 않을까해.
철석같이 약속을 한 k선생님도 자신이 집을 잡혀서라도 뛰어들겠다던 용기가 어디로 가버렸는지 출소 후에는 말이 달라져 있었고 여기저기 자금의 도움을 받고자 수소문을 했지만 역부족이었어.
결국 내가 알고 있던 방식대로 보험회사의 사은품 쪽으로 가닥을 잡아보았지만 그곳 역시도 로비를 하지 않고서는 힘이 든다는 사실만을 확인해야만 했지.
남들이 힘들다고 극구 말렸지만 대기업의 창립기념일 날 직원들에게 나누어주는 기념품 쪽으로도 알아보았고 그곳 역시 노조위원장과 입찰업체간의 뒷거래가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으로 만족해야만 했던 거야.
이세상은 어차피 인과의 연결고리로서 단단히 얽혀져 있음으로 내가 끼어들 연결고리는 보이지 않더구나.
도저히 풀릴 것 같지 않은 실타래와 같은 내 환경을 탓하기보다 마지막 카드를 꺼내기로 했어.
언젠가 한번은 해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것을 실행하기로 했지.
나와 함께 일을 하던 s사형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대만 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던 거야.
그간에 조사한 밍크이불공장의 정보와 견본, 양털이불 견본 등의 침구류를 들고 대만의 이불업체를 컴퓨터를 이용하여 검색하고 연결하여 찾아갔던 것이었어.
사무실 문을 닫아야 하는가 아니면 지속적으로 영업활동을 계속할 수 있느냐는 사활을 건 한판 승부였는데 내가 생각해도 무모한 시도였지만 그 당시 내 생각으로는 그 길밖에는 길이 보이지 않았던 거지.
대만에 도착하여보니 억수같이 비가 오는데 미리 대기하고 있는 통역아가씨와 함께 대만침구업체를 찾아갔더니 사장님이 무척이나 놀라워하였어.
이불 장사를 30년 이상 했지만 나 같은 사람은 처음 봤다는 거야.
무모하다시피 저돌적인데다가 팸플릿도 마련되지 않은 사람이 견본보따리를 제 키만큼이나 되는 가방에다가 담고 들이닥쳤으니 그럴 만도 하였을 거라 여겨져.
내가 가진 재산이라고는 배짱과 무식한 용기밖에는 없었고 시장바닥에서 굴러먹던 장사치가 무역에 대해서 무엇을 알겠으며 내가 아는 바대로 가식 없이 실천하고 있었던 것이었어.
천만다행으로 그분들은 이런 무식쟁이 나를 좋게 보아주셨고 자신의 부인이 경영하는 타이베이 시내에 있는 가게로 견본가방을 자신의 벤치승용차에 싣고 가게 되었던 거야.
가게로 가는 도중 거래관계를 떠나 나와 친구사이로 지내고 싶다는 말씀을 끊임없이 하셨지만 나로서는 마지막 카드인 관계로 이번 기회에 반드시 소정의 성과를 가지고 가겠다는 말씀을 계속해서 반복하고 있었지.
가게에 도착했을 때 사모님께서도 호의적인 반응을 보여주셨고 가격과 여러 가지 제품에 대한 관심을 보여주셨는데 막상 거래를 성사시키기에는 뭔가가 부족한 것 같더구나.
결국 그렇게 성과를 보지 못하고 유학을 가서 살고 있는 p사형과 연락을 해서 그 집에서 며칠을 지내게 되었고 지내는 동안 업체 몇 군데를 더 가보았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어.
마지막 돈을 모두 긁어모아 나선 길이었고 성과 없이 돌아서긴 했지만 좋은 경험을 했다 생각 했는데 돌아와서는 곧바로 사무실 문을 닫아야 했지.
앞서 내가 교도소에서 만난 k선생님을 믿고서 시작한 것부터가 잘못이었지만 그것도 내가 반드시 그러한 경험을 하게 만들기 위해서 그분이 그러한 역할을 한 것으로 믿고 있기에 그분을 원망하는 마음은 들지 않아.
다만 마음이 착한 사람이 반드시 좋지만은 않다는 것과 차라리 못하면 못한다고 딱 부러지게 말을 해주는 것이 상대와 내가 함께 편할 수도 있다는 경험을 했다고 여기고 있어.
이분과의 동업이 성사조차 못해보고 나 혼자 만의 원맨쇼로 끝나긴 했지만 소중한 경험은 했던 것 같아.
