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가번드 2021. 11. 26. 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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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아!

요즘은 참 평화롭구나.

세상에서는 어제와 같이 오늘도 변함없이 시끄러운데 내가 머물고 있는 이곳은 시공이 멈춰버린 것 같아.

가끔 전화를 받게 되면 마음이 세상을 따라 춤을 추다가도 손에서 수화기가 떨어지는 순간 또다시 평화로움이 다가오거든.

이렇게 조용한 가운데 너와의 대화를 허락하신 신에게 감사를 드리며 오늘 또다시 아득해져 가는 기억을 더듬으며 생각의 날개를 펼쳐보자꾸나.

내가 무역사무실을 접고서 사촌형과 함께 일을 할 무렵, 2천년 밀레니엄 시대를 맞이하여 스승님의 전 세계 순회강연이 있었어.

99년의 마지막부터 시작해서 전 세계를 돌며 숨 가쁘게 강연을 하신 끝에 한국에서 그 마지막을 장식하게 되었고 먼저 코엑스에서 대규모 강연행사를 마친 후 국제선을 또다시 영동에서 열게 되었지.

마음속으로 스승님을 도와 영동선에 참석하고픈 마음이 있었지만 사무실을 닫고 난후 많은 금전적인 손해와 당장 해결해야 하는 민생고가 걱정인지라 들뜨는 마음을 억지로 가라앉히고 있었어.

강연이 있는 날 먼발치에서나마 스승님을 뵙고 싶어서 코엑스엘 갔지.

강연장을 들어가기도 전에 호주의 총 연락인 을 만나게 되었는데 무척이나 반갑더구나.

영어실력이 형편없는 나인지라 그다지 원활하게 대화는 못하였지만 마음으로 서로의 안부를 확인하고 있었어.

그 사형이 그곳에 온 것은 국제선에 참석하기 위해서 이기도 하고 세계 순회강연을 스승님과 함께한 뒤였기 때문인 것 같더구나.

몇 마디 안부 인사를 나누고 강연장을 들어섰는데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들어왔는지 만 명은 족히 넘을듯하였고 안으로 들어설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먼발치에서 스승님을 보며 속으로 생각을 했었지.

내 마음이 어떠하다는 것을 스승님께서 충분히 아실 터, 구태여 내가 작업팀이 되어 일을 하지 않더라도 이해하시리라 여겼고 강연장을 빠져 나와 집으로 향하고 있었는데 누군가 나를 아는 체 하였어.

뒤를 돌아보니 대만의 사저들이었는데 아마도 어디를 갈 모양으로 나에게 부탁을 하는 거야.

영어로 뭐라 하는데 센터를 가는가 묻는 것 같았고 마침 스님 한 분을 센터로 태워드리려고 했기에 함께 태워주려 타라고 했지.

한참을 가다 보니 뭔가 낌새가 이상했던지 대만 사저 한분이 다시 묻는 것이 아니겠니.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하기에 서울센터엘 간다 했더니 자신들이 가고자 하는 곳은 서울 센터가 아니라 영동센터를 간다고 하는 것이었어.

그냥 센터라고 하기에 무심코 오케이를 했던 것인데 그야말로 난감한일이 아닐 수 없었지.

그때 시간이 꽤 늦었기 때문에 그 시간에 다녀온다는 것은 사실상 무리였지만 그렇다고 외국에서 오신 분들을 내버려둘 수도 없었고 서로가 의사전달이 잘못되어서 일어난 일이기도 하여 내가 하루 잠을 자지 않는다 해도 이 같은 일로 봉사를 할 수 있다면 이 또한 좋은 일이다 싶어 가기로 작정을 했어.

아들아!

그때 당시만 해도 네가 어렸기 때문에 너 혼자 밤을 지내도록 내버려 둔다는 것은 마음이 편치 않을 때 이었거든.

내가 교도소 있을 때 가장 가슴 아팠던 일이 밤일을 하는 네 엄마가 새벽에 올 때까지 네가 혼자서 잠을 자야 했던 일이었어.

