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가번드 2021. 12. 8. 0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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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아!

세상일이란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는다는 말은 누구나 쉽게 하지만 어려운 세상을 바꾸는 것보다 쉽게 바꿀 수 있는 자신들 마음을 바꾸는 데는 인색하더구나.

물론 나 역시 보통 사람들과 하나도 다름없는 생을 살았다 할 수 있지만 나 같은 경우는 세상의 고통스러운 삶을 통하여 내 마음을 바꾸는데 노력을 했고 다른 분들은 아직까지 세상을 바꾸려 노력하는 것이 다르다면 다르다 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래서 말이지만 이 순간 누군가 세상에 대한 불평과 불만을 가득한 삶을 살아간다면 권해주고 싶은 말이 있어.

 

덩치 큰 세상을 움직이려 하지 말고 당신 마음을 움직여라

 

어떠니?

내가 도인 같지 않니?

사실 이 같은 말 역시 자신이 고통 속에 빠져 있을 때는 귀에 들어오지도 않는다는 것 또한 내가 경험을 해보았으니 좋은 말도 신간이 편한 사람들 몫인 것 같구나.

지난번에 말을 했듯이 내가 남을 도운 것인지 남이 나를 도운 것인지 모를 일들을 처리하느라 지방을 오르내리고 있을 무렵 대구센터를 갔을 때였어.

평상시 친분이 있던 사형 몇 분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는데 그 당시 센터 일을 보고 있던 사형 한분이 대화 도중 자신이 스승님과의 인연을 말하는 것이 아니겠니.

그런데 말을 하는 도중 자신이 다른 사람과는 달리 스승님과 아주 특별한 인연을 가졌다는 말을 하는 거야.

웬만하면 그냥 듣고 넘어가려다가 한마디 해주게 되었는데 입문 한지가 불과 몇 해 되지도 않은 것 같은데 벌써부터 선배 동수들을 경시하는듯해서 한마디 하게 되었어.

 

사형!

누구나가 모두 스승님과 특별한 인연을 가지고 있지 사형 혼자만 특별한 인연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사형이 일 년 동안 기가 막힌 일을 당하면서 수행을 했듯이 남들은 5년 이상, 아니 10년 이상을 그 같은 고생을 해왔어요.

사형이 특별하다는 생각을 혼자서 하는 것은 괜찮지만 남들 앞에서 자신을 내세우게 되면 사형의 수행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겁니다.”

 

아들아!

솔직히 이 말은 그 사형에게보다 나 자신에게 하고 있었어.

내가 겪고 있고 고통스러워하는 만큼 선배 동수들이 더욱 고생을 심하게 했으리라 여기고 그들을 본보기 삼아 견뎌 나가야 한다는 자성의 목소리를 나 자신에게 하고 있었던 거야.

그 같은 내 말을 다행히 그 사형이 좋게 받아들여 주었고 별로 기분 나빠하지는 않는 것 같더구나.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들으라던 내 사촌 형수님의 우스개는 이 순간 참말인 것 같았어.

누군가 어떤 말을 해도 받아들이는 내가 잘 받아들이게 되면 그야말로 금과옥조 같은 소중한 충고가 되는 것이 아닐까 해.

이 사형과는 별도로 또 다른 사저 한분과의 대화도 생각이 나는데 그분은 입문을 하신 분은 아니었고 입문을 하고자 준비 중인 듯 했어.

내가 이분과의 대화를 떠올리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거든.

이분이 우리단체의 문을 두드리기 전에 어떤 스님 한분을 알고 지냈던 모양인데 이 스님이 아주 무서운 분이었던 거야.

어느 학교의 선생님으로 기억되는 이분이 스님을 스승처럼 모시는 것까지는 문제될 것이 없었지만 보다 큰 영혼의 문제가 걸려 있었던 것이었어.

처음에는 스님에게 모든 것을 의지하고 살아나왔는데 어느 순간인가 자신이 이 스님의 노예가 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더라는 거지.

멋모르고 모든 일을 이 스님에게 상의를 하고 의지를 하다 보니 어느 것 하나도 스님이 아니고는 할 수가 없어져버린 자신을 문득 느끼게 되었고 이제는 스스로 독립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었어.

처음 이분이 스승님의 책자를 스님에게 보여 주었을 때는 별문제가 없다가 차츰 시일이 갈수록 시간을 더 많이 투자하게 되고 자신보다 우리단체의 스승님에게 의지하려는 마음을 보이게 되자 극심한 질투에 빠진 스님이 점점 못 가게 막더라는 거야.

