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아!(77)
아들아!
사람의 인생살이가 다 그렇지 별거 있겠어? 라는 물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모든 일들이 그러려니 할 수 있겠지만 일단 어떤 일을 하고자 하는 목표점이 생기게 되면 그 목적한 바를 이루기 위해 노력을 하는 과정에서 일에 대한 의미부여라는 것을 하게 되더구나.
내가 세상살이 자체가 수행이라는 결론을 얻고 다시금 가족들과의 생활을 하겠노라 마음을 먹고 나니 모든 생각이 거기에 따라 변화가 되더라는 거지.
교도소엘 들어앉아 곰곰이 생각해본 결과 얻은 결론이긴 했지만 막상 현실에서 부대끼면서 살아가려니 보통 어려운 것이 아니었어.
처음 명상이라는 것을 시작하면서 생각했던 것이 이 세상을 버리는 것만이 수행이라 여기다가 버리기는 쉬워도 끌어안는 것은 어렵다는데 생각이 이르렀고 앉아서만 명상을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생활을 명상화(冥想化)시켜야 한다는데 까지 내인식이 바뀌고 있었는데 그러한 것을 아는 것도 어려웠지만 실천하고 살아가는 것은 더욱더 힘이 들더라는 거야.
이러한 점을 가장 극명하게 경험하게 된 것은 바로 네 엄마와의 관계였어.
명상을 시작한 후로 어떻게든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싶었고 틈만 나면 방문을 걸어 잠그고 명상을 하였으며 여건만 허락하면 결혼생활을 청산하고 출가라는 것을 하고 싶었거든.
지금에 와서 돌이켜 생각해보면 네 엄마와의 결혼생활에서 만족을 얻을 수 없었고 힘든 사회생활 끝에 온 권태감 때문이었지 않을까 하는데 일단 내 생각이 그러하니 자연스레 가족들이 장애물로 여겨지더구나.
그러던 것이 교도소에서 내 살아온 과거사를 되돌려보니 참으로 네 엄마에게 못할 짓을 많이 한 것 같았고 네 엄마가 어떤 말을 하고 행동을 하더라도 이해하고 진심으로 사랑해 주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거야.
그런데 이런 생각과는 달리 현실을 살아가면서 내 각오를 흔들어놓는 일들이 발생이 되기 시작하는데 감당을 하기가 어렵게 되는 것이 아니겠니.
네 엄마가 어떤 일을 하는지에 대해서 무관심하게 생각하겠다는 결심은 했지만 막상 함께 살다 보니 그렇게 무관심해지지가 않는 것이었어.
나 역시 보통의 사람들과 다름없이 관심을 주기고하고 받고도 싶은데 이미 식어져 버린 네 엄마의 마음은 더 이상 나의 접근을 허락치를 않고 있었지.
호주에 살 때 네 엄마에게 내가 하는 어떤 일도 간섭을 말고 당신하고 싶은 데로 하고 살라는 말도 한 적이 있었고, 그 말에는 당신이 어떤 행동을 해도 괜찮다는 마음을 담았었는데 그러한 내 말이 그때 당시의 내 마음이었을 뿐 막상 현실에서 그러한 상태가 되고 나니 생각이 달라지더라는 거야.
교도소에서 남들에게 그토록 큰소리치며 나무라던 일들이 이제는 내 앞에 현실로 다가와 있었던 거지.
입이 돌아가고 치통으로 이빨은 물론 머리가 빠개지듯 아픈 것도 내 마음이 아픈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더구나.
나를 가장 힘들게 만든 부분이 네 엄마의 달라진 마음 때문이라기보다 내 안의 양심의 소리가 더욱 나를 힘들게 만들었어.
분명히 내가 스승님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을 때는 모든 이들을 용서해야 한다고 배웠고 이 세상 어떠한 것도 영원한 것은 없으며 그 누가 되었건 자유롭게 해주어야 한다고 배웠었는데 막상 내 앞에 그러한 일을 몸소 실천해야 하는 순간이 되니 전혀 그렇지가 않았어.
매일같이 얼굴을 마주 대하고 부대끼면서 살아가야 하는 것과 멀리 떨어져서 생활하는 것과는 무진장 차이가 있더라는 거지.