옥탑 방에서 살다 보니 겨울날 바람이 심할 때면 바람소리가 무서워 네 엄마에게 전화를 하는 통에 가슴 아프다는 편지를 받아 보고 내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지.

그러한 터라 사촌형에게 부탁을 하고 일주일정도 휴가를 받고서라도 선에 참여하고 싶었던 마음을 눌렀던 거야.

그러한 내 마음을 조금이라도 보상 받을 수 있는 기회라고 여겼기에 밤늦은 시간 140키로가 넘는 속도로 달려갔던 거지.

이불을 실어놓은 봉고승합차를 몰고 다녀오고 나니 카메라 단속에 무려 4번을 걸렸더구나.

갈 때 두 번 올 때 두 번

다음날 출근을 하고 보니 차안에 검은 비닐봉투가 보이는 것 같기에 열어보니 채식 햄 두개가 들어있었어.

아마 대만 사저들이 고마운 마음의 표시로 두고 내린 모양이야.

아주 비싼 햄을 먹게 된 샘이었지만 속으로 기분이 아주 좋았고 비록 내가 직접 참여하여 행사를 돕지는 못했지만 그나마 그런 일이라도 할 수 있었다는 것이 마음의 위안이 되고 있었어.

나를 따라와서 태워 달라 했던 대만 사저들이 98년 영동선 때도 왔던지라 그 당시 내가 워킹팀 이었다는 것을 알아보았던 거야.

솔직히 그 당시 내가 국제선을 참석하지 않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내 마음의 변화 때문이었던 것 같아.

너 때문이었다는 것도 하나의 핑계를 내가 정당화 시킨 것에 불과하거든.

왜냐 하는 것은 98년으로 거슬러 가보면 알게 돼.

그때 역시 선이 있었고 가족들이 있었지만 그때는 가족들조차 내 마음에서 떠나있었어.

아들아!

너는 아마 내 말에 적잖이 실망을 하겠지만 솔직히 그때당시는 그랬어.

신으로 향한 나의 여정이 가족들로부터 방해를 받아서는 안 된다 생각을 했고 아브라함이 이삭을 묶어놓고 제사를 드리는 심정으로 가족들을 버리기로 마음먹었었거든.

출가를 하겠다는 마음이 워낙 강했기 때문에 가족들이 모두 방해물로 여겨지고 있었지.

그랬던 내가 98년 영동선을 경험하면서 출가의 환상을 깨버렸던 거였고 교도소를 다녀오게 되면서 인식의 변화가 무척이나 많이 이루어지고 있었어.

그런 과거가 있었던 나이기에 얼마든지 출가를 할 수도 있었고 언제든지 마음만 먹으면 현실로부터 멀어질 수도 있었지.

그런데 불구하고 내가 너를 핑계로 가지 않았던 것은 더 이상 그런 일들이 내게 필요하지 않다는 생각 때문이었던 거야.

그리고 이런 생각을 하도록 만들어준 여러 가지 주변 여건들 때문이기도 하고…….

사실 선행사가 있기 전 물품구입담당을 책임지고 계시는 스님으로부터 소식을 들어 알고 있었고 함께 일해주길 요청 받기도 했지만 그분을 모시고 다니면서 내가 느낀 점은 더 이상 그분들과 연극을 하고 싶지 않았어.

도무지 현실감각이라고는 결여된 분들과 더 이상 함께 일을 할 수 없었던 거지.

그 스님 말로는 수행이 높아지면 오신채를 먹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스스로 알게 된다는 것이었는데 그 말이 내게는 무척이나 걸리고 있었던 거야.

과거 98년 함께 일을 할 때도 느꼈던 점이었지만 자신들은 스승님으로부터 특별한 선택을 받았다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일들이 나에게는 에고로 비춰졌기 때문에 출가에 대한 환상을 버릴 수 있었던 것인데 2천년역시 그러한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어.

물론 나 역시 마늘을 크게 좋아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채식이 아닌 것도 아니고 스승님께서 먹지 말라고 지시하신 것도 아닌 것을 그렇게나 분별을 한다는 것이 못마땅하기 이를 데 없었거든.

게다가 물품을 고르는 것조차도 자신의 고집대로만 하려고 하는데 내가 구태여 나설 필요가 없을 것 같더구나.

