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아!(75)
아들아!
오늘은 모처럼 시장엘 갔어.
한국의 시골장과 같은 곳을 가게 되었는데 갈 때마다 느끼는 점이지만 사람이 살아가는 참모습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을 주더구나.
아침 일찍 버스를 타고 운동 삼아 갔는데 물건을 사면서 과거 내가 살아온 경험을 또 한 번 떠올리게 되었지.
좌판에 널브러져 놓인 각종 농산물을 팔러 나온 분들 모두가 손수 농사지은 것들을 직접 판매하기 위해 새벽부터 준비해서 나오신 것인데 몇 십 원을 벌겠다고 추운 날씨를 아랑곳 않고 서계신 모습을 보면서 감히 깎을 엄두를 내지 못했어.
불과 그리 멀지 않은 세월의 내과거가 그곳에 있었지.
내가 처음 서문시장 이불가게 점원생활을 시작할 때만 해도 밍크이불을 리어카에 싣고 다니며 월부장사를 하시던 분들이 많았어.
지금은 누가 밍크이불을 월부로 사겠냐만 그 당시만 해도 밍크이불 이라 하면 하나의 살림 장만에 속했거든.
그때 밍크이불 좋은 것이 3만원 정도였는데 지금도 밍크이불이 그 정도가격이면 살 수 있으니 세월을 대비해보면 충분히 이해가 갈 거야.
지금은 교통이 발달되어 웬만하면 대도시로 나와서 사버리는 통에 시골 장들이 자꾸 사라져가고 보따리를 머리에 이고 집집마다 다니면서 물건을 파는 사람들은 아예 없어졌지만 80년대 초만 해도 시골로 월부이불 장사를 하시는 분들이 더러 있었지.
사실 큰 사업이라 해도 형태와 규모만 달라졌을 뿐 그 행위자체를 놓고 보면 모두가 같아.
예전에는 사는 곳에서 나는 물건을 가지고 먼 길을 걸어 장이 서는 곳을 가서 물물교환을 하며 살다가 사람들이 편리한 물건을 자꾸 만들고 그 물건을 구하려는 인간의 욕구로 인해 상업이 발달되었고 그러한 행위를 원활히 하기위한 도구들을 개발하였던 것이 오늘날의 세상이 생기게 된 거야.
사람들은 장사를 하는 행위의 범위가 커고 돈이 오가는 액수가 많은 것을 하려고 기를 쓰고 있고 그 같은 일을 잘하는 것을 두고 출세했다고 말하는 거지.
그 같은 일이 워낙 만연하다 보니 이 세상 어떤 행위도 금전과 관련이 되지 않는 일이 없어.
혹 너는 학교 선생님들이나 공무원들은 그렇지 않다고 할지 모르겠지만 그 또한 내면으로 들어가 보면 별다를 바 없다는 것을 알 수가 있는 거야.
우선 선생님들을 볼라치면 책과 공책 등의 학용품을 이용해서 아이들을 가르치니 학용품을 파는데 관련이 있을 것이고 아이들이 커서 장사를 잘할 수 있는 방법들을 가르치니까 엄밀히 따지면 잘 먹고 잘사는 방법을 가르친다는 말이거든.
다시 말해서 황금만능주의에 아주 잘 적응하고 살아 갈수 있도록 만드는 일을 한다는 말이야.
공무원들 역시도 그와 같은 이치로 보면 한 치의 벗어남도 없음은 물론이겠지.
세상을 살아가자면 그러한 행위를 하지 않고는 살아갈 도리가 없으니 그러한 행위를 비난 할 수도 없어.
나 역시 그러한 범주에 속하기는 마찬가지였고 사회의 첫발을 장사로 시작하였으니 이 세상에 아주 잘 적응하고 있었다고 봐야 할 거야.
그런데 이와 같은 행위를 하다 보니 여러 가지의 모순점을 발견하게 되더구나.
이불가게에서 처음장사를 경험하고 다음으로 내가 옮겨간 곳은 여성들 옷을 파는 곳이었는데 어느 날인가 아가씨 둘이서 청바지를 사러 왔지 않겠니.