내가 두 번째 호주에 머물 때, 그러니까 교도소를 들어가기 직전까지만 하더라고 함께 생활하지 않았기 때문에 네 엄마가 어떠한 생활을 하더라도 내가 관여할 바가 아니라는 생각을 했었지만 이제는 다시금 가족을 이루고 살아가야 함에 따라 내 인식이 바뀌어 있었던 거야.
이러한 일들이 나를 얼마나 힘들게 만드는지 한마디로 신이 원망스러울 정도였어.
어떤 이들은 진정한 사랑을 하면 모든 것을 이해하여야 하고 상대의 잘못까지 용서해 주어야 한다고 말하지만 막상 그것이 내 앞에 놓이게 되었을 때는 전혀 문제가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해.
어차피 마음이 달라졌다면 보내주면 되지 않느냐고?
그래!
내 말이 바로 그 말이었어.
차라리 내 마음이 바뀌었으니 헤어지자고 하면 얼마나 좋겠냐만 절대 자신은 마음이 달라지지 않았다는 데야 어쩔 도리가 없더라는 거야.
아직까지 나에게서 마음이 돌아선 것은 아니라고 하는데 어쩔 것인가 말이지.
이러한 것을 심증은 있으니 물증이 없다고 한다고 하지만 나 같은 경우는 상대방의 의도를 분명히 알고 있기에 더욱 힘이 들었어.
그리고 그 당시 내 마음 역시 네 엄마의 말을 액면 그대로 믿어주고 싶었거든.
사실 네 엄마로서도 어쩔 수 없었을 거라 여겨지기도 해.
내가 냉정히 돌아섰던 때부터 나에게 대한 기대감은 사라졌을 것이고 몇 년 동안을 혼자서 지내왔기에 이미 내가 다시금 가정으로 돌아온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것이고 뒤늦게 돌아온 내가 달갑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받아들인 것은 순전히 너를 혼자서 키워야 하는데 따른 부담감 때문이었을 거라 여겨져.
몇 번이나 이러한 사실을 내게 말하기 위해 새벽녘에 술을 마시고 전화로 나를 불러냈다가도 차마 말을 못하고 입을 닫아버리는 네 엄마의 행동에서 그 같은 일이 사실이라는 것을 감지할 수 있었고 매일같이 늦게 들어오거나 밤을 세고 들어올 때마다 내가자는 머리맡에서 꿇어앉아 기도하는 네 엄마의 모습에서 확신을 하고 있었어.
그러나 몇 번이나 확인을 하고 네 엄마를 자유롭게 해주고 싶었지만 끝내 네 엄마는 자신의 사랑이 식어버렸다는 고백을 하지 못하였고 지옥의 뜨거운 불구덩이를 내게 안겨주고 있었지.
네 엄마로서는 소위 도를 닦는다는 사람이 일반인들처럼 가정생활에는 연연하지 않으리라 여기고 있었고 또한 내가 평상시 그렇게 말을 하고 있었으므로 잘 이해하리라 생각할 수도 있는 문제였거든.
사정이 그러했던 만큼 네 엄마를 나무랄 일은 전혀 아닌 것이 내게는 또 다른 고통이었는데 내가 그러한 일을 자초하였고 만들었기 때문에 감수해야만 하는데도 불구하고 현실을 받아들이기가 쉽지가 않더라는 거야.
자유롭게 떠나보내기는 쉬운데 그러한 모든 점을 껴안고 가는 것은 그야말로 과목자체가 다르더구나.
결국 상대방에게 바라는바 없이 주기만해야 한다는 식의 내 나름의 사랑에 대한 개념이 완전히 무너지고 있었어.
그토록 남 앞에서 큰소리를 치면서 사랑은 받는 것이 아니라 주는 것이라 말해왔는데 내 사랑하는 이로부터 외면당하고 내 사랑이 보상 받지 못하는 것에 가슴아파해야 했으며 사랑하는 이의 잘못까지 포용하지 못하는 내가 한심하여 고통스러워해야 했지.
그런데 아들아!
이토록 힘든 생활을 하는 중에도 즐겁고 행복한 순간들이 있었어.
그것은 동수들과 가끔씩 차를 마시면서 법담을 나누는 일이었지.
