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가번드 2022. 2. 9. 0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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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아!

어제는 갑자기 대련을 가야했어.

가끔씩 연락을 주고받고 있는 H박사님께서 만나자는 연락이 온 거였는데 결론이 어떻다는 것을 알면서도 만나기 위해 갔던 거야.

모든 비용을 부담하겠다면서 오라는데 가지 않을 도리가 없었어.

이러한 기회가 아니면 움직이기 싫어하는 내가 대련을 간다는 것은 그야말로 힘든 노릇인 만큼 신은 그분을 도구로 해서 나를 여행 시키신 거지.

물론 이것은 나를 중심으로 한 생각이고 박사님의 경우는 다르다고 생각해.

하지만 그분 역시 나를 만나서 아무런 성과도 없이 돌아갔다 하더라도 겸사겸사 오신 것이니 손해 볼 것도 없었거든.

워낙 바쁘신 분이라 한 번에 여러 팀을 불러서 만나곤 하는데 꼭 나와의 만남만이 목적은 아닌 만큼 나로서도 부담이 되지 않아서 좋았던 거야.

만약 그분의 목적이 나와의 만남에만 있게 되면 내 마음이 편치가 않을 텐데 다행스럽게 일행들이 많아서 그러한 부담을 느낄 필요는 없었어.

벌써부터 나와 함께 사업을 했으면 하시는데 도무지 조율이 되지 않고 있었지.

내가 분명하게 동업하고 싶은 마음이 없음을 말씀드렸는데 불구하고 기회가 닿을 때마다 또다시 제의를 하고 있는 거야.

이 같은 일의 원인을 내가 제공하고 있었던 것 또한 사실이었는데 내가 이분에게 누군가를 소개를 시킨 일 때문이었어.

얼마 전 내게는 한국에서 부고가 전해져왔는데 언젠가 박사님에게 소개를 시킨 적이 있었다던 사형이었지.

이분이 돌아가시면서 자신의 공장을 내가 경영해 주었으면 했는데 나로서는 전혀 고려하고 싶지가 않았었기에 박사님을 소개시켜 드린 거였지.

그러나 이분들이 각자가 반드시 나를 끼고 사업을 하고자 했기에 아주 힘이 들고 있는 거야.

내공장의 일만 하더라도 장난 아니게 나를 압박하고 있는데 그들의 문제까지 내가 거들어 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거든.

박사님께도 말씀을 드렸지만 두 분 모두 내게는 어린 아이들 같이 느껴졌어.

 

아니!

나이로 보나 세상경험으로 보나 그분들이 한참 연상이신데 어떻게 그런 말을 함부로 말을 하십니까?

 

그 말이 맞긴 하지만 내가 말하고자 하는 부분도 바로 그런 말이야.

그토록 연세가 많고 세상 경험이 많으면 거기에 합당한 처신과 행동을 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거지.

자신들이 그토록 잘 알고 경험이 많다면 다들 혼자서 알아서 하라는데 왜 자꾸 싫다는 나를 억지로 끼워 넣으려고 하는가 이 말이지.

다들 다른 사람들은 믿지를 못하고 나는 그나마 믿을 수 있다 싶어서 함께 하고자 하는 것인데 참으로 한심한 노릇이 아닐 수 없더구나.

그들이 나를 진정 믿고서 일을 하고자 하는 것인지 아니면 내가 다른 이들과는 다르게 돈을 적게 받고서도 일을 잘해줄 것 같아서인지, 그도 아니면 어수룩해 보여서인지 알 수는 없다만 정말 그들 모두와 일을 한다는 것은 피곤한 일이 아닐 수 없어.

이 같은 일은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공장의 식구들이라 해서 별다르지 않아.

다들 각자의 시각들이 따로 있기 마련이어서 조율을 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대단한 인내심을 갖추지 않고서는 어림도 없는 일이야.

먼저 이분들이 제시하는 바를 가만히 들어보면 세상 사람들의 기준으로는 전혀 맞지 않는 소리들을 하고 있거든.

자신들은 부담을 하지 않는 가운데 어떻게든 성공을 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심리인데 나 역시 그러한 생각으로 세상을 살긴 했으되 언제나 나를 중심으로 생각하기보다는 남들 위주의 삶을 살아나왔어.

그렇다고 해서 무조건적으로 양보만 한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남들을 속여가면서 내 이익을 위해 살지는 않았던 거야.