그때만 해도 옷은 처음 팔아보았고 대구 중심가에 위치한 교동이라는 곳에서 청바지를 팔고 있다는 소리만 들었던지라 가격이 얼마나 하는지 알 수가 없었으니 대충 짐작으로 팔게 되었는데 1.800원의 도매가격의 청바지를 무려 7천원을 받았던 거야.
그날따라 주인아주머니가 가게에 없었던 관계로 내가 팔게 되었고 그 같은 가격으로 청바지를 판사실을 알게 된 주인아주머니께서는 무척이나 놀라워 하셨는데 너무 많이 받았다는 것이었지.
나야 많이만 받으면 그만이라는 생각이었으나 수많은 세월이 흘러가는 동안 내가 경험을 해보니 주인아주머니의 말씀을 이해하게 되었어.
그날 이후로도 여기저기 가게를 옮겨 다니면서 점원 생활을 하게 되었는데 그때마다 느낀 점은 거짓말을 하지 않고는 장사를 할 수가 없다는 것을 느끼게 되더구나.
가령 남자들 옷을 팔게 될 때도 사러 오시는 손님들이 옷이 면인가를 물으시는데 솔직하게 말씀 드리면 백이면 백, 사지 않고 다들 가버리는 거야.
시간이 많이 지난다음에서야 사람들은 모두가 면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면이 아니면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과 자신이 면인지 아닌지도 모른다는 사실까지도 알게 되었어.
게다가 그런 면제품을 아주 싸게 사고 싶어 한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으며 속으로 미심쩍어 하면서도 일단 파는 사람 입에서 면이라는 말을 듣고 싶어 한다는 사실까지도 알게 되더라는 거지.
마치 바람피운 남편의 입에서 절대로 바람피운 사실이 없다는 거짓말을 듣고 싶어 하는 여인네의 마음과 마찬가지며 혹 바람을 피운 일이 사실로 드러나더라도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은 오로지 당신뿐이라는 말을 듣고 싶어 하는 심리와 같은 거야.
그런데 이러한 사람들의 심리를 파악 하는 것 까지는 좋았지만 내가 알고 있는 또 하나의 사실과 현실과의 괴리감 때문에 고민을 해야 했는데 어린 시절부터 줄기차게 들어왔고 성장해서 성당을 다니면서 십계명에 나오는 거짓말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내양심의 소리였어.
이러한 내 양심을 지킨다고 말한다는 것이 “그렇다고 들었습니다.” 이거나 “그렇다고 하더군요” 이었지.
기껏 내가 물품을 팔면서 한다는 말이 “면이라고 하던데요” 거나 “면이라고 들었어요” 였다 는 말이거든.
게다가 한술 더 떠서 “진짜 면이라면 이처럼 싸겠습니까?” 이었는데 이처럼 말을 해서 다행히 사가면 별문제가 안 되지만 사지 않게 되면 월급을 받아먹는 사람으로서 주인에게 면목이 없어지더라는 말이야.
될 수 있으면 양심에 어긋남이 없이 장사를 하려고 했지만 가끔씩은 나도 거짓말을 하게 되었고 그때마다 마음이 편치가 않았어.
이러한 일은 비단 섬유계통에서만 일어나는 일은 아니더구나.
내가 하던 장사를 이종사촌형에게 물려주고 보다 안정적인 장사를 하겠다고 생각하고 가스 대리점을 개업했을 때도 역시 그랬지.
음주운전으로 사고를 내고 면허가 취소되는 바람에 어차피 이 기회에 전업을 하자 싶어서 가스 집을 열게 되었는데 그 일도 거짓말을 해야 했던 거야.
우선 첫 번째로 들 수 있었던 것이 가스통 앞에 설치되어진 조절기였는데 그 조절기가 사실은 거의 영구적인데 불구하고 배달하는 젊은 친구들이 뾰쪽한 톱을 들고 다니며 일부러 구멍을 내고 갈아야 한다고 겁을 주어서 팔아먹곤 하였어.
그 같은 일이 생기게 된 것은 배달하는 사람들에게 조절기를 하나 갈면 수당을 지급하기 때문이었는데 사장 몰래 조절기를 파는 행위를 막기 위한 방편으로 그러한 제도를 만들었기 때문이었지.