교도소에서부터 생각하길 이 세상을 살아가려면 이세상의 방식이 필요하다는 생각과 내가 하는 일에 어떠한 죄책감도 가질 필요가 없다는 결론을 가지고 시작한 사업이었지만 그러한 사회의 법칙대로 살아가고자 해도 번번이 나를 방해하는 요소가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내양심의 소리였고 내가 아는 범위 내에서만 지켜나가면 그 나머지의 일에 대해서는 계율역시 내가 알바 아니라는 듯이 살고자 하였지만 내가 알고 있는 범위라는 것을 정하는 것조차 그다지 쉽지가 않더라는 것이었어.
예를 들어보자면 과자하나를 먹는다 하더라도 계란이 들었나? 안 들었나를 살피는 것이 어찌 보면 하찮은듯해서 무관심해지려고 해도 그렇게 되지가 않더라는 거야.
한번은 가족들과 나들이 길에서 길거리에서 파는 빵을 사먹게 되었는데 네 엄마가 물어보았다면서 먹자고 하였지만 아무래도 이상해서 차에서 내려 확인을 해보니 계란을 넣었다는 것이 아니겠니.
이일로 불같은 화를 내지는 않았지만 다시는 네 엄마 말을 신용하지 않게 되었어.
이렇듯이 매사가 대충 넘어가는 법이 없는 내가 얼마나 네 엄마를 숨 막히게 했을지 모르겠지만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을 어쩌겠니?
차라리 굶는 한이 있더라도 내가 아는 범위 내에서의 계율을 지켜야만 했으며 명상시간 역시 앉아서 하는 명상을 못하더라도 누워서라도 해야만 했고 남들이 보지 않는 가운데 명상을 해야만 했으므로 단칸방에서 식구들이 다들 자는 가운데 몰래 명상을 해야만 했거든.
이미 교도소에서 훈련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가족들조차 눈치 채지 못하게 명상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있었고 T. V를 함께 시청하고 있어도 나는 명상을 할 수 있었어.
일상생활 중에서도 마찬가지였었는데 운전을 하면서도 집중상태를 유지하는 것은 물론 내면의 소리를 늘 들을 수 있었지.
이와 같은 일은 나만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연습하면 할 수 있는 법인데 자신이 해보지도 않고 나 같은 사람을 귀신이 덮어 씌웠다느니 귓병이 생겼다느니 하는 것을 보면 한심하다 못해 코웃음이 절로 나와.
내가 이처럼 되게 되기까지 용맹정진을 하였고 할일이 없다 보니 명상만 죽어라고 했던 몇 년의 세월이 밑바탕이 된 것이지 어느 한순간 마음먹어서 된 일이 아니었다는 것을 네가 알았으면 해.
운전 중에 명상을 하느라 사고가 날 것 같은 순간도 있었고 만트라를 놓칠까봐 단한순간도 지혜안에서 의식을 내려놓지를 않으려는 세월이 있었으며 남들과의 대화중에도 집중을 하는 노력이 있었던 거야.
심지어 내면의 소리를 듣는데 방해가 된다싶어서 과자조차 먹지 않았어.
과자가 바삭거리는 소리에 내면의 소리가 묻힐까 걱정이 되었거든.
사업이 힘이 들고 고통스러운 나날이 계속될 때 역시 단한순간도 내면의 소리를 놓치지 않으려 노력했으며 다시 한 번 사업을 한답시고 친구들의 도움을 받으러 다닐 때 친구들과 술집엘 앉아서도 집중을 놓은 적이 없었지.
이렇게 내가 신을 향한 몸부림 속에 있으면서도 사회생활을 해야 했던 가장 큰 이유가 너를 위해서였는데 이러한 일 역시도 사실은 나 자신과의 약속에 근거하고 있는 만큼 결국 나 자신을 위한 것이었어.
이렇게 열심히 수행과 명상을 병행했지만 사회생활에 집중을 하지 못한 탓인지 결과는 좋지 않았고 사무실을 그만두어야 했는데 사무실을 닫고도 그간에 빌려 쓴 돈과 직원의 월급을 못주는 바람에 너희 외할아버지가 네 엄마를 타고 다니라 사준 자그마한 중고승용차까지 팔아야만 했지.