이분들이 이러한 나를 좋게 생각해 주시는 것까지는 좋지만 다들 한 가지만 알고 두 가지는 모르는 부분이 있어.

사업을 하고자 하는 주체가 내가 아니라 자신들이라는 사실을…….

내가 이렇게 말을 한다고 해서 그들이 남을 속이려 한다는 것이 아니라 다들 자신들의 위험부담은 최소화 하려고 하며 다른 사람이 자신의 부담을 떠안아주었으면 하는 심리상태를 말하는 거야.

그래서 나는 정중하게 거절을 했고 두 분을 직접 연결을 시켜 드린 건데 서로가 의견의 합의점을 찾지를 못하고 있었어.

이 두 분을 보면서 내안에 존재하는 여러 가지 생각들을 떠올리게 되더구나.

내가 이분들의 심리상태를 따로 말할 필요도 없이 내가 겪어 나온 일들이 바로 그들의 내면이라는 것을 그들은 꿈에도 모르겠지만 사실을 말하자면 그러한 경험을 너무나 많이 해서 더 이상 말할 필요조차 없을 정도였거든.

이제는 더 이상 그러한 경험을 하고 싶지가 않기에 전혀 진척이 없었으며 다들 각자의 수준대로 나를 평가한다는 말을 끝으로 상담을 마무리 지었어.

아들아!

이것은 어쩌면 우리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너무나도 힘들어하는 부분이기도 한 것 같으니 좀 더 심도 있게 파헤쳐볼까?

사업을 하다보면 나는 기술을 가지고 있는데 상술이 없어서 애를 먹는 경우가 왕왕 있어.

이럴 때 우리들은 조력자를 구하게 되는데 잘못하면 이것 때문에 기술까지 몽땅 빼앗길 때도 있거든.

그러다보니 사람들이 믿을만한 사람들을 찾게 되는 거지.그러나 이 같은 경우와는 정반대의 경우 또한 있어.

자금이 있고 기술이 없는 경우가 바로 그러한데 이 같은 경우역시 기술을 가진 분에게 무작정 돈을 손해 보게 되는 경우도 생기는 거야.

바로 중국의 내공장이 이러한 경우라 볼 수 있는데 아직까지 성과를 얻지 못했으니 투자를 하신 분들은 속으로 애를 태울 수도 있는 거지.

그렇지만 이분들은 모두가 자발적으로 투자를 하신분이라 원망 따위는 하지도 않고 있으며 투자해준 돈을 돌려받겠다는 말씀도 하지 않고 있어.

물론 아직까지 이긴 하지만 말이야.

그러나 이러한 것들 모두가 우리들이 물질적인데 초점이 맞춰지게 되면 다들 손익관계를 따지게 되겠지만 영적인 해석의 범주 속으로 접어들 경우 완전히 달라지거든.

그러다보니 정말이지 쉽지 않은 일들을 경험하게 되는 거지.

앞에서도 보아왔지만 김치를 판매하면서 겪어 나온 일을 물질적인데 초점이 맞춰지게 되면 그야말로 나는 패잔병이 되고 말아.

그러나 이 같은 과정을 격어 나오는 동안 자각의 일을 말한다면 그야말로 성공한 일이 되는 것이 아니겠어.

이것이 바로 우리들이 가고자하는 목표점을 어떻게 설정하는가에 따라 결과물역시 달라진다고 하는 거지.

가치관을 어디에 두는가에 따라 모든 해석들이 달라진다는 건데 과연 나에게 사업을 함께 하자는 분들이 이러한 내 생각에 얼마만큼 부응할 수 있을까 말이야.

내가 보았을 때는 전혀 아니었거든.

시작부터 한발을 뺀 상태에서 엉거주춤한 상태로 무엇을 할 수 있겠니.

도저히 될 수도 없는 마음상태로 결과물을 얻으려하는 행태로밖에 볼 수 없었던 거지.

언제나 내가 강조하는 것은 어떠한 일도 안 되는 것은 없으며 어떠한 결과도 신의 뜻이 아닌 것이 없으며 어떠한 결말도 실패라는 것은 없는 것인데 과연 이러한 개념을 그들이 가질 수 있는가 말이야.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그들은 이러한 나와는 도저히 발을 맞출 수가 없는 분들이었기에 정중하게 거절을 했어.