센터 주변에 집이 있었던 관계로 동수들과 자주 만나게 되었고 그때마다 함께 차를 마시면서 스승님의 법문에 대한 이야기로 시간을 보내곤 했는데 이시간이야말로 힘든 일상에서 완전히 탈출하는 시간이었어.
네 엄마와의 가정생활은 내게 지옥이었던 것이고 동수들과의 차를 마시는 일은 천국이었는데 천국과 지옥은 둘이 아니라는 결과를 얻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이 말이거든.
그런데 이와 같이 천당과 지옥을 왔다 갔다 하면서 느낀 점은 천당에 있으면 지옥조차 천당처럼 느껴지는 반면 지옥 속에 있으면 천당이 빛을 잃어버리더라는 거야.
다시 말해서 동수들과 법문을 나눌 때면 어떠한 고통스러운 내 현실도 내가 이겨내지 못하는 것이 없는듯했으나 고통스러운 내 현실에 깊숙이 빠져 있을 때는 평상시 그토록 열심히 찬양하던 스승님의 법문조차 그 빛이 감소하더라는 거지.
분명히 명상 속에 있을 때는 얼마든지 소화시킬 수 있는 것이라도 막상 명상에서 깨어 나와 현실을 살아갈 때는 괴리감에 고통스러워해야 했다 이 말이거든.
차라리 이모든 것으로부터 도피라도 했으면 하였지만 그렇게도 못한 것은 스승님의 가르침 때문이었기도 하였으나 보다 큰 이유는 내 안에 있었어.
이미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행복을 얻지 못한다면 우주 어디에서도 행복을 얻지 못한다는 생각을 했는지라 현실로부터의 도피를 내 자존심이 허락하지를 않고 있었지.
남들에게는 깨진 바가지 어딜 가도 물 센다고 큰소리를 쳐놓고 막상 나 자신은 실천도 못한다는 것이 도저히 용납이 되지 않았던 거야.
이때가 내 인생과 수행에 있어 아주 힘이 들 때였는데 지나간 과거를 철저히 돌아보기도 했고 나 자신의 역량을 스스로 가늠할 수 있는 기회도 되었으며 인간들의 심리를 보다 심도 있게 분석해보는 경험을 하였어.
우선은 내가 얼마나 큰사랑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을 스스로 점검 받아야 한다는 생각이 나를 무척이나 힘이 들고 고통스럽게 만들더구나.
그때까지도 나 자신이 부처님의 자비와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살고 있다 자부하였는데 그러한 내 생각을 조롱이나 하듯이 다가온 현실 앞에 괴로워하고 고통스러워하는 내가 부끄러웠고 지금 앞에 놓인 내 현실이 나를 보다 성장 시켜주기 위한 것에 불과하다는 스스로가 선택한 해답이 나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묶어놓고 있었던 거야.
다음으로 다가오는 것은 과거에 내가 저질러 놓았던 많은 잘못들이 미세한 부분까지도 모두 드러내 보이는 것이었는데 내가 지금 당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현실이 사실은 지나간 내 과거의 잘못을 보상하기위해 마련된 신의 안배라는 생각 때문에 괴로워해야 했어.
빚을 갚는 거라고 여긴다면 오히려 시원하고 고마워해야 마땅한 일이겠으나 그 같은 일을 인정하지 못하는데서 오는 괴로움이었다는 말이지.
다시 말해서 분명히 느낌으로는 이 같은 괴로움이 그러한 연유로 온 거라는 것은 알지만 인정하기에는 내 잘못이 그렇게 클까 하는 의구심 때문에 도저히 내 잘못 때문이라는 인정을 하지 못했다는 거야.
분명히 스승님께서도 그렇게 가르치셨고 나 역시 인식을 하는데도 불구하고 두뇌의 속삭임은 항시 내게 그 반대되는 생각을 일으키게 하더구나.
“네가 지금까지 해온 노력과 수행에 대한 열정만 해도 벌써 부처가 되도 되었을 것이고 그간에 겪어 나온 일들만으로도 그리스도의 칭호를 받지 못할 것은 무엇인가?
이제 네 앞에 다가온 일들은 네가 과거에 저질러 놓은 일들과는 전혀 무관한 일이야.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 사람의 잘못일 뿐 너는 잘못이 없어.