이뿐 아니라 겨울철에 바깥에 위치한 가스통의 경우는 가스의 특성상 기온이 내려가면 가스가 원활하게 분출이 되지 않는데 이 같은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은 가스가 떨어진 줄 알고 주문을 하게 되거든.
이럴 때면 사실을 상세히 말해주고 가스통을 보온제로 덮으라고 말해주어야 하는데 이렇게 말해주는 사람이 거의 없어.
대부분 말없이 가스만 갈아주고 와버리게 되는데 그 같은 이유는 배달을 갔다 허탕을 치게 되면 손해가 따르기 때문이야.
물론 나야 이런 일들을 전혀 못하게 했고 나중에는 이런저런 이유로 동업관계가 깨어졌지만 좋은 경험을 하게 되었지.
이와 같이 내가 배우고 실천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삶의 형태와 내가 현실에서 부대끼며 살아가야 하는 삶에는 너무나 많은 괴리감이 존재하였어.
비단 이뿐만이 아니었지.
내가 가스가게 조차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네 엄마가 하는 피아노 교습소의 한쪽 방에서 비디오를 빌려보며 시간을 쪼개고 있을 무렵 네 외할아버지의 권유로 포클레인을 할 때도 마찬가지의 괴리감을 느껴야 했어.
그때 당시 포클레인을 5대를 소유하고 있으면서 대여업을 하고 있던 네 외할아버지의 외사촌동생을 소개 받고 부산현장을 찾아갔을 때 이었지.
공사장의 자욱한 먼지를 헤치며 산언덕을 올랐을 때 포클레인을 작동하고 있던 처당숙이 내려 오셨는데 나이가 어린데도 불구하고 사장의 포스가 느껴지고 있더구나.
그때만 해도 흔치 않은 휴대전화를 손에 들고 통화를 하는 폼이 멋있어 보이기까지 했는데 나를 보더니 무척이나 반가워하였어.
이분으로서는 나처럼 자신을 대신해서 부속을 사다 나르고 직원들을 관리해줄 사람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던지라 나를 반길 수밖에 없었던 거야.
네 외할아버지가 나를 그곳으로 보내셨던 이유는 우리가 사둔 포클레인이 나오는 동안 우선 이분을 도우면서 전반적인 업무를 숙지하라는 뜻이었는데 이분과 일을 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크다면 크고 작다면 작은 일이 발생되었어.
토목공사에 포클레인이 투입되었었기 때문에 자연스레 토목 기사들과 회식이 잦았는데 어느 날인가 현장감독을 맡고 계시는 토목대리를 모시고 술판이 벌이지고 있을 때 이었지.그 당시만 해도 술을 말로 마시던 때였고 담배역시도 줄담배를 할 때 이었는데 거나하게 취기가 오르고 있었어.
그 자리에서 정식으로 토목대리와 인사를 나누게 되었는데 이분이 나에게 현장에 와서 느낀 점을 말해 보라는 것이 아니겠니.
솔직하게 말해보라고 하기에 정말인가 되물었더니 정말이라는 거야.
어떤 말을 해도 괜찮다는 말을 하면서…
그래서 좌중의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술기운을 빙자하여 말을 했어.
“제가 말이죠.
처음으로 아파트 공사 현장엘 왔는데 말입니다.
건축 현장이야말로 비리의 온상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내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좌중에는 소란이 벌어졌고 딴사람과 얘기를 나누고 있던 처당숙이 벌떡 일어나고 있었지.
“야!
김 기사 빨리 00이 데리고 가.
여관에 데리고 가서 재워!"
다급해진 처당숙의 말에 두 사람의 포클레인 기사가 팔을 부축해서 끌고 가다시피해서 억지로 여관에 데리고 가는 것으로 그날의 술자리는 막을 내렸어.
아들아!
내가 이 말을 하기까지 그렇게 많은 시간을 공사현장에 몸을 담지는 않았거든.
그러나 짧은 시간 내 눈에 비춰지는 현장의 구석구석은 온통 비리로 얼룩져 있었어.
첫째로 내가 본 것은 공사현장 여기저기에 널브러져있는 자재들이었지.