본인이 생각해도 우리 스승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 진리라 여겨지는데 불구하고 처음에는 가라고 부추기기 까지 하시던 스님의 태도가 돌변한 것이 믿기지가 않더라는 거지.

이분이 말리더라도 자신이 가겠다는 의지만 있으면 문제될 것이 전혀 없는 것 같았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를 않았어.

이 스님이 보통스님이 아니었던 거지.

한마디로 신통력이 대단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이분이 겁을 냈던 거야.

스님이 신통을 부려 자신에게 실질적인 일을 해주는 것을 수없이 보아왔거든.

이 같은 일을 경험해보지 않은 분들은 실감할 수 없을 테지만 내 앞에서 이러한 신통력을 직접 경험해 보게 되면 절대 무심하게 흘려버릴 수가 없어.

이분 역시 처음에는 그냥 아는 소리를 하는 스님으로 알고 지내다가 어려울 때마다 도움을 청해보면 기가 막히게 모든 일들을 알아맞히고 그 스님이 시키는 대로 하게 되면 이상하게 일이 술술 풀리더라는 거야.

게다가 이분의 일거수일투족을 귀신같이 알아맞히는데 무서울 정도였다는 거지.

이분이 질렸던 것이 바로 이런 점이었어.

너도 생각해보면 알겠지만 자신의 모든 일을 누군가 하나도 남김없이 알고 있다면 기분이 어떻겠니.

물론 세상을 조금도 걸림이 없이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문제될 것이 없겠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 같은 경우 자신의 치부가 들여다보이기 때문에 싫어하거든.

처음에는 스님이 신통을 써서 도와주는 바람에 어려움을 극복했던 터라 모든 일을 의지해오다가 어느 날인가 스승님의 책자를 보고 입문을 하고자 했던 것이고 이때부터가 그 여자 분과 스님 사이에 문제가 발생되기 시작한 것이었어.

아들아!

너는 왜 이 같은 일이 발생되는지 알겠니?

쉽게 생각해보면 스님의 질투 때문인 것으로 보이지만 여기에는 숨어있는 아주 많은 일들이 있어.

이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에너지 싸움 같은 거야.

!

아들아!

이 같은 말을 내가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렵다는 것을 너는 모르겠지만 이것은 그야말로 어려운 일이거든.

고급식당에서 밥을 먹게 되면 먹는 사람은 맛있게 먹고 맛있다는 칭찬과 계산을 해 버리면 끝나겠지만 식당의 주방 안에서 요리를 하는 많은 사람들이 일을 하는 것과 같은 이치인 거지.

나 역시 너와의 대화 중간 중간 어려운 과제가 선택이 될 때마다 내 두뇌 속 저장고를 뒤적이며 애를 먹어야 하는데 지금 하고자 하는 대화 역시 그러한 것이야.

분명히 내 느낌은 알고 있지만 손님의 입맛에 맞도록 요린지 조린지를 해야 하는 것이 나를 힘들게 한다 이 말이거든.

공치사나 엄살은 그만 부리고 빨리 진행시켜나가자고?

그래!

나에게 그런 사치스러운 푸념조차 허용이 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아.

이미 선택되어진 만큼 가지 않을 수도 없음을 수없이 많은 내경험이 말을 해주니 어쩔 수 없지.

사실 이 같은 설명을 하자면 각자가 가지고 있는 종교라든지 사상 등의 정신적인 면들을 총망라해서 한 덩어리로 볼 필요가 있어.

왜냐고?

그래야 내가 하는 말이 이해가 가기 때문이고 내가 설명하기가 편하기 때문이기도 해.

모든 에너지 체의 집합덩어리가 하나 있다고 쳐.

그 중에는 여러 가지의 종교와 사상들이 모두 들어 있는데 그 중에 내가 어떤 부분을 선택을 했어.

그것을 보고 우리는 종교를 가졌다고도 하고 신앙을 가졌다고도 해.

이러한 맥락에서 보자면 결국 크고 작고의 문제를 떠나고 먼저와 나중 등의 제한된 시각만 벗어난다면 모두가 하나로부터 내려온 것이라 볼 수 있지 않겠니.

그렇다면 어느 누가 특정한 선택을 해서 그것이 좀 더 많은 영향력을 얻기 위해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야 할까?

거기에 힘이 실려야 한다고?

맞아!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이 바로 그것이었어.