이러한 내 에고의 속삭임을 깨트려준 것이 바로 소동을 벌리고 타 단체로 떠난다든지 혹은 스스로 깨달았음을 말하는 분들로 인해서 이었지.
그들로 인해 나 자신을 다시금 되돌아보고 내 마음은 과연 어떠한가를 끊임없이 살필 수 있었으니 그분들 또한 내게는 스승이었어.
그리고 그때당시 내가 뼈저리게 느꼈던 것은 질투심이 얼마나 무서운가 하는 거야.
인간의 사랑이라는 감정의 범위가 상당히 넓다는 것과 질투심이나 미움역시 사랑의 일직선상의 영역에 속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으며 내 마음의 변화에 따라 사랑과 질투가 일어난다는 것을 경험하였지.
질투와 미움이라는 것도 결국 정도를 달리한 사랑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었고 어떤 것에 가치를 두느냐에 따라 천국과 지옥이 만들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으며 하루에도 몇 번씩을 내가 만들어놓은 지옥과 천국을 들락거리고 있었어.
이러한 뜨거운 솥단지 안에서 스스로를 단련시키고 있을 무렵 앞에서 말한 여러 가지의 사회적인 어려운 일들이 함께 다가왔었는데 하청공장에 불이 나고 얼마 후쯤 부산에서 총무를 하고 있다던 J사형에게서 전화가 온 것이야.
자신이 일본을 가게 되었는데 함께 가지 않겠는가 하는데 가만히 들어보니 아주 잘되었다 싶더구나.
지난번 햄을 사기위해 일본을 갔다 오고 나서 일본에 대한 정보를 조금 가지고 있었고 그간에 부산의 동수 한분이 일본에서 급하게 싱크대조립을 할 목수를 여러 사람, 아주 좋은 조건으로 채용한다는 것이었어.
드디어 내가 힘든 일상으로부터 해방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왔구나 싶었고 억지로 내 마음을 조복 받기 위해 애를 쓸 필요도 없을 것도 같았지.
가족들이 없는 곳으로 가버리고 나면 아예 포기를 하고 살아갈 것 같았거든.
일단 이렇게 마음을 결정하고 나니 하던 장사를 정리를 해야겠다고 생각 하였고 평소 알고 지내던 외삼촌의 후배 되시는 분에게 장사를 넘기고 빠르게 일본행을 진행 시키고 있었지.
먼저 일본을 가기 전에 예행연습이라는 것을 해야 했는데 일이 성사되기까지는 6달 정도의 기한이 남아있었기에 그간에 싱크대 조립을 배우기전 예비훈련 격으로 일산에 있는 우체국을 짓는 공사현장에서 일을 하기로 결정했어.
함께 일본을 가기로 했던 사형들이 나를 포함해서 모두 4사람이었는데 그 중 한사람을 제외하고는 전문적인 목수 일을 해본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며 목수일 을 안다는 분 역시도 형틀목수였으니 싱크대일과는 전혀 무관하였어.
초보도 보통초보가 아니라 왕초보들 이었는데 그나마 건축기사 자격증까지 갖추고 있는 H사형이 집도 지어본 경험도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감독으로서는 경험이 있다 해도 기술적인 면은 그 역시 초보였지.
막상 현장에 투입이 되고 보니 엉성하기가 이를 데 없었고 누가 봐도 우리의 행색이 목수로 보이지는 않고 있었던 거야.
그런데 아들아!
목수 같지도 않은 우리들이 그 현장에서는 그래도 쓰임새가 있었던지 그곳에 일을 한지 약7일정도가 지나고 나자 우리를 데리고 가겠다는 사람이 나서더구나.
하루 일당을 8만원인가를 받기로 하고 일을 하던 우리에게 숙소제공에다 10만원의 일당을 주겠다는 거였는데 속으로 웬 횡재냐 했던 거야.
솔직하게 말을 해서 나 같은 초보를 5만원 주기도 아깝다는 생각을 스스로 하고 있었고 우리가 해야 할 형틀을 갖다 붙이는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었거든.
언젠가 한번은 3층 높이에다 형틀을 붙이는 작업을 하던 중이었는데 밑에서 올려다 볼 때는 몰랐지만 막상 올라가서 형틀을 붙이려고 하니 다리가 후들거리고 밑이 아득하게 보이는 것이 그 자리에서 어쩔 줄을 모르겠더구나.