그래서 내가 설자리는 아니라는 판단을 하게 된 거였는데 나중에 H사형이 서울로 직접 올라와서 내게 한탄을 하였어.

잠시 자신의 일을 접어두고 선에 참여하여 스승님을 돕는 일을 하고 있던 사형이 서울로 올라온 것은 순전히 나를 설득하기 위해서였지.

98년 한 팀이 되어 움직였던 사형인지라 2 천년에는 그때와 같은 순발력이나 모든 일들이 원할 하지 않다는 것이었고 한 달 월급을 자신이 줄 테니 함께 영동을 내려가자는 것이었어.

그러한 사형의 말에도 내 마음은 요지부동이었던 거야.

이제는 다른 이들도 그런 역할을 해봐야 한다는 말로서 정중하게 뿌리쳤었는데 훗날 들어보니 몇 가지 문제점은 있었던 것 같더구나.

그 대표적인 예가 인삼 구입 건 이었는데 무척이나 실망스러운 일이었어.

내가 소개 시켜 주었던 인삼거래처를 가지 않고 다른 곳을 갔다고 하였는데 뭘 몰라도 한참을 모르는 일을 저질러놓고서 그 당시 책임을 맡았던 분이 나에게 자랑을 하는 거야.

내가 아는 곳보다 훨씬 싸게 파는 곳에서 인삼을 샀다고 하였는데 어처구니가 없었지.

인삼이라는 것이 금산에서 산다고 해서 모두 금산 것이 아니고 외지산도 있고 심지어 중국산도 판을 친다는 것이 오늘날 인삼시장의 현실인데 불구하고 싸게 산 것을 자랑 삼는다는 자체가 한심스러운 짓이 아니겠냐 말이야.

옛말에 이런 말이 있어.

 

물건을 모르면 돈을 많이 주라

 

아들아!

이것은 진리라는 것을 네가 명심하고 이 세상을 살아가길 바라.

나 역시 가끔은 물건 값을 깎기도 하지만 물건을 보고 사야지 가격을 보고 물품을 골라서는 안 되는 법이거든.

똑 같은 물건이 너무 싸다면 반드시 물품에 하자가 있기 마련이라는 것은 철칙이 아니겠니.

또한 물품을 시세보다 싸게 구입했으므로 그 차액은 자신 것이라 여기고 자신이 챙겼다면 그것은 형태를 달리한 또 하나의 도적질이라는 것이 내 개인의 생각이야.

지금도 말하지만 98년 선행사를 끝내고 센터를 걸어 나올 때 십 원 한 푼 센터 돈을 가져오지 않았고 내 개인의 돈을 되레 쓰고 나왔었어.

우리가 신의 일을 한다고 여기고 신을 스승으로 삼고 있다면 내 스스로의 행동과 마음가짐을 거기에 걸맞게 가질 줄 알아야 하지 않겠니.

그 당시 우리는 신을 위한 일을 한다고 생각했었기에 일반인들이 생각하고 있는 생각을 몇 배 뛰어넘는 자신의 성찰을 가졌어야 했어.

내가 지금 이런 말을 한다고 해서 내가 어떤 사람의 어떤 행위가 잘못되었다는 증거를 가진 것은 아니야.

하지만 누군가의 입에서 그러한 말들이 나온다는 것은 분명히 그러한 생각이라도 있었다는 것이 아니겠냐는 것이고 거기에 따른 내 개인의 생각을 말하는 것뿐이야.

하지만 아들아!

이러한 생각도 그때의 생각 일뿐 지금의 내 생각은 아니거든.

지금은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그 누구의 어떤 행동도 필요 없는 것은 아니라고 했고 있는 그대로의 완벽을 얘기했는데 또 무슨 설명이 필요하겠니.

누군가 도둑질을 한다 해도 이유가 있고 그 일로 인해 서로가 얻어야할 무엇이 있다고 했던 것처럼 이러한 선행사 일을 통해서도 얻어야할 무엇이 있는 사람들이 그러한 행위를 했을 뿐이라 여기기 때문에 내가 문제 삼을 것은 전혀 없고 다만 그러한 일을 통해 얻기 위해 당해야 하는 교육적인 면은 행위당사자가 고스란히 받을 것이라는 것이 지금의 내 생각이야.