그러한 자재들이 가끔씩은 공기에 쫒긴 나머지 급하게 일을 해야 하는 토목 감독들에 의해 땅속에 파묻혀야 했는데 참으로 기가 막힐 지경이 아닐 수 없더구나.
물론 공사의 진행상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는 하더라도 철근더미나 시멘트 무더기가 땅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내 눈으로 뻔히 보고 있어야만 했고 실지로 우리 포클레인이 건축용으로 쓰일 대형유리를 박살을 낸 적도 있었어.
토목공사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아예 산산조각을 내고 있었는데 기가 막혀서 말이 나오지 않았던 거야.
이러한 일들이야 내가 말을 했던 비리에 속하지는 않아.
정작 내가 비리의 온상이라는 말을 한 이유는 따로 있었는데 포클레인 임대료를 받기 위해 기성을 타기 위해 사무실을 들렀을 때 이었지.
처당숙으로부터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뭐가 뭔지 몰랐지만 막상 가서보니 이들이 기가 막힌 방법으로 도둑질을 해먹고 있는 것이 아니겠니.
포클레인을 다섯 대를 임대해주고 있었던 우리가 여섯 대분의 기성자료를 들고 갈 때부터 이상하다고 여겼는데 일단 여섯 대 분의 기성대금을 건네받았다가 내가 다시 한대분 임대료인 5백만 원을 경리과장의 손에 전해 주었다 이거야.
이뿐이 아니었어.
각종 이권이 개입되고 있는 대규모 건축 현장이다 보니 청탁은 이루 말할 수도 없었고 우리만 하더라도 포클레인 기술자도 아닌 사람을 기사로 쓰고 있었거든.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사람들을 기사로 앉혀놓거나 아직 포클레인 조수티를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을 기사로 쓰다 보니 매일같이 토목 기사들에게 꾸지람을 당해야했고 매일같이 접대라는 것을 해야 했던 거야.
기사를 쓰면 될 것을 왜 조수를 썼냐고?
그것은 머리가 좋지 못한 사람의 산술 때문이었어.
포클레인 다섯 대 곱하기 100만원이면 오백만원이 한 달에 생긴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지.
그 당시 조수월급을 10만원을 주고 있었는데 이 같은 사람을 기사로 썼으니 그 고충이 어찌 말로다 할 수 있었겠냐는 말이야.
심심하면 토목대리에게 욕을 바가지로 얻어먹어야 했는데 실력부족을 메우기 위해 나까지 건설회사 직원들 하인노릇을 해야 했지.
돈만 벌면 그만이라는 생각 때문에 생긴 일이었지만 이상과 현실의 괴리감으로 오는 양심의 가책으로 매일이 괴로움의 연속이었어.
나 역시 그리 깨끗한 삶을 살아 나온 것은 아니었지만 어린 시절의 내 잘못을 뉘우치기 위해서라도 올바르게 살아가야겠는데 갈수록 더한 잘못을 저질러야 하는 현실이 너무나 싫었지.
그렇다고 어쩔 수도 없는 만큼 살아야 하는 현실을 올곧게 받아들이지도 못하는 어정쩡한 중간위치에 내가 있는 것이 더욱더 싫었어.
하지만 아들아!
그것보다 더욱 한심하고 고통스러웠던 이유가 처당숙이 기사들을 대하는 태도였어.
사람들을 어떻게 그렇게나 혹사하고서도 마음이 편할 수 있는지 참으로 신기할 정도더구나.
한번은 포클레인이 고장이 났을 때 이었는데 포클레인이라는 것이 생긴 모양만큼이나 억센 물건이어서 한번 고장이 났다 하면 수리하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거든.
5대중에 4대가 모두 낡은 중고였기에 걸핏하면 수리를 해야만 했고 어떤 때는 나사하나를 푸는데 2시간이 걸리기도 했는데 그럴 때면 입에서 단내가 절로 나지 않았겠니.
대형 스패너에다 쇠파이프를 끼운 체 파이프 위에 한 사람이 올라서서 박자에 맞춰 뛰었다가 밟기도 했는데 심지어 두 사람이 올라설 때도 있었지만 잘 풀리지가 않았던 거야.