J사형과 내가 벌벌 떠는 모습에서 그 현장의 반장님이 얼마나 한심했겠냐 싶지만 내가 분명히 초보여서 적합하지 않을 거라 말을 했는데 불구하고 그 당시 우리를 일본으로 데리고 가고자 했던 C사형이 자신만 믿어라 했으니 따라갔던 거였어.
이런 우리를 쓰고자 했던 사람은 판문점근처 위치한곳의 미군 막사를 짓는 공사를 하고 있던 사람이었는데 급하게 인력이 필요한 관계로 여기저기 부탁을 했고 그러한 와중에 우리에게도 그러한 제의가 들어왔던 거야.
처음으로 하는 형틀목수 일이 힘이 드는 것은 둘째 치고 현장에서 마주치는 다른 목수들의 따가운 눈총도 받아야 했던 터라 마음이 전혀 편치가 않았고 그 같은 사람들의 마음이 전해져 왔기에 모자라는 실력을 보충이라도 하려고 남들이 쉬는 시간도 쉬지 않고 주변청소를 한다 어쩐다 하며 애를 먹고 있었던 지라 어떤 면에서는 반갑기도 했어.
서로 의논을 한 후 결국 4사람 모두가 문산에 있는 미군막사 현장을 가기로 하고 일을 시작했던 것인데 훗날 여중학생이 장갑차에 깔렸다는 그곳이었어.
전국적으로 장사를 다녀봤어도 파주 쪽은 처음이었는데 그곳에 일을 하면서 몇 가지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되더구나.
그때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의 국방을 우리군대가 책임지고 있고 미국이 거들어 주는 것으로 알고 있던 것이 실상은 그 반대라는 사실에 놀라워해야 했어.
3.8선 가까이에 그토록 많은 미군이 배치되어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놀라웠고 우리군대는 별로 보이지도 않는 것이 또다시 놀라웠으며 작전권이 우리에게 없다는 사실에 더욱 크게 놀라야 했어.
처음 현장에 도착해서 며칠간 일을 해보니 말로만 들어왔던 것과는 엄청나게 많은 차이점이 보이고 있는 거야.
가끔씩 매스컴에 나오는 것을 보면 한쪽에서는 미군을 철수하라고 데모들을 벌리고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미군철수 결사반대를 외치고 있는 이유를 알게 된 거지.
내가 일을 하던 곳이 미군의 탱크부대 막사 안이었는데 군대를 갔다 오지 않은 내가 다른 전투무기에 대해서는 모르겠으나 트럭만큼은 운전을 하는지라 알 수 있었는데 우리나라의 트럭과 그들의 트럭은 비교자체가 되질 않는 거였어.
그 육중한 몸체의 크기도 놀라웠지만 바퀴하나의 두께만 해도 총알을 튕겨내겠다 싶더구나.
아마 이 같은 말이 네게는 실감이 가지 않을 거라 생각해.
그러한 장비들을 보통 일반인들이 볼 수 있는 기회가 없는 것은 그토록 큰 군사장비가 일반도로를 다닐 수가 없기 때문이야.
아들아!
이곳에서 일을 하면서 내의식이 또 한 번 바뀌고 있었어.
내가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얼마나 표면적인가 하는 것과 사람들이 떠들어대는 것들 모두가 자신이 알고 있는 범위 내에서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는 것에 불과할 뿐 진정한 사실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
미국CIA나 펜타곤에서 일어나는 일을 내가 영화를 통해 알고 있거나 얘기를 들어서 알고 있는 것과 실질적으로 일어나는 일들이 얼마나 거리가 멀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당장 우리나라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들에 대한 것도 잘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어.
처음 일을 하는 곳의 공정상 나중에는 민통선 안의 미군 막사에 공사를 하러 갔는데 임진강에 놓인 초소를 지난 후 볼 수 있었던 미군막사는 조그마한 산의 중간지점 인 것 같았는데 비행기로 촬영을 한다 해도 쉽게 노출이 되지 않을 것 같았으며 간간히 보이는 미군들의 모습이 모두들 그렇게 착하게 보일수가 없더구나.