이무렵 사촌형이 찾아와서 자신의 일을 도와주길 원하는 바람에 가게 되었는데 형과의 일로서도 참으로 많은 세상경험을 하게 되었고 인간의 감정이라는 것이 얼마나 간사한가 하는 것과 일반적인 삶이나 수행인들의 삶이 둘이 아니라 하나임을 알게 되었으며 내면의 번뇌라는 것이 비단 수행자들만이 겪는 것이 아니라 일반인들 또한 마찬가지이며 자신의 역할에 따라 인격형성이 되어 간다는 것 또한 알게 되더구나.
처음 사촌형이 나를 찾아왔을 때는 함께 일을 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생각을 했지만 갈수록 주위환경이 남의 집에 취직을 하지 않고는 안 될 위기로 몰아가는 바람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해야만 했는데 그나마 당장 돈이 필요했던 내 요구를 들어 주는 곳은 사촌형밖에 없었거든.
이 형으로 말하자면 앞서 내가 말을 했던 사촌형, 그러니까 나와 함께 성장과정을 함께 하다가 결국 알코올 중독으로 유명을 달리했다는 형과는 친형제사이로서 아주 어린 시절부터 성장 시기까지 주변에서 늘 함께 하다시피 한 사이였으니 친구와도 같은 형이었어.
초등학교 때 시골학교를 함께 다니기도 했는데 남달리 체격조건이 좋았던 형이 달리기 선수로 나오는 운동회 때면 친구들에게 자랑을 하며 내형임을 강조하곤 했고 대구로 전학을 와서도 가끔 우리 집을 들러 팔다 남은 껌을 들이밀어 놓고서 도망치듯 가는 형을 네 할머니가 돈을 주고 오라해서 따라가 돈을 쥐어주곤 했으며 성장을 하고서도 한집에 살다시피 하며 청년시절을 함께 하였지.
동네 건달들과 함께 싸움을 하여 파출소를 간적도 있었고 여러 명에게 내가 몰매를 당할 때도 다른 이들은 모두다 도망을 가도 그 형만큼은 나를 감싸다가 깨트린 병에 눈을 맞아 병원신세를 진적도 있었어.
그렇게 성장 시기를 함께 보낸 친구 같은 형이었기에 참으로 많은 것을 주고받았었는데 이형과 내가 사이가 뜸해진 것은 모든 사회생활이 그렇듯이 돈이 관련된 일 때문이었어.
내가 이불사업을 처음 벌리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나에게 자신이 장사를 할 수 있게 얼마간의 이불을 밀어줄 것을 요청했고 그 당시 자금의 어려움을 겪고 있던 나에게는 그러한 여력이 없었기에 거절을 하게 되었으며 나에게 기대를 크게 했던 형인지라 실망 또한 컸던 거야.
나로서는 형에게 부탁을 받기 이전에 형의 친형이자 알코올중독으로 유명을 달리했다던 형에게 이미 내가 할 수 있는 범위 이상의 물품을 제공하고 있었고 시작단계에서부터 친구 녀석에게 손해를 보고 있었으며 그밖에도 사기꾼으로부터 막심한 손해를 보고 있었거든.
이러한 여러 가지 사건들을 얘기했지만 형을 이해시킬 수는 없었어.
나에게 실망을 한 형이 한번은 두문불출 하고 나를 만나지 않겠다고 하기도 했는데 이 같은 일로 인해 서울로 장사를 가게 되면 어김없이 형을 만나 함께 지내고 하루를 자고 오곤 했지만 별로 할 일도 없이 내가 그곳을 갔던 이유가 형의 비뚤어진 마음을 달래주려 했다는 것을 형은 모를 거라 여겨져.
어찌되었건 그러한 기억 때문에라도 언젠가는 형에게 도움을 주고자 했었던 것은 사실이었고 결국 이 같은 내 마음과는 달리 오히려 도움을 받아야 하는 신세가 되어있었던 거야.
처음 공장을 하는 것은 아니었고 형 역시 몇 번의 공장을 경영하다 실패를 보고 있었는데 내가 물품을 제공하길 거절하고 난 이후 자극을 받아서인지 뼈를 깎는 것 같은 노력 끝에 5년을 지내고 나니 1억이라는 돈을 모으게 되었다는 것이었어.
그러한 돈으로 시작을 하였던 만큼 남다른 각오가 있었던 거지.