고장이 날 때면 밤을 새워 수리를 했는데 그렇게 밤을 새워 수리가 끝나고 나면 곧바로 일을 하러 가야만 했으니 어찌 기사들 입에서 욕이 나오지 않았겠냐 이거지.
처음 한두 번은 이정도의 고생은 참아야 한다고 여겼었지만 하루 이틀도 아닌 일이 연이어 벌어지는 통에 도저히 양심이 허락치를 않더구나.
한동안은 기사들을 다독거리며 어떻게든 끌고 나왔지만 노동착취도 그렇게 심한 노동착취 는 처음 보았어.
물론 이러한 노동착취를 하게 된 것이 모두가 돈을 생각했기 때문이었는데 그러한 생각의 밑바탕에는 이분의 성장과정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던 거야.
이분이 어린 시절 포클레인을 배울 때 자신이 그렇게 혹사를 당하면서 배워야 했고 그와 같은 일을 경험하면서 한대 두 대 포클레인을 늘려 나왔기에 건축현장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한다는 것과 어떻게 기사들을 다스려야 한다는 것을 나름대로 터득한 거였어.
솔직하게 말을 하자면 이분만 나무랄 일은 아니라 여겨져.
대기업역시 하는 행태를 보면 매한가지라는 것을 요즘은 누구나가 알아.
그 같은 일은 정부도 마찬가지여서 실질적인 서민들 경제보다는 국익에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서민들이 희생해야 한다는 것이 정부의 정책이라는 것을 누구나 알 지경이 되었어.
그러나 아들아!
진정으로 처당숙이 크게 성공하기 위해서는 방법을 바꿔야했어.
좀 더 내가 적게 먹고 기사들을 생각했더라면 아마도 결과가 많이 달라졌을 것이지만 욕심을 버릴 수 없었던 그분은 지금도 포클레인 기사 일을 하신다고 들었거든.
물론 그렇게 착취를 해서 돈을 벌수도 있었겠지만 그렇게 벌어서 도대체 어디에 쓸려고 하는지 몰라.
그분 말로는 좋은 일을 하고 싶다고 하였는데 사회봉사를 생각하기 이전에 자신 옆에 자리하고 있는 사람에게 보다 나은 일자리를 제공하는 것이 사회봉사를 하는 것이나 진배없다는 것을 왜 모르는가 말이지.
이 같은 일은 개인이나 대기업이나 오십보백보이고 국가의 위정자들 또한 이 같은 일에 일조를 하기는 마찬가지야.
하기야 이 세상 자체가 그렇게 생겨먹었기에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해.
그 같은 일의 부당성을 말하는 동시에 당위성을 인정하고 있기에 절대 나무라고 싶지는 않아.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 하는 법, 결국 나 역시 그러한 처당숙의 곁을 떠나는 일이 생기게 되었어.
포클레인 일을 하러 부산을 내려 간지 얼마만인지, 백일을 겨우 넘긴 네가 심하게 아프다는 연락을 받았지 않았겠니.
속으로 잘되었다 싶었던 것은 너무나 심하게 마음고생을 하던 중이었기 때문이었을 거라 여겨지는데 그러한 핑계거리 따라 대구를 올라오게 되었지.
내가 얼마나 심하게 공사현장에서 스트레스를 받았던지 차를 타고 가는 도중에도 귀에서 뿌렛카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더구나.
예상과는 달리 그렇게 심하게 아프지 않는 너를 보며 고생하는 나를 잠시라도 집으로 불러올리기 위한 네 엄마의 배려라는 것을 알았고 이왕 온 거 좀 더 쉬자는 기분으로 기다리고 있었어.
3일쯤의 시간이 흘렀을 무렵 네 외가에서 그간에 있었던 얘기를 네 외할아버지와 나누고 있는데 부산으로부터 전화가 온 거야.
빨리 내려오라는 전화였는데 우리가 사둔 포클레인이 나오면 운전을 시키기 위해 군대를 갓 제대한 사촌처남이 내가 대구로 오고 난후 곧바로 투입이 되고 있었거든.
나는 대구로 올라오고 그는 내려갔던 것인데 나와 인사도 해야 하고 일이 바쁘니 어서 내려오라고 하는 거였어.