누군가는 미국의 나쁜 점을 들어 숱하게 공격적인 발언을 스스럼없이 하고 실지로 미국이 자국의 국익을 위해 좋지 않은 일을 하는 것을 나 역시 봐오고 욕도 많이 하긴 했지만 꼭 그렇게만 생각할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
만약 그런 식으로 따진다면 우리나라라고 해서 그러한 일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않다는 생각이 들더구나.
그래서 하는 말이지만 아들아!
우리가 남을 욕할 때는 나 자신역시 그러한 점으로부터 자유로운가를 먼저 살피고 해야 할 것 같아.
과거 고구려의 광개토대왕이 중국의 북경 가까이 까지 영토를 넓힌 것은 장한 일이고 이웃나라 일본이 세계를 제패 할 만큼 엄청난 업적(?)을 이루어낸 것은 죽여도 시원치 않을 일로 여긴다는 지금의 우리역사관을 살펴볼 필요가 있는 것이 아니겠니.
그렇다고 내가 일본의 과거사를 잘했다는 것은 아니야.
다만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러한 행위들이 모두가 나쁜 것이지 내가 하면 좋은 일 네가 하면 나쁜 일이 되어서는 곤란하다는 거지.
그러한 점에서 미국이 하는 일 또한 좋지 않은 것은 분명하지만 지금 이 시대가 무엇을 원하고 있고 어떤 과정 속에 있는가 하는 것과 미국의 행위에는 우리가 모르는 순간 우리 모든 인류의 인식정도가 밑바탕이 되어있다는 것을 말하는 거야.
내가 미군막사를 짓는 일을 하면서 생각했던 것이 우리나라의 국방비가 얼마나 많이 미군들에게 들어가는 것만 생각을 했었지만 그 같은 생각은 어디까지나 내 나라의 입장에서 생각했던 것으로 미국의 입장이라면 절대 그렇지를 않았을 거라 생각해.
하지만 아들아!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생각나는 것은 하루빨리 통일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생각이거든.
그곳에서 내 생각이 이러한 여러 가지를 생각할 만큼 여유로운 것은 아니었지만 말이 나온 김에 옆길로 잠시 여행을 나왔으니 다시 이야기를 원점으로 돌려보자꾸나.
일을 한지 며칠만인가 낌새가 이상해지고 있었어.
여기저기 사람들이 모여서 웅성거리는 것 같더니 결국 일이 중단 되는 것이 아니겠니.
처음에는 우리가 일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사람들을 추려내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나중에 보니 그런 것이 아니더구나.
일을 해놓고서 임금을 못 받는 일이 발생되고 있었으며 이러한 돈 문제로 우리 오야지(하도급업자) 가 구타를 당했다는 거였어.
원래는 우리 오야지가 미군막사를 많이 지어본 사람이었고 친분이 있는 미군고위 장교로부터 공사를 따냈는데 자신이 건설회사 허가가 없었던 관계로 그 공사를 작은 중소건설업체에다가 넘겼으며 다시 중소업체는 다른 하청업자에게 넘겼던 거지.
현장업무는 오야지가 모두 책임을 지는 상태에서 명의만 빌려주는 형태였는데 미군이 공사대금을 주면 원청업체인 중소건설회사가 하청업자에게 돈을 넘기고 돈을 받은 하청업자가 다시 오야지 에게 돈을 주어야 하는 시스템이었다 이 말이야.
그런데 하청업자가 원청회사로 부터 돈을 받고서도 돈을 주지 않는 것이 문제가 되고 있었던 것이었고 그 같은 일을 항의하는 과정에서 우리 오야지가 하청업체의 책임자에게 구타를 당했던 거였어.
그 일로 우리를 데리고 온 분과 기존 일을 하시는 분들을 만나 얘기를 들어보니 일만 하면 돈을 받을 수 있다는 분이 있는가 하면 이런 식으로 일만 해서는 소용이 없다는 분들도 있는 거야.
결국 일을 며칠 해보지도 않고 일어난 사태인지라 모두들 고민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고 나로서는 이불장사도 이미 다른 분에게 넘겨준 터이어서 하루라도 빨리 일본으로 가야 했던 만큼 이 기회에 일본을 가기 위한 비자서류도 하고 말로만 듣고 있던 일본일이 도대체 어떤 내막의 일인가 들어보자 싶기에 부산을 내려가 보기로 했어.