아들아!

이분들의 일을 통해서 우리가 알아야할 일은 그들의 마음속에 있는 모든 것들이 사실은 내안에 존재하는 것들이라는 거야.

나 역시 그분들처럼 마음을 먹어보았기에 이 같은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 수 있는 것이지 만약 그러한 경험을 하지 않았고 그러한 마음을 먹어보지 않았더라면 절대 알 수 없는 노릇이거든.

그래서 언제나 내가 말하는 남의 문제들은 모두가 내 문제들이기도 한거야.

지금 이순간도 내 공장에는 이 같은 마음의 벽을 넘기 위해 사투를 벌리는 분이 있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은 이분역시 자신의 마음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어찌할 수 없을 정도의 극심한 습관과의 투쟁을 하고 있는 점이야.

나와 차를 마실 때는 괜찮은 모습을 보이다가도 내가 어디를 가고 없거나 자신이 어디를 다녀오게 될 때면 어김없이 습관이 튀어나오는 거지.

그저 내 밑에서 일만 하고 월급만 타면 될 것을 마음속의 욕심은 한도 없이 달리거든.

 

내가 왜 저 한국 사람을 위해서 내 모든 것을 바쳐서 일을 해야 하는가?

내 기술을 가지고 얼마든지 나 혼자서 해 나갈 수도 있는 것인데 말이야.

게다가 모든 고생은 내가 하고 저는 하고 싶은 데로 행동하며 지시만 하는데 왜 내가 그를 위해 일을 해야 하지?

내 기술 값을 제대로 쳐주지 않으면 열심히 일을 해줄 필요가 없어.

저희들은 여행을 다니고 싶으면 마음대로 가면서 왜 나만 고생을 하는가 말이야.

그렇다고 장래를 보장해 주는 것도 아니면서 무조건 일만 시켜먹으려고 하는 것 같아.

차를 마실 때면 그럴듯하게 말을 하지만 사실은 나를 부려먹기 위해  말을 하는 것이며 지혜롭게 나를 이용해 먹으려고 하는 것이 분명해.

 

끝도 없을 것 같은 불평불만의 소리가 터져 나오고 있었어.

어떻게 아냐고?

아들아!

너는 무엇을 듣고 있었니?

내가 말을 해주지 않았니?

내가 이미 이러한 경험을 해보았다고 말이야.

내가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남들 밑에 일을 하면서 내뱉어놓았던 것들이 그분의 생각을 타고 들어온 것에 불과한거지.

이것은 누구나가 가질 수 있는 마음상태인 것이지 나는 고고해서 절대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그분은 아직까지 그러한 경험을 못해보았기 때문에 조만간 그러한 경험 속으로 들어가게 될지도 몰라.

참으로 어리석은 생각인 것 같지만 이러한 것들이 이사회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의 공동 책임이라는 것을 우리들이 알아야만해.

그래서 내 육신 스승님께서는 항상 긍정 속에 머무르기를 말씀하시는 거야.

언제든지 우리들은 긍정과 부정의 양면성을 모두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 같은 생각들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하다고 볼 수 있어.

내가 공장을 하면서 느끼는 점 가운데 아주 힘들게 여겨지는 것은 사람이 하나 늘어나는데 따른 일들이 너무나도 많다는 거야.

함께 일을 하지 않으면 모르겠지만 같이 일을 하게 되면 그가 가지고 있는 업력에 의한 것들이 표출이 되기 시작하는데 일반인들의 경우는 모르고 지나길 일도 수행자들이다보니 아주 명백하게 드러나기 때문이거든.

그렇기 때문에 일반인들보다 수행인들이 몇 배나 어려움을 겪는 거지.

자업자득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사실은 아주 좋은 것으로 불수도 있어.

만약 우리들이 매순간 축복을 느낄 수 없다면 진정한 해탈과는 거리가 멀다고 했으니 이 같은 경우 역시 축복이 되어야하지 않겠어?

그렇다면 어떻게 이 같은 일을 받아들여야할까?

바로 영적인 결실을 가져다주기 위한 신의 축복의 장이라 여겨야 한다는 거야.

이렇게 본다면 내가 아무리 지독한 고통 속에 머문다 하더라도 신이 나를 강하게 성장시키기 위한 훈련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그러한 고통을 이겨나가는 것이 내 사랑의 확장을 위해 신이 마련해준 선물이라는 인식에 다가설 수 있게 되는 거지.