그날 저녁 일을 배우러 내려갔던 사촌처남이 제 엄마가 갑자기 보고 싶다고 하여 때마침 내려와 계시던 엄마와 통화를 하고자 했지만 전화를 하게 되면 마음만 심란해진다면서 바꿔주시지 않는 네 외할아버지를 보며 너무 심한 것 아닌가하는 생각도 들더구나.
그러면서 나를 보고 빨리 내려가라고 하셨는데 좀 더 버팅기고 싶었지만 어차피 포클레인은 사둔 것이고 운영은 해야 함으로 기사가 제대로 일을 할 때 까지는 봐주어야겠다 싶어 다음날 부산을 향하게 되었지.
부산을 내려가기 위해 고속버스를 이용할까 하다가 네 삼촌과 할머니께서 울산으로 장사를 간다고 하기에 그편을 이용하기로 하였어.
그 당시만 하더라도 네 할머니께서 울산에서 장사를 하시는 분들에게 물품을 공급하고 계셨거든.
네 할머니를 울산에 모셔드리고 네 삼촌과 함께 우리 포클레인이 있는 공사현장에 도착해보니 불과 며칠이 지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현장의 구조물들이 많이 바뀌어 있었지.
우선 밥집의 위치가 옮겨져 있었고 현장사무실 역시 위치가 달라져 있었는데 우리포크레인이 보이질 않기에 밥집 주인에게 물어보았더니 이상하다는 듯이 되묻는 것이었어.
“아직또 모리닝교?
사람이 죽엇따 아잉교?
포크레인 대가리가 저기 쪼매 보인다 아임니꺼”
그분이 가리키는 손가락 끝을 따라 시선을 옮겨보니 산비탈 앞으로 헤드라이트 불을 켜 놓은 체 묻혀있는 포클레인의 머리가 보이고 있었어.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고 사건경위를 상세히 물어보았더니 며칠 전 비가 오고난후 산 쪽에 옹벽공사를 위한 터파기를 하고 있었다는 거야.
넓이가 약 4미터에 깊이 1미터정도의 옹벽 터파기 공사 중 돌출되어진 부분을 우리 포클레인이 들어가 뿌렛카 작업 중이었는데 산사태가 일어났던 거지.
원래 산사태가 일어나면 포클레인이 밀려남으로 완전히 묻히기는 어려운데 이번의 경우는 옹벽공사를 위해 터파기를 해놓은 곳에 들어간 포클레인이 산사태가 일어나면서 턱에 걸린 탓에 더 이상 밀려나지를 못하고 완전히 묻혀버린 것이었어.
이 사건을 당하면서 기사가 위급함을 알리기 위해 헤드라이트를 켜고 경적을 울렸는데 워낙 급작스럽게 당한 일이라 미처 손쓸 겨를이 없었다는 거야.
산사태가 일어나자 감독을 하고 있던 토목 기사들과 주위 인부들이 쫒아 올라왔고 삽과 손을 동원하여 흙을 떠내고 있었지만 역부족이었으며 조금 아래서 작업을 하던 포클레인이 올라왔지만 바퀴가 아닌 트랙이 달린 탓에 느리게 움직이고 있었으니 시간이 너무나 지체되었던 거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이 동원이 되어 사람을 겨우 건져냈을 때는 이미 한 사람은 가망이 없었고 기사역시 생사를 확신할 수 없었다는 것이었어.
그길로 병원으로 달려가 보니 흙으로 뒤범벅이 된 얼굴로 조용하게 누워있는 기사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었지.
포클레인을 배우기 위해 내려가 있던 사촌처남은 이미 이세상사람이 아니었고 시체실에 안치가 되었더구나.
두 사람이 나이가 같다 보니 친구가 되었고 전날 함께 술을 마시고 포클레인 작업을 하는데 따라 나섰던 것인데 그러한 봉변을 당한 것이었어.
작은 포클레인의 경우는 운전석 뒤에 공간이 충분치 않지만 큰 포클레인의 경우 뒷자리가 사람이 옆으로 겨우 앉을 만큼의 공간이 마련되어있거든.
내가 항시 그 자리에 앉아서 졸던 곳인데 내가 없는 사이 대신 자리를 차지했던 그 친구가 그러한 사고를 당했으니 내가 느낀 점은 남다를 수밖에 없었지.