우리들 가운데 대표 격으로 가장실력이 좋은 C사형만 남기고 다들 내려가게 되었는데 만에 하나 일본행이 무산되면 그나마 막사 일이라도 해야만 했거든.
솔직히 임금문제만 해결된다면 그 같은 일이야말로 형틀목수와는 비교가 되지 않게 편한 작업이었어.
미군 막사라는 것이 뼈대만 철골로 세워놓고 거의가 석고보드로 벽을 만드는데 칸막이를 석고로 붙이고 나면 그 위에다 철망을 덧씌워 미장을 하거나 타일작업을 하면 모든 공정이 마무리되는 아주 쉬운 일이었던 거야.
게다가 이런 일이 하나의 인테리어에 속하니 일반 목수에 비해서 인건비가 높았고 웬만큼 실력이 없다 해도 그다지 문제가 되지는 않는 것이었으니 우리 같은 왕초보에게는 딱 이었던 거지.
우리가 군사작전을 방불케 하는 회의 끝에 부산을 내려갔을 때 우리에게 놓여 있는 현실은 그때까지 알고 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일들이 불거져 나오고 있었어.
첫 번째로 우리를 가로막았던 것은 서류 문제였는데 처음 모든 서류관계를 고용하는 쪽에서 책임진다던 사형들의 말과는 다르게 모든 것을 우리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는 거야.
게다가 인건비역시 월3백을 보증한다는 처음과 달리 절반 수준인데다가 비자 때문에 한 달에 두 번씩 한국을 나왔다가 들어가야 하는데 그러한 비용조차 우리가 물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겠니.
지금 돌이켜 생각을 해보면 아마도 불법체류를 하도록 유도하는 것 같았는데 차마 우리에게 그런 말은 못하고 그런 식의 말을 우회적으로 하는 듯 했지.
또다시 부산에서 회의가 벌어졌는데 처음 내게 일본행을 권했던 J사형은 계속해서 일본행을 고집했고 보다 계산이 빨랐던 나는 일본행을 포기하는 쪽이 되고 있었어.
나중에 알고 보니 J사형의 동창생이 국내 유명싱크대업체 조립을 전문적으로 하는 사람인지라 사형에게 기술을 배워주겠다 나선 것이었고 우리야 처음부터 왕초보라 누구도 채용도 않을뿐더러 기술을 공짜로 가르쳐줄 사람도 없었던 거야.
조금은 황당하기도 했지만 생각대로 되지 않는 일을 한두 번 당하는 것도 아닌지라 그냥 덤덤하더구나.
단지 J사형에게 한마디 일침을 가하긴 했어.
“사형의 한마디로 인해서 한 사람의 인생을 바꿀 수도 있으니 앞으로 말을 할 때 심사숙고해서 말해야 합니다.”
하지만 아들아!
겉으로 내가 이렇게 말을 하고는 있었고 표정조차 정색을 하다시피 했었지만 속으로 나는 다른 말을 하고 있었어.
“사형!
어차피 벌어진 일 어떻게 하겠소.
지옥의 고통으로부터 해방시켜주어서 고맙습니다.
사형이 아니었으면 어떻게 탈출을 했겠소?”
솔직히 그 사형이 아니었더라면 내가 그렇게나 빨리 장사를 정리할 수 없었어.
일본행이라는 목표점이 생겼기 때문에 그렇게나 빠르게 모든 것을 정리할 수 있었고 쉽게 포기할 수 있었거든.
그리고 그 당시의 일본행을 주도한 것은 어디까지나 그 사형이었고 나는 그 사형이 주도한 무대에서 조연의 역할을 맡아 했으니 내가 중심이 되지 않았고 내가 조금 피해를 봤다손 치더라도 불평이나 불만을 할 필요는 없었어.
인생사 새옹지마처럼 오늘 내가 잘못된 판단으로 일을 그르쳤다 싶어도 내일 그 일이 내게 복을 가져다주는 것을 얼마든지 경험할 수 있었고 지금도 그러한 일의 연속을 살아가고 있으니 다음에는 이러한 인생의 역전극이 어떻게 전개되는가를 살펴보도록 하고 여기를 우리의 쉼터로 삼도록 해.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