의미부여를 한다는 뜻은 바로 힘을 실어준다는 것이고 거기에 힘을 실어주는 것은 그 누구도 아닌 순전한 우리들 자신, 즉 나라는 사실이야.

어때?

이해가 가지?

이러한 일을 잘 설명해주는 예들이 몇 가지 있어.

그 첫 번째로 우리나라에서 예부터 내려오는 민속신앙이라 할 수 있는 성황당을 예로 들 수 있는데 사람들이 하나 둘 자꾸만 힘(에너지, 상념, 확신)을 실어줌으로 인해서 거기에 체가 형성이 되는 거야.

또 지금은 없어져버렸지만 희랍의 델피신탁을 예로 들 수 있겠는데 신화에 나옴 직한 이 신탁이 예수님의 생존당시까지도 말을 하였다 하니 사실여부를 떠나 지금 우리의 대화에 인용해 봄직하다 여겨져.

누군가 나의 이 같은 말에 신화에 나오는 말을 어떻게 믿느냐고 딴죽을 걸지 모르겠지만 그 같은 말을 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뭔가 믿고 있다면 그 같은 잣대를 자신에게도 들이대길 바라며 무엇인가 따지려거든 잠시 보류 해놓기 바래.

이 말하는 원탁의 원리역시 그 당시 희랍사회의 현자들의 의식들이 모인 에너지덩어리였다는 말이 있고 그 같은 에너지 체가 점차 힘을 잃었던 것은 더 이상 현인들이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라 하니 그 또한 신빙성이 있다 생각해.

그리고 우리가 소위 무당이라 불리는 무속인 들의 행위에서도 그 같은 말을 증명해 줄 수 있는 흔적들이 있지 않겠니.

산 기도를 할 때 뭔가를 본다는 말을 많이 하는데 그것을 그들은 산신령이라 부르고 있고 그 외에도 어떤 신, 어떤 신하며 이름들을 붙이고 있어.

바로 이러한 것들 모두가 내가 에너지 체라 부르는 것들임에는 틀림이 없지.

그런데 이러한 일들도 그 속을 들여다보면 상당히 여러 가지갈래로 갈라진다는 것을 알 수가 있는데 그 같은 이유는 똑 같은 종교와 믿음을 가지고 있다 해도 모두가 같지 않은 체험과 인식정도를 가졌기 때문이라는 거야.

이러한 연유로 함께 신앙을 가져도 신앙심은 틀리는 거지.

특정종교를 봐도 이 같은 사실을 알 수 있는데 어떤 이는 하나님을 보기도 하고 어떤 이는 부처님을 보는가 하면 수십 년이 지나도 부처나 하나님은커녕 코빼기도 못 보는 경우는 고사하고 하는 일마다 안 된다고  푸념하는 사람들도 불수가 있거든.

이 같은 이유가 바로 자신의 에너지가 약해서가 아니겠니.

이러한 것을 두고 많은 종교인들은 신앙심이 약하다고도 하고 신심이 떨어졌다고도 해.

누군가 뭔가를 믿는다고 할 때 그 믿음의 대상을 놓고 누가 믿는가를 생각해보면 나의 이 같은 말이 보다 쉽게 이해가 될 거라 믿어져.

바로 이러한 연유로 모든 일에 대한 절대값어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의미와 가치부여는 내가 하는 것이고 그러한 믿음의 정도에 따라 내가 얻는 신앙의 기쁨도 내 믿음의 크기만큼 따라온다는 거야.

혹 누군가는 절대적으로 믿사옵니다를 외쳐도 결과는 좋지 않음을 말씀하시는 분(내가 그러했음)들도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신을 들여다볼 줄 모르는 사람들의 푸념에 불과해.

이렇게 믿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떤 종교의 교리를 믿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것을 주길 바란다는 사실을 알아둘 필요가 있고 믿는다는 것을 전체적인 것보다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한 부분을 인용하여 믿사옵니다를 외치고 있는 것에 불과하거든.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기복신앙을 말하는 거지.

실지로 이 세상 어느 종교도 이세상의 물질을 추구하라고 가르치지는 않고 있으며 소위 깨달은 스승들 대부분역시 물질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해.

이러한 명백한 사실을 보면서도 자신이 원하는 것을 못 얻는다고 불평한다면 자신의 신앙생활을 심각하게 되돌아봐야 한다 이 말씀이야.

내가 간간히 비판적으로 말하고 있는 기독교조차 실질적인 가르침은 물질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을 가르치고 있으며 진정한 해탈을 말하고 있는데 뭔가 물질적인 것을 준다고 하는 말은 믿음이 약한 자들이 가지고 있는 약한 마음에서 비롯된 거라 봐야해.