그리고 또 하나 내가 그곳에 가서 봉사할 기회를 포기했던 이유는 봉사라는 것이 꼭 그런 자리에서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 때문이었어.

스승님의 가르침과 같이 나 자신의 몸이 이세상의 부정적인 기운을 태우는 용광로처럼, 또는 빛을 뿜어내는 반사경처럼 만들어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선행사를 참여하여 봉사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었지.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느냐고?

그거야 항시 지혜안에 집중을 하고 신, , 의를 깨끗이 하면 되는 것이 아니겠니.

백회를 통해 끊임없이 들어오는 에너지의 흐름을 느끼면서 항시 좋은 생각과 좋은 말, 행동을 한다면 그야말로 세상을 이롭게 하는 일이 아닌가해.

증거가 있냐고?

그런 증거를 해서 뭐하게?

누가 인증 하냐고?

누구 인정은 뭐 하러?

아들아!

진정 네가 어떤 일을 하고 싶다면 그 일을 의식하지 말고 하길 바라.

마치 하늘의 태양처럼 묵묵히 빛을 뿌리는 존재가 되렴.

누군가 나의 선행을 봐주지 않는가 하는 마음보다는 자신이 스스로 하고 싶어 선행을 할 때 그야말로 대 자유를 얻을 수 있는 거야.

이러한 사실을 우리주변에서 얼마든지 불수 있지 않니.

무대에선 가수가 자신의 감정에 충실해서 관객을 의식하지 않고 노래에 심취할 때 관중들은 열광하는 것과 같은 이치야.

그때당시 내가 선행사를 참석하지 않은 변명을 너무 장황하게 늘어놓는 것 같지만 사실은 내 마음 역시 선 행사를 참석해야 한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야.

다만 내 주변 환경과 여건들이 내가 참석해야 하는 이유보다 하지 않아야 하는 더 많은 이유를 제공하고 있었던 것이고 그것을 사실로 내가 인정한 탓이었지.

모르긴 해도 내가 참석하지 않았어야 하는 이유가 반드시 있었을 거라 생각해.

그 당시 내인식의 변화에 따라 선행사를 참석하지는 않았어도 스승님을 만나 뵙고 싶은 마음은 들더구나.

그래서 일반인들도 들어갈 수 있게 허가된 마지막 날, 휴일이라 새벽 일찍 영동을 내려갔고 공연 중인 스승님을 멀찍이 서 볼 수 있었는데 마음속으로 작별 인사를 하고 돌아서 서울로 향했어.

아들아!

이때당시 내 삶이 너무나 힘이 들었기에 동수들을 만나면 항시 내가 시끄러웠던 것 같아.

만약 내가 모든 문제점을 바깥에서 찾았다면 벌써 단체로부터 멀어졌을 테지만 어디까지나 모든 문제점들은 내안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으므로 이러한 점을 나 자신에게 심어주기 위해서 안간힘을 썼기에 그토록 시끄럽게 떠들었던 거야.

그러했기 때문에 동수들과 모이는 자리에서 그러한 생각을 항시 말을 해야 했고 흐트러지려는 나 자신을 다시금 다잡아야 했던 거지.

많은 동수들이 이런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면서 관객이 되어주었어.

숱한 말을 많이 했지만 어디까지나 듣는 이는 동수들보다 나였거든.

내가 말을 하고 그 말을 내가 듣고 있었던 거야.

이 말을 네가 얼마나 이해하려나 모르겠지만 언제나 말을 하는 당사자가 그러한 말이 자신을 위해 필요한 것이기 때문에 하는 것이라는 것을 이해하는 것도 결코 쉽지가 않아.

언젠가 네가 아하~ 하는 날이 올 거라 생각하니 지금은 그다지 깊게 생각할 필요는 없어.

선행사를 마치고 나서도 끊임없는 내 인생의 굴곡은 계속되어졌는데 앞에서 말했던 고통스러운 시간들이 지속되는 것과 때를 같이하여 J사형이 찾아왔었지.