꼭 나를 대신해서 죽었다는 생각까지 들었던 거야.
나중에 사건당시의 일을 기사에게 들어보니 산사태가 일어나기 전 먼저 조짐이 보이고 있었다고 하였어.
처음에는 모래가 간간히 떨어지더니 점점 굵은 돌과 흙이 쏟아지는 바람에 스윙을 하며 빠져 나오려는데 터파기 공사 중이라 턱에 걸린 트랙이 넘어 설수가 없었고 다급해진 기사가 크랙션을 울리며 헤드라이트 불을 켜는 순간 쏟아져 내린 토사가 포클레인을 덮쳤으며 뒤에 앉아 있던 조수가 유리창이 깨어지며 들이닥친 흙더미 때문에 깔리면서 기사를 덮었다더구나.
그 바람에 상대적으로 무릎아래 공간이 생긴 기사는 살 수 있었고 뒷좌석의 조수는 처음부터 충격을 심하게 받았던 탓에 운명을 달리 한 거지.
이 사건을 겪으면서 인간들이 얼마나 돈에 노예가 되어 있는가를 철저히 경험 해야만 했고
합의를 보는 와중에 오가는 욕설과 사람의 죽음을 두고 밀고 당기는 작태들이 그야말로 꼴불견이었고 나름대로의 죄책감도 느껴야 했어.
내가 늘 앉아있던 자리에 그것도 때를 맞추어서 자리바꿈을 한 얼굴도 모르는 사촌 처남의 죽음 때문에 눈물을 많이 흘렸고 그일 때문에라도 더 이상 포클레인 일을 하고 싶지가 않더구나.
네 외할아버지 역시 사고전날 엄마가 보고 싶다고 하던 조카의 말을 무시한 것을 가슴 아파 하셨는데 그 때문에도 건강이 많이 악화되셨으리라 여겨져.
그 일이 있고 난후에도 몇 달인가 포클레인 일을 하기위해 여기저기를 다녀야 했는데 결국 내가 선택한 길은 내가 처음 했던 이불장사 이었어.
몇 년의 시간이 흐른 후 차 백미러를 갈기 위해 부속품가게를 갔을 때 그때당시의 포클레인 기사를 만날 수 있었는데 몇 년의 시간이 흘렀는데도 불구하고 가끔씩 악몽에 시달린다고 하였지.
포클레인 근처에는 얼씬도 하기 싫다는 말을 하더구나.
아들아!
이 세상 어떤 일도 이와 같은 식의 일들이 항시 일어나고 있어.
그리고 그러한 삶의 방식들이 이 세상을 존재케 한다는 것에는 이의가 있을 수 없지만 삶의 형태를 달리해야 한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인 듯 해.
무엇인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면 고쳐 나가야 하고 바르게 해보려고 할 때 인식의 변화와 발전이 생기는 것이지 그냥 그러려니 해서는 정체만 될 뿐 변화는 일어나지 않아.
나 역시 이러한 여러 가지 일들을 겪어 나오면서 인식을 바꾸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기에 오늘날의 인식을 가지게 되었지 않을까해.
내 양심을 속이면서 사는 것을 내가 선택하지 않았다고 해서 양심을 속이고 사는 다른 이들을 비난하고 싶지는 않아.
다만 어떠한 목표가 있다면 그리로 가기 위한 삶의 형태는 있더라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거야.
사람들은 누구나가 이세상이 천국과 같이 바뀌길 원하고 있지만 그것을 위한 노력들은 하지 않는다는 거지.
나는 이렇게 살더라도 너는 그렇게 살지 말라는 식인데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는 정치인이라 해도 자신의 자식에게는 거짓말을 하지 말라고 하지 않겠니.
천하의 난봉꾼이라 해도 제 처자식이 그 지경을 당하는 입장에 서면 분기탱천한다 이 말이거든.
세상의 역지사지라는 말은 남들에게 써야 할 말이 아니라 자신에게 써야 한다는 아주 당연한 말을 모든 사람들이 실천할 때 이세상은 천국이 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오늘의 이야기를 마무리하자꾸나.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