물론 믿음에 따른 물질적인 축복이 올수도 있고 많은 분들이 물질의 축복 속에 있음도 사실이긴 하지만 진정으로 강한 믿음을 가진 분들은 그것이 어떠한 종교이든지 모두들 이세상의 모든 것들에 대해 연연해하진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 말이거든.

결국 이러한 모든 것들을 종합해보아도 알 수 있듯이 나의 믿음이 얼마나 강한가? 약한가에 따라 내가 믿는 종교가 커졌다 작아졌다 할 수도 있음을 알았을 거야.

이게 내가 말한 에너지의 힘이란 거지.

내가 얼마나 많은 에너지를 쏟는가에 따라 그 대상이 힘을 받게 된다는 아주 평범한 에너지교환의 법칙인데 내가 주는 것이 많은 만큼 거기에 따른 반작용도 커다는 것을 알아야해.

주는 것이 많을수록 내가 그곳에 의미부여도 많이 하게 되고 그곳에 내가 붙잡히게 된다 이 말이거든.

그렇다면 나는 그렇지 않느냐고?

왜 그렇지 않겠어?

나 역시 마찬가지이고 다른 누구보다 더 심하게 붙잡혀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지.

그런데 왜 남을 비판하느냐고?

내가 언제 비판을 했는가 모르겠구나.

아들아!

너는 뭔가 잘못생각하고 있는 것 같구나.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남을 비판하는 행위를 비판했던 것이지 그들이 잘못 믿는다거나 종교에 속박된 사실을 비판하지는 않았다는 것을 명심해다오.

자신이 즐거워서 할 수 있다면 어떤 일도 못할 일은 없고 어느 누구의 행동도 잘못된 것은 없다 하였던 내가, 또 누구보다도 더 많이 속박되어 있다시피 보이는 내가 남을 탓할 수는 없지 않겠니?

게다가 남들이 나를 붙잡혀 있다고 생각하는 부분역시 나의 소중한 선택인 만큼 자유의지의 선택을 나만 할 것이 아니라 이 세상 누구도 할 권리가 있고 지옥으로 떨어질 선택도 자유로워야 할 거라 생각해.

이러한 관점으로 보자면 이 세상 어떤 믿음도 비난 받거나 지탄 받을 것은 없다는 것이고 내 선택을 남들에게 심판 받는 것이 싫다면 남들의 선택 또한 심판해서는 안 되지 않겠니?

내가 에너지를 쏟아 부은 만큼 많은 것을 얻었건 속박이 되었건 그것은 어디까지나 나에게 일어나는 일일뿐 남들은 그 같은 일과는 하등 상관이 없지만 내 에너지가 너무나 큰 사랑으로 넘칠 때 많은 이들이 그 사랑에 동화되고 융화가 되는 거야.

진정으로 남을 구제하고자 한다면 나 자신의 평화를 얻고 사랑의 에너지를 갖출 때 사람들은 감화를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이런 에너지가 충만한 분들을 우리는 부처라고 부르고 그리스도라고 부르는 것이 아니겠니?

그런데 이런 크나큰 에너지를 남을 속박하는데 쓴다면 그야말로 큰 문제라는 거지.

이 세상에 사이비교주라 불리는 많은 분들이 바로 이러한 행위를 하는 자들을 이름이고 그때 대구센터에서 말하던 스님역시 이러한 범주에 속하는 분이었다 이 말이야.

자신이 도를 닦아서 생긴 조그마한 재주를 다른 이의 영혼을 자신에게 종속 시키는데 썼던 것이었어.

보다 심각한 문제는 이러한 스님에게 종속 시킨 것이 바로 그 여자분 자신이라는 사실이야.

아들아!

너는 나의 이 같은 말을 어떻게 생각하니?

스님이 여자 분을 종속 시키려 했으니 나쁘다고?

그럴 수도 있겠지만 여기에는 또 다른 일들이 숨겨져 있어.

처음 스님이 자신에게 도움을 청해왔던 여자 분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었고 그것 때문에 둘 사이에 주고받는 일이 생긴 것이었으니 어디까지나 한쪽이 다른 한쪽에 빛을 져버린 것이 문제의 발단이 되었던 거야.

지난번에는 물질적인 문제를 비유해서 이 같은 일을 설명했으나 영혼의 문제라 해서 인과의 법칙을 벗어 날수는 없는 노릇이거든.