함께 채식 햄을 팔다가 서로가 여정을 달리한지 몇 달만 이었는데 말도 못하게 시커멓게 된 얼굴로 나타났더구나.

얼마나 고생이 심했나 하는 것은 굳이 들어보지 않고 그 모습만 보고서도 충분히 알 수가 있었고 내가 유일하게 만들 줄 아는 자장면을 너무나 맛있게 먹는 모습에서 그간의 고충이 나타나고 있었어.

채식 햄을 팔기위해 일어난 일을 지난번 잠시 언급했었기에 다시 말할 필요는 없겠지만 내가 사형의 일을 다시 떠올리게 된 것은 사형으로 인해 내 인생이 획기적인 변환 점을 맞이했기 때문이야.

내게 그렇게 힘들어 보이는 모습을 보여 준지 불과 몇 달이 지나지 않아 내게 들려온 전화한통은 그야말로 놀라운 것이었지.

그 사형이 죽었다는 소식이었는데 믿어지지는 않았지만 진정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어.

나이도 어린데다가 그렇게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 실감이 가질 않아서 여기 저기 확인을 해보았더니 죽었다는 것이 아니라 죽게 되었다는 것이었고 다시 살아날 가망성이 없어 보이기 때문에 죽었다는 말까지 낫던 거야.

뇌 세포성 결핵이라고 들었던 것 같았는데 자세히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무진장 어려운 병명이었던 것은 틀림이 없었던 것 같고 어려운 병명만큼 치료역시 어려운 모양이더구나.

이렇게 죽다가 다시 회생한 사형이 선택한 길은 부산센터의 총무직 이었고 한동안은 기척도 없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는데 사형이 그러한 일을 겪는 동안 나는 앞에서도 말했다시피 죽을 고생 중이었으며 거기에 호응이라도 하듯이 전국 센터에도 대단히 중대한 일이 발생되었어.

00마마 사건이 터져 나왔는데 앞에서도 간간히 보아왔듯이 누군가 깨달았다고 해서 동수들이 떠나거나 타단체가 좋다는 소리를 듣고 옮겨가는 것을 수없이 경험했고 어떤 동수는 스스로 깨달았다 말하는 바람에 센터 동수들로부터 지탄을 받기도 하는 등의 숱한 사건들이 있어왔는데 이번 일은 오래된 동수들을 중심으로 일어난 일종의 내부 반란이었지.

남아프리카 공화국 선행사 때 대만의 전 연락인의 부인이 자신이 깨달았다고 주장하면서 스승님께서 높은 법문을 수준이 높은 동수들에게 따로 전수를 한다고 하여 한국의 번역 팀에게 말을 해주었다는 거야.

번역 팀의 일원 중 한분이 평상시 알고 지내던 사이라 이 같은 말을 듣고 솔깃했고 처음에는 이 같은 일을 아주 비밀리에 장주자들 일부에게만 전해 오다가 어느 날인가 출판 팀의 책임자에게 들켜버린 것이었고 그간에 법을 전해 받지 않고 있던 사람들 때문에 문제시 되었던 거였어.

내가 이 같은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순전히 H사형 때문이었는데 밤늦은 시간 서울로 올라와서 연락을 해 왔기에 오랜만에 차나 한잔 하려고 갔었고 그 같은 사건의 진상을 들을 수 있었던 거야.

그런데 아들아!

이 같은 일이 일어나는 것이 처음에는 조금도 이상하게 생각이 들지 않았어.

왜냐고?

스승님께서 법을 펼치시길 85년인가 86년인가 이었으니 20년 세월에 제자들이 하나도 못 깨달았다면 그야말로 이상한 노릇이 아니겠냐 말이야.

당연히 수없이 많은 이들이 깨달음을 얻어야 마땅한 일이고 스승님이 위대하기 위해서라도 높은 깨달음을 얻으신 분들이 나오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말이지.

오히려 박수를 쳐주어야 한다고 여기고 있었고 별로 문제될 것이 없다는 것이 내 개인의 생각이었어.