나와 실타래처럼 엉킨 과거의 일들이 이형과의 일을 하게 만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내가 풀어야할 인과의 고리가 있었다면 그러한 일을 통해 매듭을 풀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함께 일을 하게 되었지 않았을까해.
내가 형과 공장을 차리기 전 함께 대구를 가게 되었고 차를 타고 다니면서 과거의 이러한 여러 가지 일에 대한 얘기를 했지만 형은 내 말을 제대로 들으려고 하지를 않더구나.
아무래도 그간에 나에게 섭섭했던 감정이 과거 내가 처해있던 사정을 말하는 것으로는 풀리지 않는 모양이었어.
그도 그럴 것이 나에게 복수를 하겠다는 일념으로 뼈를 깎는 노력을 기울였다고 했으니 그러한 강한 신념이 내 말 한마디에 바뀌기가 쉽지 않을 것은 당연하지 않겠니?
그래서 내가 이야기 하나를 해주었어.
이 이야기는 원래 프랑스에서 있었던 실화라고 하는데 내가 이 이야기를 본 것은 만화를 통해서였으니 원작과는 많은 거리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형이 겪어 나온 5년의 인고의 세월과 많이 닮은 것 같아서 말을 했던 거지.
프랑스의 어떤 부인이 파티에 초대되어 가게 되었는데 가난했던 관계로 몸에 장식할 목걸이가 변변한 것이 없었고 이러한 자신의 초라함을 남에게 보이기 싫었던지라 친하게 지내던 부자친구에게 가서 다이아목걸이를 하나 빌려 참석하게 되었다는 거야.
그런데 파티에서 그만 목걸이를 잃어버리고 말았어.
그러한 일이 일어난 후 자신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그와 같은 목걸이를 갚을 길이 없는 이 여인은 그 길로 이사를 하여 도망을 가버리고 말았고 10년의 세월동안을 숨어 지내며 그야말로 뼈를 깎는 고통을 겪으면서 노력한끝에 물질적인 성공을 이룬 후 다이아목걸이를 마련할 수 있었으며 다시 자신에게 목걸이를 빌려준 친구를 찾아갔던 거지.
자신이 그간에 목걸이를 돌려주지 못한 일에 사죄를 하면서 돌려주자 친구는 어처구니 없어하며 말하더래.
“아니!
왜 그렇게나 보이지 않는가? 했더니 그런 일이 있었구나.
진작 말을 하지 그랬어.
사실은 그 목걸이가 진짜가 아닌 가짜였어.”
이 말을 듣고 난 부인은 그 자리에서 지나간 인욕의 세월을 돌이키며 대성통곡을 하였고 결국 다이아목걸이를 그 부자부인에게 주었다는 거야.
자신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이 결국 그 가짜 목걸이에 있었던 만큼 성공 할 수 있게 만들어준 당사자가 가짜 목걸이의 주인이라는 거지.
아들아!
여기까지가 그 형에게 전해준 얘기였어.
형이 내이야기에서 무엇을 느낄 수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하고자 했던 말은 자신이 서운하게 여기는 상대라 해도 사실 실체를 보면 자신을 돕는 사람일수 있다는 말이었지.
내가 형을 돕지 않았다는 해석보다는 내가 서운한 것을 주었어도 그 서운함으로 말미암아 형이 1억이라는 돈을 모을 수 있었음을 자각하라는 뜻이었는데 말장난을 한다고 받아들이더구나.
만약 내가 어려움을 무릅쓰고 형을 도와주었다 해도 결과가 좋았을 것이라는 확신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그렇다고 좋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도 하지 못하겠지만 그 당시 여러 가지 여건이 우리가 그러한 결과를 만들어 내지 못했던 것이고 운명은 정확하게 우리가 이러한 연극을 하도록 만들었다는 것이 내 생각이었는데 형은 내 말을 이해를 못했던 거야.
이러한 결과가 우리가 받아들여야 하는 현실이 되었을 때 어떠한 해석이 나를 이롭게 할 것인가를 생각하라는 뜻으로 내가 말을 했지만 형의 굳어진 마음을 풀기에는 역부족이었지.
아마도 내가 형의 일을 도우면서 서로 간에 응어리진 마음을 풀어야 할 것 같았어.
어떻게 내가 이렇게 생각했냐고?
그것은 그 형이 그렇게 만들고 있었기 때문이었어.
너도 생각해보면 알 거야.
만약 네가 정말 보기 싫은 사람이 있다면 어떻게 할 것 같니?