그래서 스승님께서는 아무에게나 영적인 일을 물어서도 안 되고 의지를 해서도 안 되며 가르침을 받아서도 안 된다고 하셨던 것이고 절도 하지 말라했던 거야.

그렇다면 예수님이나 부처님을 믿는 것도 마찬가지가 아니냐고 하겠지만 그것은 너무나도 크나큰 차이가 있어.

너 혹시 예수님이 가르침의 대가를 요구하는 것을 들어보았니?

혹 부처님이 자신의 가르침을 배우는데 뭔가를 요구하는 것을 들어보았냐 말이야.

혹 너는 십일조를 들먹일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예수님의 말씀이 아니라 성경의 말씀을 소위 성직자들이 써먹고 있는 것에 불과해.

이처럼 이 세상을 살다간 어떤 성자들도 자신이 주었다고 받고자 하진 않았음을 불수 있고 심지어 자신이 주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지 않니?

이러한 점에서는 우리 스승님 역시 마찬가지인데 제자들을 위해서라면 목숨이라도 내놓겠다고 눈물을 흘리시지만 단 한 푼도 보시를 받지 않거든.

물론 성직자들도 먹고 살아야 하니 일정한 돈을 받는 자체를 나무라고 싶지는 않아.

다만 내가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그때의 스님과 여자분 사이처럼 그러한 관계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거야.

내가 가장 싫어하는 부분이기도 한데 나를 믿지 않으면 어떻게 하겠다는 식의 협박은 강도들이나 하는 짓이란 것을 알아야해.

사람들은 누구나가 내면에 부정적인 면과 긍정적인 면을 공히 갖추고 있는데 어떤 품성을 개발시키느냐에 따라 한쪽으로 치우친다고 지난번에 말했을 거야.

바로 이와 같은 일을 보면 그와 같은 내 말이 분명히 드러나는 것을 알 수가 있어.

스님역시 처음에는 좋은 뜻으로 도왔을 테지만 자신도 모르는 사이 에고라는 것이 발동을 하였을 것이고 그와 같은 부정적인 생각을 끄나풀 삼아 부정적인 기운들이 자꾸만 쌓인 거지.

아니 좀 더 확실히 하자면 빙의가 된 거라 보면 돼.

빙의라 하는 말을 해석해보면 귀신이 들린 자를 이름인데 그와 같이 남의 영혼을 종속 시키려는 자들이 바로 귀신들린 자라 할 수 있거든.

내가 수행의 길을 걸어오는 동안 이 같은 부류의 사람들을 숱하게 보았는데 나 역시 남들의 눈에 그렇게 보일 수 있다는 것을 알지만 적어도 남을 이용하려는 마음은 가지고 있지 않으며 남들 위에 군림하고자 하는 마음 또한 없음을 분명히 말하고자 해.

에고라는 것이 무서운 이유가 바로 이런 것이고 남을 돕고자 하는 마음이 순수하지 못하면 어떤 일이 발생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무서운 표본인거야.

그 여자 분이 울고 있더구나.

자신이 헤어 날수조차 없는 깊은 수렁 속에 있다면서 하소연을 하는데 이와 같은 일은 증명이 되지 않으니 경찰에 신고도 할 수 없다는 것이었고 자신이 그러한 마음을 먹기도 하였더니 어떻게 알았는지 그 당장 불호령을 내리더라는 거야.

배은망덕한 년 이라는 욕을 스스럼없이 하며 절대 자신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을 거라는 악담을 하더라는 거지.

게다가 한술 더 떠서 앞에 신세를 진 사실까지 들먹이고 자신의 도움으로 가족들이 어려움을 극복했지만 자신을 배반하면 여자 분은 물론 가족들까지 피해를 볼 거라 협박하더라는 거야.

그래서 내가 차분하게 스승님이 말씀하신 법문을 들려주었어.

 

귀신이 나타나서 괴로워하던 어떤 사람이 매일같이 시달리다 못해 어느 날은 큰스님을 찾아뵙고 이 같을 일을 하소연하였답니다.

어떤 일을 해도 모르는 것이 없고 귀신이 시키는 데로만 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못살게 괴롭히는 통에 못살겠으니 구해달라고 하소연했지요.