그런데 그 같은 내 생각이 달라지는 일이 발생이 되었는데 그들이 취한 행동들이 문제가 되고 있더구나.

입문한지 5년 이상이 된 동수들 중에 그것도 하루 명상을 5시간 이상을 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해서 포섭활동을 전개한다는 소식이었는데 그야말로 야단이 아닐 수 없었지.

전혀 관심 밖이던 일이 내 일로서 받아들여진 데는 그들이 주장하는 바가 예사롭지 않았기 때문이었어.

스승님께서 말씀하시는 것과는 상당히 다른 수행법을 말하고 있는 것 같았고 관음과 관광의 비율을 무시하는 것 까지는 그럴 수 있다 하여도 고기를 먹어야 한다는 데는 뭔가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 들더구나.

중생의 업장을 받아주기 위해서 당연히 고기를 먹어 주어야 한다는 얘기였는데 참으로 지당한 것 같았지만 자기모순이 있는 발상이었지.

만약 그들이 주장하는 바대로 동물이 중생이고 그들의 업장을 우리 인간들이 들어 주어야 한다면 왜 먹는 짐승과 못 먹는 짐승을 구분하는지 물어보고 싶더구나.

그리고 보다 결정적인 일은 만약 자신이 깨달아서 일가를 이루었다면 그것은 축하를 받아야 할일이지만 먼저 모시고 있던 스승의 제자를 빼간다는 것은 인간적인 측면을 봐도 그렇고 깨달은 분이 취해야할 행동은 아닌 것 같았거든.

나 자신의 고통스러운 순간을 무릅쓰고 뭔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여러 가지의 모순점 때문이었고 그간에 내가 스승님으로 받은 많은 사랑에 대한 보답을 해야 한다고 여겼기 때문이었지.

다음날부터 몇 사람이 모여서 대책회의 라는 것을 하게 되었어.

치 의원을 하고 계시던 Y사형의 사무실에서 칠판에 조목조목 적어가면서 회의를 해본결과 만약에 그들이 센터를 접수하려고 마음만 먹는다면 한순간에 법적인 권리자체까지도 넘어 갈수 있는 문제인 것 같았고 설사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상당히 골치 아픈 일이 발생될 수 있는 일이더구나.

그런데 이 같은 우리의 연구(?)결과와는 달리 연락인 들은 의견을 달리했는데 무조건 국외조의 연락을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 아니겠니.

어찌 보면 체계적인 지휘계통이 짜여 있는 만큼 그 말도 일리가 있는 듯 했으나 그렇게 마음 놓고 기다릴 문제는 아니었어.

그렇게 우리가 연락을 기다리는 중에도 수없이 많은 동수들이 그쪽 사람들과의 접촉으로 넘어가고 있었고 물밑 접촉으로 대만으로 건너가서 입문이란 것을 하고 있었거든.

사태가 이런데도 연락인 들은 이 같은 사실을 동수들에게 알리는 것을 주저하고 있었는데 그 이유라는 것이 황당하기 이를 데 없었지.

마음이 변심한 분들이 다시 돌아올 수 있게 문을 열어 두어야 한다는 거야.

한마디로 이 같은 사실을 알리게 되었을 경우 한순간 마음을 잘못 먹은 이들이 돌아올 길이 없어져 버린다는 것이었는데 사태를 제대로 파악한 것인지 도무지 모를 지경이었어.

둑이 터져 쏟아져 내린 물을 퍼 담을 생각을 먼저 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말이야.

흘러내리고 있는 자리부터 메우고 나서 쏟아진 물 걱정을 해야 할 터인데 선후를 몰라도 한참을 모르는 처사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 길로 P사형과 내가 대구로 향하게 되었지.

내가 대구로 향했던 가장 큰이유가 대구에 계시는 K스님을 만나 뵙기 위함이었어.

수십 년을 얼음만 드시고 살아가신다는 그 스님을 만나기로 한 것이 꼭 그 사건을 말하기 위함보다는 그 스님역시 많은 동수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것을 넘어서서 하나의 파를 형성시키다시피 한 사실 때문이었는데 안 그래도 시끄러운 센터를 진정시켜주시는 의미에서 자중해 주실 것을 부탁드리기 위함이었어.