다시는 보지 않겠다고?
그래!
내말이 바로 그 말이야.
그 형 역시 나에게 감정이 있다면 다시는 보지 않으면 될 것을 나를 찾아와서 도와달라고 부탁을 했던 것은 나에게 도움을 받아야겠다는 생각도 있으면서 나에게 복수를 하겠다는 심리가 깔려 있었던 거다 이 말이거든.
내가 표현을 이렇게 하니까 너무나 감정이 격해지는듯하지만 내가 말하고자 하는 복수심이라는 것이 누구를 해치려는 것에 국한된 말이라기보다 내가 잘되었다는 것을 과시하고자 하는 것을 말하는 거야.
형의 이 같은 마음을 내가 충분히 느끼고 있었고 내가 도울 수 있으면 도와야겠다는 생각역시 하고 있었던 터이어서 풀 것은 풀고 뒤늦게나마 도울 수 있게 된 것 역시 신의 뜻이라 받아들이기로 했어.
이렇게 시작된 형과의 일이 며칠인가 지났을 무렵 뜻하지 않은 소식이 내게 전해졌는데 내가 마지막 사활을 건다는 심정으로 갔던 대만 침구업계 사장님께서 연락이 온 거야.
미리 사람을 보내 나를 만나보고 능력과 환경을 알아보라는 지시를 하였다는데 통역을 만나보니 여자 분으로서 대만화교였는데 무역 일을 많이 해보신 베테랑이시더구나.
비 오는 날 이불보따리를 메고 간지 5개월만의 쾌거였는데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 들고 있었고 통역을 만나서는 솔직하게 내 처지를 말씀드렸어.
내가 과거에 이불공장경영은 해보았지만 큰 무역은 해본 적이 없다는 것과 대기업들 역시 수출업무를 하청공장에 맡기고 있는 만큼 하청업체들을 동원 할 수 있는 능력은 있노라 말씀 드렸더니 솔직한 내 말에 감동을 했다 시며 반드시 이번 일을 성공하도록 돕겠다고 하셨지.
형에게 이 같은 소식을 전하고 우리가 준비해야할 일들을 시작했는데 형의 공장에서 나오는 제품만으로는 외국바이어를 상대하는 것이 부족하다는 생각에 평소 내가 아는 업체들을 찾아가서 준비를 하였더니 마침내 내가 만났던 사장님 부부와 다른 업체의 사장님 이렇게 3분이 한국에 도착하셨어.
형과 인사를 시키고 함께 식사를 했는데 대만 분들을 데리고 오신 통역은 그럴 필요가 없다고 하는데도 불구하고 한사코 형이 계산을 하겠다고 우기더구나.
함께 배석한 통역은 아직까지 결정이 난 것도 아닌데 뭣 하러 돈을 쓰는가 하며 자신이 돈을 내면 저들이 모두 계산해준다고 하였지만 경험이 없기는 형이나 내가 모두 마찬가지여서 식사를 대접하였던 것이었고 형으로서는 내가 자신의 종업원으로 있는 이상 내가 모시고온 바이어라 해도 자신의 손님이라 여겼던 것 같았어.
하지만 형의 생각과는 달리 나또한 엄청난 손해를 봐가면서 이루어놓은 결과물인 만큼 이손님들이 내개인의 손님이라 여기고 있었기에 바이어를 만나는 자리에 형을 대동하지 않으려는 생각도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형 밑에 종업원으로 들어가 있었고 명색이 사장님인지라 함께하였던 거야.
이분들을 모시고 다음날부터 관광을 시켜드렸고 금산에 있는 인삼밭까지 가서 구경을 시켜드렸었는데 기분이 좋았던지 주문을 하자고 하시더구나.
그러나 막상 형의 공장을 들렀을 때는 이분들이 그다지 기분이 좋아 보이지 않았었는데 그곳에서 나오는 물건이 이분들 눈에 차지를 않았던 거야.
이미 이때 당시 대만에는 중국으로부터 들어오는 침구류가 넘치고 있었고 우리공장에서 제시하는 원단의 소재가 중국 제품에 비해서 그다지 차이가 나지 않는데 불구하고 가격이 너무나 높았던 거지.
장사경험이 부족했던 형이 너무나 가격을 높여 불렀고 내가 봤을 때도 터무니없이 높아진 가격이 그분들 눈에도 들지가않았거든.