아들아!

이 같은 개념을 가진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나 역시 잘 알아.

그리고 네가 현실에서 당하는 고통을 얼마나 힘들게 여긴다는 것도…….

그러기에 우리들은 명상을 통해서 신을 만나야만 하는 거지.

언제나 신이 주시는 빛과 소리에 집중이 됨으로서 이러한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있거든.

언제든지 빛과 소리는 우리의 인식을 긍정 속에 머물게 하기 때문에 고통의 바다에 빠지지 않게 보호를 해주는 거지.

지금 나와 같이 일을 하시는 분은 그야말로 내 과거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는데 가끔씩 미안할 정도로 힘겨워할 때도 있더구나.

사회생활을 통해서 얻었던 경험들은 그야말로 불평등 자체였고 정상적인 삶을 살아가고자 해서는 결코 남들보다 잘살도록 되어 있지 않은 현실을 보면서 택한 삶이 수행인데 결국 어느 시점에서는 그조차도 내려놓아야 했으며 생각과 이념을 사회로 복귀해야 했으니 그러한 상태에서의 현실적응이 결코 쉽지가 않은 거야.

처음에는 명상 속에서 신의 지복만을 느끼다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사회로 돌아가서 배운 바를 실천해야하니 당연히 어려울 수밖에 없는 거지.

이것이 바로 수행자들의 현주소라 할 수 있어.

내주위분들 대부분이 10년이 지난 지금 처음 하시던 일을 다시금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한 바퀴를 돌아서 제자리로 돌아온 거야.

그렇지만 그것은 결코 제자리가 아니라 한 바퀴를 돌아 온 거라는 것을 알아야해.

다시 말해서 처음 서있던 자리에서 머물렀던 것이 아니라 한 바퀴를 돌아 온 거라는 거지.

 

어차피 제자리가 아닌가요?

차라리 돌아다니지 않았으면 고생을 하지는 않았을 것 아닌가 말입니다.

 

아들아!

네 질문이 무엇을 말하는가는 알겠지만 결코 그런 것이 아니야.

그들이 한 바퀴를 돌아서 왔지만 이제 그들은 처음 출발점에 서있던 모습이 아니거든.

이미 한 바퀴를 도는 동안 수없이 많은 난관들을 만났으며 비바람 몰아치는 풍파도 겪었으며 산 넘고 물을 건너 뗏목을 타고 뒤집혀도 본 후가 아니겠어?

그런 가운데도 그들은 신의 빛과 소리를 따라 온 거였어.

이미 그들은 신을 알게 된 거지.이러한데 어떻게 한자리에 서 있다는 사실만으로 같다고 볼 수 있겠냐 말이야.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이 말을 쓰는 사람에 따라 의미가 달라지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치인거야.

수행이라는 것은 현실의 도피가 아니라 선택이라는 것을 우리들이 알 수 있을 때 우리의 여정은 그야말로 가치가 있게 되는 것이며 도피가 되 버렸을 경우는 정체성(正體性) 상실로 인한 비참함만이 우리를 기다리게 돼.

내가 이러한 말을 하는 순간 우리들은 각자가 자신들의 현 위치에서 스스로를 들여다보면 알 수가 있어.

과연 나는 현실이 힘들어서 수행이라는 도피처를 찾아서 피신을 한 것인지 죽음도 불사할 정도의 강인함으로 무장한 선택을 한 것인지 말이야.

이것은 많은 수행자들 역시 마찬가지이며 일반적인 삶을 살아가는 이들 또한 마찬가지 일수밖에 없어.

너도 생각을 해보면 알 수가 있을 거야.

한 바퀴를 돌아와서 내 앞에 놓여 있는 현실을 내가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가를 보면 자신의 여정이 도피인지 선택인지 알게 돼.

처음 출발과 다름없이 물질을 바라보고 가치관이 바뀌지 않고 있다면 그야말로 제자리걸음만을 한 것이 되겠지만 세상의 가치관으로부터 많이 멀어져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면 이미 그는 세상으로부터 멀어진 사람으로서 신이 선택한 삶을 살고 있는 분이라 할 수 있어.

아들아!

이 같은 일은 출가자나 재가자들 모두가 공히 느껴야하는 점이야.