솔직히 그 스님에 대한 동수들 시선이 곱지가 않았고 많은 추종자들이 생긴 만큼 시끄러웠거든.

그러한 일이 스님 때문이 아니었고 스님을 따르는 동수들 탓이라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지만 큰 어른으로서 동수들을 자제 시켜 주실 것을 부탁드리러 갔던 거야.

그런데 정작 찾아뵙고 보니 내가 말씀 드리지 않아도 알고 계신다는 듯이 자신에 대해서는 걱정을 말라는 것이었고 오히려 센터에 대한 걱정을 하시더구나.

지금까지의 어떤 사건보다도 위험하다시면서 자신이 있는 대구센터는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하셨지.

그렇게 말씀하시는 바람에 더 이상 말씀을 드릴수도 없었고 몇 가지 수행상의 의견만 주고받고 돌아섰어.

그 수행상의 의견이 무엇이었냐고?

그것은 말이야.

관광과 관음이 사실은 둘이 아니라는 것이었지.

구태여 구분을 한다면 떡이나 송편의 차이라고 하셨어.

평상시의 내 의견을 말씀드렸을 뿐이었는데 그 스님의 생각과 일치가 되었고 더 말하고자 해도 말할 것이 없었기에 다시 대구센터로 향했던 거야.

그런데 아들아!

내가 그렇게 돌아왔다고 해서 그분이 문제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어.

그분이 깨달음을 얻었다는 소문이 나자 동수들이 몰려가서 질문도 하고 공부에 도움이 되는 말을 청해 듣기도 했던 것인데 그것이 정도가 지나치고 있었거든.

그분이 살아가시는 삶의 형태를 보아도 알 수 있고 80평생을 도를 닦으신 분이 얼마나 많은 것을 득 하였겠냐 만은 어디까지나 센터는 스승님을 모시는 동수들의 장소로서 활용이 되어야 하고 스승님께 가르침을 구하는 장소로 쓰여야 한다고 생각했어.

스님께 삼배를 하던 스승으로 모시던 그것을 내가 개인적으로 나무랄 이유나 비난할 어떠한 이유도 없지만 그러한 행동을 하고 싶다면 센터를 떠나서 해야 한다 이런 말이었지.

00마마가 되었던 스님이던 그 어떤 경우라도 이 같은 원칙은 지켜져야 하지 않겠어?

그 같은 행위야말로 남의 집에 들어가서 주인행세를 하는 것이나 뭐가 다른가? 이 말이거든.

가끔씩 보면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돌아다니는 많은 동수들을 볼 수 있는데 참으로 한심스러울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어.

스승님께서도 대만에 계실 때 말씀을 하셨지만 센터근처를 어슬렁거리면서 돌아다니지 말라고 하셨고 눈물로서 호소를 하셨지.

배우고자 한다면 철저히 배우던가 아니면 떠나야 해.

그렇게 여기저기를 다녀봐야 자신에게 조금도 이익이 되지 않을뿐더러 남에게도 많은 피해만 주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하고 꼭 이곳저곳을 기웃거리고 싶으면 남들이 알아채지 못하게 조용하게 자신만이 해야 할 것이라 여겨졌지.

아들아!

수행의 욕심으로 우리들은 얼마든지 이곳저곳을 다닐 수 있어.

그렇지만 두 마리의 토끼를 쫒다 모두 다 놓치는 것보다 한 마리의 토끼를 집중적으로 쫒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라는 것을 알아야해.

혹 누군가는 다른 이들은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는 행위를 보고 자신들도 따라가는 것을 볼 수가 있는데 그래서는 곤란하지 않겠어?

남들이 어떠한 행위를 하더라도 그들의 문제 일뿐 결코 내가 그들을 닮거나 따라 행동해야할 어떤 이유도 없는 거야.

이 같은 내 생각도 그 당시의 생각이었을 뿐이란 것을 말하며 다음에는 대구센터를 간 내게 어떤 일이 있게 되나 알아보도록 하고 오늘은 여기에서 쉬어가도록 해.

오늘도 변함없이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