결국 형이 제시한 제품은 모두 캔슬이 나버리고 내가 다른 업체에서 보여주었던 제품에 한해서 디자인을 바꾸어서 주문을 하였는데 그 액수가 한국 돈으로 무려1억 이상이나 되었지.
내가 혼자서 이익을 보는 듯 했기에 형에게 내가 맡은 주문을 형 공장에서 해주면 어떻겠는가? 했었고 내 생각으로는 형이 흔쾌히 승낙할 것이라 여기고 있었어.
나로서는 뜻밖의 횡재였고 형으로 봐서도 무척이나 좋은 일이라 여겼거든.
첫 거래에 이 같은 결실을 맺게 되는 경우는 없다는 말씀을 통역이 하지 않았더라도 꿈같은 일이 아닐 수 없었고 무모했던 대만행이 적어도 나에게는 기적 같은 일을 이루어 낸 것이 아닐 수 없었어.
다음날 이분들을 공항에 모셔드리는 자리에서 나에게 말씀하시길 참으로 고마웠다고 하면서 다른 업체들과는 통상 50~70%의 L/C를 오픈 하지만 나에게는 100%의 현찰을 입금하겠다는 약속까지 하였지.
이렇게 기분 좋게 보내드리고 돌아왔고 견본을 보내야 하는데 어쩐 일인지 형이 도저히 못하겠다는 것이었어.
자신의 공장에서 일을 하고 돈도 자신이 대면서 내가 가지는 이익이 너무 많고 자신의 이익이 너무 적다는 것이 그 이유였는데 참으로 답답하고 분통이 터질 지경이었어.
우선 이일을 성공리에 마쳐야 다음을 기약 할 수 있을 것이고 또 다른 이익창출이 따를 것인데 이같이 제동을 걸고 나오는 바람에 일이 틀어지고 있었던 거야.
나로서는 절체절명의 순간이 와있는 것인데 일이 틀어지게 생겼으니 속이 탈수밖에 없었고 어떻게든 일을 성사시키려는 욕심에 대구의 동수들에게 도움을 청하게 되었지만 뜻대로 되지를 않았고 결국 소문만 나고 말았어.
급기야 내가 이익을 물리고 형의 배분을 높여준 다음에야 견본을 보낼 수 있었는데 며칠이 지나서 보낸 견본을 받아본 대만 업체의 반응은 그야말로 냉담해져 있었지.
뒤늦게 사태를 파악한 형과 내가 합의를 해서 내가 대만을 직접 가기로 했고 바이어들을 직접 만나보았지만 우리가 견본을 지체하는 동안 이들이 중국본토에서 물품을 구입하기로 결정을 했고 내가 다시 이들과 거래를 하기위해서는 보다 저렴한 가격에 공급을 해야만 했는데 그 같은 가격에 공급을 한다면 우리에게 마진이 전혀 없어야 가능하였고 그럴 바에는 국내장사가 훨씬 낫다는 판단으로 소득도 없이 돌아와야만 했어.
한여름 이불견본을 들고 온 나를 무척이나 반겨주었고 나에게 신세를 졌다 생각했던지 대만에서 제일 유명한 식당을 데리고 가서 채식으로 된 요리를 실컷 대접 받는 것으로 만족해야만 했고 때마침 돌아올 비행기 표가 없어서 P사형 집에서 얼음물에 발을 담그고 3일을 꼼짝 않고 지냈더니 감기만 들려 돌아와야만 했지.
아들아!
여기까지가 무역에 관한 내 과거의 경험이었는데 L/C오픈을 눈앞에 두고 무산이 되어버린 이 같은 일이 내가 안타깝거나 아쉬워서 이 같은 말을 네게 하는 것은 아니며 내가 겪어 나온 이일로 네가 네 오촌 당숙이 되는 내형을 원망하라는 뜻이 아니라는 것을 네가 분명히 명심하기 바라.
언제나 내가 말하지만 이쪽 산의 풍경과 저쪽 산에 올라간 서울시내의 풍경이 다르듯이 내가 겪고 느낀 점과 형이 느낀 점이 다를 것은 분명하고 그런 관점이 다르기에 서로의 연극에 충실할 수 있었으므로 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연극을 통해 무엇을 얻을 수 있었나 하는 것임을 네가 인식하길 바라며 이장을 여기에서 마무리하고 다음에는 또다시 형과의 연극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살펴보도록 해.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