출가자 역시 신을 향한 출가가 되어야지 사회로부터 도피를 위한 출가가 되어서는 곤란하다는 거지.

신을 찾기 위해 혹은 자신이 신이 되기 위해 출가는 했지만 출가를 해서도 사회와 같은 권력놀음에 빠져 허우적거린다면 그러한 출가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이 말이거든.

이러한 내말을 뒷받침해 줄만한 경험을 지난번 한국을 갔을 때 하였어.센터 사무실에 앉아서 장주자들과의 대화를 할 때였는데 출가승 한분이 단체를 떠난 동수의 근황을 궁금해 하시는 거야.

그래서 얼른 대답을 했지.

 

"! 그분은 지금 환속을 한 것 같습니다."

 

내말이 끝이 나자 곧바로 누군가가 말을 이어받는 거야.

 

"아니 그분이 언제 출가를 하셨나요?"

 

"그러면 우리들이 세상을 버리고 관음법문에 입문하는 것이 출가가 아닌가요?"

 

"그게 아니라……."

 

말을 더 이상 잇지를 못하고 얼버무리는 것을 보며 화제를 딴 데로 돌려버렸는데 심사가 결코 편치가 않더구나.

지금 앞에 나열된 대화 내용으로는 도무지 우리사이에 어떤 대화가 오갔는지 감이 오지 않지?

이것은 말이야.

내가 오랜만에 센터 사무실을 갔을 때 일어난 장주자들과의 대화 내용인데 사실은 그들의 분별 심을 자극하기 위해 일부러 대답을 그렇게 했던 거였어.

항상 사무실을 들어갈 때마다 느낀 점 이었지만 그날따라 사무실을 들어오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무척이나 심했거든.

아마도 나 혼자가 아니라 사저와 함께 갔기 때문에 더욱 심했던 것 같았는데 일반인들이 여기를 왜 들어오는가 하는 기운이 너무나 강하게 느껴졌어.

나보다 사저가 더욱 예민하게 느끼고 있었는데 대놓고 말을 못하는지라 내가 말을 돌려서 그들이 얼마나 큰 분별심이 있는가를 스스로 살펴보라는 뜻으로 말을 그렇게 한거야.

단체를 떠났다는 동수는 출가자는 아니었지만 일부러 내가 환속이라는 말을 썼던 거지.

그리고 실지로 우리들이 관음법문에 입문을 한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출가를 하는 것 이상으로 철저한 계행과 수행을 해야 함으로 출가라는 말을 쓰고도 남음이 있거든.

10년을 넘게 스승을 모시고 수행을 해나오는 수행자 입에서 출가와 재가의 분별도 못 넘은 소리가 나온다고 해서야 어찌 최고의 스승을 모시는 제자라고 할 수가 있겠니.

그래서 내가 일부러 그들을 싸잡아서 비난을 했던 것인데 그들 중 어느 누구도 나의 의도를 제대로 파악을 못하더구나.

게다가 한술 더 떠서 누군가는 나에게 이런 말을 하였어.

 

"나이가 50은 넘겨야 뭔가를 제대로 안다고 할 수 있지 그전에 말하는 것은 모두 다 쓸데없는 말에 불과해"

 

기가 막힐 정도가 아니라 화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억지로 참아야했어.

그분이 말하는 의도가 다분히 나를 향하고 있었고 나의 에고를 누르기 위해서인 것을 알았기에 담담하게 대답을 드렸지.

 

"60 이 넘은 노인네도 7~80노인네 앞에서는 어린애 같지요"

 

연세 높으신 어른이라 곧바로 직선타를 날리지는 못하고 우회적으로 한방 먹여드린 셈이었지.

내가 이분에게 이렇게 못되게 굴었던 것은 그분이야말로 최고의 스승을 최고이지 못하게 만드는 주역이기 때문이었어.

분별 심을 제일 먼저 보고 없애야할 분이 가장 많은 분별 심을 가지고 있기에 드린 말씀이었지.

만약 그분의 말씀대로 나이로 수행력을 평가해야 한다면 스승님이 법을 펼치실 때 나이가 얼마였는지를 살펴봐야해.

도대체 당신은 나이 어린 분을 어떻게 스승으로 모시게 되었나를 물어보고 싶었지만 참고 말았어.