그 말을 들으신 스님께서 만약 오늘 밤 또 나타나거든 머리맡에 콩을 한 바가지 두었다가 한주먹 쥐고 맞춰보라 해서 못 맞추거든 그것도 못 맞추는 주제에 누구를 협박하느냐고 호통을 쳐서 쫒아버리라 했고 그 말을 듣고 난 그날 저녁 또다시 귀신이 나타나자 큰스님이 일러준 데로 했더니 콩 쥔 손을 한참 노려보며 고개를 갸우뚱거리던 귀신이 스님이 시키신 데로 그것도 못 알아맞히는가 하며 호통을 치자 그 즉시 사라져서 다시는 나타나지 않더라는 겁니다.”

 

이 이야기는 스승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기억나는 대로 내가 인용한 것일 뿐이었지만 이야기를 들어봐도 알 수 있듯이 귀신이라는 것이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것임을 알 수가 있는 것이 아니겠니?

결국 나 자신이 모르는 것은 귀신도 모른다는 이야기인데 그렇다면 내가 인식하지 않는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이 아닌가 말이지.

모든 원인 제공자는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존재하고 있는 나 자신이다 이 말이었어.

그래서 내가 그 여자분 에게 말을 해주었지.

 

그 스님이 사저님의 일거수일투족을 알 수 있는 것이 사저님의 생각을 읽기 때문입니다.

사저님이 그동안 그분에게 신세를 짐으로 인해서 생긴 결과인 만큼 보다 강하게 마음을 먹고 그 스님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해야 해요.

더 이상 당신의 도움이 필요 없으니 이제는 자유롭게 놓아달라고 강력하게 주장해야 합니다.”

 

나의 이 같은 말에 또다시 흐느끼고 있더구나.

 

나는 어떤 일을 당해도 견딜 수 있지만 애꿎은 가족들이 문제예요.

분명히 내가 배신한 것을 알게 되면 복수를 할 겁니다

 

아들아!

여기까지 들어보아도 사태가 심각하지 않니?

바로 이 같은 일을 마왕의 손아귀에서 놀아난다는 표현을 하는 거야.

물질을 추구하고 육신의 쾌락을 추구한 결과물인 거지.

만약 이분이 처음 어려움이 닥쳤을 때 자신의 힘으로 이겨내거나 아니면 진정으로 자신의 영혼에 안식을 줄 참된 믿음을 선택해야만 했어.

이세상의 어떠한 믿음도 괜찮다고 해놓고 이제 와서 딴소리냐는 식의 말은 하지말기 바래.

내가 그 어떠한 믿음도 문제가 없다고 한 것은 내 시각이고 내 판단과 인식 정도인 것이지 아직까지 마왕의 손아귀를 벗어나지 못하는 유치원생을 위한 말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해.

그리고 그분이 중대한 실수를 한 것이 또 하나 있었던 거야.

뭐냐고?

바로 내가 말해준 방법을 선택하지 않은 잘못이었어.

그분이 그토록 그 스님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고 싶었다면 과감해야 했다는 거지.

 

나는 이제 당신이 싫어요.

당신이 보복을 하고 싶다면 얼마든지 하세요.

이제는 이세상의 물질적인 고통 따위는 두렵지도 않으며 지옥조차 나를 얽매이게 할 수 없을 거예요

 

이렇게 선언을 해야만 했어.

이 세상에 어느 누구도 어떤 사람의 영혼을 어쩔 수 있는 자는 없지만 그 같은 일을 가능케 해주는 이는 어느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이라는 거야.

왜 이 같은 일이 발생되는가에 대한 해답은 바로 이분의 전생인연과 깊은 관계가 있어.

전생에 자신이 보다 좋은 인연을 심어놓지 못했거나 수행인들을 방해하는 행위를 함으로 인해서 이러한 장애를 불러들인 것일 수도 있다는 거지.

이래서 우리들은 보다 좋은 인연을 심기위해 노력을 해야 하고 보다 많은 선근공덕을 쌓아야 해.

아들아!

감히 고백하건대 사람들은 누구나가 해탈해있고 자유의 몸이 되어있는 것이 분명해.

하지만 그들이 그러한 사실을 인정할 수 있는가 없는가 하는 것은 순전하게 자신의 선택에 달려있고 그러한 선택의 순간조차 불수 있는가? 없는가 하는 것이 이 세상을 보다 진솔하게 살아가는 원동력이 되고 있어.

앞으로 우리들의 남은 시간동안 이와 같은 일에 대해 또다시 말할 수 있는 기회가 오리라 생각되는 만큼 그때가 되면 또 다른 인식변화를 가져보기로 기대하며 이 시간은 여기에서 마감하도록 하자꾸나.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