어차피 알아듣지도 못할 사람에게 말을 해주어야 무슨 쓸데 있겠는가 싶었거든.

아들아!

너는 이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니?

스승님과 우리들은 다르니까 그분의 말씀이 맞는다고?

우리들은 아직도 스승과 같은 수준에 다가서지 못했기 때문에 출가와 재가를 분별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을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다고?

그렇다면 네게 물어보자꾸나.

스승님의 가르침을 일상생활 속에 적용을 시키지 못한다면 무엇 때문에 우리들은 그토록 열심히 배워야하지?

뭣 때문에 인생을 송두리째 바치면서까지 가르침을 따르려 애쓰는가 말이야.

모름지기 배우고자 하는 것은 가르침을 세상살이에 적용시켜서 가르침대로 살아가고자 하는 것이지 어떻게 머릿속에 넣어두려고만 해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는지 신기하기까지 하더구나.

그리고 배우고자 마음을 먹는 수행자들은 어느 누가  말을 하더라도 그 속에서 스승님의 가르침을 볼 수 있어야지 어떻게 누가 말을 하고 어떤 의도로 말을 하는가를 분석하고 파악하는 것을 우선으로 삼느냐는 말이지.

스승을 따른다는 것은 스승의 외모나 외형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가르침이라는 것을 우리들이 안다고 한다면 그러한 말을 해서는 안 되는 거야.

그것은 그야말로 그분의 에고가 튀어나와서 말을 한 것이지 결코 그분의 내면의 소리가 아니었기에 그분에게 무례를 범할 수밖에 없었어.

어떻게 다른 사람의 말에서 그러한 에고밖에 못 보는지 참으로 한심한 노릇이 아닐 수 없었지만 그 또한 그분이 그분답게 처신하기 위해서라는 것을 알고 있는지라 얼른 그 자리를 나와 버렸지.

그리고는 급한 볼일이 아니면 다시는 사무실을 들어가지 않게 되었어.

좀 더 솔직한 내 심정을 말하자면 다시는 그들과 상종을 하기 싫었거든.

그러나 아들아!

어떠한 순간에서도 우리들은 완벽을 말해야하고 신을 보아야하니 이러한 일을 통해서도 가르침을 얻어야겠지?

그렇다면 이러한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할까?

나는 말이야.

그분들의 생각이 모두가 맞는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

그분의 말대로 나의 에고가 발동을 한 것도 맞고 사무실에 아무나 들어가서는 안 되는 것도 맞는다고 생각해.

그리고 내가 함부로 출가재가의 분별을 말하는 것도 잘못된 것일 수도 있고 말이야.

그렇다면 왜 그렇게 비판적으로 말을 했느냐고?

아들아!

아직도 너는 모르겠니?

그때 내가 처해있는 상황은 그러한 판단과 그러한 행동을 요구받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이야.

그때는 그때의 내의식이 필요했었고 지금은 보다 관조자적인 시각을 요구받고 있기에 그기에 따른 의식이 발동을 했을 뿐이거든.

또한 그들 역시 그분들이 필요에 따른 말과 행동을 보였던 것뿐이고…….

바로 이러한 이치로 우리들은 앉은자리에서 완벽을 보는 거야.

그렇다면 우리들은 발전을 기대할 수는 없지 않느냐고?

그렇지는 않아.

우리들은 항시 명상을 하고 있어서 매일 자신을 반성하기도 하고 모자라는 부분은 나처럼 말이 많은 사람들이 상대방을 찔러주거든.

오늘 우리들이 말하는 것 자체가 이미 많은 이들에게 자신을 들여다보는 기회를 제공하는 거야.

그런 의미에서 앞서 등장했던 인물들은 우리들 모두에게 성장의 장을 마련해 주기위해 연극을 보여주신 부처님들인 거지.

내가 앞서 몇 분의 예를 들어 말을 했던 것도 바로 이러한 부분을 말하고자 한거였어.

의식의 이쪽 편에서 저쪽 편까지 언제나 우리들에게는 선택권이 주어져 있으며 어떠한 경험을 이생에서 하고자 하는가를 우리들 스스로가 결정짓고 있다는 것이 오늘의 교훈이라 할 수 있을 것이며 이모든 것들이 신의 범주 안에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고 있음을 말하는 것을 끝으로 오늘을 마무리 하도록 해.

사랑한다.

아들아!

알지?